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학의 교육 2/[인터넷성경교육]

제62과 사무엘하(3): 다윗 왕국의 위기와 극복(2) (14-20장) 10

好學 2012. 11. 27. 21:47

제62과  사무엘하(3): 다윗 왕국의 위기와 극복(2) (14-20장) 10

 

4. 세바의 반역과 진압(20장)

 

  다윗 왕을 궁으로 모셔오는 일로 인해 유다 지파와 이스라엘 지파가 다투던 길갈에는 비그리의 아들 세바라고 하는 난류가 있었다. '난류'('이쉬 벨리야알')라는 말은 '무익한 사람', '파괴적인 사람'이란 뜻을 가진 말로서(16:7), '비류'(삿 19:22; 삼상 10:27; 30:22; 왕상 21:10; 대하 13:7),  또는 '불량자'(삼상 2:12; 25:17, 25; 잠 6:12; 16:27)라고 번역되기도 했다.

이는 부도덕하고 사악한 자로 하나님과 사람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는 무익하고 쓸모 없는 자라는 뜻이다(고후 6:15). 세바는 베냐민 지파의 족장급 인물로서, 사울가를 지지하는 과격한 선동가였다(Lange). 그는 나팔을 불면서 우리가 이새의 아들 다윗과 함께 할 업이 없다고 소리치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선동했다(1). 그가 불었던 나팔('쇼파르')은 수양의 뿔로 만든 양각 나팔로서, 이 나팔은 신호용으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임박한 재앙을 경고하거나 성문을 닫는 것을 알리기 위해 사용되었다(E. Werner). 이러한 점에서 보면 세바가 나팔을 분 것은 다윗 왕의 파문과, 그에 대한 반란을 선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는 이스라엘이 다윗으로부터 독립해서 새로운 나라를 세워서 그들의 토지나 기업이 다윗의 간섭을 받는 일이 없게 해야 한다고 소리쳤다. 그는 다윗을 이새의 아들이라고 부름으로써 그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윗을 좆기를 그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다윗 왕에게 등을 돌려 그의 통치를 거절한다는 의미를 포함하는 반역 적인 행위였다.

 

이러한 세바의 선동으로 인해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윗을 좆는 일을 중단하고 세바를 좆아 자기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유다 지파는 끝까지 남아서 다윗이 예루살렘에 들어갈 때까지 함께 동행했다(2). 다윗은 예루살렘에 돌아온 후에 전에 남겨 두었던 후궁 10명을 잡아서 별실에 가두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먹을 것만 주고 그들과 동침하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그들은 평생을 생과부로 지내야만 했다(3).이들은 압살롬이 동침했던 후궁이었다.

다윗이 이들을 별실에 격리시킨 것은 수치를 당한 여인에 관한 율법 조항(신 9:1-4)을 따른 것이었다. 모세 율법은 다른 남자와 관계를 가진 아내를 다시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신 24:4). 특히 이들은 아들과 동침하였기 때문에 근친상간에 해당되었으므로(레 18:6-8), 더욱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다윗 왕은 그들을 성밖으로 내쫓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다윗은 이 일이 자기에게도 책임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죽이거나 내쫓는 가혹한 형벌은 하지 않았다.

 

  다윗은 세바를 진압하기 위해서 군대장관 아마사에게 3일 내로 유다 사람들을 소집하고 예루살렘에 와서 있으라고 명령했다. 다윗은 아마사에게 세바의 난을 평정한 기회를 주려고 했다. 다윗은 이렇게 함으로 요압 앞에서 그의 권위를 세워주고, 그를 군대 장관으로 삼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려고 했다. 그러나 아마사는 다윗의 명령을 듣고 떠났지만 정한 기한이 넘도록 돌아오지 못했다.

그가 지체된 것은 아마도 그의 무능력함과 반란군의 수장이었던 그에 대해 유다 사람들이  협조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윗은 아마사가 지체하는 것을 보고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아비새를 불러서 왕과 궁정을 지키는 정예병을 이끌고 세바를 추격하도록 지시했다. 다윗은 세바의 추격이 더 이상 지체하되면 그가 견고한 성에 들어가서, 체포하는 일이  어려워 질 것을 염려했다.

 

 이에 요압과 아비새는 황실의 정예병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떠나 세바를 추격하기 시작했다(4-7). 그들이 기브온 큰 바위 곁에 이르렀을 때에 유다 지파를 소집하러 갔던 아마사를 만나게 되었다. 이때에 요압은 아마사에게 인사를 하는 척하면서 아마사에게 나아갔다. 아마사는 요압의 허리에서 칼이 빠진 것을 보고 그를 크게 경계하지 않았다. 그러나 요압은 숨겨두었던 단검을 몰래 꺼내서 아마사에게 인사하는 척 하면서 그를 죽이고 말았다. 그의 시체가 길에 있는 것을 보고 지나가는 군사들이 길을 가다가 멈추어 섰다. 이를 본 군사 중 하나가 아마사의 시체를 큰길에서 옮겨서 옷을 덮어주었다. 그리고 요압과 아비새는 그 군사들을 이끌고 계속해서 베그리의 아들 세바를 추격했다(8-13).

 

  요압은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를 지나가면서 그들의 군사들을 통합해서 함께 세바를 추격했다. 이때에 요압이 거쳐간 성은 아벨과 벧마아가와 베림의 모든 지역이었다. 요압이 이끈 군사들은 벧마아가 아벨로 가서 세바가 있는 성을 포위했다. 그리고 그 성을 향해 해자 언덕 위에 토성을 쌓고, 그 성벽을 쳐서 헐어버리려고 했다. 그 때에 그 성안에 사는 한 지혜로운 여인이 요압을 불렀다. 그리고 그녀는 요압에게 어찌해서 이유도 없이 화평하고 충성스러운 성을 공격하느냐?고 항의했다.

요압은 자신들이 여호와의 기업을 멸망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에브라임 사람 비그리의 아들 세바가 다윗 왕을 대적하기 때문에 성을 공격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요압은 만일 세바만 내어주면 즉시 이 성을 떠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자 그녀는 세바의 머리를 베어서 성밖으로 내어 던질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 여인은 성안에 있는 모든 백성들을 설득하여 비그리의 아들 세바의 머리를 베어 요압이 있는 곳으로 내던졌다. 요압은 세바가 죽은 것을 확인하고 나팔을 불어 추격 작접이 완료되었음을 알렸다.

 

이로 인해 모든 백성들은 세바의 추격 작전을 끝내고 각자 자기 고향으로 돌아갔으며, 요압은 예루살렘으로 와서 다윗 왕에게 그 일을 보고했다(14-22). 이와 같이 해서 다윗은 여호와의 도우심으로 왕권에 대한 중대한 위협을 성공적으로 막아낼 수 있었다.

 

사무엘서 기자는 큰 단락을 마무리 할 때에 하던 대로(8:15-18), "다윗 용사들의 명단"으로 이 단락을 끝내고 있다(20:23-26). 여기에 기록된 다윗의 용사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1) 군대장관-요압,

2) 그렛과 블렛의 장관-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

3) 감역관-아도니람,

4) 사관-아힐룻의 아들 여호사밧,

5) 서기관-스와,

6) 제사장-사독과 아비아달,

7) 다윗의 대신-야일사람 이라.

이러한점에서 보면 (삼하 9-20)장은 다윗의 약점과 단점을 있는 그대로 증거하는 동시에, 여호와의 은혜의 언약에 따라 그의 왕권이 보존된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 다윗은 완벽한 왕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과 신실하심은 변함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