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케, 엄마를 부탁해"
칠순에도 '구루프' 마는 그녀도 알고 보면 귀여운 여인
시어머니나 친정엄마나
평생 일만 하고 살아온 이땅의 한많은 '어머니'
당신이 혼자가 아니라고 느끼게만 좀 해주시게
〈1〉
어찌 지내는가.
꽃비 오나 했더니 하마 여름 장마인가 싶게 날씨 한번 고약허이.
어릴 적 이맘때면 천지에 흐드러진 앵두 따러 동산을 뛰어다녔는디,
인자는 꽃바람에 처녀 가슴 콩닥거릴 새도 없이 목하 여름으로 쳐들어가니 세월 참 무정하네.
새퉁스럽게 웬 편지질인지 묻고 싶겄지.
바깥일로 머리 뒤숭숭한 우리 동생헌틴 암말 말고 자네만 알고 있소.
작년부턴가.
몇 발짝만 걸어도 벌렁벌렁 숨이 차고, 어깻죽지 욱신왁신하더니,
근자엔 끽소리도 못 낼 만큼 가슴팍이 아퍼서 병원엘 갔었지.
심장 혈관이 막혔다누만. 그것두 세 개나.
의사양반은 걱정 말라고, 수술하면 좋아진다 하고,
내 또한 당장 큰일을 당한대도 별 볼일 없는 인생이지만서도 우리 엄니,
시골집에 혼자 남을 그 노인네가 명치 끝에 걸려 나가 요즘 잠이 안 오요.
〈2〉
우리 엄니, 별나시지. 딸인 내가 봐도 괴팍하고 까탈스럽고. 요즘은 그 집 전화기에 불 안 나능가.
당신 아들 밥 굶을까 봐, 날도 안 샜는디 전화 걸어 밥은 안쳤느냐, 반찬은 뭣을 해 먹였느냐 닦달 안 하시능가.
기별도 없이 서울 아들집에 들이닥쳤다가 집에 기척이 없으니 '아녀자가 어딜 싸돌아다니느냐,
내 아들이 새빠지게 벌어온 돈 길바닥에 쓰고 다니느라 바쁘냐,
대학 나왔으면 다냐' 악다구니를 하셨대서 나가 얼매나 면구스럽든지.
요즘 젊은 엄마들이 좀 바쁜가 말이지.
애 잘 키워보겠다고 그 좋은 직장 버리고 들어앉은 사람한테 말이지.
그래도 나가 딸이라고 구실을 좀 하자면, 말씀은 그리 요란스레 하셔도 속내는 양털처럼 따사로운 노인이라네.
또 알고 보면 우리 엄니도 귀여운 여인이라네. 낼모레 칠순이어도,
아들뻘 되는 40대 노래교실 강사한테 귀염 있게 보일랴고 백발 찬란한 머리를 구루프로 마는 모습을 자네가 봤어야 허는디.
소싯적엔 하날 가르치면 열을 안다고 세 오빠들보다 칭송이 더 자자했다는디,
여자라고 학교를 안 보내 저리 괴팍스러워졌다는 기 당신 분석이시네.
〈3〉
엄니 춤바람 났던 거 얘기했등가?
하고한날 아부지가 오토바이 타고 나도시니 엄니도 동네 아지매들 따라 지루박을 배우러 나섰는디,
춤선생 집 문간 앞에서 아부지한테 딱 걸렸다지.
있는 힘껏 줄행랑을 치다가 넘의 집 똥통에 빠졌는디,
사방에 고린내를 풍기면서도 나 죽었소 하고 싹싹 빌었다네.
춤추는 기 큰 죄도 아닌디 빌긴 왜 비냐고 내가 따졌더만, '넌 누굴 닮아 앞뒤 꼭지가 꽉 맥혔을꼬' 혀를 차시네.
'안 빌면 그 길로 황천길인디, 위기는 벗어나고 봐야지. 복수할 날은 쇠털같이 많지 않더냐' 하시네.
진짜로 울 아버지 앓아누우셨을 때 3년을 꼬박 병 수발 하면서도 그간 쌓인 분풀이를 조근조근 하시데.
오토바이 뒷자리에 다방마담 태워 달리다 논두렁에 쑤셔박혔던 거,
빚보증 잘못 서서 내 등록금 홀랑 날린 것꺼정 죄다.
무학(無學)인 엄니한테 여고 나온 내가 배우는 것도 많었지. 경주에 왕들의 무덤이 있잖은가.
근디 어느 놈은 '총'이라 부르고, 어느 놈은 '능'이라 부르는데, 그 이유를 아능가?
총은 무덤 주인이 누군지 모를 때 총(塚)이라 하고, 주인을 알면 능(陵)이라 한다고, 울 엄니 일러주시데.
'워서 배웠소?' 나가 입을 딱 벌링께 '나가 핵교만 지대로 나왔어도 장관까지는 무난~히 했을 기다'
'다시 태어나면 내 이리 부엌데기로, 바보맨치론 안 산다' 하시데.
〈4〉
외아들을 향한 징허디징한 사랑에 올케가 힘든 거 아네.
우로 딸 셋 낳고 8년 만에 얻은 아들이니 오죽하겠능가.
이쁘고 똑똑한 며느리헌티 샘도 나셨겄지.
그래도 노인정 나가시면 며느리 자랑이 늘어지시네.
무뚝뚝이에 잔정은 없어도 속 하난 깊은 물건을 얻었노라고.
울 엄니 늘 갖고 다니시는 노란 수첩 봤능가. 거기 삐뚤빼뚤한 글씨로 '메느리 생일'이 적혀 있더라만.
딸 생일은 잊어묵어도 며느리 생일은 기억하시지.
서울 올라가실 때면 목욕탕 가서 어찌나 때를 빼고 광을 내시는지.
늙은이가 냄새 풍기면 손주들 도망간다고 저리 야단을 떠시네.
맏시누이 잔소리가 길어졌고만. 봄꽃 지는 것이 서러웠나 보이.
내가 하고픈 말은 늙으신 우리 엄니, 이 세상에 당신이 혼자가 아니라고 느끼게만 좀 해주시게.
자존심 강한 우리 엄니, 어버이날 당신 손으로 카네이션 사서 달지 않게만 해주시게.
나도 시집살이 20년을 했지만,
시어머니나 친정어머니나 그 엄니가 다 그 엄니 아니당가.
시절을 잘못 만나 두 손이 거북 등 되도록 평생 일만 하고 살아온 여인네들 아닌가.
사시면 또 얼매나 사실 텐가.
그렇게 지은 복(福) 몽땅 자네헌티 돌아가네.
자식들헌티 돌아가네.
그러니 올케,
우리 엄니를 좀 부탁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