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간증]신앙간증글

주님만 섬기다 간 사람 - 장기려

好學 2012. 10. 19. 08:04

 

주님만 섬기다 간 사람 - 장기려

 

장기려 張起呂

(1911~1995.12.25) 한국

의료활동과 사회봉사활동을 펼친 의사. 1950년 월남하여 이듬해부터 부산에 복음병원을 세워 행려병자를 치료하였다. 1968년에는 한국 최초의 의료보험조합인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을 설립 운영하였으며, 전간 환자 치료모임인 ‘장미회’를 설립하여 그 치료에도 정성을 쏟았다.

 

평안북도 용천군 양하면 입암동 출생. 개성 송도고등보통학교, 경성의학전문학교 졸업하고 일본 나고야 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 취득.

 

 

 
평양 연합기독병원 원장, 김일성대학 외과대학 외과 교수,
부산복음병원 초대 원장, 청십자병원 원장, 부산아동병원 원장 등 역임.

최초로 혁신적인 “간의 부분절제(1943) 및 대량절제술(1959)”성공.
6·25전쟁으로 인해 아내 김봉숙과 5남매와의 이별. 둘째 아들 장가용만 데리고 월남.

북에 두고 온 가족을 그리다 독신으로 살았음.

아시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막사이사이상(사회봉사 부문), 국민훈장 무궁화장,
자랑스런 서울대인상 등을 수여함.

호칭:바보의사, 한국의 슈바이처, 살아 있는 성자, 작은 예수
 


Q. 안녕하세요 박사님!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기 편한 자리에 앉으세요.
박사님에 대한 사전지식이 부족한 탓에 얼마 전 제9회 기독교영화제에서 박사님에 대한 인물다큐를 보고 왔습니다.
국경과 사상을 초월한 인정받은 박사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어떻게 인터뷰를 해야 하나 고민이 되더라고요.
어찌나 고민스러운지... 어디서부터 어떤 질문을 해야 할지도... 조금은 서투르더라도 양해해주시고 귀엽게 봐주세요.
 
A. 안녕하세요. 인터뷰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주변에 훌륭하신 분들이 많은데 저를 인터뷰에 초대해주셨다는 건 선택받았다는 건가요? 어쨌든 진실하게 인터뷰에 응하리다.


Q. 선생님의 일화[간의 부분절제(1943) 및 대량절제술(1959) 성공] 중에 “간농염은 수술할 수 있어도,
간종양은 수술을 못한다”는 통념을 깬 선구자였다고 나오는데요, 용감하게 학문적 시도를 할 수 있었던 이유를 말씀해주시겠습니까?
 
 
A. 간절제술은 간조직과 간의 일부를 잘라내는 수술방법입니다. 외과수술에서 가장 까다롭고 어려운 부분이죠.
제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제 기술이 나아서가 아니었고, 온 만물과 사람을 하나님이 만드셨다는 이유였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이기에 만물에 질서가 있듯이 사람에게도 질서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저는 그 질서를 찾아 연구했고,
수술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Q. "나의 세계는 나의 사랑하는 곳에 있다. 그것은 나의 영원한 왕국이다. 아무도 빼앗지 못한다.
인생의 승리는 사랑하는 자에게 있다.“ 라는 말이 무슨 뜻인가요?
 
A. 나의 영원한 왕국. 하늘에 소망을 두는 것이지요. 저에게 큰 영감이 되었던 것은 예수님의 부활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묵상할 때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빛나는 생각이 넘치게 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참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은 죽음으로 마침표 되지 않았고 ‘부활했다는 것’에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인 것이지요.
그래서 전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사랑이라고
사랑은 다른 사람을 위한 죽음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목숨을 아끼는 자는 생명이 없는 자입니다.
잘 죽는 자가 잘 사는 자 인 것이지요. 목숨을 버리라는 것이 순교자처럼 최후를 맞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매일 죽는 것, 자기 부인, 자기 포기, 자기 헌신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사랑은 언제나 형제들에 대한 이웃사랑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진정한 사랑을 소유한 자는 영원한 왕국을 소유한 자요, 인생의 승리자입니다.

“. 나의 세계는 나의 사랑하는 곳에 있다. 그것은 나의 영원한 왕국이다. 아무도 빼앗지 못한다. 인생의 승리는 사랑하는 자에게 있다.
사랑받지 못한다고 슬퍼하지 말라. 우리는 자진해서 사랑하자. 그러면 사랑을 받는 자보다 더 나은 환희로 충만하게 되리라.
 p.252_「장기려, 그 사람」”

Q. 선생님은 가난한 자들의 친구였고, 그들의 치료자이자, 위로자였습니다. 그렇게 하실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A. 하나님께 서원했던 것을 잊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 저를 의사가 되게 해주신다면 가난한자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습니다.”
인생에 많은 고비가 있긴 했었지만, 하나님은 주변의 환경들과 사람들을 붙여주셨고 그렇게 저를 만들어나가셨습니다.
가족과의 생이별은 고통스럽고도 헤아릴 수 없는 아픔이었지만 그래도 하나님 앞에서의 서원은 늘 잊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아픈 환자들이 만약 나라면, 나의 가족이라면 이라는 생각이 그들을 더욱 동정과 정성을 다해 대해주고 싶었습니다.
전쟁의 극한 상황들이 가난한자들을 더욱 극심한 가난으로 치닫게 하는 것을 보면서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섬기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Q. “그 여자(아내,김봉숙)는 내 눈동자요 내 손과 발이었다.”라고 아내를 정의하셨더라고요.
감동적이어서 제가 더 가슴이 설레었어요. 아내에 대한 깊은 그리움을 간직하면서 살아 오셨을텐데,
아내 되시는 김봉숙 여사님은 어떠한 여인이었나요?
 
 
A. 제가 아내와 약혼 할 당시에 3가지의 조건을 달았어요. ‘첫째는 예수를 믿어야 하고, 둘째는 우리 부모님을 모셔야 하고,
셋째는 제가 공부하는 동안 생활비를 대지 못해도 살림을 꾸려 나가야 한다’. 아내는 이 약속을 승낙했고,
우리는 결혼(1932년 4월 9일)을 하게 되었죠. 시어머니의 등쌀에 시달리기도 했고,
최고로 봉급을 받는 의과의사의 아내였음에도 불구하고 삯바느질과 잡일로 손이 늘 터있었죠.
그녀는 그렇게 저에게 희생과 절대 순종을 해주었습니다. 비록 6·25전쟁 이후 생이별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아내의 희생과 절대 순종에 저 역시 아내에게 충실하고 싶었고 재혼을 하지 않았습니다.
 
“내 아내가 절대의 사랑으로 순종했기 때문에 나도 아내에게 죽도록 충성하는 사랑을 주려고 결심했다.
‘나는 이렇게 믿는다’ <부산모임>제25호(1971년8월),5쪽”

Q. 신앙의 모체가 있다면요?
 
A. 할머니(이경심)였습니다. 할머니의 기도는 제가 존재 할 수 있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저를 먹이시고 입히시며
예배의 자리에도 데려가 기도하는 것을 놓지 않으셨습니다. 할머니는 저에 대한 꿈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 이 금강석이 자라나 하나님의 나라와 현실 나라에서 크게 쓰여 지는 일꾼이 되게 하소서.
이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에서 크게 쓰임 받는 일꾼”이 되게 해달라고요.
그것이 의사로서의 삶을 예감하시고 하신 기도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분의 기도가 씨앗이 되어주었습니다.
 
Q. 선생님은 어디에서 신앙생활을 하셨나요?
 
A. 평양 산정현교회입니다. 이 교회하면 조만식 선생(장로)과 주기철 목사를 떠올리실 겁니다.
일본의 신사참배 속에서 목사, 장로, 성도 할 것 없이 모두가 신앙과 신념을 지키기 위해 옥중 살이, 잔인한 고문, 순교를
적극적으로 감내했습니다. 일제의 압박은 결국 교회를 폐쇄시켰습니다(1940년 3월 24일)
그 와중에도 평양 산정현교회 교인들은 교역자의 집에 모여 예배를 드리거나 성도의 각 가정을 방문하는 심방을 통해
예배의 끈을 놓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해방 후 ‘신사참배’에 동조한 교회, 동조하지 않은 교회에 대해서 노회들은 원칙을 내세우며 해결을 도모하는
와중에 불거진 노회 가입 문제는 교회에 불화의 바람을 일으켰습니다. 평양노회는 과거에 주기철 목사를 파면하고
교회를 폐쇄시킨 것에 대해서 어설픈 사과와 함께 노회 재가입을 요청하였고, 이에 대해 교회는 응하자, 응하지 말자는
의견으로 갈렸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표면적으로는 노회 재가입 문제였지만, 시간이 점차 감에 따라 교회 노선에 대한 문제요,
정치와 신앙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 민족주의와 신앙주의의 마찰” 인 셈이지요.
삐거덕거리던 교회는 민족보다는 신앙을 우선시하면서 교회 재건과 함께 3개항 교단혁신, 5개항 복구를 앞세워 교회를
바로 세워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신앙의 재건과 공산주의 속에서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교회의 방편이었던 것입니다.
그 이후로 저의 가슴 속에는 ‘교회 개혁’이 의무감으로 자리 잡게 되었고, 제자들과 함께 성서공부 모임이었던 <부산모임>에
대한 애착으로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Q. 6·25 전쟁 당시 미국이 평양연합병원을 폭격 할 당시 박사님도 그 자리에 계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와중에도 수술을 용감하게 해내셨다고 하는데요?
 
A. 긴박한 순간이었죠.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소련과 미국의 개입이 있었습니다.
기세가 등등했던 북한군은 미국의 기세에 밀리게 되었죠. 1950년 7월부터는 미국공군이 하늘을 꽉 잡고 있던 터였는데
병원까지 무차별로 폭격을 하였습니다. 평양연합병원에 미군이 폭격을 가한 폭탄은 ‘친자 폭탄’이었는데 물체에 부딪히면
곧 파편이 주변으로 퍼져 많은 인명을 살상하는 무시한 폭탄이었죠. 이 폭탄이 제가 병원 2층에서 수술을 하고 있는데
3층 지붕위로 떨어진 게 아닙니까. 순간적인 폭파소리와 함께 진동이 느껴져 저도 모르게 두 손가락으로 두 귀를 막고
수술대 밑으로 허리를 구부렸습니다. 그때에 그 병원 부원장으로 일하던 임영식 선생이 수술에 들어왔다가 깜짝 놀라
두 손을 번쩍 들더니 포로 모양의 태도를 하는게 아닙니까. 그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해요. 조금 있으니 3층 수술실에서
근무하던 교실원들이 얼굴이 창백해 가지고 수술가운을 입은 채 제가 일하고 있는 수술실에 들어왔습니다.
수술을 계속 할거냐고 묻는 질문에 저는 정신을 가다듬고 수술에 충실하게 임했습니다.
폭탄이 투하된 그 시점에서 긴급하게 대학병원 내에 응급수술실을 설치하였고, 파편이 박힌 환자들이 물 밀 듯이 밀려왔습니다.
잠을 지새우고 수술이 총력을 기울여야 하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적으로 환자들이 밀려왔습니다. 정말 비극이었습니다.
 
Q. 김일성 대학에서 의례적인 교수가 되었고 실력까지 인정을 받으셨습니다. 삭막한 시간들이 었을 거 같아요.
그 시간들이 교수님에겐 어떠한 의미가 되어주었나요?
 
김일성 정권하에서 보낸 5년의 시간. 회상을 해보면 많은 일들이 있었죠. 일본의 패망과 함께 찾아온 해방.
감격스러웠고 몸 상태가 많이 악화되어 있긴 했지만 ‘건국하다 죽어야지’라는 일념으로 저에게 주어진 일들에 정성을 다했습니다.
위생과장, 김일성대학 교수로 저의 신분은 상승하게 되었습니다. 원래 김일성 대학에서는 교수가 되기 위한 조건이 있었거든요.
1.교수가 될 만한 실력. 2.유물론자여야 한다. 저는 이 두 조건에 충족되지 않는 사람이었고, 게다가 저는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저를 교수로 임명해 주었고, 김일성 정권 최초의 학위까지 수여하게 되었습니다. .
병원에서의 생활을 기억해보면 늘 물품부족에 시달려야 했다고 할까요? 그래도 생명을 살리는 일에는 정성과 헌신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을 놓을 수 없어서 제 월급을 들여 병원 물품을 구입해야 했고, 저의 아내는 재봉틀을 돌려 환자복을 만들고 바느질 하는 일로
적극 도와주었습니다. 저는 그저 하나님의 뜻에 할 도리를 했을 뿐인데 모범일꾼상을 받게 되었고 이 때 받은 상금은 교회에
헌금도 할 수 있었습니다.
북한 땅에도 공산정권화의 틀이 형성되어 갔고 장애물들이 하나씩 제거되기 시작했습니다. 영향력은 교회에 까지 미치게 되어
신앙인들을 향한 투옥과 고문, 죽이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유물론자가 아니면서 기독교인이라는 핸디캡을 가진 저에게도
늘 소련의 감시가 뒤따랐죠. 오죽했으면 병원장직에서 물러날 때 소련군에게 불려가 사상검토를 받아야 했으니깐요.
기억 속에 잊혀지지 않는 두 사람을 언급해볼까 합니다. 해방 직후 이북에는 다양한 출신의 공산주의자들이 귀국하였습니다.
그 중에 박 일과 최응석이 있었습니다. 박 일은 소련회에서 초등학교 교장을 지낸 교육자요, 공산주의에 투철한 사상을 가진 사람이었죠.
귀국과 동시에 김일성대학의 부총장을 맡을 만큼 실력파였으니까요. 그렇지만 그의 실력은 식량 문제 해결을 위한 첫 농사에서
저조한 수확량으로 숙청되고 말았습니다.
최응석은 저에게 와 유물론을 가르쳐주던 사람이었는데, 북한의 화폐개혁 전 쌀 두 가마니와 두 개의 재봉틀을 매점했다가
모든 공직 박탈, 결국 숙청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저보다 분명 직책이 높았던 사람이었고, 능력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저를 은근히 라이벌로 생각했던 거 같기도 했고요.
어쨌든 공산주의의 긴 터널 속에서 몸도 마음도 힘들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 터널을 나와 고백하건데, 역사의 주관자,
이 세상의 통치자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뼈져리게 배운 시간이었습니다.
“ 나는 그들과 반대로 그들이 말하는 소위 인민들에게 신임을 받게 되어 원치 않는 의학박사 학위까지 받게 되었다.
나는 이것을 나의 자랑으로 생각지 않는다. 다만 공산주의 사회에서라도 역사는 하나님께서 주장하고 계심을 믿게 하는
한 과정을 보여 주셨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_장기려, “나의 생애와 확신”, <부산모임>제 59호(1977년 6월),34쪽
 
Q. 믿음의 여정을 걷고 있는 주의 자녀들에게 용기를 주신다면요?
 
A. 용기요? 저보다 훌륭하신 분들이 많은데...전 그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었을 뿐이죠.
그것이 나의 생각과 다르게 진행된다 해도 하나님은 나의 선택보다 위대하시다는 걸 제 삶을 통해 증명해 보이셨으니까요.
‘의사가 되게 해주신다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다고’ 하나님께 서원을 했었습니다. 주변의 영향은 없었던 거 같아요.
지금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저를 의사로서 사용하시기 위해 주신 마음이었던 거죠. 아내와의 결혼도 그랬고요.
그동안 살아오면서 일제의 탄압도 있었고, 병원에서의 텃세도 있었고 예기치 못한 어려움들이 있었습니다만 그럴 때마다
“예수만을 상대로 영적 생활”에 매진했습니다. 불신에서 믿음으로 돌이키는 힘은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향한 일편단심의
생활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신앙은 현실에 충실해서 현실에서 자기의 본분을 다하며 사는 것입니다. 현실 경시, 현실도피의 생활은 옳지 못해요.
저도 지난날을 돌아보면 경성의전에 다녔을 때를 생각하면 후회가 되요. 의전에 다니면서 암기를 열심히 해서 의학지식은 쌓았지만,
사회과학이나 문학서적에 관심도가 적었고, 이해하지도 않고 넘겨버린 일들이 생각났거든요. 단편적인 의학이 위험하듯이,
단편적인 신앙에만 의지하는 것도 위험합니다. 이는 마치 “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구원을 받으면 된다”는 식과 같죠.
단편적인 신앙에서 벗어나 현실을 직시하고 충실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갔으면 합니다.

 
혼자만의 독백: 제9회 서울기독교영화제(SCFF)에서 <그 사람 바보의사 장기려> 다큐를 보러 갔습니다. KBS에서 방영했던 <인물현대사>를 상영해주었고, 뮤지컬 배우들의 인사와 뮤지컬에 삽입되는 CCM명곡들을 불러주었습니다. 이념을 초월한 위대한 인물 장기려, 뮤지컬로도 만나볼 수 있다고 하니 그곳 또한 꼭 가보아야 겠습니다.
[ 출처: 장기려, 그 사람_ 홍성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