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학의 교육 2/[인터넷성경교육]

제59과 사무엘상(3): 사울과 다윗 (16-31장) 17

好學 2012. 8. 22. 09:36

제59과 사무엘상(3): 사울과 다윗 (16-31장) 17

 

 

 4-4. 사울과 그 아들들의 죽음(31장)


  마침내 블레셋 군대가 이스라엘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블레셋 앞에서 패배하여 도망을 치다가 길보아 산에서 엎드려 죽게 되었다(1). 이때에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과 그 아들들을 추격하여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아비나답과 말기수아를 죽이고 말았다(2). 다윗은 후에 요나단의 죽음을 크게 슬퍼하였다. 요나단의 죽음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는 1) 사울의 아들이었지만, 질투와 시기의 화신이 된 사울과는(18:29) 달리 참 사랑과 우정을 나눌 줄 아는 자였으며(18:1-4:20:17), 2) 매우 지혜롭고 용감한 군인이었고(14:6-14), 3) 훌륭한 신앙 인격을 갖춘 의인이었으며(19:1;20:30-42), 4) 왕위에 집착하지 않는 겸손의 인물이었다(18:4;23:17). 그러한 요나단이 길보아 전투에서 패역한 사울과 운명을 같이한 사실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진리를 가르쳐주고 있다. 1) 부친의 사악한 죄 때문에 그 자손들이 고난을 당하게 된다(겔 18:2). 2) 의인의 소망과 생명은 세상에 국한되지 않고 오는 세상의 참되고 영원한 삶에 있다(잠 14:32). 3) 의로운 자였지만 요나단은 사악한 부친의 곁을 떠나지 않고 끝까지 운명을 함께 했다. 사울은 블레셋 군사를 피해 달아나다가 블레셋 군사의 화살에 맞고 중상을 당하게 되었다(3). 사울은 할례를 받지 않는 이방인에 의해 죽음을 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의 병기를 든 사람에게 자기를 죽이라고 명했다. 그러나 그는 그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그러므로 사울은 할 수 없이 칼을 빼어 그 위에 엎어져서 자결하고 말았다(4). 그리고 사울이 자결하는 것을 보고 그의 병기를 든 자도 자결하고 말았다(5). 이렇게 해서 사울과 그의 세 아들과 그의 병기를 든 자가 모두 같은 날에 죽고 말았다(6).

 

  사울이 죽고 이스라엘이 블레셋에게 패배했다는 소식은 곧 주변으로 전파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골짜기 저편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과 요단 건너편에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두 성읍을 보리고 도망을 치고 말았다. 그러므로 그 모든 성읍에 블레셋 사람들이 살게되었다(7). 여기서 '골짜기'는 사울이 전사한 길보아 산의 북동쪽 기슭에 있는 '이스르엘 골짜기'(29:1)를 가리킨다. 그리고 '저편'은 잇사갈, 스불론, 납달리 지파 등의  주민들이 사는 갈릴리 지역을 가리킨다. 당시 여기에 살던 사람들은 분명히 비 전투 요원들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사울의 군대와 합류치 못한 까닭은, 블레셋 군대가 그들과 사울의 군대 사이인 '수넴'(28:4)에 진을 쳤기 때문이었다(Aharoni). 요단 서편에서 볼 때 '요단 건너편'은 '요단 동부 지역' 전체를 가리킨다(Smith). 그러나 여기서는 전투 장소인 길보아 산의 맞은편 지역인 므낫세 반 지파의 거주 지역을 가리킨다. 길보아 산의 패배 소식은 이곳까지 급속히 퍼져나갔으며, 따라서 그들은 보다 안전한 지역을 찾아 급히 남하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언급된 이스라엘 사람들은 길보아 전투에 참여했던 사울의 군사들로, 주로 유다 지파, 베냐민 지파, 에브라임 지파에 속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다음 날 블레셋 군사들은 죽은 자들의 물건을 수거하러 왔다가 사울과 그의 세 아들이 죽은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8). 그들은 즉시 사울의 머리를 베고, 그 갑옷을 벗겼다. 그리고 승리의 소식을 신당과 자기 백성에게 전하기 위해서 그것을 블레셋 온 영토에 보냈다(9). 블레셋 사람들에게 있어서 사울이라는 인물은 자신들에게 너무도 뼈아픈 패배를 안겨준 장본인이라는 점에서 큰 공포와 증오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사울의 죽음은 그들에게 큰 기쁨을 주는  큰 소식이었다. '신당에 전파한다'는 것은, 사울의 '머리'와 '갑옷'을 자기 신에게 봉헌한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신당' '우상들의 집'이란 뜻이며, 이 말은, 블레셋 땅에 많은 신당들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블레셋 사람들은 사울의 갑옷을 아스다롯의 집에 두었다(10). 그들은 자기 신들이 길보아 전투에서 승리를 가져다 주었다고 생각하고 이러한 일을 한  것이다. '아스다롯'은  '아세라'(신 7:5), '아낫'과 더불어 가나안 3대 여신 중 하나로서, 전쟁과 풍요의 여신이었다(삿 2:13).   그들은 산울의 시체를 벧산 성벽에 못 박아 매달았다. 사울의 '시체'는 '그 머리를 다곤의 묘에 달았다'는 (대상 10:10)을 참고하면 아마도 벧산 성벽에 매단 사울의 몸은 머리가 없는 몸뚱이  였을 것이다.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다가 죽어서도 수치를 당하는 처참한 자리에 떨어지게 되었다. '벧산'은 요단 골짜기 근처, 즉 이스르엘 골짜기의 동쪽 끝 부분으로, 요단 강에서 서쪽으로 약 6.5km 떨어지고, 갈릴리(긴네렛, 디베랴) 바다로부터 남쪽으로 약 19km 떨어진 곳에 있는 성읍이었다. 고대 문헌에 따르면, 앗수르 왕 산헤립은 블레셋 정복 후 블레셋의 에그론 관리들의 시체를 그 성읍 주위의 기둥 위에 매달아 놓기도 했었다고 한다(Pritchard). 이러한 기록을 보면 패장의 시체를 성벽에 못박는 것은 1) 상대국 백성들에게 엄청난 수치심을 안겨주고, 2) 자신들의 승리를 공개적으로 확증하려는 전쟁 관습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비참한 일은  사울에게 있어서 하나님께 행한 그의 끈질긴 반역 행위에 대한 심판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선민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자신들의 왕으로 모시기를 거부하고 세속적인 왕을 원했던 반역 행위에 대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8:4-8,19,20).   

 

  길르앗 야베스 족속들은 사울이 죽어서 벧산 성벽에 매달려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들은 장사들을 선발하여 밤새 달려와서 사울의 시체를 찾아다가 야베스로 가져가서 화장을 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의 뼈를 가져다가 야베스 에셀 나무 아래에 묻고, 사울을 위해 7일간을 금식하며 슬퍼했다(11-13). '길르앗 야베스'는 갈릴리 바다에서 남쪽으로 약 30km 떨어진 곳에 있는 요단 동편의 므낫세 반 지파의 성읍이었다(수 17:5,6). 이곳은 사울의 즉위 초기에 '암몬 사람'들로부터 침공을 받았었다(11:1). 그때에 사울은 '베섹'에서 군사를 모집하여 암몬 사람을 공격하여 길르앗  야베스 거민을 구원했었다(11:8-11). '길르앗 야베스' 거민들의 이러한 은혜를 갚기 위해서 블레셋 족속들에게 능욕 당하는 사울의 시체를 가져오기로 결단을 했다. '길르앗 야베스'에서 사울의 시체가 못박혀있던 '벧산'까지는 약 21km 정도의 거리였다. 그러나 요단 강 계곡 등 길르앗 야베스로부터 벧산까지의 험한 지형적 요인을 감안한다면, 그때 그 거리를 최소한 약 5시간 정도 이상 행군했을 것으로 보인다. 특별히 길르앗 야베스 거민들이 밤을 택하여 이러한 일을 결행한 것은 블레셋 사람들의 수비망을 뚫기 위한 것이었다(28:8). 야베스 거민들이 사울과 그의 세 아들들의 시체를 화장했는 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다양한 의견들이 제시되었다.

 1) 목이 잘린 사울의 시체는 크게 손상되었기 때문에 화장을 했다(Lange, Keil).
 2) 매장을 하는 경우 블레셋 사람들이 다시 침공하여 그 시체를 파내고 다시 모욕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Thenius, Smith, Philippson).
 3) 죽은 지가 오래되어 시체가 심하게 부패되었기 때문에(Hertzberg).
 4) 모압 암몬 등의 이방 국가와 인접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영향을 받은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이 훌륭한 용사들을 화장하는 이교적 장사법에 따랐다(Rainey).
 5) '불사르고'(사라프)라는 단어를 '송진을 바른다'는 의미로 이해하여, 길르앗 야베스 거민들이 여부스 사람들의 장사 방식에 따라 사울의 시체를 방부 처리했다(Driver)

 

  그런데 이러한 견해 중에서 2)의 견해는 사울의 매장지가 블레셋 사람들의 영향권 밖인 요단 동쪽이라는 점에서 적절치 못하다. 또 4)의 견해도 모압 암몬 등의 민족들은 화장하는 방식의 장례에 별로 익숙하지 않다는 점에서 타당치 않다. 오히려 그 민족들은 적의 시체를 불살라서 뼈를  가루로 만드는 등의 형벌적 성격으로 시체를 불살랐다(암 2:1). 그리고 5)의 견해는 시체를 불사름으로써 뼈가 남았다는 것을 보아 그 타당성이 적다. 여기서 '에셀  나무'는 (대상 10:12)에는 '상수리나무'로 표기되어 있다. 이 나무는 길르앗 야베스에 많았던 유명한 나무였다

 

(Smith). 길르앗 야베스 거민들이 사울의 뼈를 그 나무 아래  장사한 까닭은, 그들은 사울이 그 나무 아래 앉기를 즐기는 등 생전에 그 나무를 특별히 좋아했던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22:6). 한편 그곳에 묻혔던 사울의 유골은 후에 다윗에 의ㅎ 발굴되어 그의 아들 요나단의 뼈와 함께 베냐민 땅 셀라에 있는 자신의 아비기스의 묘에 안장되었다(삼하 21:11-14). 아론이나 모세가 죽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30일씩 애곡을 했었다(민 20:29;신 34:8). 이같은 애곡은 고인(故人)의 죽음을 아쉬워하며, 그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키 위함이었다. 여기의 '금식'도 애곡의 일종으로서 같은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삼하 1:12). 길르앗 야베스 거민들은 사울의 시체를 벧산 성벽으로부터 걷어다가 장사를 지내고 7일을 금식하였다. 즉 이들은 과거에 사울이 베풀어 준 은혜를 기억하고(11:1-11) 그 보답으로 이러한 선행을 했던 것이다. 하나님께 선택받은 사울은 교만으로 인한 불순종과 거역으로 하나님께 버림을 받게 되었고, 길보아 산에서 적의 화살에 중상을 입고 자살로 생을 마쳤다. 이렇게 하여 사울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좆지 않고 두 마음을 품은 사람을 상징하는 인물이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