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時事/[소식통]기쁜·슬픈소식

산유리 교회

好學 2012. 9. 22. 10:42

 

[그곳에 교회가 있었네-경기도 가평읍 산유리교회]

 

“구경 삼아 교회 나왔다가 하나님한테 붙잡혔어”

 


한가위를 앞두고 누렇게 결실을 맺고 있는 논밭, 드문드문 자리 잡은 촌락과 한데 어울려 정겨운 전원 풍경을 자아내는 한옥식 예배당이 눈길을 끈다. 경기도 가평군 청평댐에서 남이섬, 자라섬 쪽으로 향하는 도로 한편으로 시원하게 뻗어 있는 북한강 물줄기에 한동안 시선을 뺏기다 보면 가평읍 산유리교회에 도착한다.

산유리의 새벽을 깨우는 종소리

크리스천이 아니더라도 어린 시절 고향 마을에서 은은하게 울려퍼지던 교회 종소리를 기억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도시에선 소음 공해로 취급받기 십상인 종소리는 이제 한적한 시골교회 주변에서만 들을 수 있게 됐다.

산유리교회 종소리는 1968년부터 산유리 마을의 새벽을 열었다. 빨갛게 녹슨 이 무쇠 종은 원래 서울 동대문 시온감리교회에 설치돼 있다가 경기도 구리시 교문감리교회를 거쳐 산유리교회로 옮겨졌다.

하지만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탓인지 2000년쯤 종소리가 둔탁해졌고 나무로 만든 종탑은 쓰러질 위험에 놓였었다. 당시 이 소식을 전해들은 시온감리교회 조성연 권사가 “신앙생활을 함께했던 의미 있는 종소리”라며 선뜻 보수비용을 헌금해 청명한 종소리는 끊이지 않게 됐다.

‘종지기’ 김종훈(76) 권사는 13년 동안 교회 종을 울리는 일을 쉬지 않았다. 오전 4시20분 종탑에 연결된 밧줄을 당겨 10분 뒤에 시작되는 새벽예배를 알린다. 주일에는 예배가 시작되기 10분 전인 오전 10시50분에 종을 친다.

김 권사는 “그동안 알람을 오전 4시10분에 맞춰놓고 잤었는데 이젠 습관이 돼서 저절로 눈이 떠진다”면서 “옛날부터 꾸준히 종을 쳤으니까 이 마을에서 종소리 시끄럽다고 하는 사람은 없다”고 말했다. 어떻게 이처럼 고단한 일을 맡게 됐느냐는 질문에 김 권사는 “그냥 뭐, 교회에서 제일 가까운 데 사니까”라면서 웃었다.

한동안 술에 빠져 있던 김 권사는 아내 현은호(76) 권사의 끈질긴 권유로 하나님을 만나게 됐다.

김 권사는 60년전쯤 큰아들이 골수염으로 한쪽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을 한 뒤 술병을 손에서 놓지 못했었다. “그땐 속상해서 막걸리 소주 닥치는 대로 다 먹었어요. 아들이 그렇게 된 뒤 몇 년 있다가 의학 기술이 좋아져 절단까지는 안 해도 됐는데….”

현 권사는 절망에 빠져 있던 남편을 억지로 예배당에 데리고 갔다. 김 권사는 “교회에 잘 다니면서 술도 끊었고 20년전쯤부터는 나도 몸이 좀 여러 군데 아프고 해서 이제 하나님한테 완전히 매달리게 됐다”고 말했다.

김 권사는 경기도 가평군 북면에서 살다 6·25전쟁을 피해 산유리로 내려온 현 권사를 만나 혼례를 치렀다.

‘6·25커플들’의 미션라이프

산유리교회의 주축은 김 권사 부부처럼 6·25전쟁을 계기로 백년가약을 맺은 커플들이다. 당시 가평군 북면 화악산 자락에서 살다가 산유리 마을로 피란온 여성들이 이 마을 총각들과 결혼해 정착하게 된 것.

대표적인 사례는 76세 동갑내기 이순재·박찬숙 어르신 부부. 이·박 커플은 6·25전쟁이 터진 이듬해인 1951년에 결혼했다. 이 권사는 “마누라인 박 집사를 처음 본 게 첫날 저녁 이부자리에서였어”라면서 “둘 다 만으로 열다섯이었는데 나이가 어려서 뭘 알아. 그냥 어른들이 하라니까 (결혼) 한 거야”라고 했다. 이 권사 주변에 있던 어르신들이 “나이가 어려서 모르긴 뭘 몰라”라고 농을 치자 이 권사는 웃으면서 “결혼하고 2년 뒤에 첫 애를 낳았으니까 뭘 모르진 않았지”라고 말했다.

이 부부는 결혼하던 그해 교회가 처음 개척된 때부터 믿음을 지켜온 ‘1호 성도’다. 이 권사는 “귀경(구경) 삼아 (교회에) 나왔다가 하나님한테 붙잡혔어”라며 “이 마을에 교회가 없을 적부터 우리 어머니가 ‘예수님 믿어야 천당 간다’고 항상 말씀하셨는데 그런 마음이 나한테도 전해진 것 같아”라고 말했다.

이 권사는 “3남1녀를 뒀는데 추석 때 다 올 거야. 우리 자식이라 그런지 몰라도 속 안 썩이고 잘 하니까 특별히 할 말이 없다”고 했다. 그러자 곁에 있던 한 어르신이 “자식들한테 예수님 믿으라는 말을 해야지”라면서 웃었다.

장기문(79) 권사도 51년에 북면 화악산 자락에서 산유리 마을로 피란을 온 현옥순(76) 권사를 만나 결혼했다. 현 권사는 “잔치(결혼)하는 날 영감을 첨 봤다”면서 “좋든 싫든 어떡해. 맺어졌으니까 같이 살았지. 그땐 다 그랬어”라고 말했다.

결혼 이후 장·현 어르신 부부가 다정하게 예배당에 나오기까지 꼬박 31년이 걸렸다. 장 권사보다 먼저 산유리교회에 다니던 현 권사가 남편을 전도했다. 장 권사는 매번 “적당한 날짜에 (교회에) 가겠다”고 미뤘지만 결국 새벽예배에 빠지는 일이 거의 없는 아내의 진심을 받아들인 것.

장 권사는 자신이 처음 하나님을 만나던 날을 선명하게 기억했다. “1982년 음력으로 11월 9일, 만으로 49세 되는 생일날 처음 마누라하고 같이 교회에 갔어. 어차피 교회에 나간다고는 약속을 했으니까 새로 탄생하는 마음으로 생일날 맞춰서 하얀 눈길 밟으면서 교회에 갔지.”

교회 맞은편 양지마을에 살고 있는 장 권사는 “교회 나오고 나선 목사님이 보실까봐 나쁜 일은 아예 생각도 못 해. 누구랑 싸우지도 못 하고…. 교회 창문으로 보면 우리 마을까지 훤히 내다보이니까”라고 했다.

막내 성도가 61세

교회 주변에는 100가구, 300여명이 모여 사는 인동 장씨 집성촌이 형성돼 있다. 이 지역에는 주민 한 사람이 아프거나 상을 당하면 너나 할 것 없이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따뜻한 정이 아직 남아 있다.

논밭을 일구며 살아가는 이곳 주민 대다수는 고령이다. 산유리교회에서도 성도 20여명 가운데 70대가 젊은 축에 낀다. 지난 14일 만난 어르신 성도들은 “젊은 사람들이 죄다 도시로 떠나서 일손이 부족하다”고 푸념했다.

산유리교회 최연소 성도는 홍유표(61) 권사다. 그는 10여년간 서울에서 살다 2년전쯤 건강이 급격히 악화돼 세상을 뜬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왔다 정착한 경우다.

택시운전을 하는 홍 권사는 2006년 11월 첫 손님에게 받은 택시비를 교회에 헌금할 정도로 신앙이 깊었다. 하지만 한동안 각박한 타지 생활에 쫓겨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했다고 한다. 홍 권사는 “IMF로 직장생활도 관두게 되고 가정 문제까지 겹쳐 하나님을 멀리했지만 이제는 고향으로 내려와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교회에 열심히 나간다”고 말했다.

홍 권사는 교회에 나온 어르신들을 집까지 모셔다 드리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어르신 성도들은 종종 홍 권사에게 전화해 집 앞부터 병원까지 태워달라는 부탁을 하기도 한다.

감리교 초대 선교국장을 지낸 고(故) 오기선 목사의 외손자인 강승희(75) 장로는 5년전쯤 산유리교회 인근에 있는 박달골로 귀촌했다. 교회에서 젊은 축에 드는 강 장로는 “홍(유표) 권사님 덕분에 막내를 면했다”고 말했다.

강 장로는 “서울 광장교회에서는 교회 행정 일도 오래 맡았기 때문에 후배들이 이런 저런 조언을 나한테 해달라고 하는데 여기선 내가 한참 일할 나이”라면서 “순박하신 어르신 성도님들 잘 모시면서 사는 게 낙”이라고 했다. 강씨의 아내 방효원(70) 권사는 “남편 꿈이 시골에서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거였는데 산유리교회에서 그 꿈을 이루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

강 장로는 “평양 남산현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한 외할아버지는 주일마다 마을에서 잔치를 여셨다”면서 “밥을 해서 일일이 교인들에게 대접하는 모습을 자주 접하면서 봉사하는 게 크리스천의 삶이라는 걸 배웠다”고 말했다.

천막교회로 시작

산유리교회는 51년 8월 천막교회로 시작됐다. 6·25전쟁이 터진 이후 미군으로부터 지원받은 천막으로 간이 예배당을 만들었던 것. 얼마 가지 않아 천막은 군데군데 찢어지고 공간이 부족해져 더 이상 예배당으로서의 기능을 할 수 없었다.

당시 마을 사람들은 “교회 세우는 데 보태자”며 200원, 300원씩 헌금했고 서울 큰 교회에서 일부 비용을 지원받아 교회를 새로 짓는 공사가 간신히 마무리됐다. 하지만 전기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고 아궁이불로 강추위를 견뎌야 했던 척박한 환경 탓에 산유리교회에 부임했다가 채 2년을 넘기지 못하고 떠난 목회자들이 적지 않다.

산유리교회가 현재의 모습으로 탈바꿈한 건 1990년. 교회는 농촌교회의 특성을 살려 한옥 양식으로 리모델링됐고 예배당 면적도 60㎡(18평)에서 83㎡(25평)로 넓어졌다. 2010년 6월 22번째 교역자로 부임한 장병선 목사는 “산유리에는 옥수수나 감자 같은 걸 직접 집으로 가져오시고 불편한 게 없느냐고 항상 묻는 따뜻한 주민들이 많다”면서 “앞으로 마을 어르신들이 영적으로 더욱 성숙해질 수 있도록 열정적인 목회를 펴겠다”고 말했다.

▶산유리교회 가는 길

서울에서 자동차를 이용할 경우 서울∼춘천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화도IC에서 우측으로 진입, 창현교차로에서 청평·남양주 방면으로 들어간다. 이어 마석IC에서 춘천·청평 방면으로 빠져 46번 국도를 따라간다. 청평댐 입구에서 고성리·호명리 방면으로 우회전한 뒤 75번 국도를 타고 가다 가평 방면으로 들어가면 왼편에 산유리교회가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