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世界信仰人]

옥스포드 광야시절과 George Whitefield의 거듭남 1

好學 2012. 8. 24. 19:51

 

 

 

옥스포드 광야시절과 George Whitefield의 거듭남 1

 

 

 

옥스포드 시절과 거듭남

휫필드는 짧은 기간 동안 교회 부설학교에 다니면서 많은 고전들과, 헬라어성경, 그리고 라틴어까지 공부하였다. 휫필드의 어머니는 아들이 계속해서 교육을 받을 수없는 형편에 대해서 늘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이 지금은 공부를 중단하고 있지만 인젠가는 가문의 조상들처럼 옥스포드에서 공부할 수 있기를 소망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녀는 한 청년으로부터 아들이 옥스포드 대학교에 진학할 수 있다는 희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 청년에 의하면, 자신처럼 옥스포드에 근로장학생으로 입학하게 되면 아주 적은 비용으로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즉시 휫필드에게 의사를 물었고, 휫필드 역시 옥스포드에 대한 동경이 있었기 때문에 기쁨으로 진학을 결정하게 되었다.

1)굴욕적인 근로장학생

휫필드가 옥스포드의 펨브로크대학(Pembroke College, Oxford)에 입학한 것은 만 18세에 조금 못미치는 1732년 7월이었다. 물론 입학조건은 근로장학생으로 식비와 수업료를 면제받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으로는 근로장학생이라는 일이 서너 명의 부유층 자제들의 시중을 드는 일이었기 때문에 야심에 찬 청년 조지 휫필드에게 있어서 그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실로 같은 또래의 학생들을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나서 잠 깨우기, 구두닦기, 잔 심부름, 방 청소 등의 일을 하는 것이 휫필드에게는 굴욕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학교 당국은 그러한 천한 일을 하는 학생들에게 다른 학생들과 특별히 구별되는 옷을 입게 함으로써 근로장학생이라는 신분을 나타내도록 했으니, 휫필드로서는 무척 곤욕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달리모아(Arnold Dallimore)에 의하면 "근로장학생으로 일하는 학생이 그 굴욕을 참아내지 못하고 그 대학을 떠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라고 했으니 당시의 상황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히 짐작할 만하다.


근로장학생의 굴욕은 때때로 수업시간에서도 드러났다. 당시 펨브로크대학의 규정은 매 주일마다 있었던 철학 토론시간에 근로장학생들은 다른 학생들과 함께 참여하지 못하고 정규시간 외에 다른 날 그들과 토론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모든 학생들이 성례에 참여할 때에도 근로장학생들은 따로 다른 시간에 참여해야 했다. 잉글랜드 사람들에게 깊숙히 스며있는 귀족계급 체제나 그 문화는 오늘날까지도 명맥이 유지되고 있을 정도니 당시의 상황은 충분히 이해된다.


어쨌든 잉글랜드 최대의 지성의 산실이라는 옥스포드의 영예에 걸맞지 않게 휫필드의 옥스포드 생활은 어두운 그늘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휫필드는 전에 여인숙에서 급사로 일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어려웠지만 굴욕적인 그곳 생활을 잘 극복할 수 있었다. 휫필드에게 있어서 옥스포드는 자신의 조상들이 공부했던 곳이고, 또 그의 어머니와 본인이 그렇게 소원했던 곳이기 때문에 어떠한 상황이라도 감내할만한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휫필드는 그와 같은 어두운 상황에서 조금도 굴하지 않고 학업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러나 휫필드의 옥스포드 생활을 면밀하게 연구해보면 그가 힘에 겨운 어려운 상황을 극복할 수 있었던 또 다른 두 가지 요인들이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는 지도교수 로크(George Hernry Rooke) 박사의 영향인 듯하다. 그는 휫필드에게 끊임없는 격려를 아끼지 아니한 아버지와 같은 인자한 선생님이었다. 아마도 어릴 때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던 휫필드에게는 그가 부어준 남다른 사랑을 통해서 친근한 부성애를 느꼈던 것 같다. 훗날 휫필드는 로크 박사를 가리켜서 '나의 친절한 지도 교수 (my kind tutor)라고 평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의 지도 교수는 참으로 귀한 분이었다 … 그는 나에게 책들을 빌려주거나 돈을 주기도 했고, 내가 아팠을 때 방문해서 의사를 불러주기도 했다. 요컨데 그는 나에게 마치 아버지처럼 행동했다. 나는 그를 위해서 드렸던 기도의 응답으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선을 베풀어주실 것을 믿는다."


이와 같은 지도교수의 격려와 관심은 휫필드에게 늘 학업에 대한 동기를 부여해주었고, 마침내 그는 어려운 상황을 잘 극복하고 학업에 있어서도 유능한 학생으로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던 것이다.


다른 하나는 휫필드의 개인적인 성품의 영향인 듯하다. 그는 학업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매사에 진지함과 근면함과 열심으로 임했다. 따라서 비록 자신의 처지가 남과 같지 않다 하더라도 조금도 굴하지 않고 성실하게 학생의 신분을 다했다. 특히 휫필드는 학교생활에 있어서 어떤 형태로든지 시간이 낭비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시간을 낭비하면서 학업을 등한시하고 있을 때, 그는 한 순간도 낭비하지 않도록 철저한 계획에 의해서 생활하면서 자기관리를 해나갔다. 그는 다른 학생들이 학업 외에 다른 일로 시간보내는 것을 보고 안타깝게 생각했고, 학생으로서의 근면한 자세를 한번도 잃어버리지 않았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많은 젊은 학생들이 사치스러운 생활로 학생의 본분을 잃어버릴 뿐 아니라, 그로 인해 학업수행에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을 볼 때마다 내 영혼은 슬프다."


옥스포드 생활은 처음부터 휫필드가 의기소침한 생활을 할 수 밖에 없는 그늘진 상황들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와 같은 선생님과의 만남과 열정적이고 근면한 성품은 휫필드가 성공적으로 4년간(B. A. 코스 3년, M. A. 코스 1년)의 옥스포드 생활을 마치는데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2) 홀리 클럽(The Holy Club)과의 만남

당시 옥스포드 대학교의 분위기는 종교적, 도덕적으로 상당히 침체되어 있었다. 그러한 분위기를 이해하고 있었던지 휫필드가 글로스터(Gloucester)를 떠나기 전 그의 형들 가운데 한사람이, 그가 옥스포드에 가면 신앙생활을 하기 힘들 것이라고 조언해주었다. 그 형의 조언대로 정말 횟필드는 옥스포드에 도착한 후 근로장학생으로서 학업이나 생활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경건생활에 있어서도 어려움을 겪었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나는 같은 방에 있던 친구들로부터 자기들과 같이 어울려서 방탕한 생활을 하자는 유혹을 늘 받았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그러한 유혹을 물리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셨다. 한번은 매우 추운 날씨가 그들과 함께 어울리지 않으려고 혼자서 방에 앉아 공부하다가 손발이 마비되어 밤새도록 거의 잠을 잘 수 없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곧 그러한 유혹에 넘어가지 않음으로써 얻게 되는 유익을 알게 되었고, 그들은 나를 유혹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아예 나를 별난 친구로 생각하고 제쳐두기 시작했다."


옥스포드 생활이 이같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휫필드가 그동안 글로스터에서 경건생활 기초를 쌓지 않았더라면 그곳에서의 신앙생활은 유지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당시 옥스포드 전체가 영적으로 어두웠던 것만은 아니었다. 사회적, 종교적 상황은 점점 퇴락의 길로 접어들어가고 있었지만, 옥스포드에는 하나님의 열심으로 가득찬 소수의 사람들이 차분히 자신들의 미래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들은 일명 옥스포드의 '홀리 클럽'(The Holy Club)회원들이었다.


'홀리 클럽' 은 웨슬리 형제를 비롯한 8-9명의 학생들이 자기훈련의 방편으로써 '초기 기상, 철저한 시간관리, 금식, 경건훈련' 등에 주력하는 옥스포드의 써클 모임이었다. 원래 그 모임은 1728년 당시 옥스포드 대학교 학생들이었던 로버트 키르캄(Robert Kirkham), 윌리암 몰간(William Morgan),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등 세 명이 만들었는데, 그 다음 해 요한 웨슬리(John Wesley)가 가담하여 후에는 대표직을 맡기도 했다. 이 모임은 '홀리 클럽'이라는 명칭 외에도 '성경 벌레들(Bible Moths), 성경쟁이들(Bible Bigots), 경건 클럽(The Godly Club), 성례주의 자들(Sacramentals), 그리고 계율주의자들(Methodists)' 등으로 불려졌다.


그들은 매 주일마다 성례에 참여했고, 수요일과 금요일에는 금식했으며, 옥스포드에 있는 두 군데의 감옥을 정기적으로 방문했다. 그들은 모두 영국 국교회(Church of England)에 소속했으며, 그러한 선행이 자신들의 구원에 영향을 끼친다고 믿고 있었다. 휫필드는 옥스포드에 오기전부터 소문에 의해서 '홀리 클럽'을 알고 있었다. 휫필드가 옥스포드에 와서 지금까지 소문으로만 듣던 클럽의 회원들을 주시해 보았을 때 그들은 휫필드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휫필드와 같이 하나님을 갈망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휫필드는 그 클럽에 속한 회원들의 영적인 상태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떠한 사람도 그들만큼 열렬하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심지어 자기 몸을 극단적으로 절제했다. 그들은 세상에 대해 죽었고, 모든 것을 기꺼이 배설물과 찌꺼기로 간주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얻으려고 했다.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불타올랐으며, 자신들에 대한 악의에 찬 말들을 들을 때마다 그들의 속사람은 더욱 풍성해졌다."


이처럼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가득 찬 '흘리 클럽'의 회원들은 휫필드의 선망의 대상이 되고도 남았다. 하지만 자신도 동일하게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이 있었으나 동료들과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없다는 점에서 늘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왜냐하면 휫필드는 다른 학생들과 신분이 다른 옷을 입고 있었던 근로장학생이어서 자신은 그 모임에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휫필드가 그 클럽에 대해서 얼마나큰 관심을 가졌는지에 대해서는 다음의 고백 속에서 잘 나타난다.


“열두 달 내내 나의 영혼은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을 알기를 갈망하고 있었고, 나는 그들의 좋은 모범을 따르기를 소망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나에게 문을 열어주셨다."


1학년이 끝나갈 무렵, 찰스 웨슬리가 휫필드의 종교적인 열심을 소문으로 듣고는 어느 날 아침식사에 초대함으로써 횟필드의 '홀리 클럽'과의 접촉이 시작된 것이다. 그후 휫필드는 '홀리 클럽'의 회원들과 함께 활동하면서 많은 유익한 시간들을 가졌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이제 나도 그들처럼 규율에 의해 살기 시작했고, 한 순간도 잃어버리지 않도록 일 분 일 초까지 아꼈다. 나는 먹든지 마시든지, 혹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려고 노력했다."


당시에 휫필드가 가까이 교제했던 사람들로는 창단 멤버였던 로버트 키르캄(Robert Kirkham), 윌리암 몰간(William Morgan),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 그리고 대표인 요한 웨슬리(John Wesley), 요한 웨슬리 다음으로 영향력을 발휘했던 요한 클라이톤 (John Clayton), 나중에 유명한 모라비안 주교가 되었던 요한 감볼드(John Gambold), 여러 해 동안 휫필드와 절친한 친구였던 요한 허칭스(John Hutchings), 후일 유명한 모라비안 전도자가 되었던 벤쟈민 인캄(Benjamin Ingham), 휫필드와 동갑이었던 제임스 허비(James Hervey), 그 외에도 토마스 브로톤(Thomas Broughton), 찰스 킨친(Charles Kinchin)등을 들 수 있다.


이제 휫필드는 '홀리 클럽' 의 회원들이 추구했던 것처럼 철저한 자기훈련으로 경건생활을 유지했다. 이때부터 휫필드의 종교적 열심은 더욱 고조되기 시작하였다. 그 당시 자신의 영적 상황에 대해서 휫필드는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나는 아침 저녁 외에도 매일 세 차례씩 기도하고 시편을 노래했으며, 매주 금요일에는 금식했고, 대학 근처의 교회에 나가서 성찬에 참여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