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文學/[참회록]Augustine

11권 [17~22]

好學 2009. 7. 26. 22:22

 



제11 권 창조의 말씀 - 17. 과거의 시간과 미래의 시간. 
 
아버지여, 나는 묻습니다.
단언은 하지 않습니다.
나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보살피고 인도하여 주십시오
우리는 어린 시절에 세 가지 때가 있다고 배웠습니다.
즉 과거. 현재. 미래입니다.
또 그와 같이 어린아이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세 가지 때라는 것은 없으며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현재뿐이다
   왜냐하면 과거와 미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라고 누가 대체 나에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과거도 미래도 있기는 하지만
미래로부터 현재가 생겨날 때에는 알지 못하는 곳으로부터 나타나며
현재로부터 과거가 될 때도 역시 
알지 못하는 곳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일까요?
그런데 미래는 아직 없다고 한다면
미래를 예언한 사람들은 어디서 그 미래를 찾았을까요?
없는 것은 볼 수도 없을 것입니다.
만약 과거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마음속에서 그것을 느끼지 못했다면
절대로 진실을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과거가 무에 지나지 않는 다면 그것은 전혀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래도 과거도 역시 있는 것입니다.




제11 권 창조의 말씀 - 18. 미래에 대한 예언. 
 
주님이시여 나로 하여금 다시 물을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나의 이상이여,나의 주의가 방해받는 것을 용서하지 마십시오.
만약에 미래와 과거가 있다면 대체 어느 곳에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것을 알 수 있는 능력이 나에게는 부족하더라도 
적어도 다음의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어디에 있건 간에 
거기에서는 미래나 과거도 아니고 현재라는 것을 말입니다.
사실 만약 거기에서도 미래라고 한다면 그것은 거기에 아직 없고
만약 거기에서도 과거라면 그것은 거기에 이미 없을 터이니 말입니다.
그러므로 어디에 있든지 무릇 있는 것은 모두 오직 현재로서만 있는 것입니다.
하기야 과거에 대해서 진실이 이야기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그 경우 기억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지나가 버린 일 자체가 아니라
지나가는 도중에 감각을 통해서 발자국처럼 
마음속에 새겨진 영상을 기초로 해서 마음에 품어진 말인 것입니다
예컨데 나의 소년 시절은 이미 사라진 과거의 시간 속에 있습니다만
그것도 나는 그 영상을, 그 시대를 상기하고 이야기할 때에는
현재의 시간에 서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것은 나의 기억 속에 아직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미래를 예언하는 경우도 사정은 이와 비슷할까요?
즉 아직 없는 일들의 영상이 현재 있는 것으로 나타날 것인지요?
하나님이시여, 머리 숙여 고백합니다.
나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곧잘 미래에 해야 할 행동에 관해서 먼저 생각하는 일이 있는데
이 경우 그 '먼저 생각한다'는 것은 현재 있지만
우리가 먼저 생각하고 있는 그 행동 자체는 미래이므로 아직 없습니다.
그런데 그 먼저 생각하던 일을 막상 행동에 옮겨서 실행하기 시작하면
그때 그 행동은 있는 것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때 그 행동은 미래가 아니고 현재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미래의 그 신비적 예감이 어떤 성질의 것이든 간에
하여간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실제로 있는 것 뿐입니다.
그런데 이미 있는 것은 미래가 아니고 현재입니다.
그러므로 미래의 것을 볼 수 있다는 경우 보이는 것은 아직 없는것,
즉 미래 자체가 아니고 아마도 그것들의 원인이나 징후일 것입니다.
이것들은 이미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보는 사람들에 따라서 미래는 아니고 이미 현재이며
그것들은 그 현재의 것으로부터 정신속에 미래를 포착해서 예언하는 것입니다
또 그들이 정신 속에 포착한 미래에 관한 상은 이미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앞에 현존하는 그 상들을 바라보면서 
미래를 예언하는 것입니다.
수 많은 사실 중에서 한 가지 예를 들어 이야기해 봅시다.
나는 해가 돋는 광경을 바라봅니다.
'해가 뜬다'고 예고합니다
바라보는 것은 현재이고 예고하는 것은 미래입니다.
미래가 태양은 아닙니다 그는 이미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미래는 일출입니다.그것은 아직 없습니다.
그러나 그 일출이라 해도 머리속으로 상상하지 않는다면
ㅡ 지금 이렇게 말하면서 상상하듯이 ㅡ 예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에 보이는 저 서광은 일출에 앞서는 것이라고는 하되
그 자체가 일출은 아닙니다.
마음에 품은 상상도 또한 일출은 아닙니다.
게다가 그 양자는 미래의 일출을 예고하기 때문에
현재 있는 것으로 인식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미래는 아직 없습니다.
아직 없다면 결코 보이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있고 보이는 현재의 것으로부터 예언될 수가 있습니다.


 

 



제11 권 창조의 말씀 - 19. 마음의 눈. 
 
하나님, 그렇다면 피조물의 지배자이신 당신은 
어떠한 방법으로 인간의 영혼에게 미래의 일을 가르치실까요?
사실 당신은 예언자들에게 미래의 일을 가르치셨습니다.
대체 어떠한 방법으로 그것을 가르치실까요?
무릇 미래라는 것이 당신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데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미래에 관해서 현재 있는 일들을 가르치시는 겁니다.
사실 없는 것을 가르치기란 불가능한 일이니 말입니다.
당신이 미래를 가르치시는 방법은 나의 눈으로부터 너무 멀리 있습니다.
너무나 강합니다.
내 힘으로 거기에 다다르기란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의 능력으로는 가능할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그 능력을 나에게 주신다면 말입니다.
오, 내 마음의 눈의 감미로운 빛이여!


 



제11 권 창조의 말씀 - 20. 시간의 다름. 
 
그런데 지금 나에게 있어서 분명해진 것은 미래도 없고 괒거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과거.현재.미래라는 세 종류의 시간이 있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아마 정확히 이렇게 말해야 할 것입니다.
'세 종류의 시간이 있다.
 과거에 관해서의 현재, 
 현재에 관에서의 현재,
 미래에 관해서의 현재.'
사실 이 세가지는 어쨌든 영혼 속에 있는 것입니다.
영혼이 아니라면 어디에서도 찾아 낼 수가 없습니다.
과거에 관한 현재란 기억이며, 현재에 관한 현재란 직관이며,
미래에 관한 현재란 기대입니다.
만약 그런 것이 허용된다면 분명 나는 세 종류의 시간을 보며
그뿐만 아니라 세 종류의 시간이 있다는 사실도 인정합니다.
그런데도 역시 부정확한 말버릇을 따라서
'세 종류의 시간이 있다. 그것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이다.'라고
말하고 싶은 자가 있다면 말하도록 내버려 두겠습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고 반대도 안하고 비난도 안합니다.
다만 거기서 말하는 바를 잘 이해하고 있어야만 합니다.
미래인 것이 이미 있다든가 과거가 되버린 것이 
아직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정확한 말로 이야기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대개의 경우 확실하지 못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하고자 하는 말은 통하는 것입니다ㅣ.


 



제11 권 창조의 말씀 - 21. 시간 측정법. 
 
그러므로 방금 나는 우리가 재는 것은 '지나가는 시간'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와 같이 해서 우리는 이 시간의 부분은 1이라는 단위의 두 배라든가
이 시간은 저 시간과 같다든가
그 밖에 무엇이고 시간의 부분에 관해서 측정하면서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얘기해 왔듯이 우리가 재는 것은 지나가고 있는 시간입니다.
누가 나에게 '어쩧게 자네는 그것을 아는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그것을 알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우리는 사물을 잰다 그러나 없는 것을 잴 수는 없다.
그런데 지나가 버린 것도 아직 오지 않은 것도 현재에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만약 폭이 없다면 어떻게 현재의 시간을 잴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그것은 지나가 버릴 때 측정되는 것이지
지나고 나면 더 이상 잴 수가 없습니다.
그때에는 이미 잴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여간 현재의 시간은 측정될 때 어디로부터 오며
어디를 거쳐서 어디를 지나가 버리는 것일까요?
어디로부터ㅡ 물론 미래로부터.
어디를 거쳐서ㅡ 물론 현재를 거쳐서.
어지로ㅡ 물론 과거로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아직 없는 것'으로부터 와서
'폭이 없는 것'을 거쳐서 '이미 없는 것'으로 사라져 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재는 것은 어떤 폭에 있는 시간입니다.
우리가 시간에 대하여 배, 두 배, 세 배와 같다 또는 
이와 흡사한 말을 하는 것은 시간의 폭을 말하는 데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폭에서 지나가는 시간을 재는 것일까요?
다가오는 미래에서일까요? 
그러나 아직 없는 것을 잴 수는 없습니다.
그것을 거쳐서 지나가는 현재에서일까요?
그러나 폭이 없는 것을 잴 수는 없습니다.
지나가 버린 과거에서일까요?
그러나 이미 없는 것을 잴 수는 없습니다.


 



제11 권 창조의 말씀 - 22. 수수께끼의 해답. 
 
나의 영혼은  복잡한 이 수수께끼를 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주여! 닫지 마십시오. 선하신 아버지시여, 
그리스도를 통해 원합니다. 닫지 마십시오, 
나의 열망에 대해 그다지도 가까이 그러나 깊이 숨어 있는 수수께끼를 말입니다.
그 수수께끼 속에 깊히 파묻혀 
당신의 연민의 빛을 받을 수 있는 은총을 허락해 주십시오
주여, 이 문제의 해답을 누구에게 구하면 좋겠습니까?
당신 이외의 누구에게 자신의 무지를 고백하고
당신에게 고백해서 얻을 수 있는 이상의 성과를 얻을수 있겠습니까?
나의 가슴은 당신의 책(성경)의 깊은 의미를 알고자 불타고 있습니다
그 열망을 당신은 싫어하지 않으십니다.
내가 사랑하는 것을 받기를 원합니다.
진정 나는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 사랑을 주신 것은 바로 당신입니다.
하나님, 좋은 선물을 자식들에게 주는 것을 알고 계신 아버지여, 주십시오.
사실 나는 이미 그것을 알아낼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보여 주실 때까지는 내 앞에는 오직 고생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간구합니다.
그 성스러운 분의 이름으로 아무도 나의 길을 막지 말아다오.
나는 믿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나의 소원은 거기에 보람을 느끼는 것, 그것은 바로 주의 기쁨을 보는 것입니다.
주님이시여, 당신은 나의 하루하루를 낡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셨습니다.
그것은 사라져가고.... 어떻게 해서인지 나는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우리들은 시간이라는 것을
또 여러가지 시간이라는 말을 종종 입에 올립니다.
'그는 얼마나 오랜 시간 그것을 말했는가.'
'얼마나 오랜 시간 그것을 했는가.'
'얼마나 오랜 시간 나는 그것을 보지 않았는가.'
'이 음절은 저 짧은 단음절의 두 배의 시간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런 말들을 하거나 듣고 있으며 
자신이 말하는 것을 상대방이 알아듣고 상대방이 말하는 것을 알아듣습니다.
그 이상 확실한 것은 없고 그 이상 낯설지 않은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의미는 아주 깊게 숨어 있어 
찾아 내려면 다시 한 번 땀을 흘려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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