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歷史,宗敎,哲學/(역사)韓國敎會史

한국교회사(4)제1장 개신교 선교 이전의 한국의 정황

好學 2009. 9. 6. 22:18

한국교회사(4)제1장 개신교 선교 이전의 한국의 정황


1. 서양종교 및 문화와의 접촉

5) 한국 땅을 밟았던 외국인 평신도들을 통한 개신교와의 접촉

1595년경, 세스페데스가 일본으로 돌아간 후에도 간헐적이지만 서양인들이 국내에 입국한 일이 있었다. 이 시기 조선에 입국한 서양인들로는 1627년 경주 앞바다에서 표류해 입국한 벨트브레(Jan Janse Weltevree, 朴燕), 1653년 제주도에 표착한 헨드릭 하멜(Hendrick Hamel), 1816년 조선의 서해
안을 탐사하기 위해 군함을 이끌고 입국한 영국 해군대령 머리 맥스웰(Murray Maxwell)과 바실 홀(Basil Hall)을 들 수 있다.

(1) 박연 일행의 한국 표착

박연으로 우리에게 더 잘 알려진 벨트브레(Jan Janse Weltevree)는 화란 리프(Riip) 지방 사람으로 1627년 무역선 우베르케르크(Ouwerkerck)에 올라 일본으로 교역 차 항해하던 중 심한 폭풍우를 만나 표류하다가 일행 세 사람과 함께 경주 앞바다에 표착하였다. 박연은 같은 동향 출신인 디렉 헤리
스베르쓰(Direk Gijsbertz)와 암스텔담 출신 얀 피테르츠(Jean Pieterz)와 함께 물을 구하기 위해 단정(短艇)을 타고 육지에 상륙했다가 그곳 주민에 의해 사로잡혔다.

박연 일행은 경주로 압송되어 동래부사 앞에 끌려가게 되자 일본 나가사키로 보내 달라고 애원하였다. 이에 동래부사는 이들을 나가사키로 보내기 위해 동래의 왜관(倭館)으로 보냈으나 왜관이 저들을 받지 아니하고 되돌려 보내므로 저들은 부산에 4, 5년간 억류되어 있다가 서울로 압송되었다. 서울로 압송된 일행은 일본으로 보내 줄 것을 요청했고, 인조 대왕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다시 간청했으나 왕이 이를 거절했다. 저들은 심문을 받고 얼마 후에는 군대(訓練都監)에 편입되어 전투에도 참전했다. 박연은 3인 중에서 그 용모, 지식, 인격, 기술이 출중하여 호겸과 함께 훈련대장 구인후 휘하에서 한·왜군의 영솔자가 되었다. 세 사람이 모두 인조 14년 병자호란에
참전했으나 박연만 살아남고 두 사람은 그 전쟁에서 사망했다. 이 전쟁에서 공을 인정받은 벨트브레는 얼마 후 조선 여인과 결혼이 허락되어 1남 1녀까지 두었다.

그가 과연 개신교도였는지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1618년 화란은 개신교 국가로 세계에 명성을 떨치며 세계 개신교를 주도하는 국가 중 하나였기 때문에 박연 역시 독실한 개신교도였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김양선은 정재윤의 한거만록(閑居漫錄) 제2권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벨트브레는 일개 상인이었고 전도자가 아니었으므로 기독교를 전파하는 일을 전문적으로 하지 않았으나 기독신자로서의 행위와 언사를 십분 이행하여 접하는 사람들에게 큰 감화를 주었다. 아무리 신실한 신자라도 환경이 바뀌어지면 신앙에 변화가 오기 쉽다. 더구나 외국에 가서 기독교인이 전혀 없는 곳에서 신앙의 절조를 지킨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데 벨트브레는 일평생 신앙을 지켜서 생면부지의 사람들로 그를 훌륭한 종교인으로 추존케 하였으니 그의 신앙은 실로 놀랄 만하다. 그는 조선에 들어온 최초의 신교 신자였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하였다.

정재윤이 한거만록에서 지적한바 박연이“매양 선악화복(善惡禍福)의 이치를 말하고 툭하면 하늘이 갚는다고 말하니 그 말이 도(道) 있는 자의 유(類)하더라.”는 사실은 성해웅의 연경제전집과 탐라기년 제2권에서도 그대로 나타나 있는 것으로 볼 때 박연을 보는 주변의 인물들은 그가 하늘의 신을 믿고 있는 것으로 평가하였음을 알 수 있다.

박연은 조선에 정착, 자신처럼 배의 난파로 표착하는 외국인들의 통역을 담당하는 통역관으로 일하면서 자신의 생애를 이국 조선에서 보냈으며, 그의 후손들도 모두 훈련도감에 소속되어 군인일가를 이루었다.

(2) 하멜 일행의 한국 표착

1653년 1월 10일 본국을 떠난 화란 상인 하멜 일행을 실은 네덜란드 무역선 스패로우 호오크(Sparrow Hawk) 호는 자바의 수도 바타비아와 대만을 거쳐 일본을 향하여 가던 중 폭풍을 만나 표류하다가 8월 15일 제주도 남해 앞바다 화순포에 표착하였다. 저들이 육지를 발견하고 안도감을 가지는 순간 거대한 파도가 배를 강타하면서 세 겹의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닥치고 그와 함께 배가 쪼개져 선창에 누워 있던 사람들이 익사당했다. 갑판 위에 있던 몇 사람들은 바다로 뛰어 내렸고 남은 사람은 물결에 휩쓸려 바다로 떠내려갔다. 이렇게 해서 탑승원 64명 중 선장 에흐베르츠(Egbertz)를 포함한 28명이 익사하고 36명이 가까스로 물에서 기어올라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 8월 18일 하멜 일행은 현감 권극중에 의해 생포되었고, 역관을 불러 문정을 하려 했으나 언어가 통하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했다. 제주현감은 하멜 일행이 난파된 배에서 마음대로 물건을 건져 낼 수 있도록 자유를 주었으며, 여러 날 동안 파선된 배 속에 남아 있는 물건들을 건져 내게 하였다.
효종실록, 하멜의 표류기, 연경제전집에 의하면 하멜 일행이 건져 낸 물품들은 식료, 의료, 적포도주, 서적, 양기, 천리경, 조총, 망원경에 이르기까지 종류가 다양했고, 그 양도 상당했다고 한다.

1653년 8월 21일 하멜 일행은 제주 감영에 압송되어 제주 목사 이원진의 심문을 받았다. 하멜 일행은 자신들이 화란 사람으로 일본으로 가려다 사고를 당했다고 말하고, 자신들을 일본으로 보내 줄 것을 간청했으나 목사는 국왕의 지시에 따르겠다며 정확한 답을 보류했다. 하멜 표류 소식이 조정에 알려져 문정관과 역관 벨트브레가 제주도에 도착한 것은 두 달이 지난 10월 29일이었다. 박연이 화란어로 하멜 일행에게 국적과 여행 목적을 물었고, 서로 같은 화란인인 것을 확인한 하멜 일행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박연에게 자신들을 일본으로 돌려보내 줄 것을 간청했다. 박연은 외국인이 내지에 들어오면 돌려보내지 않는다는 사실, 일본 역시 바다 선상에서만 외
국인과의 교역이 허용된다는 사실, 더구나 기독교인과는 교역조차 금하고 있어 전에 조선에 들어온 기독교인들을 대마도로 보냈는데 다 죽였다는 사실을 들어 일본으로 간다고 해서 생명을 보장받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고, 자신과 함께 서울에 올라가 훈련도감에 예속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하멜 일행은 비록 일본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여
전했지만, 박연의 조언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1654년 5월 말 서울로 압송된 하멜 일행은 효종을 만나 자신들을 일본으로 보내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러나 효종은 입국한 외국인을 도로 국외로 내어보내는 것은 국법에 어긋나므로 보내주지는 못하지만 왕으로서 이들을 관대하게 대우하였다. 또한 당시 상선에 승선한 대부분의 화란 사람들이 총포에 능숙한 이들이어서 전투 훈련관으로 적합하였기 때문에 하멜 일행은 훈련도감에 편입되어 훈련도감 대장 이완 휘하에서 박연의 지도를 받으며 군인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전 세계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화란은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해양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박연을 통해 부분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한 화란의 우수한 과학문명이 조선에 접목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항해술은 모든 과학지식의 집약을 요구하는 분야였기 때문에 이들이
갖고 있는 서양 과학에 대한 기술은 대단했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 생활에 잘 적응을 한 박연과는 다르게 하멜 일행은 여러 차례 탈출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결국 1657년 전라도 작천병영으로 유배되어 10년 동안 감금생활을 하게 되었다. 10년의 감금생활 동안 하멜 일행은 선관을 만나 행동의 자유가 주어졌을 때에는 조선의 문화를 주의 깊게 관찰하고, 산사를 돌면서 수도승과 환담을 나누며 조선 종교와 문화에 대한 많은 식견들을 수집하여 기록으로 남길 수 있었으며, 이 기록들은 후에 하멜표류기를 기술하는 데 상당히 훌륭한 자료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작천병영에 유배되어 살던 10년의 대부분은“악관의 학대와 흉년과 기근이 그들을 한없이 괴롭혔으며”이로 인한 식량부족으로“한 때는 구걸행각에 나선 일도 있었다.”유배생활 7년 만에 33인(탈출 시도로 사망한 2명을 포함하여 3명이 사망한 상태임) 중 11명이 세상을 떠난 것은 이들의 생활이 얼마나 힘들었는가를 단적으로 말해 준다. 흉년과 기근으로 인한 식량 문제가 극에 달하자 그들을 책임 맡은 감사는 1663년 3월 이들의 식량난 해결을 위해 일행을 여수 좌수영에 12인, 순천에 5인, 그리고 남원에 5인 등 세 곳으로 분산 배치시켰다.

오랫동안 조선을 떠날 기회를 엿보고 있던 하멜 일행은 전라도 여수의 바닷가로 보내지자 탈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1664년부터 3년간 나무를 해다 파는 등 온갖 노력을 다해 이들은 작은 배 한 척을 구입하여 탈출 준비를 하였으며, 1666년 9월 4일 여수 좌수영에 유배되어 있는 12명 중 하멜을 비롯한 5명과 다른 곳에서 방문 온 2명, 그리고 순천에서 불러온 조선인 뱃사공 등 도합 8명은 한밤을 이용해 여수를 떠나 일본 이쓰시마(五島)에 도착하였으며, 그곳 관리를 만나 자신들이 화란인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나가사기(長崎) 화란상관으로 보내 줄 것을 간청하였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668년 7월 20일, 일행은 화란 상관의 주선으로 고국 암스텔
담에 도착했다. 또한 조선에 남아 있던 생존자 8명도 일본 대마도주의 요청에 따라 1668년 4월 12일 대마도로 보내어졌고, 고국 화란으로 귀환하게 되었다.

하멜은 자신의 표류기에서 살아 돌아올 수 있게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약간의 풍랑을 만난 후 이들 배가 1668년 7월 20일 암스텔담에 도착했다. 살아 돌아온 우리는 13년 28일에 걸친 긴 포로생활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였으며, 아울러 뒤에 떨어져 있는 우리의 불쌍한 동료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크신 자비를 베풀어 주실 것을 간절히 간구했다.”

하멜은 그의 표류기에서 고난과 역경 가운데서도 시종일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잃지 않고 지내 왔음을 밝히고 있다. 고국으로 돌아간 하멜은 자신의 14년간의 조선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표류기를 출간했다. 이 책에서 하멜은 그 동안 경험한 조선의 지리, 풍토, 산물 등 조선의 물정과 조선인의 기
질, 풍습, 군사, 법속, 정치, 종교, 사회관습에 이르기까지 조선에 관한 모든 지식을 소상히 기록했다. 하멜의 표류기는 유럽에서 일약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 책은 얼마 후 영어, 프랑스어 등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어 유럽 전역에 유포되면서 유럽인들에게 조선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시키는 기회가 되었다. 이 책은 은둔의 나라 조선을 세계에 널리 알리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출판 동기와는 달리 표류기는 조선선교와 동양선교에 관심을 가진 많은 선교 후보생들에게 유용한 조선입문서가 되었으며, 그리피스는 하멜의 표류기를 담아‘한국, 국내외’(Corea, Without and Within)라는 책을 출판하기도 했다. 1832년의 귀츨라프의 서해안 항해 및 선교와 1865년의 토마스 목사의 조선선교는 모두 하멜의 표류기에 힘입은 바컸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박연과 하멜은 개신교도였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조선과 접촉이 있었던 박연과 하멜이 개신교도였다는 점에서 조선과 개신교와의 접촉 역사는 청을 통한 천주교와의 접촉의 역사보다 앞선 것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