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歷史,宗敎,哲學/(역사)韓國敎會史

천수교 신앙의 수용 [보존자료]

好學 2009. 9. 6. 22:16

천수교 신앙의 수용

천주교는 명대(明代)에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利瑪竇) 등 예수회 선교사들의 활동으로 중국사회에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당시 조선사회는 양란을 겪으며 사회변화에 대한 자각의 움직움 속에서 천주교를 비롯한 서양문물을 접하게 되었다. 특히 연행사절단에 의해 서구 과학지식과 문물 수용이 이루어지면서 천주교가 조선사회에 전래되었다. 초기 천주교는 ‘신앙적 체계’보다는 ‘학문적 관심’, 즉 서학(西學)의 차원에서 조선사회에 수용되었다. 하지만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天主實義) 등 천주교 관련서적이 전해지면서 점차 종교로서 신봉되기 시작하여 급속하게 확산되어 갔다. 
이러한 천주교의 확산은 전통적 유교사회를 동요시켰으며, 성리학(性理學)을 신봉하는 보수세력으로부터 갖은 박해를 당하였다. 1785년 ‘을사추조적발(乙巳秋曹摘發) 사건’을 계기로 시작된 박해는 1791년 신해박해(辛亥迫害), 1839년 기해사옥(己亥邪獄),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를 거치면서 수많은 순교자를 낳았고 조선 천주교는 혹독한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적 열정과 고귀한 희생은 오히려 천주교의 확산과 성장을 가져왔다. 초기 천주교회를 주도했던 양반층과 지식인층의 역할은 점차 중하층의 일반 교인들이 대신하게 되었으며, 박해를 피해 산간벽지로 피신한 신자들을 중심으로 교우촌(敎友村)이 형성되면서 천주교 신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결과를 낳았다



마테오리치와 서광계


천진암터(서학교리연구)

    천주교 초기미사 모습(명도회)


배론신학당


순교선교사(샤스땅,모방,앙베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