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文學/[참회록]Augustine

11권 [23~28]

好學 2009. 7. 26. 22:25


제11 권 창조의 말씀 - 23. 시간이란 무엇인가. 
 
나는 어떤 학자로부터 들었습니다.
'태양. 달. 별의 운행이 시간 그 자체이다.'
그러나 그 설에는 동의 할 수 없습니다.
왜 차라리 모든 물체의 운행이 시간이 아닙니까?
만약에 하늘의 광채가 운행을 멈추었는데도 
도공이 풀무를 움잊이고 있을 경우, 시간은 사라져 버리는 것일까요?
게다가 우리가 풀무의 회전을 측정하여 
'일정한 간격으로 움직이고 있다.'라든가
빨라졌다가 늦어졌다가 하는 경우에는 '어떤 회전은 길고 어떤 회전은 짧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시간에 의해서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경우에도 시간 안에서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또 우리의 말속에서 어떤 음절은 길고 어떤 음절은 짧은 것도
전자는 오랜 시간 동안 울리는데 후자는 짦은 시간 동안 울리기 때문이 아닐까요?
하나님이시여, 작은 일 속에 작은 일과 큰 일의 
공통되는 개념을 투시하는 힘을 인간에게 주십시오.
별이나 천체의 빛은 계절이나 날이나 해를 나타내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것은 분명합니다.
나도 그 보잘것없는 나무 바퀴의 회전이 하루라는 등의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학자의 입장에서도 
'그러니까 그것은 시간이 아니다' 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내가 알고자 하는 것은 시간의 힘과 본질입니다.
시간에 의해서 우리는 물체의 운동을 재고 
그 운동은 예컨데 그 운동의 두 배의 시간 동안 계속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나는 묻습니다.
하루란 단순히 태양이 지상에 있는 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ㅡ그런 의미에서는 낮과 밤은 별개의 것입니다.ㅡ
일출로부터 다음 일출에 걸치는 태양의 순환의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며
그런 것으로 우리는 '여러 날이 지나갔다.'고 하는데
그 경우 여러 날 속에는 그 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루는 태양의 운동과 일출로부터 다음 일출에 이르는
순환에 의해 완성됩니다만 내가 묻는 것은 이 사실입니다.
즉 그 운동 자체가 날인가, 그렇지 않으면 운동이 경과하는 동안 날인가,
그렇지 않으면 그 쌍방이 모두인가?
만약 태양의 운동 그 자체가 날이라고 한다면, 비록 
태양이 한 시간 동안에 운동을 끝마쳤다고 해도 역시 하루는 성립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운동이 경과하는 동안이 날이라고 한다면 일출로부터 다음 일출까지 
한시간 동안이라는 짧은 동안밖에 없는 경우에는 하루는 성립되지 않고 
하루가 완성되기 위해서는 태양이 지구의 둘레를 24회나 회전해야만 할 것입니다.
만약 양쪽 모두가 날이라면 한 시간 동안에 태양이 회전을 마칠 경우
그 운동은 하루라고 말할 수 없고,
또 만약 태양이 정지해서 그 동안에 태양이 아침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한 바퀴 회전하는데 필요로 하는 만큼의 시간이 경과했다 해도
하루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묻고 싶은 것은 
'저 날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엇인가'가 아니라,' '시간이란 무엇인가' 입니다.
그 시간에 의해 우리는 태양의 순환을 재고, 
만약 12시간이 지나는 동안에 순환을 끝냈다면 
태양은 평시의 반밖에 안되는 시간에 순환을 끝냈다고 말하며
그 두개의 시간을 비교하여 한쪽은 다른 쪽의 두 배라고 말할 것입니다.
게다가 이것은 태양이 일출로부터 다음 일출까지 되돌아 가는데
이때는 다른 경우의 두 배의 시간이 걸린 것과는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이러한 시간이 '무엇인가'가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나에게 '천체의 운동이 시간이다'라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사실 여호수아가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서 기도에 의해 태양을 멈추게 했을때
태양은 멈추었지만 시간은 여전히 흐르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렇게 때문에 전투를 하기에 충분한 시간 동안 전투는 진행되고
그 다음에 끝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간은 일종의 연장(延長)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정말로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요?
알고 있는 듯이 보일 뿐일까요.
오, 빛이여, 진리여,당신이 기르쳐 주시겠지요?

 



제11 권 창조의 말씀 - 24. 물체의 운동. 
 
누군가가 '시간이란 물체의 운동이다.'라고 할때
당신은 그것을 승인하라고 먕하시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물체도 오직 시간에 의해서 움직인다고 나는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물체의 운동은 자체가 시간이다.'라고 알고 있지는 않습니다.
당신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사실 물체가 움직이고 있을 때, 움직이기 시작해서부터 멈출 때까지
움직이는 동안을 시간에 의해서 잽니다.
언제부터 시작했는지를 모른다면 
또 계속 움직여서 언제 멈출지 모른다면 잴 수가 없습니다.
잴 수 있는 것은 그 운동을 보기 시작했을 때부터 
보기를 중단하기까지의 시간입니다.
오래 보고 있을 때에는 '긴 시간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며
'얼마나 긴가'를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얼마만큼'이라고 말 할 때에는 비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이것과 저것은 같은 크기이다.'라든가
'이것은 저것의 두 배'라든가, 또는 이와 비슷한 다른 표현을 하듯이 말입니다.
이에 반하여 운동하고 있는 물체나 회전 운동의 경우처럼 물체의 부분이 
여기서부터 저기로 가는 장소 사이를 정확하게 측정할 수가 있는 경우에는  
물체 또는 그부분의 어떤 장소로부터 다른 장소에 이르는 운동은
얼마만큼의 시간 동안 수행되었는가를 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물체의 운동과 그 운동이 지속되는 시간이
그것에 의해서 측정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이므로 양자중 어느쪽을
시간이라고 말해야 하는가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사실 물체는 어떤 경우 여러 가지의 방식으로 운동하고 
어떤 경우에는 정지합니다만 우리는 단순히 운동뿐만 아니라
정지까지도 재서 '움직인 시간만큼 정지하고 있다'라든가
'움직인 시간의 두 배, 또는 세 배 정지하고 있었다,'라든가
이와 비슷한 일, 즉 우리의 척도로 측정하고 
또는 흔히 말하듯이 '대강' 측정한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시간은 물체의 운동이 아닙니다.


 



제11 권 창조의 말씀 - 25.다시 하나님에게 원하다. 
 
주님이시여 당신에게 고백합니다.
나는 아직 시간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 또다시 고백합니다.
나는 이것들을 시간을 통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미 오랜 시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 오래란 시간의 여유가 길다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대체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시간이란 무엇인지 모르는데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어떻게 나타내면 좋은가를 알지 못하는 것일까요?
아, 나는 얼마나 어리석은 인간일까요?
자기가 무엇을 모르는지를 모르다니!
하나님이시여, 보십시오.
내가 당신 앞에서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나의 마음은 내가 이야기하는 그대로 입니다.
주여, 나의 하나님이시여,
나의 등불을 밝혀 주십시오.
나의 암흑을 비춰 주십시오.


 



제11 권 창조의 말씀 - 26. 우리는 시간을 어떻게 재는가 
 
나의 영혼은 당신에게 '나는 시간을 잰다'고 고백합니다.
그 고백에 거짓이 있을까요?
주여, 확실히 나는 잽니다.
나의 하나님이시여 그런데도 나는 무엇을 재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나는 물체의 운동을 시간에 의해서 잽니다.
마찬가지로 시간 그 자체도 재는 것이 아닐까요?
사실 물체의 운동이 얼마나 계속되는가,
여기서 저기까지 가는데 얼마나 걸리는가 하는 것을 
시간을 재지 않고 알 수가 있을까요?
물체는 시간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나는 시간 그자체를 재는 것일까요?
짧은 시간으로 긴 시간을 재는 것일까요?
마치 팔의 길이로 재목의 길이를 재듯 말입니다.
사실 모두들 알고 있듯이 우리는 짧은 음절로 긴 음절을 재고 그 두 배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또한 시의 길이를 구절로 재고, 구절을 각운으로 재고,
긴 음절을 짧은 음절로 잽니다.
그러나 이것은 페이지 위에서 재는 경우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니고 음성이 발음되면서 지나가
'이 시는 길다' 많은 시구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 각운은 길다 많은 음절로 되어있기 때문에, 
이 음절은 길다,단음절의 두 배니까.' 따위를 말하는 경우를 뜻합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어떤 확정된 시간의 척도를 포착할 수은 없습니다.
짧은 시구라도 길게 발음될 때에는 긴 시구를 압축해서 발음할 경우 보다 
더 오랜 동안에 걸쳐서 울리는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위와 같은 이유에서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시간이란 연장이다 그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그러면 대체 어떤 것의 연장일까요? 나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만약 정신 그 자체의 연장이 아니라고 한다면 신기합니다.
사실 하나님이여,당신께 묻고 싶습니다.
대체 나는 무엇을 재고서 어떤 경우에는 막연한 표정으로
'이 시간은 저 시간 보다 길다.'고 말하고, 어떤 경우에는 명확한 표현으로
'이 시간은 저 시간의 두 배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요?
나는 시간을 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미래를 재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아직 없기 때문입니다.
현재를 재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어떤 폭에 걸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과거를 재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그러면 대체 나는 무엇을 재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지나가고 있는 시간'이며 '지나가 버린 시간'이 아닌 것 같습니다.
분명히 나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제11 권 창조의 말씀 -27. 정신 속에 존속하는 시간. 
 
나의 영혼이여 깨어나라. 주의력을 집중하라.
하나님은 우리를 돕는 분이시다.
우리를 만든 것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진리가 어렴풋하게 나타나나기 시작한 곳으로 주의를 돌려라.
어떻습니까? 
예를 들어서 어떤 소리가 물체로부터 울려나와 계속 울리다가 방금 그쳤습니다.
이제는 조용합니다. 소리는 이미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 소리는 울리기 전에는 미래였습니다. 그리고 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때 소리는 아직 없었으니 말입니다.
지금도 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잴 수 있었던 것은 울릴 때입니다.
왜냐하면 그때 잴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멎어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것은 가고, 사라져 가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잴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사실 그것이 지나가면서 어떤 시간의 공간으로 뻗고 있었습니다.
그 시간의 간격에 의해 잴 수가 있었습니다.
현재에는 어떤 시간의 간격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시간을 측정할 수 있는 때는 지나치고 있는 순간이라고 한다면
자,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다른 소리가 울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것은 연속적으로 아직도 울리고 있습니다. 울리는 동안에 잽시다.
울리고 나면 잴 수 있는 것은 이미 사라져 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 정확하게 재보고 길이가 어느 정도나 되는지 말해 봅시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울리고 있습니다.
잴 수 있는 것은 울리기 시작한 때부터 멎는 때까지입니다.
사실 우리가 재는 것은 어떤 시초로부터 종말까지의 간격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아직 끝나지 않은 소리를 재어 길다든가 짧다든가 말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소리와 비슷하다던가, 어떤 소리의 두 배, 세 배,
그 밖에 몇 배라는 등의 말을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소리가 멈추었을 때에는 이미 그것은 없겠지요.
그러면 어떻게 그것을 잴 수 있을까요?
게다가 우리는 시간을 잽니다.
그것은 아직 없는 시간은 아니고, 이미 사라진 시간도 아니고,
퍼질 사이조차 없는 시간도 아닙니다. 
또 끝이 없는 시간도 아닙니다.
즉 우리가 재는 것은 미래의 시간도, 과거의 시간도,
현재의 시간도, 지나가고 있는 시간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시간을 재는 것입니다.
'Deus Creator Omnium(만물을 내신 주여)'ㅡㅡ
이 시구는 여덟개의 단음절과 장음절을 번갈아 가며 사용하고 있습니다.
제1, 제3, 제5, 제7의 네 음절은 짧고,
네 개의 장음절, 제2, 제4, 제6, 제8음절이 1단위입니다.
나는 발음해 보고 이들 장음절의 하나하나는 
그 단음절의 하나하나에 비하여 두 배의 길이를 가지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또 명료한 감각으로 듣는 경우도 그대로입니다.
감각에 의해 확실한 것은 짧은 음절로 긴 음절을 측정하고
또 장음절을 두 배의 길이로 감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쪽이 다른 쪽 다음에 울릴 때 
짧은 것이 먼저이고 긴것이 나중이라고 한다면
단음절을 기억해 두었다가 장음절에 맞추어 재고
그것이 단음절의 두배의 길이에 해당된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장음절은 단음절이 끝난 후가 아니면 울릴 수가 없는데 말입니다.
그 장음절도 그것이 현재 있는 동안에 잴 수가 있을까요?
끝나지 않으면 측정할 수가 없을텐데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난다는 것은 과거가 된다는 뜻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나는 무엇을 재는 것일까요?
그것에 의해서 재는 단음절이 있는 곳은 어디일까요?
두 가지가 모두 울렸다가는 날아가고 이제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재고 훈련된 귀를 신뢰하는 동안에 있어서
'이 음절은 시간의 간격에 있어서 1의 길이이며 이 음절은 두 배의 길이이다.'
라는 확신을 가지고 대답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그 음절이 지나가서 끝나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재는 것은 이미 사라져 버린 음절 그 자체가 아니고
나의 기억 속에 오래도록 머물러 있는 그 무엇입니다.
나의 정신이여, 나는 너에 의해서 시간을 잰다.
제발 나를 혼란스럽게 방해하지 말아다오.
즉 그것은 네가 너 자신에 대해 
여러가지 감각적 인상의 떼를 지어 방해하지 말라는 뜻이다.
다시 한 번 말하고 싶다. 나는 너에 의해서 시간을 잰다.
지나가 버리는 것이 너의 속에 만드는 인상은 그것이 지나가 버린 후에도 남아 있다.
나는 현존하는 인상을 재는 것이지 그 인상을 낳은 지나간 것을 재는 것은 아니다.
시간을 측정할 때, 바로 그 인상을 나는 재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인상이 시간인지 내가 재는 것이 시간이 아닌지가 문제일 뿐이다.
그러면 우리가 침묵을 재고 그 침묵은 그 소리가 계속된 만큼의
시간을 계속했다고 말하는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마치 아직도 소리가 계속되는 양 사유를 긴장시켜서 
소리의 측정 쪽으로 뻗어 중간에 끼는 침묵의 간격에 관한 무엇인가를
시간의 길이로써 표현하려는 것은 아닐까요?
사실 우리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입술도 움직이지 않고 
마음속에서 노래나 시구나 어떤 이야기나 그 밖에 무엇이든 잴 수 있는
움직임을 계속하여 한쪽이 다른 한쪽에 대해 
시간의 길이라는 점에서 얼마만큼의 비율인가를 소리내어
말할 때와 마찬가지로 정확하게 언명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 누군가가 얼마간 긴 소리를 내는 데 얼마만큼의 길이로 하려고 
미리 생각하면서 정하는 경우는, 분명히 그 사람은
침묵 속에 정한 시간의 길이를 정신에 맡기어 그 소리를 내기 시작합니다.
그 소리는 울려서 먼저 정해진 종점에 이르러 그칩니다.
아니, 차라리 '그 소리는 울렸다.그리고 울릴 것이다.'라고 말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그 소리가 끝난 부분은 분명히 이미 울려 버렸지만
남아 있는 부분은 이제부터 울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해서 현재의 정신적 작용을 통해 미래는 과거로 흘러가버림으로써
미래는 줄고 과거는 늘어나 
드디어 미래에 남아 있지 않고 모든 것이 과거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제11 권 창조의 말씀 - 28. 정신으로써 재는 시간. 
 
하여간 아직 없는 미래가 어떻게 해서 줄거나 다하게 될까요?
이미 없는 과거가 어떻게 증대할까요?
그 이유는 그러한 일이 일어나는 정신 속에 세 가지 작용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정신은 기대하고, 직시하고, 기억합니다.
그리고 정신이 기대하는 것은 직시하는 것을 통해서 기억하는 것으로 옮겨 갑니다.
미래가 '아직 없는'것을 누가 옳지 않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에 대한 기대는 정신 속에 '이미 있는' 것입니다.
과거가 '이미 없다'는 것을 누가 옳지 않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기억은 정신 속에 아직 있는 것입니다.
현재의 시간에 길이가 없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한 점에 있어서 지나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시는 지속됩니다.
그 직시를 시켜서 '이제 곧 여기 있을 것,은 
'여기 없는 것'으로 옮겨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긴 것은 미래의 시간이 아닙니다.
미래의 시간은 없으며 긴 미래란 미래에 관한 긴 기대에 지나지 않습니다.
긴 것은 과거의 시간도 역시 아닙니다.
과거의 시간도 '없으며' 긴 과거란 과거에 관한 '긴 기억'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노래를 하려고 합니다.
노래를 부르기 전의 나의 기대는 그 노래의 전체를 향해 있습니다.
그런데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면 기대로부터 빼앗아서 
과거로 넘겨 버린 부분으로 기억이 향합니다.
그래서 나의 정신 활동의 산 힘은 두개의 방향으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기억의 방향으로서, 그것은 이미 노래를 끝낸 부분을 위해서입니다
또 하나는 기대의 방향으로써 그것은 이제부터 노래하려는 부분을 위해서입니다.
게다가 나의 직시는 지금 여기 현존해 있고
그것을 거쳐서 미래였던 것은 옮겨져서 과거가 되어 버립니다.
이러한 작용이 실현되어 감에 따라 기대는 점점 줄어들고 기억이 길어져서
드디어 기대의 전부가 다해 버리는데
그때 그 작용은 완전히 끝나 기억으로 옮깁니다.
그리고 노래 전체에서 행해지는 것 등이 노래의 개개의 부분에서도 행해지고
그 개개의 음절에서도 행해집니다.
같은 것이 그 노래를 그 작은 부분으로써 포함하는 더 긴 작용에서도 행해지고
또한 인간의 모든 작용을 그 부분으로 포함하는 인간의 전 생애에서도 행해지며
또한 사람들의 모든 생애를 그 속에 포함하는 인간의 자식들의
전세기(全世紀)에서도 행해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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