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世界信仰人]

냉전시대 목숨을 걸고 복음을 지킨 젊은 신학자 - 본 훼퍼

好學 2012. 10. 19. 08:11

 

 

냉전시대 목숨을 걸고 복음을 지킨 젊은 신학자 - 본 훼퍼

본 훼퍼 Dietrich Bonhoeffer

(1906.02.4~1945.04.9) 독일

목사이자 신학자이며 저항가.어린 시절 형 발터의 죽음으로 신학자로서의 꿈을 키워나갔으며, 히틀러의 정권에 대한 적극적인 저항을 스페인, 북아프리카, 멕시코, 쿠바, 미국, 영국 등을 돌아다니며 추진했다. 왜곡되어진 교회와 정치를 향해 삶이 뒷받침 된 쓴소리를 했으며 정보 요원으로 활동했다. 1945년 4월 9일 처형당했다. 그의 나이 39세였다.

 


 
 
하나님의 은혜, 즉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값 비싸다. 그런 은혜는 다가오도록 우리에게 요청하기 때문에 값 비싸지만, 그것은 그리스도를 뒤 따르는 것이기에 은혜다. 또 그것은 우리에게 목숨을 요구하기 때문에 값 비싸지만 우리에게 참된 생명을 주기 때문에 은혜다. _「나를 따르라」_ 본회퍼


작가: 안녕하세요. 목사님, 날씨가 많이 춥습니다.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목사이자 신학자로 또 저항가로 활발하게 활동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냉전과 독재의 시대에 치열하게 제자도의 삶을 추구한 목사님을 존경하며 닮고 싶어하는 젊은 이들이 많습니다. 또 요즘 세상이 교회의 정체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 때에 본 회퍼 목사님의 삶과 가르침이 요청되어 집니다. 

본회퍼: 인터뷰에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Q1. 목사님이 가지고 있는 성경책에는 깊은 사연이 담겨있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사연이 담겨있는지 듣고 싶습니다. 

A. 이 성경책은 둘째 형의 것입니다. 형이 남기고 간 유산과도 같죠.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당시 첫째 형과 둘째 형이 군에 소집되었습니다. 가족들은 서부 전선에 나가기 전날 밤에 모여서 음악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때의 제 나이가 11살이었는데, 형을 위해서 특별한 노래를 불러주었습니다. 
형들은 치열한 전투의 현장에 투입되었고, 얼마 안 되어 야전병원에서 부상을 치료받던 형은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어머니 파울라 본회퍼와 가족들은 형의 죽음에 깊은 영향을 받았고 어머니는 한동안 거동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형이 가족들에게 남겨준 것이 *견신례 때 받은 성경책이었습니다. 
 
*견신례: 세례를 받은 신자가 믿음을 견고히 하기 위해 받는 성사로서 한국 개신교의 입교의식과 
비슷하다. _「디트리히 본회퍼 사진으로 보는 그의 삶」_ 주잔네 드레스 p.37

 
 Q2. 목사님의 일화들을 보면 가족애가 자주 등장합니다. 목사님께 가족은 어떤 존재인가요?
  
 A. 인간관계의 모체라고 생각합니다. 식구가 많아서 북적북적한데, 그 속에서 함께 인격을 나누고 사상을 나누면서 저의 인간관계를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고 봅니다. 저의 선조들은 공교육 보다는 지적 전통을 중시하는 가문이었어요. 그래서 가정 안에서 선조들의 생각과 경험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법을 배웠죠. 세공인, 목사, 의사, 시의원 시장 등의 다양한 직업을 가진 분들이었어요. 어머니 역시 강인하며 지혜로운 여인이었기에 직접 8남매의 교사가 되어주셨죠. 아버지는 정신의학 및 신경병학 교수와 병원 관리자로 바쁜 일정 속에서도 가족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잊지 않고 챙기셨고, 주일 저녁식사 후에는 가끔씩 가족들을 모아두고 고전문학을 큰 소리로 읽어주시곤 했습니다.

요즘엔 자식이 여덞 명이라고 하면 대단히 많게 여기지만 우리는 너무 많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집은 넓고 아이들은 정상적으로 자라고 있으며 우리는 아직 나이가 많이 들지 않았다. 우리는 아이들을 버릇 없게 만들지 않으면서도 이들이 행복한 어린시절을 보낼 수 있게 해주고 싶다. _「나를 따르라」_ 본회퍼_p.23 

아, 가족음악회도 있었습니다. 토요일 저녁이 되면, 가족 모두가 저녁식사를 맛있게 먹고 난 후에 각자가 자신 있는 악기들을 연주하면 어머니는 반주 소리에 맞추어 매력적으로 노래를 부르셨죠. 참으로 사랑스러운 조화가 있는 시간들이었습니다.


가족 모두가 모였다. 7시 30분에 저녁식사를 한 뒤 거실로 갔다. 보통 남자아이들은 삼중주로 시작했다. 즉 칼 프리드리히는 피아노를, 발터는 바이올린을, 클라우스는 첼로를 연주했다. 그 다음에는 우리 어머니가 회른헨 의 반주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셨다. 그 주에 교습을 받은 사람은 그날 저녁에 배운 것을 선보여야 했다. 자비네는 바이올린을 배웠고, 두 언니는 이중창과 슈베르트, 브람스, 베토벤의 가곡을 불렀다. 디트리히는 칼 프리드리히보다 피아노를 훨씬 잘 쳤다._「디트리히 본회퍼 사진으로 보는 그의 삶」_ 주잔네 드레스


 Q3. 유대인들을 위해 전력을 쏟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게 하실 수 있던 계기가 있다면요?

A.*아리안 조항이 공식적으로 공포되면서 유대인들에 대한 위협과 학살이 심해졌습니다. 1933년 4월 1일 오전 10시에, SA와 SS 군대(나치 친위대) 가 유대 사업장마다 들이 닥쳤습니다. "독일 국민들이여 ! 스스로를 보호하라 ! 유태인에게서 사지 마라!" 외치며 유대인 상점들 앞에 진을 치고 구매하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아리아인이 아닌 국민들"에 대한 정책은 저희 가문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저의 쌍둥이 동생인 자비네의 남편(게르하르트 라이프홀츠)와 저의 절친인 프란츠 힐데브란트 뿐 아니라 아버지의 조수들까지 추방당했습니다. 이렇게 독일 거주 유태인들에 대한 핍박이 히틀러 정권에 대한 정치적 저항에 가담하게 된 주된 원인이 되었습니다. 지독한 반유대주의는 교회에 까지 흘러들어 왔고 목사들 중에선 이미 히틀러 추종자들이 있었습니다. 자신들을 "독일 그리스도인"이라 부르며 아리안 조항을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왜곡된 교회에 대한 선언문을 작성하여 독일에 있는 교회 뿐 아니라 전 세계에 있는 교회들에 심각성을 알리고 적극적으로 협조해 줄 것을 호소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독교의 선포를 위험에 빠뜨리는 교회는 스스로를 부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국가와 관련해서 세 가지 행동을 해야 한다. (앞서 말했듯이) 첫째, 교회는 국가의 행위가 합법적이고 적절하게 이루어졌는지를 물어야 한다...... 둘째, 우리는 국가의 행위에 희생당한 자들을 돌보아야 한다. 교회는 모든 사회 질서의 희생자들을 반드시 도와야 한다. 심지어 그들이 기독교 공동체에 속하지 않았더라도 그래야 한다...... 세 번째 행동은 바퀴에 짓밟힌 사람들의 상처만 싸매주는 것이 아니라 바퀴 자체를 멈추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가 취해야 할 직접적인 정치적 행동이다."_「유태인 문제에 직면한 교회」_ 본회퍼
   
 
Q4. 정치적 저항은 어떤 식으로 진행이 되었나요? 

A. 공공연하게 정치 뿐 아니라 교회는 히틀러의 통제 아래 놓여지게 되었습니다.  교회에 침투한 히틀러 추종자 목사들이 힘을 얻게 되면서 주변 교회들에 대한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유태인 목사들은 추방당하거나 수용소에 수감되는 상황이었으니 짐작이 가시죠?  저희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사촌들과 가족 모두는 저항에 전력을 쏟았습니다.  제가 핑켄발데 신학원에서 「제자도」 과목을 가르치면서 구성원들과 교회와 공동체를 사회적 형태로 발전시켜 나가고자 했습니다. 산상수훈에 입각한 제자도를 실천하는 공동생활을 구축하고자 했습니다. 비록 법령, 금지령, 체포 같은 방법으로 학교는 문을 닫아야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희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핑겐발데에서 실험된 신학교육과 공동생활은 이후에도 소그룹 형태의 "공동교구목사들" 로 거의 2년 반 동안 유지되었습니다. 

이 모임은 비밀리에 움직였고, 독일 내에서 뿐 아니라 스위스, 미국, 런던 주변국들을 오가면서 저항을 시도하였습니다. 저는 스위스에 막중한 임무를 띠고 방문을 했습니다. 그 임무는  연합국과의 새로운 접촉창구를 개설하는 것이었고 서유럽의 지도자들이 모인 회의 자리에서 나치체제의 심각성과 소멸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제가 스위스에서 잠시 머물고 있을 당시 스위스 당국에서는 유태인 표식에 관한 경찰규정이 발효되었습니다. 모든 유태인의 옷에는 "별모양"을 새겨 넣어서 정보국 첩보원으로 위장시킨 후 이송하는 작전을 계획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작전이 "작전 7호(유태인들을 비밀리에 스위스로 이송하는 작전)"입니다. 

새로운 접촉 창구는 벨 주교를 통해 영국 정부와의 접촉을 시도하는 것이었지만, 아쉽게도 부정적인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이번에는 암살을 시도하기로 했습니다. 두 차례에 걸친 암살시도는 이렇게 진행되었습니다. 첫 번째는 히틀러가 독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 시한폭탄을 설치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무기 박물관"에 방문할 히틀러와 자폭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두 번에 걸친 암살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Q5. 간디를 만나고 싶어했다고 들었습니다. 

A. 네, 그의 일상을 공유하고 싶었습니다. 그의 삶을 통해서 평화주의를 배우고 싶었습니다. 편지도 보냈었습니다. 긍정적인 회신이 왔지만, 저의 교구들과 동료들을 버릴 수 없게 되어 인도 방문을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Q6. 테겔 형무소에서의 시간은 말할 수 없이 가혹했으라 봅니다. 오히려 절망을 넘어 창작활동에 몰두하셨다고 하는데요. 어떤 시간을 보내셨나요 ?

 


A.  제가 갇힌 감방은 가로 2m, 세로 3m의 감방에서 생활을 했습니다. 푹신함과는 거리가 먼 딱딱하고 냉기가 도는 판자 침대, 벽의 게시판, 걸상, 양동이가 있었죠. 묵직한 나무문에는 밖에서 저를 감찰하기 위한 틈새가 있었는데, 저는 밖을 볼 수 없었습니다. 이곳에서의 생활은 너무나 가혹하게 느껴졌습니다. 죄수에게 비누도 갈아입을 옷도 없었습니다. 저는 정치범으로 들어오게 되었는데 간수들과의 대화는 일절 할 수 없었습니다. 지독한 고독이 밀려왔습니다. 
 
"불만족-긴장. 조급함. 갈망. 지루함. 밤-깊은 외로움. 무관심. 뭔가 새로운 것을 하려는 열정. 변화. 새로움. 따분함. 싫증. 잠-가혹한 징계의 공격. 상상력의 분출. 과거와 미래의 왜곡. 자살. 죄책감 때문이 아니라 내가 기본적으로 이미 죽었기 때문. 완전 중지. 끝. 뇌가 행복한 순간들을 더 잘 기억하는가? 왜 그런가? 과거의 고통은 극복된 것으로 보인다. 아직 극복하지 못한 고통(용서받지 못한 죄)은 늘 새로우며 아픈 기억으로 이어진다. _「디트리히 본회퍼 사진으로 보는 그의 삶」_ 주잔네 드레스

저는 1943년 4월부터 7월 까지 심문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함께 가담했던 주변인들을 심문하기 시작했고, 우리는 서로 말을 맞춰야 했습니다. 서로의 감방이 달랐지만 책에 연필로 표시를 해둠으로써 암호를 교환했습니다. 저는 주로 정보국의 "작전 7호"에서 맡은 임무, 공모를 위한 여행, 고백교회 목사들의 병역 면제를 중심으로 심문을 당했습니다. 가혹한 심문이 끝나고 나면 감방에 돌아와 저는 가족들과 약혼자, 친구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편지가 저의 즐거움이 되어 주었습니다. 이때 주고 받은 편지들을 토대로 책을 출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_「저항과 복종」, 국내에서는 「옥중서간」으로 출간

 심문의 강도는 더욱 심해질수록 독서하는 것을 놓지 않았습니다. 
아니, 더욱 몰두했습니다. 형무소에는 도서관이 있었는데 그곳에 빌리거나 다른 죄수들과 교환하며 단단한 지력을 소유하고자 했습니다. 읽은 책들을 토대로 저는 시와 문학작품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곳에서 나는 거의 매일 이런 식으로 과거와 만난다. 과거를 단단히 또한 새롭게 붙잡으려고 한다."
_「디트리히 본회퍼 사진으로 보는 그의 삶」_ 주잔네 드레스

형무소에서의 시간은 점점 더 저를 강하게 만들어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도 제자도의 삶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 동료 죄수들을 돕기 위한 메모("공습경보에 관한 메모" 와 "감옥상황에 대한 메모")를 작성하였고, 이 시대에 요청되어지는 교회의 역할에 대해서도 고민과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비종교적 기독교"라는 개념을 만들어 냄)

Q7. 목사님의 삶을 들어보니 파란만장한데요. 주저앉고 싶을 때도 있으셨을 것 같아요. 그럴때마다 견딜 수 있는 힘, 이겨낸 힘은 어디에서 얻으셨나요? 

A.  참 쉽지 않은 시간들이었죠. 그러나 사랑하는 가족들과 동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봅니다. 
제가 성경을 대하면서 가장 감명과 영감을 받았던 것은 바로 산상수훈이었습니다.  산상수훈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향한 사랑의 메시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산상수훈에 입각한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반응이요, 제자도의 삶이라고 봅니다.


그 당시에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나 자신에게 개인적인 이익을 주는 것으로 간주했음을 잘 알 고 있네. 나는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네. 사실 그 당시에 나는 도무지 기도하지 않았다네. 어쩌다 기도를 해도 아주 짧게 했지. 혼자 있을 때에는 나 자신에게도 도취되어 즐거워하기도 했네. 그런데 성경, 특히 산상수훈이 나를 그런 상태에서 해방시켜주었네. 그때 나의 모든 것이 변했네. 나는 이것을 분명하게 느꼈고, 내가 변화되었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도 느낄 수 있었다네. 그것은 굉장한 해방이었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네. 그리고 어느 정도까지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 점차 분명해졌네._1936년 친구에게 보낸 편지_


Q8. 목사님의 기도제목을 듣고 싶습니다. 

 A. 기도제목이라, 기독교 혹은 그리스도교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에 대해 고민한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신학의 말이든 경건의 말이든, 말로 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영성과 양심의 시대도 지나갔습니다. 사실상 모든 형태의 종교적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어쩌면 ‘종교적‘이라고 단호히 말하는 사람들 조차 종교를 실천하고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행위가 뒷받침 되지 않는 종교가 당연시 되어 교회에 불신을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강조하고 싶은 것은 시대적인 흐름 속에서 교회는 가난한자들, 억눌린자들, 힘없고, 약한자들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정치 흐름에 대한 긴장을 늦추지 말며, 희생자들을 보살피며, 옳지 않은 것에 대해선 바르게 말할 줄 아는 책임이 있습니다. 
산상수훈을 문자적인 연구가 아닌 실재적인 연구가 이루어지고 삶으로 실천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기독교의 선포를 위험에 빠뜨리는 교회는 스스로를 부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국가와 관련해서 세 가지 행동을 해야 한다. (앞서 말했듯이) 첫째, 교회는 국가의 행위가 합법적이고 적절하게 이루어졌는지를 물어야 한다...... 둘째, 우리는 국가의 행위에 희생당한 자들을 돌보아야 한다. 교회는 모든 사회 질서의 희생자들을 반드시 도와야 한다. 심지어 그들이 기독교 공동체에 속하지 않았더라도 그래야 한다...... 세 번째 행동은 바퀴에 짓밟힌 사람들의 상처만 싸매주는 것이 아니라 바퀴 자체를 멈추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가 취해야 할 직접적인 정치적 행동이다."   유태인 문제에 직면한 교회  _ 본회퍼
  
epilog. 디트리히 본회퍼는 1943년 4월 5일, 한스와 크리스티네 폰 도나니 부부, 요제프와 마리아 뮐러 부부와 함께 체포되었고 1945년 4월 9일에 처형당했다. 
   
참고문헌: 
1.「디트리히 본회퍼 사진으로 보는 그의 삶」_ 레나테 베트게‧ 크리스티안 그레멜스 엮음. 정성묵 옮김_ 가치창조 
2.「디트리히 본회퍼: 나를 따르라」_엘리자베스 라움 지음_길성남 옮김_좋은씨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