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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 종을 받아주소서 - 韓景職

好學 2012. 10. 19. 08:06

 

이제 이 종을 받아주소서 - 韓景職

 

한경직 韓景職

(1902~2000.04.19) 한국

장로교 목사. 1945년 서울 영락교회 목사로 부임하고 1954년에는 숭실대학 학장을 겸직하였으며, 1955년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장, 숭실대학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1992년에 ‘노벨 종교상’으로 일컬어지는 템플턴상을 받았다.

 
 
 
Prolog.
1902년 평안남도 간리에서 태어나 민족학교인 오산학교, 숭실대학교를 거쳐 미국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했다. 유학 이후 한국으로 귀국하여 ‘영락교회’를 창립하고, 한국 전쟁 이후 어려운 시대 상황 속에서 큰 고통을 받는 고아들과 이웃들을 위해 많은 시설들을 건립했다.

1950년 밥 피어스 목사와 ‘월드 비전’을 설립.
1990년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을 전개.
1992년 ‘템플턴 상’ 수상.
2000년 남한 산성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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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기자: ‘템플턴 상’을 아시나요? 
‘종교계의 노벨상’으로도 일컬어지는 템플턴 상은 전 세계를 아울러 이웃에게 헌신하고 기독교 발전에 큰 공헌을 한 사람이 받는 상입니다. 대표적인 수상자로는 우리가 잘 아는 테레사 수녀와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이 있어요. 그런데 우리나라에도 이 상을 받으신 분이 있습니다. 오늘 모신 분인데요, 92년 대한민국 최초로 템플턴 상을 수상하신 한경직 목사님이십니다. 목사님 안녕하세요?

한경직: 안녕하세요 여러분. 이렇게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Q1. 아흔이 넘는 연세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왕성한 활동을 해오셨어요. 요새는 어떻게 지내세요?

A1. 감사하게도 하나님이 이 늙은 종을 끝까지 알뜰하게 써주시더군요. 허허. 젊어서는 두 발로 뛰고, 직접 이웃들을 만나 돕는 것만이 사역인줄 알았는데 나이가 들어보니 또 늙으면 늙은 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생기더군요. 감사한 일입니다. 요새는 북한으로 보내는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을 위해 가끔 설교 강단에 서는 것 말고는 남한산성에 있는 집에서 가족들과 조용한 시간을 보내고 있지요. 어린 나이에 저에게 시집와 유학이다, 선교다, 전쟁이다 해서 한 번도 살갑게 못해준 부인과 많은 이야기를 하며 집안일도 좀 하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Q2. 어린 시절 이야기를 좀 해주세요. 시골에서 자란 산골 소년이었지만 학구열이 굉장히 높으셨다고 들었는데요?

A2. 저의 학구열은 엄밀히 말하면 저희 부모님께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죠. 저희 부모님은 가난한 농사꾼이셨지만 제가 태어나기 전, 우연히 마을을 찾은 미국인인 모펫 선교사님의 영향을 받아 지식만이 나라를 살리는 길임을 잘 알고 계셨던, 당시 시골마을에서는 흔치 않게 깨어있던 분들이셨습니다.

제가 다른 아이들처럼 밭매기라든지 집안일을 거들라고 하면 아버지는 ‘공부를 열심히 해서 나라를 구하는 것이 더 크게 도와주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곤 했죠. 그런 부모님 덕분에 저는 서당이 아닌 ‘진광 소학교’라는 신식 학교를 들어가 신식 교육을 받는 시골 농사꾼의 아들이 될 수 있었습니다. 자식을 신식 학교에 보내는 일은 그 당시의 상황에 비추어보면 대단한 모험이었으나, 저희 부모님은 교육에 뒤따르는 위험보다는, 교육을 받지 못하게 되는 위험을 더 걱정하신 분들이셨습니다. 
또한 나라를 사랑하는 열정적인 교사들의 가르침을 신뢰하셨기 때문에 저를 그 학교에 보내셨습니다. 정말, 시골 농사꾼의 생각 치고는 놀랍도록 깨인 생각이 아닙니까?

Q3. 목사님은 좋은 스승을 많이 만났다고 늘 말씀해오셨는데요. 특별히 기억에 남는 스승이 있으시다면?

A3. 아아..정말 대답하기 힘든 질문 중 하나군요(웃음)!! 정말 많은 선생님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가는데 이왕 앞에 소학교 이야기를 했으니 소학교를 졸업한 후 진학한 오산학교에서 만난 조만식 선생님의 이야기를 해드리죠.

진광소학교를 졸업한 이후 선생님들의 강력한 추천으로 상급학교인 오산학교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앞에도 말씀 드렸지만 저희 집은 가난한 농사꾼 집안입니다. 아버지는 저의 상급학교 학비를 위해 집안의 유일한 재산인 소를 내다 파셨습니다.

죄스러운 마음을 안고, 반드시 열심히 공부하겠다는 결의를 가지고 입학한 오산 학교는 전교생이 기숙사에서 생활을 하는 학교였죠. 그 학교를 세운 조만식 교장 선생님은 일본 유학파 출신의 소위 말하는 엘리트이셨는데 일본 유학시절 간디의 자서전을 읽고 고국으로 돌아와 우리 나라의 독립을 위해 교육 및 사회운동 사업을 활발하게 벌이신 분입니다. 요즘 우리 중고등학생이 역사시간에 배우는 ‘물산 장려 운동’도 조만식 선생님으로부터 시작된 운동이죠.

그러나 조만식 선생님은 그런 사회활동 때문이 아니라, 학교에서 보이는 그 분의 인격 때문에 학생과 교사의 존경을 한 몸에 받으시는 분이었습니다.
한 예로, 저희 학교는 겨울이 되면 땔감이 없어서 학생들이 산에 가서 땔감을 구해와야 했는데, 이 산이 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눈이라도 올라치면 매우 위험했죠. 그 큰 나뭇짐을 이고 꽁꽁 언 산길을 걸어가는 것은 젊은 남자들도 감당하기 힘든 노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알기론 저희 학생 중에서 단 한 명도 산에 올라가 땔감을 가져오는 것에 불만을 갖는 이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와 똑같은 나무를 어깨에 이고 묵묵히 걸어가는 교장 선생님을 보지 못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죠. 조만식 선생님이야말로 하나님 안에서 바른 인격을 갖추신, 제가 기억하는 가장 훌륭한 교육자이셨습니다.

Q4. 목회를 하기로 결심하신 계기가 있나요?

A4. 솔직히 대학교(숭실대학교)를 졸업한 이후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 생활을 지속하면서 하나님이 나를 어디로 부르시는가-에 대한 고민은 끝없이 있었습니다. 그 동안 만난 훌륭한 선생님들처럼 나도 교육자의 길을 가며 후진을 양성하는 일을 업으로 삼아야 할지, 아니면 상급 학교에서부터 꾸준히 흥미를 느끼며 대학까지 전공한 과학자의 길을 가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길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저를 가장 필요로 하는 곳, 하나님이 저를 부르신 곳은 ‘교회’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앞의 교육자나 과학자의 길은 궁극적으로 ‘저’를 위해 제가 계획한 일이었을 뿐,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는 일은 아니었음을 깨달은 것이죠.

흔히 그런 말들을 하죠. ‘좋아하는 일보다 잘 하는 일을 하라’ 고요. 
그러나 저는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을 떠나 하나님이 ‘예비하신 일’ 이 있다고 믿습니다. 내가 속한 상황과 사회 속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종이 반드시 있어야 할 곳으로 예비하신 자리 말이죠. 비록 내게 어울리지 않고, 설령 잘해나갈 자신이 없다 해도, 하나님은 부르심에 순종하는 종을 원하시는 것이지, 그 자리에 처음부터 합당한 종을 원하시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목사가 되기 위한 모든 준비와 저의 능력까지 하나님께 맡겨버렸습니다. 이왕 이렇게 부르신 거, 어떻게든 만들어 쓰시겠지-라는 믿음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막상 한국의 신학교가 아니라 생각도 못한 미국의 신학교로 가게 되었을 때는 더럭 겁이 나기도 하더군요.

Q5. 미국에서도 현재까지 ‘아이비리그’라고 일컬어지는 프린스턴 대학교를 나오셨고, 
미국에서도 한국을 위해 활발한 활동을 펼치는 목회자들이 많았는데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신 이유가 있나요?

A5. 미국의 자유로운 분위기는 평생을 일제 치하에서 억압받는 나라에서 살다 온 저에게는 정말 신세계와도 같은 나라였습니다. 그곳에서는 마음껏 공부할 수 있고, 공부한 만큼 자신의 재능을 누구의 억압도 받지 않고 마음껏 발휘할 수 있죠. 배움의 자유와 일할 수 있는 자유, 이것을 저는 살면서 처음으로 겪었습니다. 
저는 프린스턴 신학과를 마치고 예일 대학교 대학원까지 진학하려 준비했었죠. 솔직히 고백하건데, 그 때의 제 마음 속에는 아마 고국으로 돌아가고픈 마음이 없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좋은 대학에서 마음껏 공부하고, 대학원까지 합격해 놓은 저는 제 앞길에 장밋빛 나날이 펼쳐진 줄로 알았고,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저를 위해 준비하셨다고 제 마음대로 생각해버렸죠.

그러나 저는 그곳에서 폐결핵에 걸리고 맙니다. 지금이야 백신이라는 주사 한방으로 간단히 고쳐지는 병이지만, 그 당시에는 그 병에 걸리면 죽을 날만 기다려야 하는 줄로 알았습니다. 
장밋빛 나날이 한 순간에 좌절되고 병상에 꼼짝없이 누워만 있는 신세가 되면서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더군요. 그러나 그 눈물은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흐르는 눈물이 아니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사랑을 베풀어준 사람들을 생각하며, 미안한 마음에 흘리는 눈물이었습니다. 저는 그 곳에서 간절히 부르짖었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실력을 쌓겠다며 이곳 미국까지 건너와 아무런 한 일도 없이 이렇게 죽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 제가 진 사랑의 빚을 나라와 민족에게 조금이라도 갚고 떠날 수 있게 해주십시오!’ 라구요.
그제서야 저는 하나님이 저를 미국까지 와서 공부하게 하신 목적, 저를 이때까지 준비시키신 진짜 목적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조선이라는 작은 나라에서 부르짖는 백성들의 간절한 기도를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신 것입니다.

저는 보잘것없는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이 이렇게까지 준비시키신 이상, 어떻게든 쓰임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렇게 죽으면 하나님 앞에 설 면목이 없다는 부끄러운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죠. 그것을 알게 되자 제 몸은 기적적으로 회복되었고, 저는 몸이 회복된 즉시 예일을 포기하고 신의주라는 가장 척박한 땅에 기쁜 마음으로 향했습니다.

Q6. 신의주 교회를 비롯하여 목사님은 가는 곳마다 교회 건물을 직접 짓는 것으로 
유명 하신데요. 어떤 특별한 뜻이 있나요?

A6. 교회를 직접 짓는다..그게 또 그렇게 보일 수도 있는 것이군요. 허허.
제가 처음으로 교회 건물을 지은 것은 신의주 제 2교회였습니다. 더러운 하천 가에 쓰러져가는 판지 상자 같은 곳이었죠. 비가 새는 것은 둘째치고 교회의 안정성을 위해서라도 건물을 지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신의주 교회는 청년들만으로 이루어진 가난한 교회였고, 일제의 압박을 받고 있던 그 당시에 교회 건립을 위해 물건을 산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죠. 
그래서 저는 제가 직접 삽을 들었습니다. 하다 보면 1년이 걸리든 5년이 걸리든 완성은 되리라는 생각이었죠. 그러자 교회 청년들도 자신들의 장기를 살려 함께 돕기 시작했고, 청년들과 하나 둘씩 벽돌을 쌓아 올리며 교회를 완공 시켰습니다. 자신들의 손으로 쌓은 교회를 보는 감동은 정말이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이후 6.25 전쟁 때문에 신의주를 떠나 남한의 저동으로 와서도 교인들과 힘을 모아 흰 돌로 지어진 ‘영락교회’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물자가 무엇이든 부족했기 때문에 교인들의 희생과 수고가 절대적이었습니다. 게다가 교인들의 대부분은 피난민들이었죠. 희생은커녕 보호를 받아야 할 사람들이 교회 건축에 발벗고 나섰습니다.
물질을 후원할 수 있는 사람은 피난 보따리를 풀어 물질을 후원하고, 후원할 물질이 없는 사람은 두 팔을 걷어 부치고 시멘트를 바르고, 돌을 쌓았습니다. 

손으로 교회를 짓는데 특별한 뜻이 있느냐구요? 
뭐든 부족하고, 가난했기 때문에, 그리고 있어도 마음대로 쓸 수 없는 시대적 상황의 부자유스러움 때문에 초라하게 맨손으로 시작한 일이 끝에는 하나님을 향한 열정과 사랑이라는 거대한 결과로 남게 되었습니다. 이걸 보면, 글쎄요, 돌을 쌓는 작은 일 조차 제가 한 것이 아니라는 고백이 나올 수 밖에 없군요.

 

Epilog 
한경직 목사님이 템플턴 상의 수상 강단에서 말씀하신 연설문 중에는 유명한 ‘삼발이 비유’가 있습니다.
삼발이는 뜨거운 숯을 담고 있지만 화로를 받치는 발이 3개 달려있어 넘어지지 않고 잘 서서 사람들에게 따뜻함을 전해줄 수 있는 작은 화로입니다. 목사님은 이 삼발이와 같이 우리 인생에도 3개의 다리가 필요하며 그 다리는 각각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 내일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서로 사랑할 때 우리는 비로소 넘어지지 않고 바로 설 수 있으며, 가난한 이웃과 사랑을 나누는 일은 바로 나 자신을 위한 일임을 표현하신 것입니다.
평생을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며 살아오신 한경직 목사님과의 가슴 푸근한 인터뷰였습니다.

도서출처 - 세계가 놀란 사랑 한경직 (강현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