□ 한고조 유방의 충직한 행정관료 소하(蕭何)
소하(?~BC 193)는 패현(沛縣, 지금의 강소성) 출신으로 법령에 정통하여 진시황제 때에는 현의 말단 관리로 근무했다. 이때부터 동향 출신인 한(漢) 고조(高祖) 유방(劉邦)과의 인연이 시작된다. 그는 유방을 보좌하여 한제국을 건설한 최고 공신으로 임명되었으며, 계속하여 승상, 상국(相國)으로서 구장율(九章律)을 제정하는 등 한왕조의 기초 조성에 크게 공헌하였다.
젊은 시절 유방은 30세 때 사수(泗水)의 정장(亭長: 역참의 장)이라는 하급 관리로 있었다. 유방이 무명의 한 서민이었을 때부터 소하는 법률상의 일로 간혹 편리를 돌봐주었으며, 유방이 정장이 된 이후에도 여러 가지로 어려운 일을 돌봐주었다. 소하는 당시부터 업무 처리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 날 중앙에서 감독관이 시찰을 왔을 때 소하는 그를 도와 시원스럽게 일을 처리해주었다. 이것이 눈에 띄어 사천군(泗川郡)의 관리에 임명되었으며, 그는 그곳에서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였다.
이때 진시황이 죽고 그 뒤를 계승한 이세황제 호해(胡亥)는 환관 조고(趙高)의 꼭두각시에 불과했고, 모든 실권은 조고가 장악하고 있었다. 진시황의 가혹한 정치에 시달려온 백성들은 조고의 학정과 전횡을 견디지 못하고 각처에서 반란을 일으키게 되는데, 그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이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의 봉기였다.
대택향(大澤鄕)이라는 곳에서 반진(反秦)의 기치를 들고 군사를 일으킨 진승 등의 군단은 파죽지세로 여러 현을 공략, 그 세력이 점점 팽창하여 북으로 향했다. 이에 호응하여 반진의 거병을 일으키는 자들이 전국 각처에서 속출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물결은 당장 패현에도 파급되었다. 소하는 유방을 도와 패현의 지사를 죽이고 그를 패공(沛公, 패현의 지사)으로 추대하였다. BC 208년 반진(反秦) 연합군의 명목상 맹주였던 초나라 회왕(懷王)의 명을 받고 유방은 2천~3천 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진나라 수도 함양 공략에 나섰다. 그 당시 반진 연합군 중에서 최대의 세력을 떨치고 있던 항우(項羽)의 군단은 북방에서 진나라 군과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유방은 진나라 군대의 반격에 고전하면서도 결국 함양(咸陽)에 육박하여 2년만에 그것을 함락시키는데 성공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소하의 역할은 그렇게 눈에 띠지 않는다.
유방이 함양에 제일 먼저 입성하였을 때 부하 장병들은 앞을 다투어 전리품을 찾아 헤매었으나, 소하는 금은보화를 돌아보지 않고 오직 승상부(丞相府)나 어사부(御史府)에 보관되어 있던 법령 문서를 접수했다. 유방보다 2개월 뒤에 함양에 입성한 항우가 아방궁에 불을 질러 모든 물건이 하나도 남김없이 다 불타 버리게 되었을 때, 만약 소하가 아니었더라면 진나라의 모든 법령 문서들도 모조리 잿더미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다행히 소하가 그 문서들을 접수해 둔 덕택에 유방은 천하의 요해지, 인구의 다과, 각국의 전력, 인민의 고충 등을 파악할 수가 있었다. 이것은 얼마 후에 시작된 항우와의 천하를 건 쟁패전에서 엄청난 이익을 가져다 주었을 뿐만 아니라 한왕조의 국정을 궤도에 올려놓는 데에도 귀중한 역할을 하였다.
<대장군 한신의 천거>
항우는 함양에 입성한 후 여러 장수들의 논공행상을 행했다. 사전 결정으로는 함양을 제일 먼저 공략한 자에게 함양 주변의 요충지인 관중(關中)을 주기로 되어 있었지만, 항우는 유방의 세력 확장을 경계하여 약속을 파기하고 유방에게 변방인 파촉(巴蜀)과 한중(漢中)을 주었다. 유방은 이러한 처사에 불만을 품고 항우와의 일전을 불사할 태세였지만 소하는 냉정히 정세를 판단하여 필사적으로 유방을 간하였다. 즉, 군사적으로 절대 열세인 현 상황에서는 싸워봐야 패할 것이 뻔하니 한중으로 들어가 그곳을 평정하고 힘을 기르면서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유방은 소하의 건의를 받아들여 한중으로 향하였다.
그런데 도중에 여러 장수들이 잇따라 도망하여 그 수가 수십 명에 달하였다. 이때 어떤 자가 유방에게 소하도 도망을 쳤다고 보고하였으며, 이 말은 들은 유방은 크게 노하였다. 이틀쯤 지난 후에 소하가 다시 돌아왔을 때 유방은 그에게 달아나게 된 경위를 물었다.
이때 소하는 자신이 달아난 것이 아니라 달아나는 장수 한 사람을 추적했다고 했다. 그 장수가 바로 유명한 한신(韓信)이었던 것이다. 그때까지 무명의 장수에 불과했던 한신이었지만 소하는 일찍이 그의 재능을 알고 있었기에 도망가는 한신을 설득하여 데려와 유방에게 대장군으로 천거하였던 것이다. 이후 용병의 귀재라고도 일컬어지는 한신은 지모의 참모장인 장량(張良), 그리고 명재상 소하와 더불어 한(漢)나라 건설의 최대 공로자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졌다.
<후방의 정비>
유방은 한중에서 전력을 가다듬고 다시 물자가 풍부한 관중(關中)을 점령한 후 항우와 천하를 다투었다. 3년여에 걸친 대격전을 전개한 이 싸움은 처음에는 유방측에 일방적으로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1~2년이 지나는 동안에 차츰차츰 유방측의 전략적 우위가 눈에 띄게 드러났다. 항우군은 각지에서 전전하는 동안에 점점 병력이 소모되어 갔지만, 배후에 관중이라는 풍부한 보급기지를 갖고 있던 유방군은 패전을 거듭하면서도 불사조와 같이 전투태세를 다시 갖출 수가 있었다. 그리고 이 대결은 유방측의 승리로 끝났던 것이다.
이 동안 소하는 후방에 머물면서 전선에의 보급에 전력하고 있었다. 유방이 동으로 진군하여 관중 땅을 점령했을 때 소하는 승상으로서 후방에 머물며 파촉(巴蜀) 땅을 공고히 다지고 인민을 잘 다스리면서 군량을 확보하였다. 더욱이 유방이 항우와 대결한 3년여 동안에 소하는 관중에 체재하면서 태자 효혜(孝惠)를 보좌하여 수도 역양의 체제 정비에 임했다. 곧 법규를 제정하고 조묘(祖廟)와 궁전을 세워 지방 행정을 정비했던 것이다.
소하는 관중의 호구수를 정확히 파악하고 전선에의 물자 보급을 체계적으로 행했다. 유방이 때로 패주하여 병력을 잃었으나 소하는 그때마다 관중에서 병력을 보충해 보냈다. 유방의 승리는 이러한 후방에서의 소하의 활약에 힘입은 바가 매우 컸다.
<법령의 정비와 명석한 처세>
BC 202년 천하를 통일하고 한제국을 건설한 고조 유방은 소하에게 법령 체계의 책정을 명하였는데, 소하는 고조의 뜻을 받들어 도율(盜律), 적률(賊律), 수율(囚律), 포율(捕律), 잡률(雜律), 구율(具律), 호율(戶律), 구율(廐律)의 9편으로 이루어지는 "구장율(九章律)"을 제정했다. 이 구장율을 제정할 때 기초 자료가 된 것은 바로 함양에서 접수해 두었던 진나라의 법령 문서였다. 소하가 제정한 이 9장율은 "정율(正律)"이라고도 불리며, 전한(前漢)과 후한(後漢) 약 420 여년에 걸쳐 가장 기본적인 법전으로 중시되었지만 그 내용은 현재 전해지고 있지 않다.
한제국 건설 초기에는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잇따른 반란을 진입하기 위하여 고조 유방은 수도를 비울 때가 많았다. 그간 대권을 위임받아 내정을 담당한 사람이 바로 승상인 소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한신, 진희, 팽월, 경포, 여관이라고 하는 공신들이 잇따라 그들의 원한을 산 자들의 밀고에 의해 반역죄로 숙청되기에 이르렀다. 소하도 유방의 의심을 받기에 쉬운 위치에 있었지만, 그는 유방에게 한 가닥의 의혹도 품지 않게 하려고 처세에 신중을 다하였다. 진희의 반란군을 집압하기 위하여 유방이 수도를 비웠을 때, 수도에서는 한신이 반역을 기도했지만 수도를 책임지고 있던 소하의 계략에 의하여 무사할 수 있었다. 유방은 고향에서 그 통지를 받자 사자를 보내 소하를 승상에서 또 하나 위인 상국(相國)으로 승진시켜 5천호의 영지를 하사하는 한편 도위(都尉)를 우두머리로 하는 5백명의 호위병을 그에게 붙혀주었다. 그러나 소하는 이것을 받지 않고 그대로 군비로 헌납하였으며, 유방은 소하의 이러한 태도에 매우 만족하였다.
BC 195년 고조 유방이 병사하였으며, 상국인 소하도 그 2년 후에 유방의 뒤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 소하는 죽기 전 그와 동향 친구로서 함께 유방을 보좌했던 조삼(曹參)을 상국(相國)으로 천거하였다. 당시 소하는 조삼과 다소 불편한 관계에 있었지만 국정을 위하여 기꺼이 그를 천거하였던 것이다. 조삼은 소하를 대신하여 상국이 되자 소하가 정한 법령을 한결같이 존중하여 한 가지 일도 변경하는 일이 없었다. 이로써 한제국은 400년 왕조의 건설을 향한 기초를 다지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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