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世界信仰人]

미국 최고의 영적 거인 - 조너선 애드워즈

好學 2012. 11. 29. 22:11

미국 최고의 영적 거인 - 조너선 애드워즈

 

 

조너선 애드워즈 Jonathan Edwards (1614~1691.02.12) 미국
미국 식민지 시대의 장로교 목사, 신학자, 원주민 선교사이다. 에드워즈는 "미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독창적인 철학적 신학자로 널리 인정되고 있다." 미국 3대 부통령과 뉴욕 주 주지사를 지낸 에런 버의 외할아버지였다.


      

 

Q. 조나단 에드워즈씨, 이렇게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미국 최고의 영적 거인으로 불리며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많은 사역을 감당하셨는데요.

어떻게 하나님을 만나고 영적으로 거룩한 삶을 추구하게 됐나요?

 

A. 전 어렸을 때부터 내 영혼에 관해 유난히 관심이 많았어요.

스스로 영혼의 유익을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죠. 그러다 회심을 통해 새로운 삶을 살게 된 거에요.

그 회심은 예일 대학원 시절에 일어났어요.

제가 기억하기로 하나님과 하나님께 속한 일들에 대해 내적이고 달콤한 기쁨을 맛본 첫 번째 경우였어요.

그 때 저는 디모데전서 1장 17절을 읽고 있었지요.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이 구절을 읽고 있는데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감각이 깨어났어요.

그 감각은 전에 경험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느낌이었어요.

그 이후로 성경의 다른 어떤 구절도 이 구절처럼 내게 다가온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이 느낌을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네요.

그냥 하나님이 얼마나 놀라우신 분이신지 느꼈어요.

만일 내가 그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천국에서 그 분에게 완전히 푹 빠지게 된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고 생각했어요.

영원히 하나님 안에 파묻혀 있고 싶어진 거예요. 저절로 거룩한 삶을 사랑하게 되었죠.

어떻게 하면 거룩하고 신실한 성도가 될 수 있을까 늘 고민하게 됐어요.


 

Q. 예일 대학원 시절에 회심을 했다고 했는데 그 시절의 에드워즈가 궁금하네요. 대학생활은 어떻게 보내셨나요?

 

A. 학교를 다닐 땐 정말 열심히 공부했던 것 같아요.

열일곱 살에 예일대를 졸업하고 신학석사 과정을 교육받았어요.

스무 살 때 대학원도 졸업했고요. 과학과 철학을 중심으로 공부했어요.

당대 최고 과학자와 철학자의 수준에 도달하려고 많은 지식을 습득하는데 힘썼죠.

또 우리 집안 전통과 예일의 전통에 따라 개혁신학과 청교도신학을 집중적으로 교육 받았어요.

아버지가 하버드를 졸업하고 목회자의 길을 걸으셨거든요.

거기다 할아버지는 뉴잉글랜드에서 ‘코네티컷 계곡의 교황’ 이라고 불릴 정도로 영향력 있는 목사님이셨어요.

어머니도 신실한 청교도 신자셨지요.

부모님을 통해 대학 교육에 필요한 기초 지식뿐만 아니라 신학에 대한 지식도 쌓을 수 있었던 거죠.

 저는 형제들도 많았어요. 특히 누나들에게 많이 배웠죠. 헬라어, 라틴어와 같은 고전어 교육은 누나들에게 배운 거예요.

그때는 몰랐는데 이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서 다 계획하셨던 것 같아요. 절 사용하시기 위해 학문과 지식까지도 습득하게

하신 게 아닐까요?

노스샘프턴 교회에서 목회하고 메사추세츠 스톡브리지에서 선교사역을 할 때 많은 도움이 됐다고 생각해요.

젊은 시절 출간했던 <노샘프턴 교회에서의 놀라운 회심 이야기>나 50대가 되어서 출간한 <의지의 자유론>,

<하나님의 천지 창조 목적>, <참된 미덕론>, <원죄론> 같은 신학적 책들을 쓰는데도 도움이 됐고요.
 

Q. 회심 전과 회심 후에 달라진 삶에 대해 이야기해 주세요.

 

A. 회심 전의 삶은 한마디로 두려움이었어요.

아까도 말했지만 저는 어릴 때부터 영혼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목사님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구원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래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던 것 같아요.

친구들과 모여 기도 하기도 하고 신자로서 여러 가지 의무 들을 신실하게 지켰어요.

가끔은 스스로 의롭다는 생각에 뿌듯하기도 했고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기쁨을 느꼈죠.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그 때 가졌던 체험과 즐거움은 참된 것이 아니었죠.

시간이 지나면서 나의 확신과 감정들은 점점 사라졌고 모든 기쁨을 완전히 잃었거든요.

개인기도 시간조차 갖지 않게 되었으니 심각했죠. 결국 자기가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개처럼 옛날의 모습으로

돌아가 죄를 짓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구원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내 마음은 편치 않았어요.

죄를 짓지 않으려고 결심했다가 어기고, 또 결심하고, 이런 짓을 몇 번이고 반복했죠.

다시 신앙적인 의무들을 준수했고요. 그런데 예수님에 대한 끓어오르는 감정과 기쁨이 전혀 없는 거예요.

내 관심은 오직 구원에 있었던 거죠. 내적인 갈등과 투쟁, 자기반성으로 쏠려 있었어요.

구원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내 삶의 가장 중요한 일이 되었어요. 맹목적이었죠.
  그렇게 공포에 가까운 두려움 속에서 살던 내가 회심을 하고 제대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죠.

나는 앞에서 말한 디모데전서 1장 17절 말씀으로 영광 받으실 하나님에 대해 깨달았어요.

성경 구절을 계속 되풀이해서 읽으며 찬송을 불렀던 기억이 나요. 그리고 하나님과 즐겁게 교제했어요.

내가 보통 때 기도하던 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요. 그 체험은 내 생각 속에서만 이루어진 건 절대 아니었어요.
  바로 그 때부터 나는 그리스도에 대해 바르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구속에 대해서,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영광스러운 구원의 방법에 대해서 새롭게 이해하고

새로운 생각을 갖기 시작했어요. 예수님의 아름다움 성품과 탁월함을 묵상했어요.

그 분 안에서 은혜로 얻는 구원에 대해서도 묵상하며 시간을 보냈어요.

은혜에 관한 말씀과 신앙서적을 읽는 것이 굉장히 즐거웠어요.

서서히 성경을 철저하게 아는 것이 내게 아주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됐죠.

또한 교리서나 논쟁서를 읽고 더욱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됐어요.

경건 서적이 내가 서 있는 발판과 기초가 무엇인지를 알게 해준 것 같아요.

아울러 하나님의 성품과 사역에 대한 묵상에도 푹 빠졌어요.

이런 나의 묵상들을 찬송으로 지어 부르곤 했는데 나중엔 거의 습관이 됐죠. 

 물론 회심 후에도 계속해서 영적 침체와 회복을 반복했어요.

영적 회복기에는 성령에 의해 회복되고 있는 것을 느꼈어요.

그러자 죄에 더 민감해지고 평상시보다 더 그리스도를 사랑하고자 하는 열정도 생겼고요.

결심문을 작성한 것도 바로 이 시기에요. 70가지 항목의 결심문은 한번에 정한 것이 아니라

하루 하루의 생활 속에서 하나, 둘 생겨난 거예요. 회심 후부터 약 1여 년에 걸쳐

그리스도인으로서 평생 살아갈 나의 자세와 태도를 정리했죠.  


Q. 로이든 존스가 에베레스트 산에 비유한 영적인 거장도 영적인 침체를 겪는군요. 어떨 때 영적 침체에 빠지나요? 

그리고 영적인 침체에 빠지면 회복하기 위해 어떤 노력들을 하시나요?
 
A. 저는 종종 내가 아주 바닥 상태에 있다고 느끼곤 해요.

그럴 땐 회복되기까지 너무 오래 걸릴 까봐 두려워요. 주로 결심문에 대한 평가가 저조할 때 침체돼요.

내가 마땅히 지켜야 할 것들임을 알고 있는데 소홀히 여겼다는 생각이 들 때나 죄를 지었을 때요.

갑자기 우울함을 느낄 때도 있어요. 영적 침체가 시작되면 내가 얼마나 빨리 침체 되는지 얼마나 약하고

무능력한 존재인지 깨달아요. 나는 한순간에 불쌍한 존재가 돼요. 아무 것도 아닌 게 되어버려요.
  곧바로 기도하게 되었죠. 주님께서 나를 가르치셔서 나 자신을 덜 의지하고 더 겸손해지길 원한다구요.

그래서 내 능력에 대한 예찬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에게 더 많은 찬양을 드리게 해달라고요.

그리고 내가 잘못한 것, 악한 행동 들을 회개하면서 시편을 노래해요. 특히 회개에 대한 시편을 노래하죠.

이러한 의무들은 영적 침체의 상태에 가장 적합해요. 신앙의 즐거움에 대한 이전의 감각을 되찾을 수 있어요.
  또한 활기차게 되기 위해서 의지적으로 노력하기도 해요. 신속하게 한 가지 일에서 다른 일로 넘어가요.   
 

Q. 70가지나 되는 결심문을 만들었다고 하셨는데 그 결심문을 다 지키는 것이 가능한가요?
   
A.  다 지키는 건 불가능하죠. 저도 그래서 종종 영적 침체도 겪었고요.

성령의 역사 없이는 내가 결심하고 행동하는 것에 아무런 열매가 없다는 것을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거예요.

만일 하나님께서 성령을 거두어 가시면 전 지체하지 않고 결심문을 어기게 되죠.

곧 옛 상태로 돌아가는 거예요. 나는 조금도 신뢰할 만한 존재가 못 돼요.

내 결심은 어느 날에는 최고조에 달하지만 다음 날에는 전혀 딴 사람처럼 죽은 상태가 되기도 해요.

아주 비참하죠. 그래서 결심문 맨 앞에 이런 문구를 달았어요.

  "나는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 결심문이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한,

그리스도를 위해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이 결심문을 지킬 수 있도록 내게 능력 주시기를 겸손하게 하나님께 간청합니다.

잊지 말고 매주 한 번씩 이 결심문을 읽자."      

  문제는 내가 항상 성령님을 붙들고 있지 못한다는 거예요. 종종 성령이 내게서 떠나가시는 것을 경험하곤 했어요. 

  내가 온전히 지키지 못할 것을 알고 결심문 3번을 작성한 거예요.

 "혹시라도 내가 넘어져 무감각해져서 이 결심문 중의 어떤 내용을 지키지 못하게 된다면, 다시 제정신이 돌아왔을 때 내가 기억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회개하자."

이것이 결심문 3번의 내용이에요. 실제로 넘어진 적이 많죠. 결심문을 어겼을 땐 내가 지키지 못한 원인을 찾아

같은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한번은 여행 때문에 하루 3번 기도하겠다는 결심문을 지키지 못한 적이 있었어요.

 왜 기도하지 못했을까 생각하다가 기도를 하려고 할 때마다 변명거리를 마련했다는 것을 알았죠.

내 편의를 앞세우기 위해서요. 그래서 그 날 일기에 그 내용을 적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나아가기로 다시 한번 다짐했죠. 
  그리고 결심문의 위치를 바꾸거나 내용을 수정하는 일도 종종 있어요.

위치를 바꿀 땐 내가 결심한 것을 소홀히 여기게 됐을 때 그래요. 수정 하는 건 이전의 내용보다 더 발전 되고

가능한 퇴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예요. 이 일이 조금 번거롭긴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금방 나태해지고 게을러져요.

 결심문은 자꾸 다시 읽어보고 내가 그것들을 잘 지키고 있는지 점검해보는 게 중요해요.

결심문 앞에 써 놓은 문구 맨 뒤에도 매주 결심문을 읽자는 다짐이 있어요.

 


Q. 그리스도를 따라 사는 성도의 삶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군요. 힘든 일도 많고 지켜야 할 것도 많네요.

그렇다면 성도의 삶이 주는 기쁨은 무엇인가요?

무엇이 영적 침체와 실패를 경험하면서까지 그리스도를 따라 살게 하나요?

 

A. 사람들은 내가 정한 결심문들, 내가 이룬 업적들, 내가 받은 학위 들을 보고 나를 오해하곤 해요.

감정적으로 메마른 사람으로요. 이성만 따르고 감정적인 것들을 배제하고 사는 냉혈인으로 보는 거죠.

그런 사람들은 내가 아무런 기쁨도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해요.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하지만 저는 영적으로 기쁨에 충만하고 가슴이 뛸 때가 많아요.  
때때로 한 단어를 말하기만 해도 내 마음은 불타올라요. 그리스도의 이름을 보기만 해도요.

아니면 하나님의 성품을 느낄 때요. 하나님은 나에게 삼위일체적인 분으로 영광스럽게 나타나세요.

내가 경험한 최고의 달콤한 기쁨과 즐거움은 내 자신이 행복해질 것이라는 소망 때문이 아니에요.

복음의 영광스러운 일들을 직접 보고 생긴 거예요. 이러한 달콤함을 즐기고 있을 때

나는 내 자신의 상태에 대한 생각에서 더 넓은 생각을 할 수 있게 돼요.

그러면 나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나 나의 행복한 상태를 추구하는 좁은 생각은 도저히 할 수가 없게 돼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은 그 자체로 기쁨이에요.

육체적인 기쁨은 아니에요. 뜨겁게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영적인 기쁨이죠.

이 기쁨으로 영원히 사는 것이 내 소망이고 이 것 때문에 즐거워요.

저는 이 소망 때문에 완벽한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노력해요.


Q. 독자들과 나누고 싶은 기도제목

 

A. "어떤 순간에도 모든 측면에서, 인격의 어떤 부분이나 어떤 환경에서도 언제나 성도다운 참 빛을 비추며,

탁월하고 사랑스럽게 행동하는 참으로 완벽한 성도가 세상에 단 한 명 있다고 가정할 때,

만일 내가 그 한 사람이 되기 위해 내 힘껏 노력한다면 그렇게 될 수 있을 것처럼 행동하자."

제 좌우명이에요.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 세운 인생 목표이기도 하구요. 모든 면에서 복음의 법칙에 따라 살려고 해요.

이런 내 노력에 발전이 있기를 간절히 갈망해요. 이렇게 거룩하게 사는 것이 밤낮 나의 싸움이고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나는 내가 전에 은혜를 구했던 것보다 훨씬 더 열심히 구하고 있어요.

내가 더 성도답게 살길 바라고 나의 결심들이 무너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내가 계속해서 나 자신을 점검하고 거룩한 삶을 위해 더 부지런하고 간절하게 연구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