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무제 유철(漢武帝 劉徹)
한 무제는 이름이 유철(劉徹: BC 156 ~ BC 87)이며, 한(漢) 경제(景帝)의 셋째 아들로 경제가 죽은 후에 왕위를 계승하였다. 54년간 재위하다가 71세에 순행에 올랐다가 도중에 병사하였다. 장지는 무릉(茂陵: 지금의 섬서성 흥평현<興平縣> 동북)에 있다.
유철은 4세 때 교동왕(膠東王)에 책봉되었으며, 7세 때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경제가 기원전 141년 정월 갑자일(甲子日)에 병사하자 그는 같은 날에 왕위를 계승하였다. 이듬해에 연호를 창시하여 '건원(建元)'이라 하였다. 이로부터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유철은 재위 시기에 정치적으로는 경제(景帝) 유계(劉啓)의 정책을 계승, '추은령(推恩令)'을 반포하여 왕후장상의 봉토를 자식들에게 분봉할 수 있도록 허락함으로써 그들의 역량을 분산시켰다. 그리고는 계속하여 많은 왕후(王侯)들의 작위를 박탈하여 제후국들의 중앙정권에 대한 위협적인 요소를 사전에 제거하였다.
사상적으로는 유학자 동중서(董仲舒)의 건의를 받아들여 유가(儒家)를 제외한 기타 학설의 전파를 금지하고, 유학을 봉건사회의 통치이념으로 삼아 중앙집권 통치를 더욱 강화하였다. 이로부터 유학은 다시 오랫동안 중국인들의 사상을 지배하게 되었다.
경제적으로는 공근(孔僅), 동곽함양(東郭咸陽)의 주장을 받아들여, 제철과 제염을 국영으로 회수하여 국가의 경제적 역량을 견실하게 다졌다. 그리고 상홍양(桑弘陽)의 건의를 받아들여 경성에 평준관(平準官)을 설치하고, 전국 각지에 균수관(均輸官)을 설치하여, 물류 수송과 무역을 정부에서 직접 관장함으로써 물가를 안정시켰다. 그리고 다시 황하(黃河)를 정비하여 수리사업을 일으키고 백성들을 주변 마을로 이주시켰다.
군사적으로는 대장군 위청(衛靑), 곽거병(?去病) 등을 파견하여 여러 차례 흉노를 정벌하고 흉노의 위협을 사전에 없앴다. 그리하여 광대한 황하 유역의 경제 문화적 발전을 확보하였다. 또 남방에서 할거하던 남월(南越: 고대 남방 월인<越人>의 한 갈래) 정권을 제거하고 지금의 광동 광서 지구를 통일하였으며, 아울러 지금의 운남성과 귀주성 등에 군(郡)을 설치하여 한족과 각 소수민족 사이의 관계를 강화하였다.
외교적으로는 장건(張騫)을 두 차례나 서역으로 파견하여 대월지(大月氏: 지금의 신강성 서부), 오손(烏孫: 지금의 신강성 이려하<伊犁河> 일대), 안식(安息: 지금의 이란고원) 등지로 가서 서역 민족과 한족의 경제 문화 교류를 강화하고, 장안에서 유럽 로마제국에 이르는 '비단길(絲綢之路)'을 개척하였다.
한 무제의 이러한 조치로 서한은 전성기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한 무제의 통치 후기에는 잦은 전란으로 병역과 부역이 심해졌으며, 대규모 토목공사를 일으키고 사치를 일삼아 문제와 경제 시기에 비축해 두었던 국고를 거의 다 탕진하였다. 수입을 증대하기 위해 그는 잔혹한 관리를 중용하여 세금을 더 많이 거두어 들이고, 매관매직을 방조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백성들의 부담이 더욱 가중된데다 흉년까지 겹쳐 농민들은 갈곳이 없어 떠돌아 다니게 되고 농민봉기도 여러 곳에서 일어났다. 이러한 사회적 혼란과 위기에 직면하여 기원전 84년에 그는 '죄기조(罪己詔: 황제가 스스로를 꾸짖는 조서)'를 반포하여 자신의 잘못에 대해 참회하였다. 그리고 전쟁을 중단하기로 결심하고는 농기구와 농업기술을 확대 보급하고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생산과 백성의 생활을 중시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이렇게 하여 전국은 다시 점진적으로 안정을 되찾기 시작하였다.
기원전 87년 2월, 한 무제는 외지로 순행에 올랐다. 부풍(扶風: 지금의 섬서성 흥평현<興平縣>)에 이르렀을 때 병이 나서 오작궁(五?宮: 문앞에 다섯 그루의 떡갈나무가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임)에 누워있으면서 장안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이에 무제는 급히 명령을 내려 유불릉(劉弗陵)을 태자에 책봉한 다음, 곽광(?光)을 대사마(大司馬), 대장군에, 김일선(金日蟬)을 거기장군(車騎將軍)에, 상관걸(上官桀)을 좌장군(左將軍)에 각각 임명하고, 그들에게 승상 전견추(田見秋), 어사대부(御史大夫) 상홍양과 함께 태자를 보필토록 했다. 이 다섯 명의 대신들이 무제의 침상 앞에 무릎을 꿇고 유언을 받들 때 무제는 이미 말문을 닫고 간신히 고개만 끄득였다.
정묘일(丁卯日)에 무제는 순행 도중에 병사하였다. 무제가 죽은 뒤에 묘호(廟號)는 세종(世宗), 시호는 무제(武帝)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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