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世界信仰人]

우치무라 간조 (内村鑑三)

好學 2012. 8. 27. 08:18

영혼의 항해일지 - 우찌무라 간조

 

우치무라 간조 内村鑑三

 

(1861.03.26~1930.03.28) 일본

일본의 기독교 사상가이다. 서구적인 기독교가 아닌, 일본인들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가르침 즉, 일본적인 기독교를 찾고자 한 사상가로 평가 받는다.

 

 

 


기자: 안녕하세요, 갓피아 여러분. 오늘은 일본의 우찌무라 간조 선생님을 모시고 인터뷰를 진행하겠습니다. 간조 선생님은 1800년대, 아직 기독교가 알려지지 않았던 나라인 일본에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 무척 노력하신 분이에요.

 

간조: 지금은 일본에도 큰 교회가 많이 세워졌지만 제가 있던 시대만해도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에서는 예수님이나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Q1. 그렇다면 선생님은 언제부터 신앙생활을 시작하셨나요?

 

우찌무라 간조의 고향 자로에도

 

 

A1. 제가 학교를 졸업할 무렵, 친구 한 명이 제게 물었죠. “나와 함께 외국인 구역에 가지 않을래? 예쁜 여자들이 노래를 부르고, 키 크고 몸집이 좋은 긴 수염을 한 남자가 환상적으로 팔을 흔들고 몸을 비틀면서 높은 곳에서 소리치고 울부짖는 것을 구경할 수 있어. 입장료는 완전히 공짜야.”
이것이 제가 처음 들은 교회에 대한 묘사였습니다. 그렇게 재미 삼아 나간 교회는 생각보다 즐겁고, 또 친절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즐겁게 논다고 해서 제가 기독교인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해보지 못했어요!
그러나 당시 새로 설립된 국립 전문학교-외국인 개척자에 의해 신설된 삿포로 농업 대학-의 신입생이 되었을 때, 저는 일생일대 최대의 위기에 봉착하게 됩니다. 대학에 입학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필수 서류 중 하나였는데, 바로 ‘예수님들을 믿는 자들의 서약’에 사인을 해야 하는 순간이 온 것이죠.
그 때만해도 기독교, 그러니까 교회는 가면 즐거운 곳, 사람들이 친절한 곳,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에 저에게 이제껏 믿어온 것을 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신앙을 시작하라는 것은 일본이라는 작은 나라의 온갖 토속 신을 따르며 자랐던 저에게 너무나 벅찬 요구였습니다.
너무나 암담하고 슬퍼진 저는 학교 근처에 있는 우상 신전의 근처에 가서 (그 때 이후로 내가 기독교의 하나님께 드린 어떤 기도 못지 않게 진지하고 참된)기도를 올리기도 했습니다. 부디 내가 그 ‘서약문’에 사인하지 않고도 무사히 학교를 다닐 수 있도록 말이죠.
그러나 아시다시피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반 강제적으로 사인을 했고, 그렇게 어이없이 제 신앙 생활의 첫 걸음이 시작 되었습니다. 고백하건대 기독교를 향한 저의 시작은 이렇듯 강제적인 것이었고, 내 양심에 반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저는 그러한 강압에 굴복하지 않았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웃음).


Q2. 일본, 하면 토속신의 나라로도 유명하잖아요? 그것에 대해 잠시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A2. 저는 셀 수 없이 많은 사원마다 각각 신이 있다고 진지하게 믿었고, 제 눈에 그 신들은 재판권을 빼앗기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며 죄인은 언제든지 벌을 줄 채비를 하고 있었죠.

 

오모히가네(思金神) 신사

 

예수님을 알기 전 까지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오모히가네(思金神) 는 배움과 글쓰기의 신이었는데, 전 이 신을 위해 합당한 정결과 희생으로 매월 25일을 신실하게 지켰습니다. 그 신의 형상 앞에 꿇어 엎드려서 필체가 나아지고 기억력이 좋아지게 해달라고 진지하게 간청했던 기억이 나는군요. 지금 생각하니 참 부끄러운 한편 웃기기도 합니다.

오오야마쯔미(大山津見神)를 모티브로 한 연극


그리고 또 기억나는 게 쌀 재배를 주재하는 오오야마쯔미(大山津見神)신입니다. 그가 인간에게 보낸 심부름꾼은 흰 여우의 형상이죠. 그 신에게는 불과 도적으로부터 사람들을 지켜주는 능력이 있다고 전해졌는데, 아버지가 집에 거의 계시지 않은 탓에 어머니와 단 둘이 있는 날이 많았던 저는 이 신에게 우리를 보호해달라고 매일매일 불쌍하리만큼 애원하기도 했습니다(웃음).


야타가라스(八咫烏)의 형상물

 

마지막으로 제가 가장 두려워했던 신은 까마귀의 형상을 한 신 야타가라스(八咫烏)로, 인간의 가장 내밀한 마음을 살피는 신이었습니다. 그의 신전을 지키는 사람이 입구에서 나누어주는 음산한 까마귀 그림의 종이에는 기적을 일으키는 특성이 있어서 거짓말을 한 사람이 그것을 먹으면 바로 심한 출혈을 일으킨다고 전해지죠. 친구들끼리 서로 믿지 못할 때 종종 그 종이를 들고 와서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는데 사용하곤 했죠. 아, 그러고 보니 치통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치유의 능력을 발휘하는 재미있는 신도 있었군요. 제가 바로 그 괴로운 질병에서 고통 받은 사람 중 하나였기 때문에 이 신의 발치에도 수 없이 엎드렸는데, 그 신은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특히 배(pear)가 해로우니 멀리 하라고 강요했고, 저는 의심의 여지 없이 순종했습니다. 나중에 화학과 식물학을 공부하게 되었을 때 저는 비로소 썩어가는 치아에 미치는 포도당의 해악이라는 아주 잘 알려지고도 지극히 과학적인 근거를 발견하게 되었죠(웃음).

 

지금은 이렇게 과거를 회상하며 웃을 수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제가 더듬어 헤맸던 영적인 어두움, 천박한 미신으로 꾸준히 지속되었던 그 어두움만큼 부끄러운 것도 없다는 것을 밝혀두고 싶군요.


Q3. 그렇게나 많은 신을 섬기다가 유일신인 하나님을 믿기가 힘들지는 않으셨나요?

 

A3. 참 신비하게도 새로운 믿음의 실용적인 유익은 금방 드러났습니다. 제가 그 믿음을 물리치려고 안간힘을 쓰는 동안에도 이미 그것을 내 자신이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죠.
세상에는 제가 이제껏 믿어온 8백만 이상의 많은 신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신만이 존재한다는 기독교의 ‘유일신론’이 제 뿌리 깊은 미신을 송두리째 뒤흔들며 제가 이제까지 믿어온 온갖 잡다한 신들이 한 하나님을 소유함으로 인해 전부 쓸모 없는 것이 되었음을 아는 순간, 저는 제 양심에게서 들려오는 ‘그래, 바로 이거야!’ 라는 외침을 들었습니다.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은 저의 작은 영혼에 참으로 기쁜 소식이었나 봅니다.

사방에 위치한 네 부류의 신들에게 아침마다 드리던 긴 기도도 이제는 필요 없고, 길을 갈 때마다 지나는 모든 신전들 앞에서 더 이상 기도를 반복하지 않아도 되고, 독특한 서약과 금기들을 가지고 이 신을 위해서는 이 날을, 저 신을 위해서는 저 날을 지킬 이유도 없게 되었습니다. 뭐랄까요, 이건 완전한 자유였죠! 신전 하나하나를 지날 때마다 제가 얼마나 자랑스럽게 머리를 곧추세우고 거리낌 없는 양심으로 지나갔던지! 이제 내가 신 중에 신을 찾았고 바로 그 위대한 신이 나를 지지해 주니, 다른 신들은 그들에게 기도를 드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더 이상 나를 벌할 수 없다는 확신은 마치 누군가가 저의 인생의 짐을 걷어간 느낌이었습니다!
유일신인 하나님을 믿는 것이 어려웠느냐고요? 천만에요!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제 손으로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서약을 한 순간, 저의 영혼은 무거운 꺼풀을 벗고 비로소 안식을 찾았습니다.
그 날을 저는 제 일기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12월 1일
‘예수 종교’의 문으로 들어서다.

그보다는 강제로 들어섰다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즉, 강제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의 서약문에 서명을 했다.


Q4. 삿포로 농업 대학의 생활은 어땠나요?

 

A4. 저는 무척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아시다시피 좋은 친구들이 있다는 것은 인생이 활기차진다는 것을 의미하죠. 더군다나 같은 하나님을 믿는 친구들이 항상 곁에 있다는 사실은 하루하루를 즐겁게 살아가게 할 뿐만 아니라 든든한 버팀목이 되기도 합니다.
저는 각양 각색의 특징과 은사를 지닌 멋진 일곱 친구들과 ‘우리들의 작은 교회’라는 종교 모임을 만들어 활동했습니다. 모임이라 하니 꽤 거창해 보이는데요, 사실 한 주일에 한 사람이 ‘지도자’의 역할을 맡아서 그 날 하루 동안의 목사요, 신부요, 선생이요, 심지어는 종의 역할을 담당하는 모임이었죠. 성격과 특색이 각각 다른 일곱 명이 만들어내는 ‘지도자’의 모습도 또한 매우 달라서 매주의 모임에는 웃음이 끊어지질 않았죠.
이런 ‘작은 교회’ 같이 서로의 이야기를 자유롭게 나누며,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는 친교를 염두에 둔 모임도 있었지만 매 주 수요일 저녁 9시 30분에 열리는 기도 모임처럼 ‘이야기’는 전혀 없이 오로지 기도에만 열중하는 사뭇 진지한 모임도 있었습니다.
저의 삿포로 대학의 생활은 평생을 함께 해도 좋을 친교와 영혼을 살찌우는 시간들, 그리고 자연스레 열중되는 학업으로 이루어진, 다시 생각해도 꿈 같은 시절입니다. 순수해서 더 열정적이었던 그 때가 아직도 그립군요.


Q5. ‘우리들의 작은 교회’ 활동은 졸업과 동시에 끝난 건가요? 목사와 평신도가 동등한 입장이라는 점에서 상당히 민주적인 교회로 보이는데요?

 

A5. 비록 절반은 재미로 시작한 모임이었지만 ‘우리들의 작은 교회’ 모임은 제 평생에 가장 이상적인 롤모델로 자리잡았습니다. 교회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긴 이해할 수 없는 현상 중 하나가, 목사는 위에 있고, 평신도는 목사 및 사역자의 아랫사람으로 간주되는 것이었거든요. 저희가 졸업한 1882년부터 제가 유학을 떠나기 직전인 1884년까지, 모임을 주관한 친구들이 합세하여 서구적 교회가 아닌 일본적 교회를 세워보고자 학교에서 모임 형식으로 시작했던 ‘우리들의 작은 교회’를 개척했었죠. 교회의 임원은 5명으로 구성되어 일상적인 일은 그들이 공동으로 처리하고 그 외의 일은 교인들과 투표를 통해서 결정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회원’은 의무적으로 교회를 위해 일해야 한다는 룰도 만들었죠.
이러한 새로운 신앙의 경험이 제 평생의 기독교 사상에 영향을 끼친 것은 두말할 것 없는 사실입니다.


Q6. 하지만 선생님이 자라신 가정은 무척 보수적인 일본의 가정으로 보이는데요, 기독교로 개종했다는 것을 가족들이 받아들이기 힘들어하지 않으셨나요?

 

A6. 1879년 여름에 제 좋은 친구 프랜시스와 함께 저희 집에서 방학을 보낼 계획을 세웠죠. 이 방문의 목적은 단순히 여름 방학을 즐기려는 것이 아니라 집에 계시는 아버지, 어머니, 형제 자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저희는 집으로 향하는 거점마다 열리는 기독교 모임에 참여해서 저희 가족의 복음화를 위한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집을 떠난 지 2년 만에 돌아오니 모든 게 새롭고 들뜬 기분이었죠. 저는 어머니에게 학교에서 새 사람이 되었다고 고백했고 어머니도 예수님을 믿고 변화되어야 한다고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아들을 오랜만에 만난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는 어머니의 귀에는 기독교에 대한 어떤 이야기도 들리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늘 그렇듯 저의 무사귀환을 감사하는 의식, 곧 가족의 우상에게 봉헌하는 시간을 가지셨는데, 그 일은 이제 모든 가족이 기독교인으로서 든든한 믿음의 후원자가 된 지금까지도 문득문득 생각나는, 지울 수 없는 서글픈 기억입니다.


Q7. 당시에는 외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케이스가 흔치 않았던 걸로 아는데요, 어떻게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셨나요?

 

A7. 간단히 말씀 드리자면, 결국 조국을 위해서였지요. 저의 조국에 대한 시각은 언제나 극도로 치우쳐져 있었습니다. 이교도였을 때는 조국을 우주의 중심으로 여겼고, 세상의 부러움을 사는 나라로 믿어왔죠. 그러나 회심하고 난 이후- ‘저 멀리 있는 행복한 나라’와, 400개의 대학이 있는 미국과 청교도의 고향인 영국, 그리고 루터의 조국 독일에 대해 듣고 난 다음-부터 이내 제 마음 속에서 조국은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나라로 비쳐지게 되었어요. 제 조국은 외국인 선교사들이 와서야 비로소 선해질 수 있는 이교도의 나라이고, 하나님이 악마의 손에 완전히 버려둔 나라로 여겼지요. 심지어 우리 나라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해도 세상은 결코 더 나빠지지 않을 것이라고 진지하게 생각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조국에 환멸을 느낀다는 이유만으로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별하는 아픔과, 저 같은 처지의 사람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비용,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간의 경험으로서는 가장 비참하다고 할 수 있는 ‘빈털터리 망명객’으로 낯선 땅을 떠돌아다니는 어려움을 감내하기는 어려웠겠죠. 미국으로 가는 이 과감한 발걸음을 내딛도록 저를 재촉한 동기는 단지 개인적인 만족의 추구만은 아니었습니다.
이 땅의, 그리고 이 땅을 위해 준비된 충성된 아들이 되기 위해서는 조국이 가진 한계를 뛰어넘는 경험과 지식, 그리고 관찰이 필요하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되는 것, 그 인간 중에서도 애국자가 되는 것이 제가 외국으로 나가는 궁극적인 이유였습니다.
저 자신을 더 많이 알기 위해 세상 속으로 들어간 거죠. 다른 민족이나 다른 나라를 접할 때만큼 자신의 자아가 더 선명히 드러나는 경우는 없으며 다른 세상이 자기 앞에 펼쳐질 때 진정한 나를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미국 유학이라는 당시에는 흔치 않은, 그래서 다소 힘든 결심을 했습니다.


Q8. 미국에서 특별히 빠져든 학문이 있다고 알고 있는데요?

 

A8. 하하! 두 말 할 것도 없이 신학입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신학을 배우러 미국에 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자신과 조국의 명예를 위한다는 명목 하에 기독교 사역을 한다는 건 아예 생각도 안 했다는 것을 밝혀두고 싶군요. 기독교를 받아들이라는 권유를 처음 받았을 때도 제가 두려움에 떨게 했던 건 정작 ‘나를 성직자로 만들지나 않을까’ 라는 생각이었을 정도니까요.
그러나 성직자에 대한 제 평생의 편견은 의외로 높은 직위에 있는 현직 성직자들을 만나며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아니, 사실 매우 존경하게 되었죠.

 


 

뉴잉글랜드의 애머스트 대학의 존경하는 실리(Julius Hawley Seelye) 총장님은 성직자요 신학자이셨습니다. 그 외에도 성경 해석학 교수님과 제게 세례를 준 감리교 사역자 등 저는 존경할만한 인품을 가진 성직자를 이상하리만큼 많이 만났습니다. 그분들을 통해 전 성직자가 때론 사회의 가장 유용한 일원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보게 되었고, 그들이 이 세상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종종 위대한 일들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루터도 결국은 성직자가 아니었습니까?

 

실리 총장


 

만약 신학이, 그 어원이 가리키는 대로 하나님에 대한 과학이라면 어느 아담의 자손이 이 학문을 마다할 수 있을까요?
주변의 존경할만한 성직자들을 접하게 된 저의 ‘신학’에 대한 고찰은 나날이 이어졌고, 결국 어느 날 아침, ‘그렇다면 내 영혼아, 신학생이 될지어다!’ 라고 외치며 잠에서 깼습니다. 그러나 그 때까지도 마지막 자존심을 내세우느라 나름대로 단 하나의 중요한 조건을 하나님 앞에 걸었는데 그 조건이란 것이 ‘절대로 전문적인 직함을 달지 않는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허락하셨고, 이러한 일종의 협정(?)을 맺고 나서야 저는 신학교에 들어가 목마른 사람이 물을 마시듯이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님, 제가 목사가 되도록 강요하시지 않는다면 신학을 공부하겠습니다. 제가 기독교 국가의 모든 신학을 소화하는데 성공할지라도 제 이름 앞에 두 개의 D(D.D., 신학 박사)로 지칭되는 그 육중한 칭호를 붙이지 않겠습니다. 저의 이 마지막 희생을 봐서라도 그것만은 허락해 주셔야 합니다.’


Q9. 조국으로 돌아오신 후 조국의 복음화를 위해 헌신하셨는데요, 그 때 얻은 감상을 독자들과 나누신다면요?

 

A9. 3년 반 동안의 해외 유학 생활 동안 하나님은 놀라운 은혜로 저를 보호하셨지만 저는 그곳에서 이방인이라는 느낌을 지우지도, 그리고 지우려 노력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고향으로 귀국하는 날 알았죠. 바로 여기가, 내가 나의 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 땅과 이 지구에 나를 묶어주는 곳이다. 이 곳은 내 고향이자 내 전쟁터다. 나의 봉사와 기도와 생명을 무료로 얻게 될 땅이다-라는 것을요.
비단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사역하고 있는 타국 선교사들과 자국민 선교사들이 느끼는 것은, 자신이 속한 땅에서 부름 받을 때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더욱 뜨거운 열정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땅이 강해지려면 기독교가, 그리고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것을요.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 죄를 깨닫게 하고, 죄를 깨닫게 한 후에는 죄를 넘어서고 정복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배에 타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곧 보게 되어 기뻤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곧 마주칠 참된 진리와 이교도의 싸움에 대한 긴장과 희열로 가득 차 충만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나의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고, (비록 그 모습이 결코 좋게 보이지 않더라도)그들을 제가 아는 가장 밝은 빛 가운데로 인도하는, 어쩌면 쉽지 않을 시간을 앞에 두고도 마치 답을 모두 아는 시험지를 앞에 둔 학생처럼 충만한 기쁨에 떨었습니다.
저를 발견하시고, 그 분의 자식임을 입증하는 띠를 둘러주시고, 내가 가려고 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가신 그 분이 저의 작은 영역에서 치러야 할 전투를 맡기셨는데, 제가 어떻게 감히 거절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저는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 끝에 그 분을 찾았습니다. 그렇게 찾아오신 그 분은 이제 너 자신과의 싸움은 끝났으니, 당신의 전쟁을 시작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1917 좌-나카타일본 / 중-우찌무라 / 우 - 기무라 복음화 운동의 주역


 

이것이 제가 고국에 돌아와 복음화 운동을 시작할 때 든 마음입니다. 사뭇 비장하고 진지했지만 마음만큼 따라오지 못한 부분도 분명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발짝의 발걸음도 헛되이 사용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이루신 크고 작은 역사를 목도하며 하루하루를 즐겁고 충만하게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기독교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닐까요? 매일매일을 전투하듯 살아가되, 그 안의 작은 기쁨마저도 놓치지 않을 수 있는 놀라운 나날들의 연속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찌무라 간조의 추모비

 

기자: 간조 선생님은 노년에 ‘월간 성서 연구’를 비롯한 본격적인 저술 활동에 들어가 주옥 같은 저작들을 쏟아내셨고, 선생님의 기독교 정신과 신앙에 입각한 애국과 정의에 관한 견해는 우리 나라의 김교신과 함석헌에게로 이어져 ‘성서 조선’의 창간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우찌무라 간조 선생님의 하나님과 함께한 즐거운 여정에 동참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