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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3) 1. 서양종교 및 문화와의 접촉

好學 2009. 9. 6. 22:20

한국교회사(3) 1. 서양종교 및 문화와의 접촉

1. 서양종교 및 문화와의 접촉

2) 아랍문명을 통한 세계와의 첫 접촉

한국이 최초로 유럽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루브루크가 한국을 소개한 것보다 4세기나 앞선 9세기경이었다. 윌리엄 엘리어트 그리피스(William Elliot Griffis)에 따르면“서양 문헌에 처음으로 한국에 대한 언급이 나타난 것은 9세기 아랍의 지리학자 이븐 쿠르드지바(Ibn Khurdhibah, 820-912)의 작품, ‘제도로 및 제왕국지’(Book of Roads and Provinces) 에서이다.
당시 아랍은 거대한 민족을 형성하여 아랍과 중국 두 제국이 국경을 맞대고 접촉하고 있었고, 한국은 중국을 통해 아랍 상인 및 문화와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아랍 제국과의 활발한 교류는 동·서 문명을 잇는 가교가 되었고, 자연히 한국이 이들에 의해 서방 세계에 소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아랍 지리학자, 이븐 쿠르드지바가 한국을 처음으로 소개한 것은 그와 같은 역사적 배경 속에서 이루어졌다.
아랍의 지리학자 이븐 쿠르드지바의 작품, ‘제도로 및 제왕국지’에 소개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중국의 다른 쪽에 놓여 있는 것은 알려지지 않은 나라이다.

그러나 높은 산들이 조밀하게 간도(Kantu, 산동성)를 가로지르고 있다. 이 산들은 신라(Sila)에 걸쳐 놓여 있는데, 신라는 금이 풍부하다. 이 나라를 방문한 회교도들은 이 같은 이점을 경험하고는 여기에 정착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인삼, 녹용, 용설란(aloes), 장뇌(camphor), 못, 안장(saddles), 자기, 공단(satin), 계피(zimmit), 생강(galauga)을 수입했다.

쿠르드지바 이후 아랍세계의 문헌에는 신라가 자주 등장한다.
신라에 대한 소개는 10세기의 아랍 사학자이며 지리학자인 알 마스오디(al-Masoudi, -965)의 세계 역사서‘황금초원과 보석광’에도 나타난다.

“바다를 따라 중국 다음에는 신라국과 그에 속한 도서를 제외하고는 알려졌거나 기술된 왕국이란 없다. 그곳(신라국)에 간 이라크 사람이나 다른 나라 사람은 공기가 맑고 물이 좋고 토지가 비옥하며 또 자원이 풍부하고 보석이 일품이기 때문에 극히 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 후 중세 아랍 지리학의 거장인 모로코의 알 이드리시가 그린 세계지도에 신라가 자리한 사실이 나타난다. 그는 전래의 지리 지식을 집대성하여 지은‘천애횡단 갈망자의 산책’(1154년)이란 책 속에 한 장의 세계지도와 70장의 지역세분도를 그려 넣었다. 그 제1지역도 제10세분도에 5개 섬으로 구성된 신라가 명기되어져 있는데, 그 지도의 후미에 신라에서는 금이 흔해서 개의 쇠사슬까지도 금으로 만든다는 기술이 곁들여져 있다. 이 지도는 유럽의 세계지도에 처음으로 한국이 등장한 것으로 알려진 스페인의 벨호 세계지도(1562년 제작)보다 무려 408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이 아랍 지도야말로 한국 이름이 적힌 세계지도로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짐작된다.

3) 루브루크와 몽고를 통한 가톨릭과의 접촉

몽고가 세계 제패의 여세를 몰아 근동 중동의 회교도 국가들을 침공해 세력을 떨치면서“서구의 기독교는 오히려 몽고와의 제협을 바라게 되었고, 또 거기에 대한 선교의 가능성까지 찾아 타진하게 되었다. ”십여 차례 십자군전쟁을 통해 수많은 대가를 치르면서도 눈에 띄는 결과 하나 얻지 못한 상황에서, 그렇게 난공불락의 중동의 회교국들이 징기스칸의 말발굽 아래 힘없이 무너지는 것을 목도하면서 서구의 기독교는 징기스칸을 단지 한 민족의 통치자라는 차원을 넘어 신의 섭리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교황은 한편으로는 고마움의 표시로 다른 한편으로는 차제에 선교의 가능성을 모색하려는 일환으로 성지 팔레스타인을 점령하여 성지 순례의 자유를 획득해 준 몽고와 징기스칸에게 사절단을 파송하기에 이르렀다.
가톨릭의 이러한 정책을 수행하기 위해 교황의 전권대사로 프란체스코회의 카르피니(Giovanni da Piandi Carpini, 1182-1252)가 선출되어 1246년 7월 22일 몽고의 수도 카라코룸(和林)에 도착하였다. 마침 그때가 쿠유크(Kuyuk)가 정종으로 즉위할 무렵이어서 그 대관식에 참석, 교황의 친서를 전달했고 정종의 우호적인 내용의 친서를 받고 1247년 가을에 유럽으로 귀환하였다.

1253년에는 다른 프란체스코회 수도사 루브루크(William de Ruburck)가 동료 크레모나(Bartolomeo da Cremona) 와 함께 카라코룸을 방문하였다. 이들은 프랑스 왕 루이 9세(Louis Ⅸ)의 사절들로 징기스칸의 증손 사르탁(Sartach)이 기독교인(네스토리우스파)이란 사실을 소문으로 전해 듣고 그와 협력하여 이집트를 공략할 정치적인 목적에서 파송된 인물들이었다. 카라코룸에 도착하여 사르탁을 만났으나 그가 기독교인이 아님을 알고 실망했
으며 종교적인 토론을 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한 채 헌종의 친서를 받아 1254년 돌아오고 말았다. 루브루크는 귀환한 후 몽고에서 체험한 것을 기록으로 남겼는데 몽고인들 사이에 퍼져 있던 네스토리우스파 신앙의 현황과 이때 유럽에서 포로로 잡혀 온 기독교인들의 실태를 소개하였다. 이때 그는 압록강 부근까지 여행하였으며 고려를‘카울레’(Caulej)로 표기하여 우리나라를 최초로 서양에 소개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루브루크가 한국을 처음으로 유럽에 소개한 사람은 아니다.
루브루크가 13세기에 한국을 서양에 소개하기 4세기 전 아랍 지리학자, 이븐 쿠르드지바가 신라를 서양에 소개한 것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4) 임진왜란을 통한 천주교와의 접촉

16세기 후반 유럽 열국이 종교개혁으로 심각한 종교적 갈등을 겪고 있는 동안 성격은 다르지만 한반도는 전에 없는 도전과 위기를 만나고 있었다. 1592년에 발생한 임진왜란이 바로 그것이다.
프로테스탄트의 종교개혁운동에 대한 반작용으로 로마 가톨릭교회는 내적으로는 자체 개혁을 목적하고, 외적으로는 선교를 통해 실추된 로마 가톨릭교회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일환으로 예수회(Jesuits)라는 선교단체를 세웠다. 예수회는 스페인 출신의 로욜라(Ignatius Loyola, 1491-1556)와 사비에르(Francis Xavier, 1506-1552)에 의해 1534년 프랑스 파리에서 창설되었다. 예수회의 동양선교는 설립자의 한 사람인 사비에르의 직접 참여로 시작되었다.

사비에르는 1541년 포르투갈 국왕의 지원을 받으며 인도 고아(Goa)에 진출했으며, 1549년 8월 15일에 토레스(Come de Torres)신부, 페르난데스(Joas Fernandes) 수사, 안지로와 함께 일본의 가고시마에 도착해 일본 선교의 장을 열었다. 일본에서는 천주교인을‘기리시단’(吉利支丹)으로 불렀다. 1552년 일본을 떠나기 전까지 불과 2년 3개월 만에 사비에르는 1천 5백 명의 개종자를 얻었는데, 후대 이들은 일본 선교의 초석이 되었다. 일본의 예수회 천주교세는 그 후 놀랍게 증가하여 1570년에 약 3만 명, 1579년 10만 명, 1581년 15만 명, 1587년에는 20만 명에 이르렀다.

일본의 예수회 천주교세가 이처럼 급증하게 된 것은 천주교가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의 국가적인 지원을 받고 있었으므로 무역에 관심을 갖게 된 일본의 다이묘(大名)들이 천주교를 받아들이게 되어, 교토와 규슈의 명문들이 기리시단으로 개종하게 되었으며, 기리시단 다이묘들의 출현은 그들이 지배하고 있는 주민들의 개종으로 이어져 기리시단의 수가 급증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놀라운 교세를 가진 예수회가 수난을 겪기 시작했는데, 1582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세상을 떠난 뒤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정권을 장악하면서부터이다. 포르투갈이라는 강대국의 지원을 받고 있는 예수회 세력의 급속한 신장은 정치적 안정이 구축되지 않은 토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정치적인 위협세력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집권 7년만에 예수회에 대한 금교령을 발표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강력한 통일국가를 지향하는 한편 내적불안 요인들을 극복하는 방법의 하나로 조선에 대한 침략전쟁을 일으켰으니 그것이 1592년에 시작되어 1598년에 끝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다. 이 전쟁 중에 우리나라는 처음으로 천주교와 관련을 맺게 된다. 그것은 두 가지 형태로 이루어졌는데, 첫째는 전쟁 중에 서양인 성직자가 최초로 이 땅에 발을 내딛게 된 것이고, 둘째는 전쟁 중에 잡혀 간 많은 한국인 포로 중에 상당수의 천주교 개종자가 나왔으며 그들 가운데는 순교에 이른 사람도 있다.

조선 침략의 선봉장의 한 사람인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유명한 기리시단 다이묘 중의 하나였다. 불과 20여일 만에 서울을 함락시켰고 평양까지 진출했던 고니시 부대는 조선 의병들의 저항을 받아 후퇴, 경상도 남단의 웅천(熊川)을 거점으로 삼아 교두보를 확보하고 있었다. 전쟁이 오래 계속되자 고니시는 본국에 있는 예수회 신부들에게 종군 사제를 한 사람 보내달라는 서한을 띄웠다. 휘하 장병들의 사기 진작을 위한 것이었다. 이 요청에 따라 1593년 12월 27일 스페인 출신의 세스페데스(Gregorio de Cespedes) 신부와 일본인 수사 후칸 에이온(Foucan Eion)이 파견되어 1년 가까이 머물면서 은밀하게 천주교 신자 병사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세례를 베풀었고 1595년 초에 일본으로 돌아갔다.

1년 동안 세스페데스는 일본군인들을 상대로 선교 활동을 했을 뿐 조선인들과의 직접적인 접촉은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의 입국은“조선인에게 전도할 목적으로 방한한 선교사는 아니었지만, 서양 사람으로서 더구나 크리스천이며 전도자인 그가 한반도의 땅을 밟았다는 점에서 역사상 특별히 기록할 만한 가치가”있다 하겠다.

임진왜란 때 일본에 포로로 잡혀 갔던 한국인은 약 5만 명으로 추정되는데, 그 대부분은 일본 가정의 노비가 되거나 노예로 팔려, 멀리는 마카오, 마닐라, 인도 및 이태리에까지 끌려갔다. 1597년 6월에 일본에 상륙했던 프란시스코 카를레티(Francisco Carletti) 수사는 5명의 한국인 노예를 사서 세례를 주고 인도 고아로 데려가 자유인으로 풀어주었다. 그 중의 안토니오 꼬레아(Antonio Corea)는 수사와 함께 프로렌스까지 가서 공부한 후에 로마에서 살았다고 한다. 포로된 한국인 중에서 천주교로 개종한 자가 7천여 명이나 나왔다. 포로들의 집단 거주지에서는 2천여 명이 세례를 받았다고 하며, 그러는 중에 한문으로 된 교리서가 한글로 번역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뒷날 포로 중의 일부가 귀국하였을 때 그 일부는 한국에 돌아와서도 은밀히 신앙생활을 유지하였던 것 같다. 일본에 체류한 한국 신자들 중에는 권(權) 빈센트같이 신학 교육을 받은 사람도 있었고, 1605-1637년에 걸친 도쿠가와(德川) 막부의 천주교박해 시대에는 여기에 굴하지 않고
희생된 이들도 많았다. 이 중에는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가 도쿠가와 궁전 안에서 궁녀로 있으면서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가 고오즈시마란 조그만 섬에 유배당해 그곳에서 절명한 오타 쥴리아(Ota Julia)를 비롯하여 6명의 증거자들이 일본 천주교회사에 기록되고 있으며, 최근 일본인 성인 26인
중 3인이 한국인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으나 확인되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