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自由/박장대소拍掌大笑

아이들은 때로 엄마보다 어른스럽다

好學 2012. 6. 28. 21:43

 

아이들은 때로 엄마보다 어른스럽다

 

 

여름을 끝내는 소나기가 천둥 번개를 동반해 내리치자 마흔 살 엄마, 엄살을 떤다. "아이구 깜짝이야. 귀신 나오겠다." 여덟 살짜리 아들, 능청을 떤다. "무서워 하기는…. 내가 있잖아."

생애 처음 부모와 떨어져 1주일간 극기캠프를 떠나는 '초딩' 3학년 딸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버스 앞까지 따라 나온 제 엄마를 돌아보며 비장하게 말했다. "약속해." "뭘?" "울지 않기로. 나 어린애 아니거든?"

아이들은 때로 그들의 부모보다 어른스럽다. 홍매(37)씨에게도 그런 기특한 아들이 있다.

먼저 홍매씨 얘기부터 하자. 지린성(吉林省) 출신의 그녀는 중국에서 의사였다. 옌볜대 의대에 들어가 집안의 자랑거리가 된 둘째 딸. 하지만 중국에 파견 온 한국 남자와 사랑에 빠지면서 모든 게 달라졌다.

열 살 연상에 가진 것 하나 없는 샐러리맨, 그 남자 하나 믿고 시작한 한국살이였다. 가난은 견딜 수 있었다. 구조조정으로 실직한 남편을 대신해 '조선족'이란 이름으로 식당과 공장을 누벼야 했지만, 그야말로 "사랑했으므로 행복했다."

무서운 건 사람의 마음이었다. 남편에게 엄습한 의처증. 이웃과 말 한마디 나눌 수 없고, 시장, 목욕탕에도 혼자 갈 수 없었다. 사랑하니까 그럴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증세는 점점 심해졌다. 사나흘씩 방문을 밖에서 걸어 잠갔고, 손찌검을 예사로 했다.

아들 철이가 웃자라기 시작한 건 이 무렵, 여섯 살 때부터다. "남편이 절 때리려고 하면 두 팔로 가로막고선 '엄마는 여자잖아. 때리지 마요' 하면서 아빠를 끌어안아요. 내 상처에 약을 발라주면서 '울지마, 햇님이 뜨면 아빠도 화 풀릴 거야' 하는데…."

홍매씨는 주위의 도움을 받아 우여곡절 끝에 남편과 헤어졌다. 보수적인 한국 사회에서 조선족에 이혼녀라는 굴레까지 떠안았고, 양육권이 없으니 아들과도 떨어져 살아야 하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내 아이 가슴이 상처로 곪아 터지고 있는데 남의 눈 무서워 무작정 덮고 가는 것도 죄라고 생각했어요. 남편도 느낀 바가 있는지 일을 다시 시작했고요. 버스로 한 정거장 거리라 반찬도 해서 보내고 아이 학교생활도 의논하고 그래요."

이혼한 뒤 홍매씨는 대학 평생교육원에 들어가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땄다. 요즘은 노인요양원에서 일한다. 초등학교 4학년이 된 철이는 그래도 혼자 사는 엄마가 못내 걱정스럽다. 점심은 먹었는지, 일 마치고 집엔 잘 들어갔는지, 아픈 데는 없는지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를 건다.

재활용가게에서 구입한 화장대를 꽃으로 장식해준 것도 이 애늙은이 아들녀석이다. "엄마가 꽃 좋아한다고 천냥가게에서 한 송이씩 사다 줘요. 하트 모양 열쇠고리도 사다 주고. 참 착하죠? …근데 저는요, 우리 철이가 어리광 부리고 떼쓰는 모습 보고 싶어요. 아이처럼, 개구쟁이처럼…. 아이들은 그래야 하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