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世界史/[지구촌]中國

아쉬운 패배자 항우

好學 2009. 10. 25. 21:23

 

아쉬운 패배자 항우



< 항우의 일생>
항우(項羽, BC233~BC202)는 진(秦)나라 말기 하상(下相, 지금의 강소성 宿遷 서남) 출신으로 이름은 적(籍), 자는 우(羽)이다. 조부 항연(項燕)은 전국 말기 초(楚)나라의 명장으로 진나라 장수 왕전(王翦)에게 살해되었다. 숙부 항량(項梁)은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후에 살인을 범하여 항우와 함께 오중(吳中, 지금의 강소성 蘇州)에 피신해 있었다. 항량은 그곳에서 숨어 지내면서 큰 부역과 상사(喪事)가 있을 때마다 항상 그 일을 도맡아 처리하고, 암암리에 빈객과 젊은이들을 모아서 조직적으로 훈련시켰다.

항우는 키가 8척이 넘고 세 발 달린 큰 솥(鼎)을 들어올릴 수 있을 정도로 힘이 셌다. 어릴 때 글과 검술을 배웠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여 항량이 화를 내자 그는 도리어 이렇게 말했다. "글은 성명만 쓸줄 알면 될 뿐이고, 검술은 한사람만 대적하는 것이니 배울 만한 것이 못됩니다. 저는 만인을 대적하는 법을 배우겠습니다."

향량은 또 그에게 병법을 가르쳤지만 그는 대략적으로 대의를 파악한 후에는 더 이상 깊이 배우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항우는 재주와 기개가 탁월하여 진시황이 회계산(會稽山)을 유람할 때 그 모습을 길가에서 지켜보고는 "저 사람의 자리를 내가 대신 취하겠노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진2세 원년(BC 209) 7월,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이 대택향(大澤鄕)에서 진나라에 항거하는 농민봉기를 일으켜 장초(張楚) 정권을 세웠다. 6국의 귀족들은 그 소식을 듣고 전국 각지에서 군대를 일으켰으며, 같은 해 9월에 항량과 항우도 회계군수 은통(殷通)을 죽이고 오중(吳中)의 병사들을 모아 반진(反秦)의 기치를 들었다. 항량은 스스로 회계군수에 올라 항우를 부장으로 삼고 정예병 8천명을 거느렸다. 진승이 희생된 후 그의 부하 장수 소평(召平)은 진승의 명의를 사칭하여 항량을 초왕(楚王) 상주국(上柱國, 초나라의 上卿으로 相國에 해당하는 명예직)에 임명하였다. 그리고는 급히 서쪽으로 진격하여 진나라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항량은 8천명의 군사를 이끌고 장강을 건너 서쪽으로 달려갔다.

진2세 2년 3월, 항량이 군대를 이끌고 장강(長江)을 건넜을 때 동양(東陽, 지금의 강소성 우태현 동남)의 영사(令史, 현령 휘하의 관리) 진영(陳嬰)이 이미 동양을 점령한 후 의병 2만명을 거느리고 항량의 휘하로 들어왔다. 또 회수(淮水)를 건넜을 때는 영포(英布)와 포장군(蒲將軍)도 군대를 이끌고 항량의 휘하에 들어왔다. 이로써 항량의 병력은 일시에 6~7만명으로 늘어나서 당시 반진(反秦) 세력의 주력부대가 되었다. 같은 해 6월, 항량은 진승이 확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설현(薛縣, 지금의 산동성 등현 남쪽)에서 봉기군 장수들을 소집하여 대사를 논의하였다. 그리고는 시골에서 양치기를 하던 초(楚) 회왕(懷王)의 손자 웅심(熊心)을 찾아내어 초회왕으로 추대하고, 항량은 스스로 무신군(武信君)이라 하였다.

그후 항량은 의병들을 거느리고 동아(東阿:지금의 산동성 동아현 서남)와 정도(定陶, 지금의 산동성 정도현 서북) 등지에서 진나라 군대를 대파하였다. 항우와 유방(劉邦)도 성양(城陽:지금의 산동성 견성현 동남)을 점령하고 옹구(雍丘, 지금의 하남성 杞縣)까지 진격하여 진나라의 삼천태수(三川太守) 이유(李由)의 목을 베었다. 항량은 동아에서 출발하여 서쪽으로 정도에 이를 때까지 두 차례나 진나라 군대를 무찌른 데다 항우 등이 또 이유의 목을 베자 더욱 적을 과소평가하고 오만하게 굴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진나라 장수 장한(章邯)의 기습을 받아 대패하고 항량은 전사하였다.

항량이 전사하자 항우와 유방은 팽성(彭城:지금의 강소성 서주徐州)으로 물러나서 전열을 가다듬었다. 장한은 다시 황하를 건너 북상하여 조(趙)를 공격하고, 진나라 장수 왕리(王離)·섭간(涉間)과 함께 거록(巨鹿, 지금의 하남성 平鄕縣 서남)을 포위하였다. 초회왕은 송의(宋義)를 상장군, 항우를 부장에 임명하고 조를 지원토록 하였다. 그러나 송의는 안양(安陽, 지금의 산동성 曹縣 동남)에 이르러 46일간을 머무르면서도 진격은 하지 않고 형세를 관망만 하고 있었다. 이에 항우는 상장군 송의가 은밀히 제나라와 결탁하여 반란을 도모했다는 이유로 그를 죽여 버렸다. 회왕은 즉시 항우를 상장군에 임명하고 전군을 통솔하여 조를 지원하게 했다.

항우는 당양군(當陽君)과 포장군(蒲將軍) 등의 장병 2만명을 파견하여 신속하게 장하(漳河)를 건너 거록의 포위망을 뚫게 하였다. 그리고는 직접 전군을 이끌고 장하를 건너가 배수진을 치고 계속 진격하였다. 아홉 번의 격전 끝에 초나라 군대는 진나라 군대를 대파하였으며, 진나라 장수 왕리는 사로잡히고 섭간은 자살하였다. 당시 초나라 군대가 거록을 지원 공격할 때에 함께 달려온 다른 제후들의 군대가 10여 진영이나 있었으나, 그들은 감히 군대를 움직이지 못하고 모두 성벽위에서 관전만 하고 있었다. 결국 초나라 군대의 승리로 전쟁이 끝나자 다른 제후들의 장수는 모두 항우 앞에 무릎을 꿇고 감히 쳐다보지도 못했다. 이로부터 각 제후들의 군대는 모두 항우의 지휘에 따르게 되었다. 항우는 여세를 몰아 계속하여 진나라 군대를 대파한 다음 진나라 통치권 내부의 갈등관계를 이용하여 장한의 투항을 받아내었다. 그는 진나라 병사들이 복종하지 않을 것을 염려하여 신안성(新安城) 남쪽에서 진나라의 병사 20만명을 모두 생매장시켜 버렸다.

항우가 군대를 이끌고 관중(關中)에 들어갔을 때, 이미 유방이 먼저 함양(咸陽)을 점거하고 있었다. 항우는 초회왕과 "먼저 관중을 차지한 자가 왕이 된다"는 약속을 하였기 때문에 유방이 당연히 관중의 왕이 되어야 했다. 이때 유방의 신하 조무상(曹無傷)이 항우에게 유방이 관중의 왕이 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밀고하였다. 화가난 항우는 자신이 보유한 40만 대군의 위력을 믿고 즉시 유방을 없애고 천하의 패권을 차지하려고 하였다. 그것을 미리 간파한 유방은 불리한 전세를 뻔히 알면서 무모하게 항우와 대적하기 보다는 자신을 낮추고 항우에게 화의를 청하기로 하였다. 유방은 홍문(鴻門)에 주둔하고 있던 항우를 찾아가서 사죄하며 이렇게 말했다. "신은 장군과 더불어 죽을 힘을 다해서 진나라를 공격했으니, 장군께서는 하북에서 싸움을 벌이시고 신은 하남에서 싸움을 벌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본의 아니게 먼저 관중에 진입하여 진나라를 무찌르고 이곳에서 다시 장군을 뵈올 수 있게 되었는데, 지금 소인배의 참언이 장군과 신으로 하여금 틈이 생기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항우 측에서는 이번 기회를 이용하여 유방을 죽이려는 계획을 미리 세워둔 상태였다. 유명한 "홍문의 연회"가 시작되었다. 살기가 가득한 연회석상에서 유방은 여러 차례 죽음의 위기를 간신히 넘겼으며, 항우는 결국 유방을 없앨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며칠 후 항우는 다시 서쪽으로 진격하여 함양을 공략하여 진나라의 왕자 영(嬰)을 죽이고 진나라 궁궐을 불태운 다음 무수한 금은보화와 미녀들을 약탈하여 동쪽으로 돌아갔다.

한(漢) 원년(BC 206) 항우는 회왕을 의제(義帝, 명목상의 황제라는 뜻)로 삼고 침현(郴縣, 지금의 호남성 침현)에 도읍을 정하도록 한 다음, 다시 제후들을 분봉하고 자신은 스스로 서초패왕(西楚覇王)에 올랐다. 그리고는 양(梁)과 초(楚) 땅의 9개 군(郡)에 웅거하여 도읍을 팽성(彭城)에 정하고 유방을 한왕(漢王)에 봉했다. 얼마 후 전영(田榮)·진여(陳余)·팽월(彭越) 등이 잇달아 군대를 일으켜 초나라에 대항하였다. 유방도 삼진(三秦)을 평정한 후 서초(西楚)를 공격함으로써 4년여에 걸친 초한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초한의 전쟁 초기에 유방은 항우가 제(齊) 땅에 머물러 있는 틈을 타서 한(漢) 2년 4월에 팽성을 공격하였다. 항우는 즉시 군대를 돌려 팽성을 지원하여 유방의 군대를 대파하였으며, 유방은 형양(滎陽)으로 퇴각하였다. 그후 초한은 각각 형양과 성고(成臯)를 경계로 오랫동안 서로 대치하였다.

항우는 비록 계속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공고한 후방을 건설하지 못하여, 줄곧 전후방에서 작전을 동시에 수행해야 하는 다소 불리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항우는 제후들을 분봉하면서 다소 공평성을 상실하였는데, 이때 불만을 품은 제후들이 유방에게 동조함으로써 항우는 정치적 고립에 빠졌다. 이외에도 항우는 비록 전쟁에서는 용맹하였지만 인재등용에서는 실패하였다. 따라서 원래 항우의 휘하에 있었던 한신(韓信)·진평(陳平) 등이 모두 항우를 배반하고 유방에게 투항하여 유방의 핵심 참모가 되었으며, 심지어 그는 자신의 핵심 참모였던 범증(范增)을 믿지 못하여 많은 실책을 거듭하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항우가 전선에서 거둔 성과를 상실한 반면, 유방은 오히려 전선에서의 패배를 정치적 승리로 전환시켰다.

한(漢) 5년 12월, 초나라 군대가 해하(垓下, 지금의 안휘성 靈璧 동남)에서 방벽을 구축하고 있었는데, 군사는 적고 군량은 다 떨어진 데다 한나라와 제후들의 군대에 겹겹으로 포위되고 말았다. 이때 밤중에 한나라 군사들이 사방에서 초나라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크게 놀란 항우는 "한군이 이미 초나라 땅을 모두 빼앗았단 말인가? 어찌하여 초나라 사람들이 저리도 많은가?"라고 탄식하였다. 그는 애첩 우희(虞姬)를 불러 함께 술을 마시면서 비분강개한 노래를 불렀다.

力拔山兮氣蓋世, 힘은 산을 뽑을 수 있고 기개는 온 세상을 덮을 만 하건만,
時不利兮騅不逝. 시운이 불리하여 오추마도 나아가지 않네.
騅不逝兮可奈何! 오추마가 나아가지 않으니 어찌하면 좋을까!
虞兮虞兮奈若何! 우희여! 우희여! 당신을 어쩌면 좋을까!

그리고는 부하 장졸 8백여명과 함께 포위망을 뚫고 남쪽으로 질주하였으나 음릉(陰陵,지금의 안휘성 定遠縣 서북)에 이르러 길을 잃어 버렸다. 여기서 항우는 한 농부에게 길을 물었으나 그 농부가 일부러 항우에게 길을 잘못 가르쳐 줌으로써 항우는 다시 유방군의 추격을 당하게 되었다. 항우는 황급히 군사들을 이끌고 탈출하여 동성(東城, 지금의 안휘성 정원현 동남)에 이르렀다. 이때까지 살아남은 항우의 군사라고는 단지 기마병 28명 뿐이었으나, 그들을 추격한 한나라 장수 관영(灌嬰)의 군사는 기마병 5천명이었다.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판단한 항우는 비장한 결심을 하고 남아있던 병사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군사를 일으킨지 지금 8년이 되었다. 직접 70여 차례의 전투에 참가하여 내가 맞선 적은 격파시키고 내가 공격한 적은 모두 굴복시켜 패배를 몰랐으며, 마침내는 천하의 패권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지금 이곳에서 곤경에 처하게 되었으니, 이는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한 것이지, 결코 내가 싸움을 잘하지 못한 죄가 아니다. 오늘 필사적인 각오로 통쾌히 싸워서 기필코 승리를 쟁취하여, 그대들을 위해서 포위를 뚫고 적장을 참살하고 적군의 깃발을 쓰러뜨려서, 그대들에게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는 것이지 싸움을 잘못한 죄가 아님을 보여주겠노라." 말을 마친 항우는 기병을 넷으로 나누어 사방으로 향하게 하였다. 항우는 마지막 투혼을 발휘하여 마침내 포위망을 뚫고 동쪽으로 달려가 오강(烏江, 지금의 안휘성 和縣 경내)에 이르렀다. 그러나 항우는 오강을 빨리 건너라는 사공의 권유를 뿌리치고, "설사 강동의 부형들이 나를 불쌍히여겨 왕으로 삼아준다해도 내가 무슨 면목으로 그들을 대하겠나?"라고 한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 항우의 실패 원인>
항우와 우희 : 경극 <패왕별희(覇王別姬)>는 초패왕 항우와 우희의 이별장면을 극화한 것이고, 영화 <패왕별희>는 이 경극을 주제로 한 것이다. 항우는 유방에 비해 전력면에서 절대 우위에 있었지만 결국 실패자로서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하고 조용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가 실패한 원인을 되짚어보지 않을 수 없으며, 그것은 바로 그의 성격과 통치 스타일에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결론지을 수 있다. 전쟁터에서 보여준 그토록 용맹을 떨쳤던 사나이다운 기개와는 달리 한 여인을 죽도록 사랑했던 그에게서 우리는 오히려 무한한 인간미를 느낄 수 있지만, 그가 끝내 초한전의 패권을 장악하지 못하고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데는 또 다른 실망감을 금할 수 없다.

첫째, 항우는 용맹하였지만 지략이 없었다.
그가 스스로 "힘은 산을 뽑을 수 있고 기개는 온 세상을 덮을 만하다"고 과시한 것은 차치하고, "키가 8척이고 힘이 세 발 달린 큰 솥을 들어올릴 수 있었다"고 한 ≪사기≫의 기록만 가지고 말하더라도 그의 힘과 용맹을 충분히 읽을 수 있다. 항우는 바로 이러한 힘과 용맹을 바탕으로 숙부 항량을 따라 반진(反秦) 투쟁에서 뛰어난 공적을 세웠던 것이다. 이러한 항우의 용맹함을 볼 수 있는 예를 들어보면, 초한군이 광무(廣武)에서 대치하였을 때, 항우는 3명의 장사를 보내어 유방에게 싸움을 걸게 하였으나, 그들이 모두 유방의 사수(射手) 누번(樓煩)의 화살에 맞아 죽어 버렸다. 화가 난 항우가 직접 갑옷을 입고 창을 집어들고는 싸움을 걸었다. 누번이 다시 그에게 활을 쏘려하자 항우가 눈을 부릅뜨고 꾸짖으니 누번은 감히 그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화살도 쏘지 못하고는 황급히 진지로 도망쳐 들어가 나오지 못하였다. 또 항우가 오강에서 자결하기 전 도망치는 도중에 한나라 장수 양희(楊喜)가 끝까지 추격해오자 항우가 말고삐를 돌려 눈을 부릅뜨고 꾸짖으니 양희의 병사들과 말이 깜짝 놀라 몇리 밖으로 달아나 버렸다. 항우는 바로 이렇게 삼군을 휩쓸어 버릴 수 있는 용맹한 힘으로 진나라 말기의 농민전쟁에서 연전연승을 거두면서 마침내 서초패왕에 올라 권력의 정상에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항우는 비록 용맹하였지만 그것은 단지 필부(匹夫)의 용맹함에 불과하였으며, 그에게는 지략이 부족하고 앞을 내다보는 전략이 없었다. 항우가 관중에 들어간 후에 어떤 사람이 그에게 관중의 왕에 오를 것을 권했지만 항우는 의외로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부귀한 뒤에 고향에 돌아가지 않는 것은 비단 옷을 입고 밤길을 가는 것과 같으니 누가 그것을 알아주리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함양을 쑥대밭으로 만든 후에 약탈한 재물과 백만대군을 거느리고 팽성으로 돌아갔으니, 이는 더없이 풍요로운 관중 땅을 고스란히 유방에게 바치고 만 셈이 되었다. 진나라 때의 관중은 험준한 산하로 가로막혀 있는 천연의 요새였을 뿐만 아니라, 토지가 비옥하고 인구가 많아 지리적으로 도읍의 가장 적격지였다. 반면 이때의 팽성은 동남쪽에 치우쳐 있어 험준한 산하도 없고 앞으로 많은 개발이 필요한 곳이었다. 그런데도 항우는 오히려 이러한 객관적인 사실을 무시한 채 오로지 금의환향(錦衣還鄕)이라는 개인적 영예만 추구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결국 항우는 이후 유방과의 전투에서 엄청난 대가를 치루게 되었으며, 해하에서 유방의 군대에 포위되었을 때는 그토록 용맹한 힘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시운이 불리하여 오추마도 나아가지 않네."라는 슬픈 노래를 부르면서 황급히 탈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둘째, 항우는 우유부단(優柔不斷) 하였다.
결단을 내려야 할 때 결단을 내리지 못하면 오히려 화를 당한다. 항우는 관중에 들어가기 전에 홍문(鴻門)에 주둔하고 있었고 유방은 거기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패상(覇上, 지금의 섬서성 서안시 동남쪽)에 주둔하고 있었다. 모사(謀士) 범증(范增)이 항우에게 유방을 습격할 것을 권했지만 항우는 머뭇거리면서 결단을 내리지 못하였다. 바로 이때 유방의 배반자 조무상(曹無傷)이 항우에게 밀고하기를, "패공(沛公:즉 유방)이 관중의 왕이 되고 자영(子嬰)을 재상으로 삼아 진귀한 보물을 다 차지하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항우는 크게 노하여 즉시 유방을 죽여 버리겠다는 맹세를 하지만, 이렇게 위급한 순간에 유방에게 매수당한 항백(項伯)이 돌아와서 두 세 마디 말로써 설득하자, 항우는 금새 유방을 죽여 버리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유방의 사죄를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전군의 지휘자로서 다른 사람이 공격하자고 하면 공격하고 화해하자고 하면 화해하는 이러한 우유부단한 태도는 그야말로 그를 비극의 주인공이 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항우의 우유부단한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또 유명한 홍문(鴻門)의 연회에서 범증이 여러번 항우에게 유방을 죽이라는 신호를 보냈지만 항우가 끝내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잠자코 있자 유방은 첫 번째 위기를 무사히 모면할 수 있었다. 잠시 후 범증이 자객 항장(項莊)을 불러서 검무를 추게 한 다음 기회를 봐서 유방을 죽이라고 하였지만 항백이 나서서 유방을 암암리에 보호하는 바람에 항장은 손쓸 틈이 없었다. 항백이 취한 비상 수단에도 항우는 오히려 조용히 지켜봄으로써 범증의 계획은 다시 실패로 끝나고 유방은 두 번째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항장의 검무가 실패로 돌아간 후에도 연회석상에는 여전히 긴장감이 감돌자 유방은 그 자리를 떠나고 싶었지만 떠날 수도 없었다. 바로 이때 번쾌(樊噲)가 뛰어들어 항우를 호통쳐도 오히려 항우는 화도 내지 않고 번쾌를 장사라고 칭찬한 다음 그에게 술과 고기를 하사하였으며, 그 틈에 유방은 재빨리 그 자리를 피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항우의 가장 큰 실수였다. 입장을 바꾸어 항우가 만약 유방이었다면 결코 그렇게 부드럽게 대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유방은 어떠하였던가? 초한군이 광무에서 대치하고 있었을 때 항우는 유방의 부친을 인질로 잡고 유방을 협박하였다. 그는 유방에게 "지금 빨리 투항하지 않으면 네 아비를 삶아 죽이겠다."고 통고하였다. 그러나 의외로 유방의 대답은 명쾌했다. "나와 그대는 회왕의 명을 받고 형제가 되기로 약속하였으니, 나의 아버지가 바로 그대의 아버지이다. 그대의 아비를 삶아 죽이겠다면 삶아 죽이고 나에게도 국 한그릇 나누어주기 바란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이러한 유방의 답변에 결국 항우의 계획도 무산되고 말았다. 여기에서 상대방을 죽여야 내가 사는 정치투쟁에서는 우유부단한 자가 크게 손해를 보고, 칼날이 번뜩이는 살벌한 전장에서는 아녀자의 관용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범증은 홍문의 연회가 끝난 후에 항우에게 "에이! 어린아이와는 대사를 도모할 수가 없도다."라고 욕설을 퍼부었던 것이다.

셋째, 항우는 고집이 세고 의심이 많았다.
의심이 많으면 변고가 생기고 변고가 생기면 사람을 잃는다. 이것은 범증의 퇴출을 통해서 충분히 알 수 있다. 아부(亞父) 범증은 70세라는 고령에도 항우를 따라다니면서 작전을 세우고 충심을 다해 항우를 보필하였지만, 이러한 충신도 항우의 의심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BC 208년 4월, 유방이 하남 형양(滎陽)에서 항우에게 포위되었다. 이것은 홍문의 연회 이후 유방을 없앨 또 한번의 절호의 기회였다. 범증은 항우에게 즉시 형양을 공격할 것을 권했다. 항우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을 때, 유방의 모사(謀士) 진평(陳平)이 항우와 범증의 관계를 이간질하였다. 이때부터 항우는 범증을 의심하기 시작하여 두 사람의 관계가 점점 멀어졌다. 이에 항우가 범증의 건의를 묵살하자 화가 난 범증은 항우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객사하고 말았다. 이로써 항우는 유방을 죽일 절호의 찬스를 놓쳤을 뿐만 아니라 제업(帝業)을 보좌할 충신을 잃어 버렸다. 여기에서 고집이 세고 의심이 많은 항우의 실책을 엿볼 수 있다.

넷째, 항우는 잔인하고 포악하였다.
잔인하고 포악한 사람은 반드시 민심을 잃고 주위로부터 고립된다. 항우는 관중에 들어간 이후에 이미 투항한 진나라 왕자 영(嬰)을 죽였을 뿐만 아니라 함양성을 약탈하고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항우는 군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진격하여 함양을 도륙하고 투항한 진나라 왕자 영을 죽인 다음 진나라의 궁실을 불태웠는데 그 불길이 3개월이나 타고도 꺼지지 않았다. 그리고는 그 재물과 아녀자들을 거두어 동쪽으로 돌아갔다."고 하였다. 이것은 그야말로 강도와 다름없는 행위였으니, 후에 진나라 백성들이 크게 실망한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이외에도 항우는 천하의 비난을 무릅쓰고 숙부와 함께 내세웠던 의제(義帝) 초회왕을 죽였다. 초회왕은 비록 꼭두각시에 불과하였지만 그는 당시 진나라의 폭정에 대한 한 민중들의 정신적 지주였다. 항우의 이러한 의롭지 못한 행위는 자신의 명성에 먹칠을 가하고 정치적 고립에 빠지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때 유방은 민심을 수습하고 민의에 따라 약법삼장(約法三章)을 공포하여 관중의 백성들과 고난을 함께 하였다.

항우는 그의 잔인하고 포악한 행위로 응분의 대가를 받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해하(垓下)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한 후에 음릉(陰陵)에 이르렀을 때 한 농부에게 길을 물었지만, 그 농부는 오히려 항우를 속이고 길을 잘못 가르쳐줌으로써 한나라 군대의 추격을 계속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 항우는 끝내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오강에서 자결하기 전에 탄식하며 이르기를, "이는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한 것이지 내가 싸움을 잘하지 못한 죄가 아니다!"고 하였다.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