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하신 주님를 만나자
- 우리들의 생에 있어서 만남이라고 하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사건입니다.
- 모든 운명은 만남에서 결정된다고 볼 수 있는데,부모를 잘 만나서 행복한 생이 되기도 하고 부모를 잘못 만나서 불행한 삶이 되기도 하며 부부간에 남녀가 만나는 그들 일생의 행.불행을 좌우하기도 합니다.
기타 친구의 만남, 이웃의 만남,지나가는 행인과의 만남까지도 자기 자신의 삶과 직결된 것임을 부인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의 삶이 어떤 만남의 계기를 통하여 새롭게 이룩되고 있을진대 오늘 우리들은 모든 사람의 생을 새롭게 창조하시는 부활하신 줄르 만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무덤 속에 장사된 후에 주를 향한 그녀의 열정적인 사랑으로 그의 현존을 갈망하다가 잠을 이루지 못 하고 밤새도록 엎치락 뒤치락 하였습니다.
마침내 사흘째 되는 날, 새벽 미명 어둡고 두려운 길이었으나 주님의 시체에 향유라고 바르기 위하여 무덤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러나 무덤에 이르러 보니 무덤 문은 굴러내려 갔으며 주님의 시체는 보이지를 아니하였습니다. 그녀는 무덤 문 밖에 서서 하염없이 슬피 울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약속하신대로 이미 부할하셔서 그의 뒤에 오셔서 서 계셨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슬픔의 벽이 너무도 두꺼워서 예수의 서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신줄을 알지 못하고 동산지기 인줄로만 알았습니다.
이때에 예수께서는 평소에 부르시던 인자하신 음성으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을때, 마리아는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고 돌이켜 "랍오니여! 하며 맨 처음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그녀는 감출 수가 없는 환희를 안고 주님의 분부를 따라 제자들에게 그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갈릴리로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위하여 본문 말씀의 내용 몇 군데를 상고하여 보기로 하겠습니다.
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마리아의 마음 속에 간직되어 있는 그리스도께 대한 참된 사랑은 그녀로 하여금 계속적인 추종을 낳게 하였으며 그와 같은 추종이 무덤 문까지 이르게 하였던 것은 그리스도를 찾아 갈망하는 참된 희망이 있었을 때 온갖 수단도 함께 동원하였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게 하고있습니다.
무덤에 도착한 마리아는 주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였음으로 슬픔을 억제하지 못하여 눈물로 폭발하고만 것이며 그녀의 눈물은 주님을 향한 사랑을 웅변적으로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울어봐도 시체가 보이지 않는 신비는 풀려나지 않았습니다. 시체의 향방을 찾는 슬픈 눈물은 그칠줄을 몰랐습니다.
마리아가 흘리는 눈물은 주님을 잃어버린 허전한 그의 마음을 연결하는 마지막 연결선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찾는 사람들은 울면서 그를 찾아야만 합니다.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을 위해서입니다.
예수의 육신의 부모도 잃어버린 예수를 찾아 헤매였습니다 (눅2:48).그런데 예수를 찾는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의 부모들도 성전에서 찾아야 할 예수를 길에서 찾고 있었으며 마리아도 다시 사신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에서 찾고 있었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천사를 통하여 마리아에게 이르시기를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에서 찾느냐" 고 책망을 하셨습니다 (눅 24:5). 마이라는 살아있는 자를 찾아야 옳은데 계속적으로 여전히 죽은 자만 찾고 있었습니다. 여기 무덤 속에 계시지 아니하고 살아나셨으니 빨리가서 제자들에게 이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마 28:6).
만일 마리아의 생각대로 마리아가 찾고 있는 대상이 되어 주님께서 무덤 속에 시체로 발견되었다고 하면 큰 문제입니다.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가 아니라 사망의 종교로 끝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 날 새벽 예수께서 마리아의 눈에 시체로 발견되지 아니하였음은 우리 인류에게 얼마나 큰 축복이요, 승리인지 모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무덤 속에 시치로 갇혀 있는 주로 찾고 있는 기독교를 모르는 자입니다. 우리들은 마리아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고 부주의하기 때문에 슬퍼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인간의 어두운 눈과 흐려진 마음들이 문제입니다.
주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성전을 헐라 내가 삼일만에 다시금 세우리라(요2:19)하셨습니다. 죽은 자들은 죽은 자들로 장사하게 하라 하셨습니다 (마 8:22). 빈 무덤을 향하여 울어서는 안됩니다. 주님의 무덤 은 그가 다시 사셨음으로 오히려 빈 무덤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시골 어느 교회 집회를 나갔을때 속장님 한 분이 시간 시간 울고 있었습니다. 자기 집으로 저녁 식사에 초대받아 갔을 때에도 밥상머리에 앉아서 또 다시 울고 있었습니다. 나는 궁금해서 울고 있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는 대답하기를 군인 가서 죽은 큰 아들 얼굴이 내 얼굴과 똑같아서 내 얼굴만 보면 눈물이 나온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은혜 받아서 운는 줄로 알고 있었는데 크게 실망을 한 일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세상적이고 육신적인 눈물을 흘려서는 안됩니다. 죽은 시체를 찾아 울지 말고 다시 사신 주님을 찾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무덤 속을 향하여 머리를 굽혀 울지 말고 무덤 밖으로 눈을 돌려 다시 살아나신 예수를 보도록 하여야 합니다.
2. 예수의 서신 것을 보나 예수신줄 알지 못하였더라.
여기에 문제가 있으며 이 문제를 풀어야 합니다.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의 뒤에 오셔서 서신 것을 보고 있었으나 예수신줄 알지 못하고 겨우 동산지기인줄로만 알고 있었다고 하는 안타까움입니다.
마리아는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않는다고 하는 슬픔의 발작이 그의 영혼을 꽉 메우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주님의 시체가 사라진 그 일념에만 몰두하고 있어서 그는 모든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고 말았습니다.
마리아의 암흑은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성격의 것이었습니다. 흔히 우리들의 삶은 주관적이기 쉬운 것이 큰 탈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을 때에도 여러 사람들이 그러하였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디베랴 바다로 십자가를 등지고 고기잡으러 갔을때, 부활하신 예수께서 바닷가에 가셔서 서 계셨으나 예수신줄 알지 못하였다(요21:4)고 기록되어 있으며, 제자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갈 때에 부활하신 예수께서 저들과 동행하여 가셨으나 저희와 눈 이 가리워져서 예수신줄을 알지 못하였다(눅 24:16)하였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도 역시 예수께서 서 계셨으나 마리아는 예수신줄을 알지 못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정욕의 눈,슬픔의 함정, 슬픔의 벽과 같은 주과적인 것들이 주님을 보지 못하도록 가로 막고 있었던 것입니다.
빛이 세상에 와서 어두움을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한다고 탄식하고 있습니다(요1:5). 그리스도는 그의 백성과 가까이 계시나 그들이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찾고 있는 노력은 헛되게 소모되거나 상실해버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열매가 주관적인 이유 때문에 지연되고 있을 뿐 이었습니다.
마리아가 헤매이고 있는 미로 안개가 짙게 깔려 있는 것처럼 사방으로 덮여 있었으나 구하는 자에게 얻게 하시고, 찾는 자에게 찾게 하시며, 문을 두드리는 자에게 열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가 배후 에 있었음이 사실입니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가이 하시되 그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가까이 하신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시34:18). 드디어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네가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요20:15) 내가 부활하였는데 왜 알지 못하고 울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무덤 속에서 다시 살아난 내가 지금 네 앞에 서 있는데 누구를 찾고 있느냐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모든 우리의 슬픔을 진정시키며, 흐르는 눈물을 저지시킬 뿐 아니라, 눈물의 근원까지도 말리울 수 있는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아무리 교회에 나와 앉아 있어도 그리스도를 그리스도로 바로 알지 못하는한 우리의 눈물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예수의 서신 것을 보나 예수신줄 알지 못하는 안타까움은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를 알아야 슬픔이 끝납니다.
그리스도를 알아야 눈물의 근원이 없어집니다.
그리스도를 알아야 절망의 함정에서 구출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나야 인생의 비극이 끝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나야 참 기쁨을 맛볼 수가 있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그리스도로 만날 수 있을 때에만이 우리들의 생은 새 역사가 창건될 수 있는 것입니다.
3.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돌이켜 랍오니여(선생님)하니...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그의 백성에게 알리는 방법은 말씀을 통해서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은총의 능력 속에서 사람의 이름을 부르십니다(출 33:12).
부활하신 주님께서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아! 사울아!" 하고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아는 것입니다(요 10:4). 예수께서는 푹풍 속에서 두려워 하고 있는 제자들을 향하여 바다 위로걸어 가시면서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하지 말라"고 위로하셨습니다(마 14:27).
지금 여기에서도 슬퍼하며 실망하고 있는 그녀에게 마리아야 하고 브리시고 계신 것입니다. 이 부르심속에는 네가 어찌하여 나를 알아보지 못하느녀?너와 나 사이에 어떻게 이렇게 낯설게 되었느냐고 하심입니다.
이때에 마리아는 아가서에 기록된 대로 가로 막힌 산을 넘어오는 사랑하는 자의 음성을 분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가 2:8). 그리하여 눈을 크게 뜨고 돌이켜 예수 앞에 허리를 굽히며 입을 열어 랍오니여하고 대답하게 되었습니다.
마리아의 이와 같은 순간적인 반응은 예수께서 그의 영혼을 향하여 사랑의 종을 쳤을때 슬픔의 꿈에서 깨어 나게 된 것과도 같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개개인의 영혼을 향하여 끊임없이 사랑의 종을 울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별들의 수를 말씀하시고 그 모든 이름을 하나 하나 부르고 계십니다 (시 147:4).
그리고 천상에는 수없는 천군 천사를 두시고 그들을 그 이름을 따라 부르시며 부리고 계시며 천하 만상을 창조하셨고 또한 이끌어 내시고 각각 그 이름을 부르시는 크고 강한 분이십니다(사 40:26).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가 되셔서 양된 우리의 이름을 하나 하나 부르시며 인도하시고 그의 눈길을 각 사람들에게 돌리시며 그들을 그의 마음 속에 하나 하나두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는 우리의 문이 되심으로 우리가 그에게로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요 10:9).
예수께서는 수시로 그의 모습을 변장하는 배우가 아니십니다.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실 뿐 아니라(히 13:8)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분이십니다 (약 1:17). 다만 주님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 선이 잘못 되고 주님을 향하여 듣는 우리들의 영적 청각이 고장났기 때문입니다.
마리아가 "랍오니여"하고 주님을 바라보며 붙잡으려고 하였으나 동작을 취하기전에 이미 그리스도에게 온전히 그의 삶 전체가 사로잡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은 우리를 향하여 xxx아! 하고 부르시고 계시는 그리스도에게 온전히 붙잡혀 살기 위하여 모든 피조물에 대한 집착을 떠나야 하겠습니다.
그 어느것도 그리스도와 우리들 사이에 끼어들지 못하도록 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어떠한 것도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를 간섭하지 못하도록 다 몰아내야 하겠습니다.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음서을 알아들었을 때 돌이킬 수가 있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빈 무덤을 향하여 시체의 향방을 찾으면서 울어야 할 필요는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마리아가 그리스도를 향하여 돌이키는 순간 기쁨과 평안은 강물처럼 흘러 넘쳤습니다.
만일 지금까지의 내가,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지 못한 생이었다면 문제는 심각합니다. 얼마 지나서 부활절을 맞이하게 될 이 새 봄에 우리들의 삶은 다시 사신 그리스도를 만나게 됨으로써 우리의 생이 감격 속에 갈릴리에서 기다리고 있을 형제들에게 힘있게 기쁜 소식을 안고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기를 "무서워 말라 그리고 갈릴리로 가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하셨습니다. 갈릴리는 부활의 주를 만나지 못한 자들이 모인 곳입니다. 우리는 마리아처럼 부활의 주님을 오늘 여기서 만나고 그리고 갈릴리의 형제들 에게로 나아가십시다.
'好學의 敎育 1 > 절기행사,예배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엠마오 도상의 현대인 (0) | 2012.08.14 |
---|---|
부활하신 후 40일간 (0) | 2012.08.14 |
부활의 능력 (0) | 2012.08.14 |
부활의 권능 (0) | 2012.08.14 |
지상 최대의 기쁜 소식 [설교] (0) | 2012.04.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