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양원(孫良源)
1902.06.3~1950.09.28
장로교 목사. 여수의 나병환자들 수용소인 애양원(愛養園) 교회에서 나환자들에 대한 구호사업과 전도활동을 하였다.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양자로 삼음으로써 세상을 감복시켰다.
호는 산돌. 1908년 그리스도교도가 되었고, 1917년 선교사 F. J. L. 매크레이에게 세례를 받았다.
1923년 도쿄[東京] 스가모중학교[巢鴨中學校], 1925년 경상남도 성경학원을 졸업했다.
부산의 나병원 전도사로 부임한 후 울산 방어진교회·남창교회(南倉敎會), 양산의 원동교회(院洞敎會) 등을 개척·설립하여 1934년까지 시무했다.
-1938년 평양장로신학교를 졸업했고, 이듬해 7월부터 여수 애양원(愛養院)에서 시무했다.
-1946년 경남노회에서 안수를 받고 목사가 되었다.
-1950년 9월 13일 공산당에게 체포되어 총살당했다.
여수·순천 10.19사건 당시 아들을 처형하여 죽인 범인을 용서하고 양아들로 삼아 전도사로 키워낸 그의 일대기를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제목으로 안용준 목사가 저술했고, 영국에서는 〈씨앗은 죽어서〉로 번역·출판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홍형린 장로의 기획으로 1966년 영화로 만들어졌다. 저서로는 〈산돌 손양원 목사 설교집〉이 있다.
나 예수 중독자 되어야 하겠다.
술 중독자는 술로만 살다가 술로 인해 죽게 되는 것이고,
아편 중독자는 아편으로 살다가 아편으로 인해 죽게 되나니,
우리도 예수의 중독자 되어 예수로 살다가 예수로 죽자.
우리의 전 생활과 생명을 주님 위해 살면 주 같이 부활된다.
주의 종이니 주만 위해 일하는 자 되고 내 일 되지 않게 하자.
기자: 안녕하세요, 갓피아 여러분. <사랑의 원자탄> 이라는 책을 아시나요? 자신의 아들을 죽인 범인을 양아들로 품는 한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내용으로 발간 당시부터 커다란 센세이션을 일으킨 책이죠. 놀라지 마세요! 오늘 갓피아 지식의 거장의 게스트는 바로 그 <사랑의 원자탄>의 주인공이십니다! 안녕하세요, 손양원 목사님!
손양원 목사: 안녕하세요, 갓피아 여러분. 이렇게 만나 반갑습니다.
Q1. 위에 언급된 <사랑의 원자탄> 이라는 소설의 주인공이신데요, 자신의 아들을 죽인 범인을 양아들로 다시 받아들이게 되신 그 경위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합니다.
A1.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아들’들’ 입니다. 1948년, 한창 인민군과 국군의 싸움이 치열했던 그 시기 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사건으로 기록된 ‘여순반란사건’이 있었습니다. 여수와 순천에서 일어난 대량 학살을 일컫는 사건이죠.
그 때 저의 장남과 차남, 동인이와 동신이 두 아들이 순천에 있었습니다. 잘 아는 목사님의 추천으로 그곳에서 학교를 다니며 한편으론 미국 유학을 꿈꾸던 평범한 학생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손양원 목사의 아들들이 순천에 있다’라는 소문이 반란군의 귀에 들어가고 그들이 폭동을 피해 숨어있던 저의 아들들을 찾아낸 거죠. 아이들의 관이 들어온 날의 슬픔이야 어떻게 말을 할 수 있을까요…하늘이 무너진다는 말로는 도저히 표현이 안 되었던 그 순간, 어이없게도 하나님은 이 아이들의 목숨을 앗아간 사람의 영혼을 염려하는 마음을 저에게 주셨습니다.
저는 목사입니다. 영혼을 사랑하고, 그간의 사역의 행적으로도 성도들에게 어느 정도의 신임도 얻은 목사입니다. 그러나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슬픔을 당한 그 순간, 사랑하는 아들을 둘이나 동시에 잃고도 관 뚜껑조차 열어보지 못하는 무력한 슬픔에 잠긴, 하필 그 순간에 찾아온 하나님의 영혼을 걱정하라는 말씀이 달갑게 들렸을 리는 없습니다. 더군다나 저의 자식들을 죽인 범인의 영혼이라니요! 영혼이란게 있는지도 의심스러울 그런 무자비한 사람을 제가 마치 예수님이라도 된 듯이 품어야 합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저희 아들들의 장례식 직전까지 ‘그 영혼마저도 사랑하신다’라는 마음을 무척 강력하게 주셨고, 저에게는 그 마음을 거부할 만한 힘이 없었습니다. 어쩌면 두 아들들이 죽으러 끌려가는 그 순간까지도 자신들을 끌고 가는 사람들에게 예수를 전하는 것을 보았다는 말을 들은 이후여서 더욱 거부할 수가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그 날 저희 아이들에게 총구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긴 사람은 ‘안재선’이라는 그만그만한 또래의 청년이었습니다. 국군이 여순사건에 관여된 모든 반란군들을 사형시킬 때 천신만고 끝에 빼내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저희 아들들을 죽인 죄인이라는 사실을 잊고, 단지 하나님이 무척 사랑하신 한 영혼으로 그 청년을 저희 가정에 받아들였습니다. 받아들이는 우리 가정이나,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남은 안재선 청년이나 피차 몸도 마음도 힘든 시기였지만, 뒤돌아 생각해보니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우리 아이들뿐만은 아니었더군요. 어쩌면 하나님은 그 피비린내 나는 끔찍한 현장에서도 사랑하는 영혼을 쉬지 않고 찾고 계셨음을 저희 가정에 재선이를 보내심으로 보여주신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Q2. 인터뷰 초반부터 벌써 눈물이 나는데요(훌쩍), 목사님이 자라온 가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볼까 해요. 소위 조선에서 내려오는 ‘종갓집 종손’ 이시라고 들었는데 사실이신가요?
A2. 엄밀히 말하면 사실이죠. 가난했지만 문중과 조상에 대한 자부심만큼은 투철했던 손씨 집안에 예수가 들어온 날은 어린 제 기억에 엄청난 파장이었습니다.
아버지 손종일 장로님은 친척 어른의 전도로 교회에 처음 가신 이후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즉각적인 실천으로 옮기신 분이었습니다. 선산을 옮기고, 제사에 사용되는 제기를 불태우고, 상투를 잘라버리는 등 말 그대로 온 집안이 발칵 뒤집어지는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았죠(웃음). 시간이 지나 저희 가정을 비롯하여 가문의 많은 어른들이 그리스도께로 회심했지만 아버지의 그러한 독단적이고도 파격적인 행동이 있지 않았더라면 아마 손씨 집안에 그리스도가 정착되기까지 훨씬 더 긴 시간이 걸렸을 겁니다.
아버지께서 보여주신 단호한 신앙의 모습은 제 유년기에 고스란히 남아 저와 제 자식들의 신앙의 모습으로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가난하고 힘들었던 시절에 아버지와 주고받은 편지를 보니 비록 좋지 않은 집안 형편으로 온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지만 저희 가정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온 가족의 믿음이더군요. 자칫하면 저는 제사를 물려받을 종갓집 종손으로, 그렇게 하나님을 모르고 지나쳤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과감하게 물려주신 신앙의 유산 덕택에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임 받게 되었죠.
Q3. 일본에서 유학을 하셨다고 들었는데, 당시로는 흔치 않은 결정이었던 것 같아요?
A3. 허허. 일본 유학이라니까 굉장히 거창해 보이는군요. 저희 집은 너무나 가난해서 도저히 학교를 다닐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어요. 그러나 너무나 공부가 하고 싶은 나머지 아버지께 허락을 맡고 서울로 올라와 낮에는 학교에 다니고 밤에는 만두를 파는 고학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너도나도 모두 어려운 시대였고, 많은 사람들이 서울로 올라와 살 길을 모색했던 시대이기도 했지요. 하루 종일 시장을 돌며 만두를 팔아도 모자랄 지경인데 낮에는 반드시 학교를 가야 했기 때문에 저녁에서 밤 늦게까지 하는 만두 장사가 잘 될 리가 없었죠. 결국 만두 장사를 그만 두고 친구들의 집을 전전하는 신세까지 갔지만, 친구들의 집도 모두 어려운 상황이었던 터라 그마저도 여의치 않게 되었죠. 저의 서울 유학은 이렇게 쓸쓸히 끝났지만 저의 공부에 대한 열정을 알아봐주신 외삼촌께서 사업차 가시는 일본 행에 저를 데려가 주시겠다는 제안을 하셨습니다. 그곳에서라고 편안히 공부만 할 수는 없겠지만 서울보다는 돈을 벌며 공부하기가 쉬울 거라는 제안이었죠.
아들을 먼 타지까지 보내는 것이 불안하셨을 법도 한데 아버지께서는 집안의 귀중품을 팔아 힘겹게 일본 행 뱃삯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더 넓은 세상을 보고, 무엇보다도 공부를 계속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신념이셨죠.
그렇게 떠난 일본에서 저는 열심히 일하고, 또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일본 역시 타국인에게 관대한 나라는 아니었지만 그 당시 일제 탄압 하에서 모든 물자가 팍팍했던 조선에 비하면 한결 일하기가 수월했죠. 그렇게 중학교를 일본에서 마치고 상급학교를 진학해야 하느냐, 아니면 조국으로 돌아가야 하느냐를 두고 기도하던 중 굳이 일본에 머물러 공부를 더 하는 것 보다는 조국으로 돌아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게 2년여의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Q4. 그렇다면 목사가 되어야겠다는 결심은 언제부터 하신 건가요?
A4. 유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진로를 두고 고민하던 중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목사가 되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경남성경학교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뛸 듯이 기뻐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하나님의 응답이 확실하다는 확신까지 갖게 되었고요.
당시에는 우리 민족이 일제 탄압 아래 있었기 때문에 종교에 대한 박해도 무척 심했습니다. 더군다나 일본 천황에게 경배를 하지 않는 기독교에 대한 탄압은 말도 못할 정도였죠. 예배당에 일본 국기를 세우라는 둥, 예배 전에 동쪽을 보고 일본 천황에게 경례를 하고 시작하라는 둥, 일본 천황을 우상화 시키기 위한 일본의 말도 안 되는 만행은 곳곳에 흩어져있었습니다. 이러한 명령에 불복하는 사람은 가차없이 형무소 행이었죠.
이런 환경에서 목사를 하겠다고 나선 장남의 결정을 말리실 법도 한데, 오히려 부모님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저를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 데리고 나가게 된 것은 분명 이런 뜻이 있었던 것이라며, 힘겨운 길일수록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격려까지 잊지 않으셨습니다. 비록 가난했지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신 부모님의 전폭적인 지지는 많은 돈보다도 든든한 기도의 후원이 되어 목사라는 직분에 기쁜 마음으로 순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Q5. 손양원 목사님 하면 나병환자 사역을 떼어놓을 수 없는데요, 당시에는 나병(한센병)이 굉장히 무서운 병이었는데, 가족들의 반대는 없으셨나요?
A5. 1929년 경남 성경학교를 마치고 첫 부임지가 부산 나병원교회였죠. 제 나이 27살, 결혼한지 꼭 4년만의 첫 사역이었습니다.
나병 환자와 꼭 함께해야 하느냐는 주변의 반대는 물론, 앞으로 아이를 낳아 길러야 하는 아내의 걱정도 이만 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불쌍한 병자를 찾아 다니면서 고쳐주셨는데 저는 그들의 육신의 고통은 덜어줄 재주는 없지만 영혼의 구원자이신 예수를 전해 줄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거기에 생각이 미치고 기도하자 하나님은 생각보다 쉽게 가족들의 마음의 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렇게 가족들을 데리고 부산까지 내려갔으나 사역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습니다. 육신의 병이 깊이 든 나병 환자들의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이죠. 나병은 자신의 온 몸이 문드러지는 것을 지켜보는 육신과 마음의 고통 속에서 결국 가장 추한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무서운 병입니다.
나병 환자들은 그런 죽음을 수도 없이 봐왔고, 상상할 수 없는 고통에 익숙해졌으며, 희망 없는 하루하루에 하늘을 향한 원망만이 늘어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것만이 진정한 구원에 이르는 길임을 그 사람들에게 설명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던지요! 게다가 저는 그들의 병을 고쳐줄 수도 없을뿐더러 고통을 조금치도 덜어주지 못합니다. 자신들의 고통을 이만큼도 이해 못할 사지 멀쩡한 목사가 앞에 나와서 하나님을 믿는 것만이 진정한 자유에 이르는 길이라고 설교하는 것이 그 사람들의 눈에 대체 어떻게 비춰졌을지 생각만하면 암담하고 하루하루가 답답했습니다.
다가갈 길은 오로지 하나,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것뿐이었습니다. 더러운 고름을 흐르는 손을 맨손으로 붙잡고 함께 기도하고, 죽은 이들을 위해 환자들을 모아 기도하며, 매일매일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나병원교회에서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감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고, 성도들은 자신들의 모습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자각하며 육신의 고통을 이겨내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곳에서 사역하는 동안 저의 가정에도 건강한 아이를 둘이나 주시며 저희 가정이 선택한 결코 쉽지 않았던 선택을 위로해 주셨습니다.
Q6. 삶에서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멘토의 역할을 해주신 신앙의 선배가 있으시다구요?
A6. 주기철 목사님은 경남성경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만난 스승님이자 돌아가시는 그 순간까지 제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충실한 신앙의 동반자이셨습니다.
경남성경학교를 다닐 때 교사이셨던 주기철 목사님의 명확한 강의에 매료되어 졸업 후로도 꾸준히 연락을 하고, 사역이 힘들거나 갈림길에 설 때 마다 도움을 받곤 했죠. 주기철 목사님은 부산 나병원교회로 오고자 하는 저의 결정을 가장 먼저 지지해주셨고, 나병원교회에서 사역하며 신학에 대한 학문의 갈증으로 고민할 때 공부에는 언제나 때가 있고 정도(正道)가 있음을 설명하시며 평양신학교에 가기를 독려해주셨습니다.
종교인에 대한 박해가 극심했던 일제 탄압 하에서도 나란히 형무소를 드나들며 서로 용기를 잃지 않도록 격려하곤 했죠. 사실, 목사님이 저와 같은 길을 걷고 계신다는 사실만으로도 용기를 얻은 부분이 굉장히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주기철 목사님이 평양 형무소에서 옥사(獄死)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저는 청주 형무소에서 복역 중이었는데 형무소의 고된 옥살이와는 비교도 못할 만큼 마음이 아팠습니다. 하나님께서 귀히 쓰신 목사 한 분을 순교자로 불러가셨지만 아직도 주 목사님과 하고 싶은 사역이 많았거든요.
Q7.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하셨는데요, 이를 두고 목사님뿐만이 아니라 교회와 가족들까지 위협받았을 텐데 두려움 없이 끝까지 굴하지 않을 수 있었던 계기가 있었나요?
가족들의 건강을 위해 기도하는 손양원 목사의 안부편지
A7. 신사참배는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조상을 우상화시키기 위한 고난도의 전략 중 하나입니다. 단지 우상숭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 민족의 정체성에 혼란을 유도하는 정책이죠.
저는 이미 조상 제사를 비롯한 우상 숭배와 관련 없는 목사였지만 뻔히 보이는 일본의 신사참배정책에는 분명한 반대의 뜻을 보였습니다. 십자가 옆에 일본 국기를 걸어 놓는 것이나, 꼭 신사참배를 하지 않더라도 반대만 하지 않는다면 그냥 넘어가는 일본의 태도에는 ‘하나님을 섬기되 일본 천황도 그와 동등한 위치에 놓아야 한다’라는 교묘한 술수가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이죠.
하나님은 인간에게 영광을 받아야 할 오직 한 분 이십니다.
혹자들은 그냥 국기인데 어떻느냐, 찬성을 하지 않아도 반대만 하지 않는다고 한 마디만 하면 되지 않느냐라며 저를 설득하기도 했지만 저와, 당시 시무하던 애양원 교회의 교인들은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을 현실과 타협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옳은 결정이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저의 긴 옥중 생활이 시작되었고, 교회와 저희 가족도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지만 한 번도 그 결정에 후회해 본 적은 없습니다. 후회할 수 없었다고 하는 편이 더 맞겠군요. 한치 의심의 여지 없이 옳은 결정이었는데, 어떻게 후회를 할 수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그렇게 신사참배를 반대함을 만천하에 확실히 하고 나니 몸은 좀 고생스러울지언정, 마음 하나는 편안하더군요(웃음).
기자: 평생 동안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직하게 한 길을 걸어오신 손양원 목사님과의 꿋꿋한 인터뷰였습니다. 일제 탄압과 6.25라는 힘겨운 시대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담대히 지나오신 그 길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도전으로 다가왔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봅니다.
손양원 목사의 시신과 가족
도서: 손양원/ 오병학 지음/ 규장
이미지출처: 손양원 목사 순교기념관 [孫良源牧師殉敎記念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