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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12) 제1장 개신교 선교 이전의 한국의 정황

好學 2009. 9. 6. 22:37

한국교회사(12) 제1장 개신교 선교 이전의 한국의 정황

3. 개신교의 한국 전래를 위한 노력

1) 중국을 통한 한국 선교의 시도

(4) 존 로스와 존 맥킨타이어

② 존 로스와 맥킨타이어 한글 성경 번역

이응찬은 존 로스를 도우면서 기독교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하였고, 그를 좀 더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싶은 생각이 강하게 일어났다. 그래서 이응찬은 1875년 고려문에 가서 백홍준(白鴻俊), 이성하(李成夏), 김진기(金鎭基) 등 의주 청년 세 사람을 포섭하는 데 성공했다. 이응찬을 비롯하여 네 사람의 한국 젊은이들을 확보한 존 로스 선교사는 한국선교를 위해
서 먼저 선행되어져야 할 것이 성경 번역이라고 보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성경 번역에 착수했다. 로스는 말씀이 기독교의 핵심이요 전도의 중심이라 보았다. 해서 성경 번역, 한글성서 간행에 전력하여야 한다고 믿었던 복음주의자였다. 선교사로서는 가장 적절하고도 고귀한 생각을 품고 있었다. 이들 네 명의 의주 청년들은 선교사, 세관관리, 병원장 등 그곳 외국인들의 어학 선생으로 일하면서 이응찬과 함께 로스의 성경 번역 사업을 지원했다. 이들이 한 일은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일을 위해 한문 성경을 수차례 정독하는 일이었다. 이 과정을 되풀이하는 동안 말씀을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께서 이들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예수를 믿기에 이르렀다. 그로부터 4년 후 1879년에 네 사람 모두가 맥킨타이어에 의해 세례를 받았다. 이 사실에 대해 로스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맥킨타이어는 네 명의 학식있는 한국인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들은 앞으로 있을 놀라운 수확의 첫 열매들이라고 확신한다.…한국인들은 중국인들보다 천성적으로 꾸밈이 없는 민족이고, 보다 종교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으므로 나는 그들에게 기독교가 전파되면 곧바로 급속하게 퍼져 나갈 것으로 기대한다.”고 하였다.

이 일이 있은 후, 같은 의주의 청년인 서상륜(徐相崙)이 동생 경조(景祚)와 함께 홍삼 장사를 하기 위해서 영구까지 오게 되었다. 그런데 서상륜은 그곳에서 심한 열병에 걸려 생명을 잃을 위험에 빠지게 되었다. 이때 로스가 이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는 즉시 서상륜을 그곳 선교부가 경영하는 병원에 입원시키고 정성을 다해 간호해 주었다. 이에 감동을 받은 서상륜은 퇴원을 한 후 같은 해인 1879년에 로스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4년 후 1883
년에는 김청송(金靑松)이 그 뒤를 이어 세례를 받아 이제 세례를 받은 젊은이는 모두 여섯 명으로 늘어났다. 이미 이들이 중심이 되어 한국인들의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어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1880년 존 로스의 동료 선교사 맥킨타이어는 한국인의 신앙공동체 형성에 대해 이렇게 보고했다.

“최근에 한국인들을 위한 저녁 집회를 조직했다. 그 모임은 우리 번역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 주관하는데 자기네들 방에서 최소한 8명이 모이고 있다. 나도 늘 참석하지만 듣기만 한다. 나는 한국어를 단지 번역 수단으로만 이용해서 문자로만 알았지 번역인들과 대화할 땐 중국어를 썼다. 그러나 이처럼 소외되고 있으니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어떤 어려움이 있든 적어도 한국어로 가르치고 설교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결심이다. <지금은> 이 일에 제외되어 있지만 가능한 한 빠른 시일 안에 이런 집회를 내 자신이 인도하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지난 10월까지 열두 달 동안 교육받은 한국인들은 30명이 넘는다.”고 하였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 한국인 신앙공동체를 이끌었던 지도자가 한국인이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한국인에 의한 한국교회가 이미 복음 전래 초기부터 실행에 옮겨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보다 더 크고 빼놓을 수 없는 공헌은 역시 성경 번역에 있다 하겠다.

초창기의 성경 번역 과정은 한국인 번역자들이 선교사들과 함께 한문 성경을 읽고 나서 그것을 한글로 번역하면 선교사는 그것을 다시 헬라 원문과 대조하여 될 수 있는 대로 헬라 원문에 가깝게 다듬는 방식이었다. 1879년 존 로스는 안식년으로 본국에 머무는 동안 서방세계에 한국선교의 중요성을 환기시켜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스코틀랜드 성서공회로부터 새로 번역될 한글 성경의 출판에 필요한 비용을 보조받을 약속을 받아내었다. 안식년을 마치고 중국으로 돌아온 로스는 1881년에 봉천에 인쇄소를 설치하여 중국인의 도움을 받아 한글로 된 첫 개신교 문서인‘예수셩교문답’과‘예수셩교요령’을 그해 10월에 인쇄했고, 이어 성경 인쇄에 들어가 1882년 3월에 누가복음을 처음 인쇄하고, 5월에는 요한복음을 발행했다.

한글을 전혀 모르는 중국인 식자공으로는 한글 성경전서를 완간할 수 없어 한국인 식자공을 구하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서간도 한인촌 출신 김청송이었다. 비록“그는 너무 둔하고 느려서 무슨 일이나 네 번 이상 가르쳐 주어야 비로소 깨달아 알았고 손이 너무 떠서 두 인쇄공이 3,000장을 인쇄하는 동안에 겨우 4페이지밖에 조판을 하지 못할”만큼 천성적으로 느렸지만“매우 성실한 사람이었고 또한 치밀한 성격의 사람”이었다. 그 치밀함 때문에 인쇄되어 나오는 복음서를 자세히 읽게 되었고, 그 결과 마침내 스스로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었던 것이다. 말씀으로 성경 번역 과정에 참여한 이들의 마음을 여신 하나님께서 다시 성경을 인쇄하는 과정에서 전혀 예기치 않게 말씀을 통해 한 영혼을 구원으로 인도하신 것이다.

누가복음 최종 원고가 완성되어 인쇄에 들어가려고 할 즈음 동지사 일행 중의 한 사람이 돌아가는 길에 봉천교회에 들렸다. 이때 로스와 맥킨타이어가 그 원고의 교정을 부탁해 그가 원고를 서울로 가지고 가서 교정을 완료한 후에 다른 동지사편에 그것을 돌려보냈다. 이 사실은 1890년 로스가 이때를 회고하면서 누가복음이 출판되기 전 이미 동지사 일행에 의해 “번역원고가 한국의 수도에서 교정되었다.”고 밝히면서 알려졌다.

“심지어 누가복음이 출판되기 전 번역 원고가 해외 서울의 수도에서 수정되었으며, 이는 너무 많은 흥미를 자아내 한국의 왕이 중국의 황제에게 바칠 조공을 나르는 동지사에 딸려 이따금씩 중국에 오는 한 수행원이 이곳의 성경 번역 사업을 보기위해 들렀다. 이들의 방문은 점차 더욱 잦아졌고,그 젊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은 느리기 한이 없었던 그 식자공(김청송)과는
정확히 정반대 모델이었다. 그는 손놀림이 민첩했고, 눈치가 빨랐으며, 말과 사고와 행동이 영특했다. 그는 식자공으로 종사했으며,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그가 배운 지식을 가지고 더 잘 적응하리라고 여겨지는 한 사역을 시작하기 위해 자유를 얻었다. 몇 백 권의 복음서와 훨씬 더 많은 전도지를 가지고 그는 봉천에서 정 동쪽으로 약 4백 마일 떨어진 자신의 마을로 갔다. 그는 그 여행에 2주일이 걸렸고, 반년 만에 돌아와 보고하기를 그 책들을 팔았으며, 깊은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그것들을 읽었고, 그 중에 몇 사람은 내가(로스) 그들에게 세례를 주러 오기를 원했다고 했다.”

처음에 로스는 와서 세례를 달라는 말을 반신반의해 주목하지는 않았으나 그는 더 많은 책을 공급받고 다른 마을로 가 반년 후 돌아와서는 정확히 같은 이야기를 반복했다. 이처럼 전혀 예기치 않은 사건과 사람들을 통해 성경 번역 사업은 더욱 가속화되었고, 출판 후에도 성경 보급은 놀랍게 진행되었다. 우리는 이를 통해 성경 저자들로 하여금 오류 없이 기록하게 하신 성령께서 한글 성경의 번역과 보급에도 개입하시고 인도하셨음을 발견한다.

존 로스와 맥킨타이어가 번역에 사용한 성경은 중국어 성경 문리, 헬라어 성경, KJV, ERV(English Revised Version) 등 네 종류의 성경이었다. 당시 번역이 진행된 곳이 만주 우장이었고, 이미 오래 전에 한문 성경이 출판되어 사용되었기 때문에 한문 성경을 주된 저본으로 사용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존 로스와 맥킨타이어는 번역의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중국어 성경 외에 헬라어 성경과 앞서 언급한 두 권의 영어 성경을 사용했다. 한국인 조력자들이 한문 성경을 가지고 한글로 번역하면 로스와 맥킨타이어는 헬라어 성경 및 영어 성경과 대조하여 수정하고 헬라어 성경사전 및주석을 참고하여 어휘의 통일을 기한 후 수정된 원고를 헬라어 성경과 대조하여 읽어 가면서 마지막 수정 작업을 진행해 나갔다.

1882년 3월에 누가복음을 처음 인쇄하고, 5월에는 요한복음을 발행한 데 이어서 1883년에는 재 교정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합본이 3,000권, 재 교정된 요한복음이 5,000권 발행되었고, 1884년에는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이, 1885년에는 로마인서, 고린도전후서와 갈라디아서, 에베소서가 출판되었고,
1887년에는 신약 전권이 완간되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성경 번역을 위해서 공식적인 모임을 시작한 것이 1887년이었음을 생각할 때, 이미 존 로스의 신약성경이 완간되었다는 것은 대단히 앞선 일이었다.

로스와 맥킨타이어 역 한글 성경은 첫 작업치고는 여러 가지 면에서 볼 때 상당한 수작이었다. 비록 로스 역이 평안도 사투리가 많아 서울 지역에서 사용하는 데는 불편이 많았지만, 고유명사를 헬라어 원문대로 표기한 것이나 또한 당시 이응찬이나 백홍준이 모두 의주 출신으로 상업에 종사하던 몰락 양반 가문이어서 한학에 일가견을 갖고 있었고, 한학이 훨씬 더 쉽고 지배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존 로스와 맥킨타이어가 성경번역을 하는 데 한글과 한문을 혼용하지도 않고 아예 순 한글로 번역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한 가지 더 놀라운 사실은 성경 번역에 기여한 이들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권서인(勸書人)이 되어 자기의 고향으로 돌아와 자신들이 만든 성서를 보급하는 일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해서 한국에는 정식 선교사가 들어오기 이전에 한글로 성경이 번역되어 한국인에 의한 복음 전파가 놀랍게 진행되었다.


제1장 개신교 선교 이전의 한국의 정황

3. 개신교의 한국 전래를 위한 노력

2) 국외에서 복음을 받은 사람들에 의한 활동

(1) 권서인들의 활동

외국의 선교 과정을 보면 선교사가 피선교국에 들어가서 그 나라 글과 말을 배워가지고 성경을 번역했기 때문에 시간적으로 선교 개시 이후 여러 해가 지나서야 비로소 그 나라 성경을 갖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복음이 전래되기 이전에 이미 우리나라 청년들이 외국에
가서 복음을 받고 선교사와 합작하여 성경을 번역하였으며, 외국 선교사가 정식으로 한국에 입국하기 전에 이미 성경이 한국에 반입되었으며, 선교 이전에 한국인에 의해 교회가 먼저 세워지는, 기독교 역사상에 보기 드문 선례를 갖고 있다.

귀하게 만들어진 우리말 성경은 권서사업을 통해 한국에 반입되어 널리 보급되었다. 일반적으로 성서공회의 권서사업(성경 반포)의 목적은 사람에게 단순히 성경을 배달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올바로 사용하여 성경의 지식을 얻도록 하는데 있다. 이를 위해 이용한 부속기관은 성경 보급소, 권서인, 성경 교사 등이었다. 성경 보급소는 성경의 보관 창고, 판매 서점 및 설치된 지방의 전도 중심지 역할을 했다. 권서인(매서인)은 성경 반포의 주역이자, 전도인들이 들어가지 못하는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녔던 전도의 선구자였다. 우리나라의 경우 성경 교사 제도는 채용되지 않았던 것 같다.

① 한문서적의 도입

1879년 말, 2명의 개종자와 십여 명의 구도자가 의주에 거하게 되자, 맥킨타이어는 기독교서적을 요구하는 그들의 굶주린 상태를 외면할 수 없어 서적 운반을 자청하는 한 한국상인을 통해 과학서적을 포함한 한문 성경과 전도책자 한 꾸러미를 보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짐은 국경에서 압수되었고, 편지가 개봉되어 의주의 백홍준은 3개월간 투옥되었다. 천주교 신자가 아닌 까닭에 풀려나기는 했으나 거의 모든 재산을 잃은 백홍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자신을 위해 돌아가신 주를 위해서 핍박받는 것을 즐거워한다.”는 신앙고백을 맥킨타이어에게 하였다.

이 최초의 박해 사건으로 인해 그 후 2년간 수세 청원자가 없었지만,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 초기 개종자들의 신앙은 더욱 견고해져 갔으며, 1880년에는 30여 명이, 이듬해에는 100여 명의 한국인들이 우장의 맥킨타이어를 찾아가서 성경공부반에 참석, 일주일까지 머물다가 돌아갔다.

② 김청송의 서간도 한인촌 전도

1882년 3월, 로스는 일단 한글성경의 반포가 가능한 만주 한인촌을 대상으로 전도하기로 하고, 김청송을‘최로로 완성된 복음서를 가진 전도자’겸 최초의 권서인으로 삼았다. 그는 자신의 고향인 즙안현 이양자를 중심으로 수천 권의 복음서와 소책자를 팔았다. 그의 전도로 많은 세례 지원자가 한인 계곡에 생기게 되었다. 많은 결신자를 얻게 된 김청송은 심양(瀋陽: 봉천)으로 돌아와 로스 목사에게 즙안 전도 결과를 보고하고, 즙안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어주는 것이 좋겠다고 간청했다. 1884년 여름 어느 날, 김청송으로부터 성경을 받아 읽고 은혜를 받은 청년들이 기독교의 진리를 더욱 더 잘 알기 위해 봉천까지 떼를 지어 왔다. 이들 중의 더러는
본국에서 임오군란 때 변경으로 좌천된 고급 군인들이 즙안현으로 망명해 온 이들이었다. 그해 가을에 로스 목사는 웹스터(Webster) 목사와 함께 즙안에 가서 75인에게 세례를 주었고, 다음해 다시 25인에게 세례를 주어 100여 명의 세례 교인이 생긴 큰 교회로 발전되었다.

③ 미 제본(未製本) 복음서의 밀반입

만주에서는 성경을 반포하는 것이 가능하였으나, 당시에 조선은 외국종교 서적의 유입을 엄금하는지라, 어떻게 이 신간된 복음을 조선에 수입할까 하는 것이 큰 문제가 되었다. 당시 의주 사람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성경 번역이 진행되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한글)성경에 대한 강렬한 요구가 있었고, 또한 백홍준 등의 전도 활동이 잘 수용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개종자들과 그의 친구들이 무보수로 성경을 전달하는 일을 자청하였고, 별 사고 없이 수백 권의 복음서가 의주로 흘러들어갔다.

그러나 로스로부터 몇 십 권의 복음서와 기독교 서적을 가져가던 한 개종자가 사고를 당해 투옥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성경 반입에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 없었고, 한 가지 묘안을 찾아내게 되었는데, 그것이 미 제본 된 복음서 낱장을 밀반입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미 제본 된 복음서 낱장이 ‘편견과 두려움이 세워 놓은 장벽’을 넘어, 창문 창호지로 장식됨으로써 집을 드나드는 자들에게 읽히게 되었는데, 성경 종이가 한지였기에 구멍 난 곳의 문종이로 적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기실 그 복음서 낱장은 공허한 조선인의 가슴에 풀칠되어 붙여지기 시작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