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世界史/[지구촌]中國

토사구팽의 주인공 한신

好學 2009. 10. 25. 21:21

 

□ 토사구팽의 주인공 한신



<한신의 일생>

한신(韓信, ?~BC196)은 진말(秦末) 한초(漢初)의 뛰어난 장수이자 유방(劉邦)을 도와 한(漢)나라를 건설하는데 혁혁한 공훈을 세운 "한초삼걸(漢初三杰: 소하, 장량, 한신 세 사람을 일컬음)"의 한 사람이다. 그는 회음(淮陰: 지금의 강소성) 출신으로 어릴 때 부모를 모두 여의고 가난한 환경 속에서 어렵게 공부하면서 병법을 익혔다.

한신은 얼마나 집이 가난하였든지 먹을 것이 없을 때는 이웃집에 가서 찬밥을 얻어먹기도 하고, 회수(淮水)에서 낚시질로 생계를 이어가기도 하였다. 하루는 그가 낚시를 하고 있었는데 그 옆에서 빨래를 하고 있던 한 노파가 한신의 처량한 모습을 보고 그에게 밥을 갖다 주었다. 마침 오랫동안 배를 곯았던 한신은 두 손으로 그것을 받으며 노파의 은혜에 감격하여, "내 반드시 후한 대가로 은혜에 보답하겠소."라고 하였다. 한신의 말을 들은 노파는 화를 내면서 말했다.

"대장부가 스스로 벌어먹지 못하니 왕손(王孫)을 가엾게 여겨 밥을 드렸을 뿐인데, 내가 어찌 보답을 바라겠습니까?"

후에 한신이 유방을 위해 많은 공을 세우고 초왕(楚王)에 봉해졌을 때, 그는 불현 듯 옛날 자기에게 밥을 주었던 그 노파가 생각나서 그녀에게 술과 안주를 보낸 다음 다시 황금 1천냥으로써 보답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일반천금(一飯千金: 조그마한 은혜에 후하게 보답하다는 뜻)"의 고사이다.

여하튼 한신은 어린시절에 너무도 빈천하여 늘 주변 사람들로부터 냉대를 받으며 자랐다. 한번은 또 불량배들이 모여서 한신에게 치욕을 안겨주려고 하였다. 어떤 백정이 한신에게 말했다.

"네 놈이 비록 몸집은 크다지만 칼을 차고 다니기 좋아하는 걸 보니 간이 매우 작은 놈이로구나. 죽음이 두렵지 않다면 그 칼로 나를 찔러 봐라. 그러나 만약 죽음이 두렵다면 내 가랑이 사이로 기어가라!"

한신은 그 백정을 한참 노려보다가 머리를 숙이고 치욕을 참으면서 그의 가랑이 사이로 기어갔다. 그러자 온 동네 사람들이 그를 겁쟁이라고 조롱하였다. 이것이 그 유명한 한신의 "과하지욕(跨下之辱)"의 고사이다.

BC 209년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이 대택향(大澤鄕)을 거점으로 중국 최초의 농민봉기를 일으켰다. 이때 한신은 항량(項梁)과 항우(項羽)가 이끄는 서초군(西楚軍)에 가담하였다. 항량이 전사한 후 항우가 그 뒤를 이었지만 한신은 그에게 중용되지 못하고 낭중(郞中)이라는 낮은 직책의 이름없는 병사에 불과했다. 그는 항우에게 여러 차례 전략을 건의하였으나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그는 초나라 진영을 떠나서 한왕(漢王) 유방(劉邦)에게로 투신하였다. 그러나 유방에게서도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고 평범한 병사생활을 하던 한신은 어느날 군법을 어긴 죄로 사형에 처해지게 되었다. 그와 함께 사형을 선고받은 13명의 동료들이 모두 처형되고 그의 차례가 되었을 때, 그는 머리를 들고 등공 하후영을 향해 큰소리로 말했다.

"한왕(漢王)은 천하를 차지할 생각이 없단 말입니까? 어찌하여 유능한 장수들을 다 죽이려 합니까?"

이 말을 듣고 이상하게 여긴 하후영은 그를 예사롭지 않은 인물이라 판단하고 그를 석방한 후 유방에게 천거하였다. 그러나 유방은 여전히 그의 재능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를 치속도위(治粟都尉)라는 낮은 관직에 임명하여 창고관리를 맡겼다.

이때 한신은 승상 소하(蕭何)를 알게 되어 그와 자주 이야기를 나누었다. 소하는 한신이 비범한 인물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고 여러 차례 유방에게 천거하였지만, 유방은 여전히 그를 중용하지 않았다. 한신은 더 이상 유방에게도 희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유방의 진영을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유방의 군대가 남정(南鄭)으로 이동하는 도중에 도망가는 병사들이 늘어나자 한신도 그들과 함께 도주해 버렸다. 한신이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소하는 밤새 말을 타고 쫓아가서 그를 설득하여 다시 데리고 돌아왔다. 그후 소하는 다시 유방에게 한신을 이 세상에서 둘도 없는 뛰어난 인재라고 하면서 천거하였다. 그리고는 유방에게 이렇게 말했다.

"한신은 당대에 견줄 사람이 없는 뛰어난 장수입니다. 만약 왕께서 그저 한중(漢中)의 왕이 되고자 하신다면 그가 없어도 되겠지만, 만약 천하를 다투고자 하신다면 반드시 한신과 같은 사람이 있어야 될 것입니다."

이 말은 듣고 설득된 유방은 길일을 택하여 제사를 지내고 한신을 대장군에 임명하였다. 그리고는 직접 한신에게 천하 쟁패의 대계에 대한 가르침을 청했다. 이에 한신은 초한전의 형세를 객관적으로 분석한 다음, 항우와 다른 제후국들을 격파하여 통일을 실현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유방은 크게 기뻐하면서 한신의 재능을 늦게 알아본 것을 후회하였다. 마침내 유방은 한신의 계획에 따라 휘하의 장수들에게 동쪽으로 진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후 항우와 유방의 패권 다툼에 있어서 먼저 진(秦)나라의 수도 함양을 차지하는 사람이 관중(關中)의 왕이 된다는 약속이 있었는데, 그 함양을 유방이 항우보다 먼저 한 발 앞서 차지하게 되었다. 그래서 뒤에 입성한 항우는 화를 억누르지 못하고 진나라의 아방궁을 불사르는 등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그런 후 항우는 서초(西楚)의 패왕(覇王)에 오르고, 유방에게는 원래의 약속을 어기고 파(巴)와 촉(蜀)·한중(漢中)을 제공하여 한왕(漢王)에 임명한 뒤에 남정(南鄭)에 도읍을 정하도록 하였다. 군사적으로 항우에 비해 훨씬 열세였던 유방은 어쩔 수 없이 파·촉 지역으로 물러나게 되는데, 이때 유방은 수도 남정(南鄭)으로 가면서 그들이 지나온 "잔도(棧道)"를 끊어, 항우를 반격할 의사가 없다는 뜻을 보이며 그들을 안심시켰다.

한(漢) 고조(高祖) 원년(BC 206) 가을, 한신은 유방이 한중(漢中)에 들어올 때 불질렀던 잔도(棧道)를 복구하여 적군의 시선을 그쪽으로 쏠리도록 속인 다음, 직접 군대를 이끌고 몰래 남정(南鄭)의 옛길을 따라 진창(陳倉)으로 진격하여 초나라 군대를 대파하고 일거에 관중(關中) 지역을 점령하였다. 이로써 유방은 삼진(三秦)을 평정할 수 있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명수잔도, 암도진창(明修棧道, 暗渡陳倉: 겉으로는 잔도를 만드는체 하면서, 몰래 진창으로 들어가 기습하다)"의 고사이다.

한 고조 2년(BC 205) 2월, 한신은 다시 군대를 이끌고 함곡관(函谷關)으로 진격하여 낙양(洛陽)을 위협하자 원래 항우에게 소속되었던 한왕(韓王) 정창(鄭昌)과 은왕(殷王) 사마공 등이 차례로 투항하였다. 그후 다시 제(齊)·조(趙)와 연합하여 초(楚)를 공격, 4월에 대군이 이미 초나라 수도 팽성(彭城)에 도달하였으나 항우에게 패하였다. 한신은 패잔병들을 모아서 형양(滎陽)에서 유방과 합류하여 다시 초나라 군대를 격파하였다. 이로써 초한 사이에는 대치 국면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유방군이 그전에 한번 패하였을 때 제나라와 조나라 등이 다시 한나라를 배반하고 초나라와 연합하여 유방군의 형세가 매우 불리해졌다.

이렇게 불리해진 형세를 만회하기 위해서 이해 8월에 유방은 한신을 좌승상(左丞相)에 임명하고 위(魏)·조(趙)·제(齊) 등을 치게 했다. 한신은 군대를 이끌고 항우의 배후를 습격, 전장을 종횡으로 누비면서 위·조·제를 차례로 격파한 후 유방을 보좌하여 초나라를 멸망시키고 한나라를 건설하는데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한신은 먼저 날랜 병사들을 이끌고 몰래 황하를 도하하여 위나라를 평정하고 위왕(魏王)을 사로잡았다. 형양의 전선이 급박해지자 유방은 다시 한신에게 있던 정예병들을 그곳으로 옮겼다. 이때 한신은 적은 병력만으로 장이(張耳)와 연합하여 조나라를 공격하였다. 조나라는 20만 대군을 자랑하는 막강 병력을 보유하고 있어서 전력상에서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하에서도 한신은 오히려 배수진을 쳐서 물러서지 않고 진격하여 조나라 군대를 격파하였다.

얼마 후 한신은 다시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진격하여 제나라를 쳤다. 평원진(平原津) 어구에 이르러 유방이 이미 제나라의 투항을 받아냈다는 소식을 듣고 전진을 멈췄다. 이때 한신의 참모 괴통이 그에게 말하였다.

"장군께서 이미 병력을 이끌고 제나라 접경까지 왔는데 어찌하여 아무런 성과도 없이 돌아가려 하십니까?

이 말을 듣고 한신은 마침내 황하를 건너 일거에 제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제나라의 도읍 임치(臨淄)까지 내달았다. 깜짝 놀란 제나라 왕 전광(田光)은 도성을 버리고 고밀(高密)로 달려가서 초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초나라에서는 20만 대군을 파견하여 제나라를 지원했다. 이에 제·초 연합군과 한신의 군대가 고밀 경내의 유수(유水) 일대에서 대치하였다. 한신은 먼저 밤에 군사들을 보내어 유수 상류에 둑을 쌓아둔 다음, 군대를 이끌고 강을 건너 제·초 연합군과 교전을 벌였다. 서로 싸운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신이 일부러 패한 척하고 후퇴하자 제·초 연합군은 한신을 추격해왔다. 연합군이 강의 절반 쯤 추격해 왔을 때 한신이 상류에 막아두었던 둑을 터뜨리자 연합군은 거의 대부분 물에 빠져 죽었다. 이에 한신은 다시 군대를 돌려 연합군을 대파하고 제왕 전광을 사로잡고 제나라를 평정하였다.

BC 202년 유방이 휘하의 군대를 모두 이끌고 해하(垓下)에서 항우와 접전을 벌였다. 이 전쟁에서 유방은 한신의 계책을 받아들여 십면(十面)에 매복을 설치하고(유명한 비파음악 <십면매복(十面埋伏)>은 바로 이 고사를 음악으로 표현한 것이다.) 초나라 군대를 겹겹이 에워싼 다음, 사방에서 초나라의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초나라 군사들은 그 노랫소리를 듣고 마음이 동요되어 산산이 흩어져 도망갔다. 그후 항우는 오강(烏江)까지 탈출하였다가 결국 자살하였으며, 이로써 유방은 4년간에 걸친 초한전을 승리로 마감하고 천하를 통일하였다.

그러나 한신은 공로를 세운 뒤에 말로가 순탄치 못했다. 한(漢) 고조(高祖) 11년(BC 196) 여태후(呂太后)와 소하(蕭何)의 계략으로 한신은 장락궁(長樂宮) 종실(鍾室)에서 피살되었다. 한신은 왜 이렇게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을까? 역사학계에서는 한신이 죽게된 배경에 대해 그 설이 분분하다.

보편적으로 알려져 있는 설은 한신이 반란을 꾀하여 피살되었다는 것이다. 한 고조 5년(BC 202), 제나라를 평정한 한신은 자신의 공로를 믿고 유방에게 편지를 보내어 제왕(齊王)에 책봉해 달라는 요청을 하였다. 당시에 유방은 형양(滎陽)에서 초나라 군에 포위를 당해 있었던 터이라 한신이 하루 빨리 군대를 이끌고 달려와서 지원해 주기를 밤낮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기다리던 한신의 지원군은 오지 않고 이러한 편지만 날아오자, 유방은 이 기회에 권력을 쟁취하려는 한신의 속셈을 알고 대단히 진노하였다.

장량(張良)과 진평(陳平)은 한나라 군의 형세가 불리한 상태에서 당시로서는 왕위에 오르겠다는 한신을 제지할 힘이 없었기 때문에, 순순히 그를 왕에 책봉하여 군심을 수습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고 유방에게 한신의 요구를 들어줄 것을 건의하였다. 이에 유방은 그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한신을 제왕(齊王)에 책봉하였다. 이러한 결정은 당시에 유방으로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기 때문에, 그후 초한전이 끝나자 유방은 한신의 병권을 박탈하고 그를 다시 남쪽 변방의 초왕(楚王)에 봉했던 것이다. 그 사이에 한신의 참모 괴통은 한신에게 자립하여 왕이 될 것을 권하면서 유방의 명령을 계속 듣다가는 언젠가는 큰 위험에 빠지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그러나 한신은 차마 유방을 배반할 수 없었던데다, 또 자신의 공로가 워낙 크기 때문에 유방이 자기를 어쩌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 그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유방은 한신을 초왕에 봉한 뒤에도 그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유방은 항우의 옛 부하 종리매(鍾離昧)가 한신과 비밀리에 접촉을 가지다가 항우가 죽은 후에 한신에게 귀순한 사실을 발견하였다. 이에 유방은 그를 체포하여 법대로 처리하라는 명령을 하였다. 이때 한신은 초왕에 갓 부임하여 많은 호위병들을 거느리고 다녔는데 이것은 유방의 의심을 더욱 불러일으켰다.

한 고조 6년(BC 201)에는 또 어떤 사람이 유방에게 한신이 반란을 도모한다고 밀고하였다. 이로써 유방은 한신을 없애야겠다는 결심을 확고히 다지게 되었다. 마침내 유방은 진평의 계책을 받아들여 초나라의 운몽(雲夢)에 순행을 간다는 것을 구실로 한신을 사로잡고자 하였다. 유방은 일단 제후들에게 초나라 서쪽 경계의 진(陳)에서 회동하자는 통보를 하였다. 한신은 그 소식을 듣고 유방의 의도가 의심스러워, 반란을 일으키려고 하니 자기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고, 유방을 만나자니 체포될 것이 두렵고 하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한참을 망설였다. 결국 한신은 부하들의 진언을 받아들여 12월에 유방이 진(陳)에 도착하였을 때 종리매의 머리를 가지고 유방을 알현하러 갔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유방은 여전히 그를 체포해 버렸다. 유방은 낙양(洛陽)으로 돌아온 후 한신의 모반 사건에 대한 진상을 조사하였으나 아무런 혐의가 없자 그를 다시 석방하고, 회음후(淮陰侯)로 강등하여 장안(長安)에 거주하게 하였다. 이때부터 한신은 항상 병을 핑계로 조회에도 나가지 않고 밤낮으로 유방을 원망하면서 불만에 찬 나날을 보냈다.

그후 한신은 막강한 대군을 보유한 변방의 장수 진희(陳稀)와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킬 준비를 하였다. BC 196년 진희가 대(代)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유방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정벌에 나섰지만 한신은 병을 핑계로 출전하지 않고 계획대로 내부에서 진희의 반란에 호응할 준비를 하였다. 그는 가신들과 모의하여 밤에 병력을 동원하여 여태후와 태자를 습격하기로 하였으나 그만 여태후에게 비밀이 누설되고 말았다. 여태후는 소하와 긴밀히 의논하여 진희의 반란이 진압되었으니 모든 신하들에게 입궐하여 축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소식을 들은 한신은 의아해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입궐하였다. 그러나 한신은 장락궁(長樂宮)에 들어서자마자 즉시 체포되어 종실(鍾室)에서 참수되었다. 이때 한신은 다시 후회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괴통의 계책을 듣지 않은 것이 후회스럽구나. 아녀자의 속임수에 걸려 죽게 되었으니 이것이 하늘의 운명이란 말인가!"

≪사기(史記)≫「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과 ≪한서(漢書)≫「한팽영로오전(韓彭英盧吳傳」에서는 한신을 일러 개인의 득실을 따져서 분열을 조성하고 반란을 도모한 음모가이며, 그의 죽음은 반란으로 인한 필연적인 결과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한신의 죽음에 대한 다른 견해>
한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모반설의 진위 여부를 둘러싸고 그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일반적으로는 한신이 모반을 기도하다 발각되어 죽었다고 하는 설이 가장 지배적이지만, 이와는 반대로 어떤 학자들은 한신의 모반설이 전혀 근거없는 이야기라고 말하면서 아래의 이유를 들기도 한다.

첫째, 한신은 유방을 배반할 의사가 없었다는 것이다. 진나라가 멸망하고 한나라가 건설되는 과정에서 한신은 유방의 제업(帝業)을 위해서 엄청난 공로를 세웠다. 그는 여러 차례 위기에 처한 유방을 구원하고 자립하여 왕이 되라는 주변의 권유를 뿌리쳤다. 심지어 그는 "한왕(漢王: 즉 유방을 가리킴)이 나를 이토록 후하게 대해주는데, …… 내가 어찌 개인적인 이익 때문에 의리를 저버릴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그가 장안(長安)에 머물면서 병권을 상실했을 때에 충분히 다른 생각을 품고 반란을 일으킬 수 있었음에도 어찌하여 그때는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던가?

둘째, 한 고조 10년(BC 197), 진희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유방이 직접 출정하여 고조 11년에 그것을 진압하였으며, 한신의 모반사건은 그후에 발생하였다. 이때 진희가 이미 패했는데 한신이 왜 굳이 내란을 일으키려고 했겠는가?

셋째, 한신의 모반사건을 밀고한 자는 한신 휘하에 있던 시종의 동생이었다. 그 시종은 한신에게 죄를 짓고 구금되어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었는데, 그 시종의 동생이 여태후에게 한신을 밀고하였다. 만약 한신이 정말로 반란을 일으키고자 했다면, 어찌하여 그렇게 중대한 비밀을 일개 죄수의 동생에게 누설되도록 했겠는가?

어떤 학자들은 한신의 죽음이 한나라 초기 통치자들의 예정된 계획이었다고 지적한다. 유방은 특정한 역사조건 하에서 7명의 공신들을 왕으로 책봉하였다. 그들은 광대한 관동(關東) 지역에 웅거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자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권력을 독점하여 전횡을 일삼으로써 유방의 중앙집권 체제 구축에 큰 장애 요소가 되고 있었다. 제위(帝位)의 보장과 유씨(劉氏) 천하의 안전을 위해서 유방은 후손들에게 길을 정리해 둘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초기 공신들은 유씨 천하를 이룩하는데 희생양이 되었던 것이다. 유씨가 아닌 여러 왕들 중에서 장사왕(長沙王) 오예(吳芮)의 세력이 가장 약하였고, 나라도 한나라와 남월(南越)의 중간 지대에 위치하여 완충작용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다행히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그 나머지 한왕(韓王) 신(信), 회남왕(淮南王) 경포, 연왕(燕王) 노관 등은 유방의 의심을 사서 시달리던 끝에 결국 반란을 일으켰다가 모두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양왕(梁王) 팽월(彭越)과 조왕(趙王) 장오(張敖)는 한신과 마찬가지로 반란을 일으키지도 않고 특별한 죄도 없었지만 모반죄로 처형되었다.

만약 한신이 평범하고 소심한 사람이었다면 오예처럼 죽음을 면할 수 있었을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신은 "백만대군을 거느리고 전쟁에서는 반드시 이겨서 공을 세우는" 뛰어난 장수였기 때문에 유방은 그를 눈에 가시처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한신의 죽음은 바로 그가 진(陳)에서 유방에게 체포될 때 탄식한 말과 같다.

"과연 내려오는 말이 맞도다. 민첩한 토끼가 죽으면 사냥하던 개는 소용이 없어 삶아 죽이고(狡兎死, 走狗烹), 높이 나는 새가 없어지면 좋은 활은 감추어진다(高鳥盡, 良弓藏). 적국을 치고나면 모신(謀臣)은 망하는구나. 천하는 이미 정해졌다. 나는 처음부터 삶겨질 운명이었어!"

이것이 그 유명한 "토사구팽(兎死狗烹)"의 고사이다. 한신은 유씨가 아닌 왕들을 사전에 제거하여 유씨 천하의 기틀을 확고히 다지려고 한 유방의 계책에 의해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 있었으며, 한신은 그러한 유방의 각본에 맞추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만 했던 것이다.

한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그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한신의 모반설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한신의 모반을 사마천(司馬遷)이 ≪사기≫를 편찬할 때 고의로 허술하게 기술한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 즉, 사마천은 한신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막강 권력을 휘두르던 한(漢) 무제(武帝) 시대에 감히 그 일을 사실대로 쓸 수 없었기 때문에, 일부러 그 내용을 허술하게 기술함으로써 후세인들에게 그것을 다시 생각할 여지를 남겨두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위에서 지적한 것과 같은 논리적 모순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한신의 모반설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사마천의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사마천은 한신이 부귀공명의 욕망을 품고 있었다고 보았기 때문에 "병권을 박탈하고 왕위를 옮기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왕위를 박탈하고 작위를 강등시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기록하였으며, 그에 대한 평론에서는 한신이 빈곤할 때에도 오히려 어머니의 상을 성대하게 치렀다는 이야기를 보충함으로써 그의 생각이 보통 사람들과는 달랐다는 것을 강조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신의 모반이 그의 야심으로 인한 당연한 결과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신은 영웅으로 살다가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하였지만, 그의 죽음에 관한 의문은 아직도 많은 토론의 여지가 남아있다.

<장기의 창시자 한신>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전통놀이의 하나로 잘 알려져 있는 장기가 한신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설이 있어 소개를 덧붙인다. 한신이 투옥되었을 때 그를 존경하던 한 옥졸이 그에게 말했다.

"장군께서 저에게 병법을 전수해 주신다면 그것을 대대로 전수하여 장군의 이름을 빛내겠습니다."

한신은 처음에는 그의 말을 수락하지 않았으나 그 옥졸이 몇 번이나 간곡히 부탁하자 마침내 3일 후에 다시 이야기하자고 하였다. 3일 후 한신은 그 옥졸과 마주 앉았다. 그리고는 땅바닥에 있던 큰 네모 판자에 적군과 아군 진영을 나누고 거기에 각각 32개의 칸을 그려넣은 다음, 중간에 강을 경계로 삼고 그 안에 "초하(楚河), 한계(漢界)"라 써넣었다.(중국 장기는 우리와 달리 중간에 강을 경계로 하고 있음) 한편에는 16개의 붉은 종이조각을 배치한 후, 수(帥), 사(仕), 상(相), 차(車), 마(馬), 포(包), 병(兵) 등의 글자를 써넣고, 다른 한편에는 16개의 푸른 종이조각을 배치한 후, (將), 사(士), 상(象), 차(車), 마(馬), 포(包), 졸(卒) 등의 글자를 써넣었다. 그것을 본 옥졸은 깜짝놀라면서, "이것이 병법입니까?"라고 말했다. 그러자 한신이 대답했다.

"이 72개의 작은 사각형을 우습게 보지 마라. 여기에는 천군만마의 대전투를 모두 담을 수 있다. 이 16개의 종이조각은 각각 자기편을 대표하는데, 용병에 있어서도 문무를 바탕으로 상하가 일치단결하여 전반적인 계획을 적절하게 운용하면 어떤 변화에도 능히 대처하여 백전백승 할 수 있다. 이 방법에 정통한 후에 그것을 군사(軍事)에 응용하면 그대로 적용할 수 있어 천하에 적수가 없게 될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옥졸은 무릎을 꿇고 절한 후 한신을 스승으로 삼고 온종일 옥중에서 병법을 배웠다. 한신이 죽은 후에 그 옥졸은 공직을 사임하고 병법 연구에 몰두하였다. 편의상 그는 종이에 장기판을 그리고 종이조각 대신 나무를 깎아서 장기알을 만들었다. 그후 이것은 사회에 널리 전파되어 지금까지도 유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전설일 뿐 사실 여부는 확인할 길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