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러스킨 John Ruskin
(1819.02.8~1900.01.20) 영국
존 러스킨영국이 낳은 19세기의 위대한 사회사상가, 예술 비평가이다. 런던의 부유한 포도주 상인 집안에서 태어나 옥스퍼드 대학교를 졸업하였다. 화려한 예술비평가의 길과 험난한 사회사상가의 길을 차례로 걸었던 그의 관심은 예술을 비롯하여 문학, 자연과학,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등의 다방면으로 뛰어난 재능을 펼쳤다.
당대 예술 평단의 일인자로 명성을 떨치던 중, 어두운 사회경제적 모순을 목도하고 불혹의 나이에
사회사상가 활동으로 전향하여 전통파 경제학을 공격하고 인도주의적 경제학을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예술의 경제학》(1857)과 1860년에는 《최후의 사람에게》,
1862∼1863년에는 《무네라 풀베리스》를 발표하여 사회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Prolog. 안녕하세요, 존 러스킨 선생님. 만나 뵙게 되어 기쁩니다.
저야말로 초대해주셔서 감사하지요. 막상 시간이 되니 떨리는군요. 지식의 거장에서 저에게도 찾아올 줄은 몰랐습니다.
Q. 겸손한 말씀이세요. 선생님은 훌륭한 본이 되시는 영적 지도자 이십니다.
그럼 저의 질문에 편하게 대답해 주세요.
선생님께서는 불혹의 나이에 사회사상가로서 대단한 역량을 보이신 분이라 들었습니다.
무엇을 계기로 예술에서 사회개혁으로 그 관심을 돌리신 건가요?
저는 어릴 때부터 고전문학과 낭만파 문학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유복한 아버지의 덕분에 마음껏 예술을 공부할 수 있었던 것 있었지요. 어머니는 철저한 청교도인 이셨고 제가 목사가 되길 바라셨지만 전 아니었어요. 사실 저는 성경을 읽으며 자랐지만 무신론자나 다름없었습니다. 예술에 푹 빠져 멋대로 문학의 길을 걸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것도 오랜 시간이 흐른 후였어요. 그런 제가 사회개혁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글쎄요. 딱히 어떤 사건은 없었던 것 같군요. 다만 어두운 사회와 경제의 모순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이 쪽 분야로 관심을 돌린 것 같습니다. 참으로 어둡고 무지한 세상이지요. 부와 가난, 지배자와 피지배층, 강자와 약자. 그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불행과 죽음. 이런 것들이 안타까웠어요. 이럴 때일수록 생명의 경제학만이 무엇이 헛되고 무엇이 영속하는지 가르쳐준다고 생각했죠.
Q. 생명의 경제학! 저도 선생님 책에서 봤습니다.
생명의 경제학에서 부의 조건으로 ‘정직’이나 ‘애정’ 같은 조건들을 세우셨던데요.
생명은 사랑이라든가, 환희라든가 이러한 것이 모두 포함된 힘이죠.
가장 부유한 사람은 자신 안에 있는 생명의 힘을 다하여 이웃들의 생명에 유익한 영향을 최대한 미치는 사람이에요. 자신의 내적, 외적 재산을 골고루 활용해서요. 마찬가지로 가장 부유한 국가는 최대 다수의 귀하고 행복한 국민을 길러내는 국가죠. 단순히 부자가 되기 위한 경제학은 그 결과가 죽음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생명의 경제학은 다르죠. 별나라에서 온 경제학이라 생각될지도 모르겠네요. 그렇다 해도 이 경제학이야말로 유일한 경제학이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Q. 어떤 독자들은 끝까지 납득할 수 없다고도 말했습니다.
애석하게도 선생님의 주장에 많은 사람들이 반박하기도 했고요.
특히 전문적으로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반발이 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저는 제가 쓴 논문을 거의 그대로 책에 옮겼어요. 그 논문이 발표될 당시에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판을 들었죠. 거친 말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전 생명의 경제학을 말한 그 4편에 논문에 대해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한 점 부끄럼 없이요. 저는 그 글들이 제가 썼던 어떤 글보다 훌륭하고, 진실하다고 생각해요. 또 필요한 말들만 사용했고요. 분명 사회에 유익을 주는 글이라고 믿습니다.
저의 말이 공상적인 어린 아이의 궤변으로 들린 다는 것은 저도 잘 압니다. 특히 전문적으로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물론 많은 것을 보았고 경험했을 테지요. 어떻게 해야 부를 거머쥘 수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거예요.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하잖아요. 그리고 깨끗한 부를 추구한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지요. 그렇다 하더라도 저는 주장을 굽힐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정작 중요한 것을 모르는 것 같거든요. 인간의 모든 행위를 비롯하여 시장을 움직이는 그 큰손이 누구의 손인지 그리고 사람들이 이익을 추구하며 판을 돌리고 뒤집을 때 그로인해 다른 어두운 한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그들은 모르죠.
Q. 정말 흥미로운 경제학이네요.
그렇다면 또 다른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는 자기 이익 추구가 사회 경제 발전에 이바지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기적인 개인들의 경제행위가 공공복지에 기여한다는 생각은...글쎄요, 제 생각과 많이 다르군요. ‘부’라는 것은 불평등과 격차에 의해서 발생하는 겁니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내가 부자가 되는 기술은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아요. 필연적으로 이웃을 가난에 묶어 두는 기술과 함께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셈이죠. 결국 더러운 부를 추구하게 되는 겁니다. 더러운 부와 깨끗한 부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언뜻 보기엔 비슷해 보여요. 마치 우리 신체의 혈액순환과 비슷하다고 봅니다. 들뜬 감정이나 운동으로 혈액 순환이 빨라지기도 하지만 발열로 인해 빨라지기도 하잖아요. 증상은 비슷하지만 결과는 정반대겠지요.
이것은 변할 수 없는 진리예요. 성경에서도 말씀하고 있잖아요. “누구든지 자신의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잃고자 하는 자는 찾으리라“입니다. 또한 성경에서는 착취가 아닌 구제를 말씀하고 있어요. 이 진리를 벗어난 모든 학문은 결국 헛되고 또 헛된 것이죠.
Q. 선생님의 확고한 생각이 엿보입니다.
그런데 선생님의 주장대로라면 사회주의 체제와 같은 맥락 아닌가요?
안 그래도 사람들이 저를 사회주의자로 보지는 않을까 우려한 적이 많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 논문 전체를 통틀어 다른 어느 것 보다도 자주 주장한 견해가 있습니다. 바로 절대적 평등의 불가능이죠. 어느 사회든지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이 있기 마련이잖아요. 저는 어떤 경우에는 한 사람의 지배자와 다수의 피지배자가 존재한다는 것까지 계속해서 암시했습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절대적 평등이 아닙니다. 지배계층에게 권위를 부여하여 보다 나은 사리분별을 통해 피지배계층을 이끌어야 한다고 침이 마르도록 주장해왔어요.
제가 주장하는 것은 오직 정직하고 깨끗한 부를 추구하자는 겁니다. 이 주장은 사회주의 사상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죠. 그리고 소망하는 것이 있다면 가난한 자들이 부자들의 재산을 침해할 권리가 없음이 공론화되어 있듯이 부자들 역시 가난한 자들의 재산을 침해할 권리가 없다는 것이 공론화 되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Q. 선생님께서 잠언을 인용하기도 하셨는데요.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잠언은 현대 경제학자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있습니다.
솔로몬은 당대 최고의 부자 반열에 올랐던 사람이지요. 왕인 동시에 뛰어난 사업 수완으로도 명성이 자자했던 유대 상인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황금해안’이라 불리던 오빌과의 대규모 무역거래를 통해 승승장구했지요. 솔로몬의 잠언들은 중세 시대에 가장 잘나가던 무역 상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요. 특히 베네치아 상인들은 솔로몬을 아주 존경했다고 합니다. 솔로몬의 동상을 시 정부건물 하나의 모퉁이에 세워둘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근래 들어서 그의 잠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시원치 않습니다. 요즘 경제학의 원리와 충돌한다는 이유로 여기저기서 비판 받고 있어요. 저는 거기에 굴하지 않고 그 가운데 몇 구절을 인용했습니다.
솔로몬의 잠언이 전해 주는 참신함으로 독자들을 사로잡으려 한 것도 그 이유지만 그보다는 솔로몬의 정직한 거래를 보여주기 위함이었어요. 살벌한 무역 거래에 뛰어든 상인일지라도 깨끗한 부를 쫓을 수 있다는 것을 잠언은 명시하고 있습니다. “속이는 말로 재물을 모으는 것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안개 같으니 곧 죽음을 구하는 것이라.” 결국 정직하게 깨끗한 부를 추구하는 것이 개개인과 국가가 형통하는 길이지요.
Q. 생명의 경제학을 추구하는 일은 많이 어려워 보입니다.
맞아요.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으로서 참된 직업 소명을 가지기가 그렇게 쉽다면 낙타도 능히 바늘귀에 들락날락 거릴 수 있겠지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좁은 길’도 ‘넓은 길’로 고쳐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든 분야에서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것은 경제적인 측면에 있어서도 당연하고요. 강단에서 순교자가 나오듯 시장 거리에서도 순교자는 나와야 하지 않을까요? 전쟁에서 뿐만 아니라 장사에서도 영웅을 위한 서사시가 쓰여 져야 합니다.
예컨대 상인의 직분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많은 사람들이 이윤추구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은 아닙니다. 성직자도 월급을 받지만 그게 성직자의 직분이 아니듯 상인도 마찬가지예요. 이익이 직분이 되어선 안 되지요. 상인의 직분은 국민들에게 필요한 물품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거짓 증거 하지 않고 법관이 불의를 보고만 있지 않듯이 상인도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 때가 있는 것이지요.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분야에서든지 생명을 추구해야 하는 것 같아요. 그 사람이 고용주든 피고용주든, 내가 종사하는 곳이 정치적인 곳이든 경제적인 곳이든 상관없이 생명을 쫓아야 하는 것이지요. 어렵더라도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Q. 그렇군요. 맞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야 하지요.
선생님은 사회사상가로서 어떤 마음으로 일하시나요?
저도 내가 죽어야 할 시기는 도대체 언제일지 생각하며 일합니다. 물론 그리스도를 위해서요.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은 저에게 아주 중요하거든요. 자신이 죽어야 할 때를 모르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이지요. 그래서 전 국가와 사회를 위한 나의 참된 직업 소명이 무엇인지 늘 생각합니다. 제가 알게 된 진리를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효과적으로 전하는 것이 제가 할 일이지요. 사람들이 더 이상 죽음을 쫓으며 살지 않도록 이요.
Epilog. 선생님의 깨어있는 직업의식과 참된 사명감이 존경스럽습니다. 앞으로도 더 많은 사람들이 선생님으로 인해 생명을 쫓으며 살게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