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漢字文學/(한자교육)署名運動

다시 古典을 읽어야 할 때

好學 2012. 6. 24. 17:36

다시 古典을 읽어야 할 때

 

 

安秀吉
서울대학교 名譽敎授 / 本聯合會 理事

 


두 개 이상의 曲을 조합해서 내는 器樂曲의 형식을 ‘組曲’이라고 한다면 호텔 등에서 두 개의 방이 서로 이어져 한 사무실로 쓸 수 있는 경우를 ‘組室’이라 해야 할 것이다. 즉 음악에서 ‘Suite’를 ‘組曲’이라 이름 붙인다면 호텔에서 ‘Suite’는 ‘組室’, 또는 ‘複室’이라 할 만하다는 뜻이다.
미국 초창기 한 지역에 가서 사업을 벌이면서 따로 사무실 건물을 마련하지 못했던 사업가들이 즐겨 썼던 것이 그 지역 최고의 호텔의 ‘Suite’였기 때문에 지금도 회사나 집의 주소로서 ‘Suite’하면 사치스런 느낌을 주는 모양이다. 서울에도 여기저기 서비스 달린 고급 맨션級 아파트에 ‘스위트’란 이름이 붙어있는데 그곳에 사는 조금 유식한 사람이 자기 주소를 적어주면서 ‘SUITE’가 아닌 ‘SWEET’라고 적어줬다는 우스운 이야기가 있다.
사람 살면서 어쩌다 돈은 모을 수 있겠지만 個個人의 人格은 ①정신 수양을 꾸준히 하거나, 아니면 ②고생스런 삶을 살망정 그 어려움 속에서도 진지하게 고민을 해가면서 인생에서 배운 것이 있거나 해야 할 것이다. ‘人間되려고 하는 진지한 노력’ 없이 기회를 타서 實利만 얻어낸다고 해서 깊은 人格이 형성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한국사회 지난 30년 간 ‘人格’이나 ‘향상을 위한 진지한 노력’ 등 內的價値에 관해서 언론이 보도한 경우는 극히 드문 것 같다. 光復後 계속(방송만 듣자면) 한국사회는 범죄만인 듯 하더니, 이제 TV를 보자면 한국사회는 춤과 노래, 드라마와 스포츠뿐인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은 TV에만 쏠리고 개인의 ‘조용하지만 강인한’ 신념 같은 것에 신경 쓸 마음의 여유가 없는 속에서 ‘視聽覺敎育’으로서의 방송의 효과가 크기 때문에 지금 한국인들은 TV로 조련된 ‘Lemming쥐’ 때와 다를 것이 없다. 이제는 바다 끝으로 내밀고 있는 낭떠러지의 마지막 단계를 달리고 있는 ‘레밍’의 꼴이 된 것이 한국의 實像인 것이다.
진정 한국사회는 이제 낭떠러지에서 바다로 추락하는 ‘레밍’의 집단으로 끝 날 것인가? 아니면 멀리 내다보는 叡智까지는 갖지 못 할망정 마지막 끝자락에서나마 ‘이것은 아닌데…’하고 머물러서는 智慧 있는 사람들이 될 것인지, 여기서 필자가 試驗性 질문을 하나 해보기로 한다.

 


한국에서 ‘매’로 處罰하는 笞刑이 없어진지 오래지만 ‘笞刑을 부활시키는 데에 찬성하느냐?’하는 것이 그 질문이다.
모두가 황당하다고 말하겠지만 笞刑은 크게 효과가 있다. 얼마 안 되는 科擧에 이 사회를 아름다운 질서 속에 유지해 주어서 유럽 등에서 우러러 보기도 했고, 불란서 시인 ‘샤으르 보우드레-ᄅ’로 하여 “그곳에는 질서와 아름다움뿐이다.”라고 후렴 붙여 읊게 했던 ‘동양질서’의 뼈대는 마을 어른들이 罪人 들을 ‘매’로 다스리는 笞刑과 ‘멍석말이’ 死刑제도였다. 다시 말해 동물급 인간들과는 달리 이 백성에게는 敎育이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인류를 잘 관찰하면 백성들의 자질부족으로 해서 ‘매’의 효과가 없는 ‘敎育不可’의 나라들이 있다. 그런 곳에서는 ‘매’질은 虐待 이외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간단하게 ‘野蠻’을 이야기한다. 결국 사람 만드는데 별 효과가 없어서 백성들을 최소한의 교육으로 끝낼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고, 子女 敎育에 관심이 없어서 ‘우수한 아이들’을 방치하기 때문에 나라가 데려가서 교육시키는 것이 기본인 나라들이 많다.
순수한 동물과 별 차가 없고 때려도 효과가 없는 곳에서는 당연히 ‘매’를 毆打로만 보게 될 것이고 가정에서 人性敎育 제외하고 信仰敎育만 하는 경우라면 ‘笞刑’이란 野蠻 이외의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東洋에서는 눈물을 감추고 자식을 爲해서 때리는 매도 있고, ‘때리는 매에 힘이 줄었음’을 깨달아 어머님의 老衰를 슬프게 생각하는 자식의 絶望을 아름답게 생각하는 風土도 있는데, 人性문제를 다루는 데에 있어서 언론 媒體가 자기네들의 사명을 뒤로 숨기고 ‘敎育을 野蠻行爲로만’ 묘사하게 된다면 그 言論이 한 社會의 時流를 결정하는 것을 그대로 맡겨놓을 수는 없는 것이다.

 


言論이 視聽率과 普及部數에만 무책임하게 매달리면서 政治客들의 의도에만 민감해서는 안 될 것이고 원래 言論은 ‘좋은 일을 적극 발굴해서 길러내는 度量’이 요구되는 것이다.
世宗大王은 周易을 1,000번은 쉽게 읽었을 것으로 전한다. 이 경우 어려서 東宮에서 처음으로 읽었을 때 얻은 知識과, 百姓의 어려움을 무수히 보게 된 다음에 읽어내는 智慧는 책은 같으나 ‘깨닫게 되는 내용’에 커다란 차이가 있는 것이다.
昨今의 風潮와 같이 ‘한번 읽으면 같은 책을 다시 읽을 필요는 없을 것’으로 斷定하는 서양의 ‘論理至上主義’, 그리고 效率性 타령에 과연 흠은 없는 것인지 생각해 볼만 할 것이다.
상기 試驗性 질문에 돌아와서 싱가폴은 무척 文化된 곳이지만 엄연히 ‘笞刑’이 있어서 잘못하면 경우에 따라서는 ‘매’를 맞는다. 千萬金의 벌금을 물게 해도 효과가 없던 것이 석 대의 매(whipping)로서 다시는 그러한 일이 없게 하는 대에 더 큰 효과가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昨今 한국 사회의 破壞 상황은 극심하기 때문에 이제는 그 以上 現實直視를 피할 길이 없게 됐는데, 이 경우 필자가 권하고 싶은 것은 누구나 한번 더 『月印釋譜』(訓民正音이 앞에 달려있다) 등을 다시 한번 읽는 일이다. 月印釋譜에서 보면 앞 부분에서 諺文기록법을 가르친 다음 漢字原典을 읽게 유도해서 無學의 무리도 漢字로 되어 있는 典籍(월인석보)을 解讀하게 하고 있어서 大王이 平 百姓에 걸고 있는 기대의 크기를 엿볼 수가 있다.
『明心寶鑑』 등 우리 고전을 再讀해서 ‘이러한 亂世이기에 읽어내게 되는’ 진실한 聖賢의 뜻을 되새김해야 할 것이고, 가장 깊은 뜻을 수용할 수 있는 眞書들과 漢字基礎의 喪失을 구체적으로 막는 일에 積極 참여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