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智慧묵상/[지혜묵상]신앙지혜

생각의 차이

好學 2012. 9. 29. 18:22

생각의 차이

누가복음 5:22

 

 

남자들이 살아가는 인생의 방향은 내가 보고있는 현실을 이해하는 생각의 방향일 때가 많다. 이주헌의 <생각하는 사람들 오늘>을 보면 “어쩌면 아쉬운 것은 흘러가버린 시간이 아니다. 생겨나서 사라지는 매 순간순간을 맘껏 기뻐하고 감사할 줄 모르는 우리 자신이다. 오늘 하루를 그 충만하고도 완전한 행복으로 살지 못하는 우리 자신이다.”라고 말한다. 사람은 보고 생각하는 것에 따라 다른 삶을 살아간다. 내 자신을 바라보면서 좌절하며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단점을 인정하고 긍정적인 삶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사람도 있다. 이처럼 어떻게 보고 생각하느냐에 따라 살아가는 삶의 모습도 달라지게 된다.

예를 들어 자기가 평범한 사원감인지 아니면 장래 사장감인지를 진단하려면 평소에 달력의 어떤 날을 기다리는지를 보면 된다. 월급쟁이는 빨간 날 즉 휴일을 기다리지만 장래 사장감은 까만 날 즉 평일을 기다린다. 당신은 일에서 벗어날 수 있는 휴일을 좋아하는가 아니면 고객이 움직이고 시장이 열리는 평일을 좋아하는가. 그런 차이를 남들이 느낄 정도가 되면 한 사람의 직장생활 및 인생의 판도가 바뀔 수 있다. 또 한 예로 ‘청소년, 중년, 노인’을 구별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나이 차이를 빼면 이 세 그룹을 가르는 것은 평소 어떤 얘기를 하느냐다. 과거를 얘기하면 노인이요, 현재를 말하면 중년이며 미래를 꿈꾸면 그가 바로 청년이다. 한 대학생이 자신이 중학교 시절에는 공부로 잘 했다는 이야기를 입에 달고 산다면 그는 내일이 없는 노인이나 다름없다. 일흔이 됐어도 5년 뒤의 계획을 말하고 있다면 그야말로 청년인 것이다.

예수님과 중풍병자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차이는 생각의 차이다. 중풍병자와 중풍병자의 침상을 메고 온 자들에게는 예수님이 그 중풍병자를 치료해줄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이 지붕을 뚫는 절박한 믿음의 행동으로 이어졌다. 반면에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평가하고 자신의 기준으로 정죄하려 들었다(눅5:21). 그들은 모든 질병의 원인이 죄로 말미암은 것이기에 죄사함을 선포하신 예수님을 참람죄로 몰아 궁지에 빠뜨릴 좋은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놀라운 것은 서기관과 바리새인 어느 누구도 자신의 생각을 말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 깊은 생각을 알고 계셨다(눅5:22)는 사실이다.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직시하는 예수님께서 질병을 치료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자신의 생각과 기준을 내려놓지 못하고 생각의 올무에 매여 사는 서기관과 바라새인은 인생의 고정관념을 붙들고 사는 중년남자들의 모습과 같은 부분이 있다. 자신의 생각을 바꾸려 하지 않고 고집스럽게 버티는 것, 마음 속에 있는 것들을 쉽게 밖으로 표현할 만큼 용기도 없으면서 끊임없이 갈등하는 모습들이 그렇다. 하지만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예수님께 내어놓는 순간 참된 자유를 맛보게 될 것이다.

남자들이여, 내게 다가오는 현실을 어떤 생각으로 바라보는가? 생각의 필터가 고장난 서기관과 바리새인처럼 자신의 지식과 사회적 지위가 나의 인생기준인가? 아니면 내 삶의 모든 문제가 예수님 앞에 갈 때에 해결될 수 있다고 믿고 사는가? 나이가 들수록 우리의 생각이 예수님을 생각하고 예수님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마음의 고통에서 벗어나 은혜의 삶을 살 수 있으리라. 내의 생각의 방향은 지금 예수님께로 향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