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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과 신앙의 모범 오산학교 설립자 - 남강 이승훈

好學 2012. 10. 19. 08:01

 

민족과 신앙의 모범 오산학교 설립자 - 남강 이승훈

 

 

이승훈(李昇薰, 1864. 4. 25~1930. 5. 9)

호:남강(南崗) 초명:인환(寅煥)

 

일찍이 장사를 배워 장사꾼으로 이름을 알렸으나, 우피무역 실패를 계기로 "신민회"에 활동, “오산학교”를 설립하며 본격적인 독립운동가로서의 길을 걸었다. "안악사건" 과 105인 사건"으로 유배와 옥고생활을 하였으나, 출옥 후에도 민족대표 33인 중 기독교 측 대표, 3.1운동 추진 등 독립운동가로서의 왕성한 활동을 하였다.



남강 이승훈 (출처: 남강문화재단)


나는 평생 소원으로 아래에 적은 두 가지 조건뿐이 형제의 마음속에 깊이 기억되기를 간구합니다. 첫째, 마음과 몸을 다하여 일함으로써 각 사회 인중(人衆)의 신앙을 받는 지경에 이르는 질실(質實)한 진인(眞人)이 생겨나기를. 둘째, 가면이 아니요 진실로 일하는 사람이 있거든 그에 대하여는 혈기방강(血氣方强)의 청년들까지라도 그를 정당히 경애하며 숭앙하며 사회중심의 추세를 지게 하기를.

- 선생이 <개벽> 1922년 1월호 밝힌 ‘신년(新年)의 신의견(新意見)’ 중에서


 

 

기자: 안녕하세요? 말로만 듣던 선생님을 직접 뵙게 되어 너무 영광입니다.잘 지내셨죠?


이승훈: 인터뷰를 한다고 해서 긴장 많이 했습니다. 동아일보를 운영하면서 많은 인터뷰를 했지만 오늘처럼 떨리는 적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



Q1. 선생님은 원래 유명한 상인이셨잖아요. 갑자기 어떤 이유로 장사를 그만 두시게 되신 거에요?


A1. 제 신분이 미천해서 할 수 있는 게 장사밖에 없었어요. 공부를 해서 관직에 나갈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사람대접을 받으려면 돈을 벌어야 했죠. 그래서 열심히 했어요. 덕분에 많은 사람을 거느리기도 하고 많은 돈도 벌었죠.

그러다 1920년 1만냥의 엽전을 싣고 부산으로 가던 중 운송선이 일본 영사관 소속의 배와 충돌해서 침몰했어요. 그래서 엽전이 고스란히 바다 속에 빠지고 말았죠. 만약 엽전이 부산에 도착했더라면 1만냥의 엽전은 2만냥에 가치가 있었을 거예요. 당시 화폐의 가치가 지역마다 차이가 났었거든요. 그래서 그 많은 엽전을 싣고 부산으로 가던 것이었어요. 그래서 일본영사관에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죠. 그런데 이렇게 저렇게 핑계를 대면서 1년이란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1년후 1만냥만 보상을 해 주었죠. 저는 소송비 그리고 소송을 하면서 다른 일은 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 사건으로 손해가 너무 컸습니다.

그러면서 깨닫게 됐어요. “나라 없는 사람에 설움, 내가 나라만 있었어도, 내가 조선사람이 아니라 청나라 사람이었어도 나에게 이렇게 했을까...”그러면서 제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신분, 재산 이런 게 다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알았죠. 나라가 없으면 조선전체가 상놈이 되는 판국에 그게 다 무슨 소용이예요. 그런 깨달음이 제 삶의 방향을 바꾸게 된 거죠.



Q2. 하시던 장사가 크게 잘못 된 것이 오히려 오늘의 전화위복이 되었네요.


A2. 그렇죠, 그때 사업이 계속 잘 됐더라면, 저는 계속 저만을 위해서 살았겠죠. 벼슬도 사고 자녀들도 양반집과 결혼시키고 했던 사람이었거든요. 참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는 미천한 인간이 깨닫기 어려운 것 같아요.



Q3. 그렇군요. 그런데 민족을 위한 일이 참 많잖아요, 계속 장사를 해서 그 돈으로 사람을 섬길 수도 있었을 텐데 어떻게 교육사업을 하실 생각을 했어요?



단상에서 강연하는 남강 이승훈 선생



A3. 제가 상놈 출신이라 배움의 기회가 적었어요. 그래도 주인을 잘 만나서 글을 배울 수가 있었죠. 글을 안다는 게 아주 작은 것 같지만, 글을 알았기 때문에 많은 정보를 알 수 있었고 돈도 벌 수 있었어요. 배움이 중요하다는 걸 제가 잘 알아요. 그래서 예전에도 집안에 친척들을 불러모아 서당을 세우고 한문과 경전을 가르쳤었어요. 그런데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할까 고민하던 시기에 안창호선생님의 연설을 듣게 됐어요. 선생님은 나라가 독립을 하려면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건전한 인격과 덕 지식을 가지고 단결을 이루어 민족의 영광을 회복해야 한다”고 했어요. 이거구나 싶었죠. 그 연설을 듣고 난 이후 서당을 ‘강명의숙(講明義塾)‘이라는 지금으로 치면 초등학교를 세웠죠. 그리고 그 해 (1907.12.24) 중등교육기관인 오산학교를 세우게 됐죠.



 

 

 “나라가 없이는 집도 몸도 있을 수 없고, 민족이 천대받을 때에 나 혼자만 영광을 누릴 수는 없소”

안창호의 격언에 독립운동을 결심한 남강 이승훈 선생 (참고 : 네이버캐스트)

 

 

 

 

 

 


Q4. 오산학교는 어떤 곳이었나요?



 

1회 오산학교 입학생과 2회 졸업생 (출처: 남강문화재단)


A: 처음에 학교를 세울 때 돈도 없고, 의욕만 넘쳐서 우여곡절이 많았죠. 자금을 끌어오느라 고생도 많이 했죠. 그래서 그만큼 애착이 많이 갔어요. 이 아이들이 커서 민족지도자가 될 거라고 생각을 하니 아이들 한 명 한 명이 소중했죠.



 

 

오산학교의 교훈, 교화, 교목 (출처: 남강문화재단)



그래서 같이 운동도 하고 청소도 하고 이야기도 많이 했어요. 그런 제 모습이 아이들에겐 이상하게 보였겠죠? 우리나라 양반들은 지시하는 것에는 익숙하지만, 함께 하는 건 잘 못하잖아요. 신분이 미천 한 저에겐 오히려 가만히 앉아서 지시만 하는 게 더 어려운 일이었어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행동한 건데, 그런 저의 모습을 보고 도전을 받았다고 말해주는 학생들 덕분에 힘이 났죠. 저희는 서로서로 의지하면서 에너지를 받았던 것 같아요. 학생도 학부모도 선생님도 저도 모두 나라를 되찾아야겠다라는 사명감으로 배우고 가르쳤어요. 그런 진심이 통했던 곳이었죠.



Q5. 그 후에 유배생활도 하시고 옥살이도 하셨잖아요. 그때 학교는 어떻게 하셨어요.





조만식 선생과 신채호 선생, 오산학교에서의 수업과 활동과 도서관 (출처: 남강문화재단)


A. 조만식 선생님께서 맡아 주셨어요.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엘리트였는데, 오산학교에 와서 제 자리를 채워주셨죠. 여러 과목을 가르쳤어요. 법률, 경제, 지리, 영어, 성경 등, 또 수신(修身)과목도 가르치셨는데 수신을 행동으로 가르치셨죠. 신앙심도 남달랐고, 수입품도 사용하지 않았어요. 칫솔대신 소금을 사용하실 정도였으니까요. 하나님께서 모두 예비 해 주신 것 같아요. 덕분에 전 제주도 유배생활을 하면서 오히려 기도도 더 많이 하고 말씀도 더 많이 보면서 하나님과 친밀한 시간을 지냈어요. 감사한 일이죠.



 

신민회 [新民會]와 

1907년을 전후하여 일제가 보안법·신문지법 등의 악법을 만들어 반일적 색채를 띤 계몽운동을 탄압함에 따라, 사회계몽운동가들이 국권회복운동을 위해 비밀리에 조직한 단체이다. 안창호(安昌浩)의 발기로 창립된 이 단체의 회원들은 대부분 1896년도에 결성되어 2년 동안 활동하다 와해된 독립협회(獨立協會)의 청년회원들이었다. 


중심인물로는 회장 윤치호(尹致昊), 부회장 안창호, 유학자 출신의 장지연(張志淵)·신채호(申采浩)·박은식(朴殷植), 청년장교 출신의 이동휘(李東輝)·이갑(李甲), 평양지방의 자산가인 이종호(李鍾浩)·이승훈(李昇薰), 그리고 안태국(安泰國)·이동녕(李東寧)·이회영(李會榮) 등이었다. 


1911년 9월에는 소위 "데라우치총독 암살음모사건"이란 것을 날조, 신민회 평안남북도지회 회원을 비롯해 전국의 지도적 애국계몽운동가 700여 명을 검거해 온갖 고문을 가하고, 그 중 105명에게는 실형을 선고하였다. 이 과정에서 국권회복을 목표로 한 한국인 애국자들의 지하단체가 신민회라는 이름으로 결성되어 있었음이 드러나, 신민회는 일제에 의해 해체되고 만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물론 옥중 생활은 힘들었지만, 그래도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예비해주신 영혼들을 만날 수 있어서 감사했어요. 옥중에서 서로를 위로할 수 있고, 의지할 수 있어서 그들에게 하나님을 전할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제가 감옥에 있어서 우리나라가 독립이 될 수만 있다면 지금도 전 다시 옥살이를 할 수 있어요.



Q6. 독립은 정말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군요. 나라에 소중함을 다시 한번 깨우치는 시간입니다. 그렇다면 학교를 하시면서 가장 힘들었을 때는 언제였나요?



 




A. 1922년 조선 교육령이 공포되었어요. 저희 오산학교가 중등학교로 인정을 받으려면 절차를 밟아 고등보통학교 인가를 받아야 하는 법이 생긴거죠. 만약에 인가를 받지 않으면 오산학교를 비인가학교라고 해서 중등학교 자격을 주지 않는 거예요. 저는 오산학교 졸업생들이 모두 교사가 되어 전국에서 민족교육을 시키는 것이 제 비전이었거든요. 그런데 인가를 받지 않으면 교사를 기를 수가 없고, 인가를 받으면 민족교육을 시키는 데 어려움이 생기는 거죠. 그때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정말 어려웠죠. 그리고 결국은 인가를 받는 방향을 택했어요. 졸업생들을 교사로 키우려면 피할 수 없는 선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 이후로 조만식 선생님이 학교를 그만 두셔야 했고, 그로 인한 학생들의 반발, 제가 변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 등 너무 많은 말들이 있었지만, 제 진심은 하나님께서 아신다고 믿어요.



Q7. 이 선생님은 <성서조선>에서도 활동을 하셨는데, 어떻게 그곳에서 활동을 하게 되셨는지, 그곳을 어떤 곳인지 설명해주세요






A. 이름 그대로 "성서"와 "조선"의 만남을 이야기 한 곳이에요. 조선에 현실에서 어떻게 성서를 해석하고 적용할 것인가를 고민한 곳이죠. 3.1운동을 준비하면서 천도교와 기독교가 연합을 해야 했어요. 민족의 독립을 위한 거사인데 종교가 다른 것은 나중 문제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이 연함을 마다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목사나 전도사가 정치문제에 관여하는 것은 옳지 않다." "다른 종교와 제휴하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었죠. 물론 당시에는 시간이 워낙 촉박하고 여러 방법으로 설득을 해서 3.1운동을 진행했지만, 저에겐 너무도 충격적인 사건이었어요.


그러던 중에 저희 학교 학생이었던 함석헌의 소개로 <성서조선>을 만났죠. 처음엔 별 다른 게 있을까 생각했는데, "기독신자보다도 조선혼을 소지한 조선 사람에게 가라"라는 말이 제 마음에 울림이 있었어요. 그 이후로 <성서조선>과 만남을 가지게 되었고, 제도권 교회와는 자연스럽게 거리감이 생겼던 것 같아요.



 



하나님 중심을 보시고, 당신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을 기뻐하시는 분이시니까요. 저는 그게 옳다고 생각해요. 하나님 뜻을 운운하며, 가난하고 소외된 자의 아픔을 돌아보지 않는 건 바리새인과 같은 모습이지 않을까요? 우리는 어디에 있던지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의의 편에 서는 것을 하나님 기뻐하신다고 믿습니다.



 

기자: 네 오늘 선생님을 만나서 제가 정말 참다운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바리새인으로 살고 있는 건 아닌지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되는 시간입니다. 대한민국이 그냥 주어진 곳이 아님을 깨닫고 저 역시 나라를 위해서 정의에 편에 서는 사람으로 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도서출처 : 이승훈 (오병학 저, 규장문화사)

이미지출처 : 남강문화재단, 독립기념관, 한국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