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世界信仰人]

위대한 성경번역은 자신의 삶을 통해 나온다 - R. A 토레이

好學 2012. 11. 29. 22:07

위대한 성경번역은 자신의 삶을 통해 나온다 - R. A 토레이
토레이 R.A. Torrey

(1856.1.28~1928.10.26) 미국

무디 성경학교 교장을 지냈으며 <평범함 속의 권능>, <진리의 영을 받는 법>, <성령 세례 받는 법>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prolog. 무디 성경학교 교장을 지냈으며 <평범함 속의 권능>,
 <진리의 영을 받는 법>, <성령 세례 받는 법>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기자: 오늘은 영감 있고 따뜻한, 그러면서도 뚜렷한 복음의 메시지를 전하는 성도들이 가장 사랑하는 설교자, 
토레이 목사님을 만나보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목사님!

 
토레이 목사: 안녕하세요. 소개를 너무 거창하게 해주셔서 인터뷰 초반부터 어쩔 줄을 모르겠습니다. 
이거 긴장되는데요^^;;

Q1. 목사님의 설교와 저서는 파워풀하면서도 안정적인 문체가 인상적이에요. 
뜨거운 성령의 불로 어쩔 줄 모르다가도 뒤돌아서면 편히 쉴 수 있는 소파가 있는 느낌이랄까요? 
그래서 목사님의 설교는 초심자가 들어도 거부감 없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평가가 많아요. 
이런 설교의 소제는 보통 어디에서 얻으시나요?

A1. 저는 체계적이고 반복적인 학습의 능력을 믿는 편입니다. 신앙의 경우도 그래요.
어느 날 눈을 뜨면서 하나님의 실체를 발견하고 회심하는 기적을 경험하는 사람들도 분명 있겠지만, 
저는 가급적 어린 나이에서부터 탄탄한 신앙적 지식과 습관을 직접 체득하는 것이 멀리 보았을 때
더욱 기름진 토양이 된다고 믿습니다.

제가 받은 많은 축복 중 하나는 신실하면서도 건강한 가정에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특히 저희 어머니는 제가 이제껏 만나본 여인 중 가장 아름답고 세련된 분으로 외모뿐 만 아니라 
그 분의 신앙이 고스란히 투영되는 평소의 삶을 통해 이웃들의 존경을 받는 분이셨습니다.
저는 그런 어머니와, 어머니 못지않게 신앙 중심인 아버지로 이루어진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그렇다고 그 당시 장로교인들이 흔히 그렇듯 너무나 엄격한 신앙 교육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부모님은 제가 세 살 때부터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고, 우리네 삶 속에서 만나는 하나님의 존재를 
자연스레 인정하도록 교육하셨습니다. 저의 설교나 책에서는 일상의 삶 속에서 강력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각 시키는 점이 많습니다. 
하나님을 하늘에서만 찾을 것이 아니라 평소의 삶을 통해 그 분의 존재를 인정하고, 
자녀의 삶을 천국에서뿐 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살아야 함을 이야기하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저의 소제는 과거에 잘 일구어 놓은 토양에서 경작되는 소출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Q2. 훌륭한 가정의 신앙 교육을 받고 자라셨군요! 정말 부럽네요. 
그렇다면 어려서부터 자연스레 목회자의 길을 가려고 계획하셨나요?

A2. 저희 어머니는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한나가 사무엘을 서원하여 바쳤듯이, 저를 바치셨어요. 
뭐, 수도원에 저를 버려두고 오신 것은 아니지만, 어찌 보면 저의 삶은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어머니로 인해 하나님께 바쳐진 삶이 되었던 것이죠. 허허.
그렇다고 해서 어머니를 비롯한 저희 가족은 저에게 목회자의 삶을 강요하지는 않았어요. 
단지 어떤 길을 가든지 하나님의 일을 하기를 바랬을 뿐이었죠.

저는 수줍음이 많고 암기력이 좋지 않아서 학교를 다니는데 애를 먹었던 아이였죠. 
저희 부모님도 걱정을 많이 하셨지만 저는 암기력이 아닌 집중력으로 공부하는 법을 터득했고, 
15살에 두 번째로 최연소의 나이로 예일대학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예일에 처음 들어갈 때만해도 저는 법을 공부하고, 변호사가 되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나 법률 공부를 하면서도 저는 하나님이 저를 목회자로 부르시는 부르심을 듣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때는 내 삶의 계획에 반대되는 방향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에 대한 반항심으로 성경을 미워하며 카드 놀이와 극장, 
댄스파티와 경마를 즐기며 기도 모임이나 주일 예배를 의도적으로 빠지기도 했지만 그런 것과 전혀 상관 없이 
하나님은 저를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그 부르심이 어찌나 주기적으로 반복되는지, 정말 듣지 않을래야 들리지 않을 수가 없을 정도였죠! 
기자님도 어느 정도 예상 하셨듯이 제가 하나님께 백기를 드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습니다(웃음).


Q3. 목사님과 무디(D.L. Moody) 목사님은 사역자의 세계에서 환상의 커플로 통하는 팀이라고 들었어요. 
무디 목사님과는 어떻게 만나게 되셨나요?

A3. 저와 무디 목사가 그렇게 알려져 있군요(큰 웃음). 
사역자에게 있어서 마음이 맞는 동료를 찾기는 정말 힘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무디 목사와 저는 서로가 서로에게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어요. 
그에게는 미처 물어보지 못했지만, 무디 목사와 처음 만난 날을 저는 또렷하게 기억합니다. 

1877년 여름, 제가 예일 신학교 졸업을 앞둔 해에 저희 부모님이 3주 간격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너무나 사랑하고 존경했던 어머니의 죽음과, 좋은 사업 수완으로 저의 공부를 아낌없이 지원해주시던 
아버지를 동시에 잃은 저는 큰 혼란에 빠졌죠. 
목회자의 길을 가기로 했을 때, 저희 어머니는 마치 오랜 서원이 이루어진 것 마냥 기뻐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런 아들이 목사가 되는 것도 미처 보지 못하고 돌아가시니, 
부모님의 기도에 크게 부응하지 못한 못난 아들이 된 것 같아 자괴감에 빠지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포터 총장으로부터 무디라는 정규 교육을 받지 않은 전도자가 예일대학교 
내 바텔 예배당의 집회에서 설교를 한다고 들었습니다. 
정규 교육은 받지 못했지만 ‘놀라운 기대와 존경심’을 갖게 될 것이라고 말이죠.
저와 제 친구들은 다소 건방진 마음으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무디 전도자의 집회에 참석하여 
그에게 격려와 용기를 북돋아 주기로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한 교육이란 신학 학사나 박사 같은 학위를 의미했죠.
그러나 무디의 설교를 들은 두어 시간 후, 저 뿐만 아니라 함께 간 친구들 모두 격려와 용기를 받은 
사람은 무디가 아니라 우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는 무뚝뚝했지만 겸손하고 간결한 한마디로 제가 가지고 있던 보이지 않는, 그러나 뿌리 깊은 자만을 깨뜨렸습니다. 
무디 목사는 기억하고나 있을지 모르겠네요. 그 날 제게 한 말을.

그는 저에게 ‘젊은이, 당신이 주를 위해 더 좋은 사역을 할 것이오’ 라고 말했습니다. 
몇 년에 걸친 신학적 학문을 쌓은 본인도 이겨내지 못했던 저의 자괴감, 슬픔, 우울을 단 몇 시간의 설교로 없애고, 
뜨거운 성령의 불씨까지 던져준 사람이 말이죠!

Q4. 처음은 모든게 새롭다는 의미에서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라고 하는데요. 
목사님의 첫 사역은 어떻게 기억되시나요?

A4. 저의 첫 사역지인 개러트 빌은 여러모로 잊혀지지 않는 곳이죠.
저는 그 곳에서 처음으로 청중들을 대상으로 주일에 세 번씩 설교를 하는 풀타임 설교자가 되었고, 
또한 그 지방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소문난 클레어 스미스를 아내로 맞이하는 최고의 행운남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그렇게 술술 잘 풀리지는 않았습니다. 
훗날 좋은 동역자가 되었지만, 저를 앞장서서 비방하던 청년은 그 지방에서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을 가진 사람이었고, 
설교자로서 경험이 전무했던 저는 매 주일마다 그저 이론적인 설교만 해댔습니다. 
성도들의 마음을 울리지 못한 것은 물론, 설교하는 저 자신마저도 제 설교 시간이 지루해서 설교하는 내내 
옷의 단추를 잡아 비트는 습관까지 생겼지 뭡니까. 
매 주일이 끝날 때마다 돌아올 다음 주일이 두려워져서 고뇌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성도의 수가 늘어나게 되는 놀라운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제가 강단에 서는 것이 차차 익숙해지고, 사람들의 실제 생활에 가까운 설교를 하게 되기까지 성도들은
 (제가 생각해도 놀라운)인내로 매 주일마다 저의 설교를 듣고, 저와 인사를 하고, 
다음 사역의 계획을 함께 세웠습니다. 그렇게 개러트 빌에서의 저의 첫 사역은 자리를 잡아갔죠. 


Q5. 목사님의 사역을 통틀어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가 되었던 사건이 있나요?

A5. 제 사역은 어디로 보나 한가하고 여유로운 사역은 아니었습니다만, 
전환점이 되는 계기를 찾으라면 독일 유학 시절을 꼽을 수 있겠군요.
예일대 동창인 하워드 벨(H. Bell)이라는 친구가 개러트 빌에서의 저의 사역을 보고 
저의 모든 유학자금을 대준다는 조건으로 독일로의 유학을 추천했죠. 
아무리 친한 친구라 해도 언제 끝날지 모를 유학자금은 조금 부담스러운 조건이라 머뭇거렸지만 
결국 1882년 가을에 독일로 향하는 배를 타게 되었습니다.
제가 수학한 라이프찌히 대학은 16세기의 고풍스러운 정취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수없이 많은 석학들과 토론할 기회는 이전에는 갖지 못했던 귀중한 시간이었죠. 
역사가 짧은 미국에서는 쉽게 접할 수 없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유럽의 유물, 화랑, 박물관 등을 접하며 
지상의 영화가 얼마나 덧없는 것인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곳에서 "루벤, 난 네가 알 수 없는 것들을 알고 있다." 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여러 번 들었죠.

독일 유학을 마치고 두 개의 전혀 상반된 조건의 사역지를 제의 받았을 때 망설임 없이 
조건이 열악한 미시시피의 개척 교회를 선택할 수 있었던 이유도 아마 이때 받은 영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후에도 저는 상반된 조건의 갈림길에서 좋지 않은 좁은 길을 선택하는데 그닥 주저함이 없게 되었는데, 
독일에서 보낸 짧은 시간 동안 하나님이 끊임 없이 보여주신 인간 인생의 한계와, 
그렇기 때문에 최대한 열심히 뛰어야 하는 복음 전도자로서의 사명을 마음 깊이 체감하였기 때문입니다.


Q6. 목사님의 영감 있는 설교는 영감 있는 기도에서 온다고 하셨는데요. 
목사님께서 생각하시는 올바른 기도는 어떤 것인가요?

A6. 저의 기도관은 
야고보서 1장 5절의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저는 많은 학자들이 정의한 기도의 정의에 반박했고, 그로 인해 비판도 많이 들었습니다만 
여전히 저는 참된 기도는 살아계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정금 같은 기도이지 
인간 내면에서 머무르는 기도는 인위적이고 또 응답 받지 못하는 기도라고 생각하는 데에 변함이 없습니다.

많은 교수와 목사들이 기도를 ‘하나님의 경배에 인간이 최고로 평가할 수 있는 경외함’ 이나,
 ‘현대인이 자신의 자만심을 꺾고 수동적으로 굴복하는 것’으로 정의하면서 가르치는 것을 압니다. 
얼핏 잘못되지 않은 것처럼 보이나, 이는 결국 내면의 알맹이 없는 기도도 하기만 하면 하나님께 상달된다는 
잘못된 지식을 갖게 할 위험성이 있습니다.
이는 진정한 기도의 커다란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상상조차도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속으로 우물우물하는 기도에도 능력이 있다니요? 우리의 하나님이 그렇게 허술하신 하나님이신가요?

진정한 기도는 사치스런 예배보다 더 엄청난 결과를 맺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기도는 모든 사역 가운데서 가장 효과적이고 능력 있는 일입니다. 
우리의 노력을 통해 얻어지는 결과보다 기도를 통해서 더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저는 현대의 교회에서 기도의 정의가 나날이 가벼워지고 있는 것을 우려합니다. 
자신도 알 수 없는 말을 우물거리면서 하나님께 상달되었다고 믿는 성도들의 가벼워지는 신앙을 우려합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를 흘리며 기도하신 것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게 되는 날이 올까 봐 두렵습니다. 
참된 기도에 커다란 능력이 따라 온다는 것을 삶을 통해 체득하게 되는 성도들이 
단 한 명이라도 더 많아졌으면 하는 소망을 매일 갖습니다.


epilog. 매 설교마다 뜨거운 도전을 남기는 토레이 목사님이셨습니다.
 ‘가장 위대한 성경 번역은 바로 자신의 삶으로 성경을 번역하는 것이다’ 라는 목사님의 말씀에는 
성경을 읽는 것에 그치는 것이 우리의 삶의 전부가 아님을 간곡히 호소하고 있습니다. 
삶으로 성경을 번역한다는 것은, 어떤 삶일까요? 
많은 생각과 도전을 남긴 루벤 아처 토레이 목사님과의 인터뷰였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