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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希春의 眉巖日記

好學 2012. 6. 23. 06:38

柳希春의 眉巖日記

 

 

沈在箕

하루 하루를 지내면서 경험한 일과 생각한 바를 날짜순으로 적어나가는 備忘錄을 日記라 하거니와, 이 日記가 個人의 私事로운 情談類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한 나라의 歷史書에 準할 만큼 公共의 價値를 지니게 된다면 그것을 日記라 할 것인가? 歷史冊이라 해야 할 것인가? 『眉巖日記』 十四冊을 펼칠 때마다 이것은 단순한 日記가 아니라 史籍이라해야 옳겠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眉巖日記』는 眉巖 柳希春(1513 中宗8~1577 宣祖10)이 宣祖 卽位年(1517) 10月부터 宣祖 10年(1577) 5月까지 적은 日記 十四冊을 가리킨다. 宣祖 10年 5月에 그가 作故하였으니 그의 生涯 마지막 11年間이 流漏없이 記錄된 것이다.
眉巖 柳希春은 全羅道 海南에서 博學한 아버지 桂麟의 아들로 태어나 崔山斗, 金安國 등 唐代 巨儒의 가르침을 받고 中宗 33年 文科別試에 及第하면서 宦路에 나아갔다. 成均館 學諭를 거쳐 司諫院 正言에 이르기까지 順坦한 官職生活을 하였으나 乙巳士禍로 罷職되고 良才驛壁書事件으로 濟州, 鍾城, 恩津 등을 轉轉하면서 前後 19년 간 귀양살이를 하였다.
宣祖가 卽位하자 伸寃되어 成均館 直講이 되었다가 弘文館 校理, 全羅監司 등을 거쳐 成均館 大司成, 司憲府 大司憲, 司諫院 大司諫, 承政院 承旨 등 長官職에 있으면서 同知成均館事, 校書館 提調를 兼任하며 經書의 口訣과 諺解를 詳定하고 『朱子大全』․『朱子語類』 등 典籍을 校正하는 일에 心血을 기울였다. 무엇보다도 『新增類合』의 編纂은 國語敎育史에 한 획을 긋는 큰 業績이 되었다. 이 『新增類合』은 千字文의 未備點을 補完하여 當代 實用漢字 3,000字를 領域別로 分類하고 四字成語式으로 익히게 함으로써 漢字敎習과 國語語彙 保存에 그 功勞가 認定되기 때문이다.
眉巖이 돌아가고 10여 년이 지나 壬辰倭亂이 터지자 나라의 典籍이 모두 잿더미가 되었는데 光海君 때에 宣祖實錄을 纂修하기에 이르러 壬亂前의 史料로 믿을만한 것으로는 이 『眉巖日記』가 꼽혔다는 事實은 이 日記가 얼마나 史實에 忠直한 記錄이었는가를 立證하고도 남는다.



眉巖日記 甲戌年(1574 宣祖8) 시월 초열흘

맑음 파루 칠 때에 일어나 의관을 갖추고 이른 아침에 경연청으로 나갔다. 묘시(아침 6시)에 전하 앞에 입시하였다. 주상 전하께서는 지난번에 받아 읽으셨던 글월을 읽으셨는데 옥음이 낭랑하여 臣은 즐거움을 이길 수 없었다.(중략)
주상전하께서 말씀하셨다. “무릇 (漢文) 글월과 그것을 풀이하는 吐나 새김과의 관계를 놓고, 어떤 이는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므로 특별히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하는데, 그러나 성현이 하신 말씀을 글뜻을 통하여 이해하지 못한다면 어찌 그 말씀의 깊은 뜻을 능히 통달하였다고 하겠는가? 이제 四書와 經書의 구결토 붙이는 것과 우리말로 풀이하는 것은 의견이 분분하여 정해진 바가 없다. 마침 경의 학문이 정밀하고 해박하여 세상에서 보기 드문 재주라 하니, 사서오경의 구결토와 우리말풀이를 모두 경이 자세히 살펴 정하도록 하라. 상설기관을 설치할 필요가 있다면 그렇게 해도 좋다. 또 혹 經學講論을 담당하는 관원이 있어야 한다면 그것도 역시 경이 알아서 선발하라.”
신이 上奏하여 말씀드렸다. “이러한 일은 상설기관을 설치할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오직 경학에 정통하고 밝은 사람 몇이서 함께 의논하여 정하면 될 일입니다. 다만 신은 지금 『朱子大全』을 교정하고 있사옵기로 다른 일에 간여할 겨를이 없습니다. 또한 신은 몸이 심히 잔약한데다가 노쇠함까지 밀려오고 있습니다. 명년에 『朱子大全』의 印出이 모두 끝나면 그 가을로 고향에 돌아가서 만들어 보면 어떻겠습니까?”
주상께서 말씀하셨다. “무슨 말이냐 그것은 아니 된다.” 신이 또다시 아뢰어 말씀하였다. “신은 어려서부터 몸이 몹시 쇠약하였습니다. 제 고향의 마을 사람들이 모두 삼십을 넘겨 살기 어렵겠다 하였사오며, 남으로 북으로 귀양살이를 하면서 비바람 찬 서리를 맞고 고초를 겪으니 세상 사람들은 모두 살아서 돌아오기 어렵겠다 하였는데, 마침내 살아서 돌아와 또 임금님의 은혜를 입고 전하를 모시는 經筵에 출입하게 되었사오니 신으로서는 더할 수 없는 행운이온데 거기에 또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기사년(1569, 宣祖3) 겨울에 아내를 거느리고 고향에 돌아갔을 때부터 이미 벼슬에서 물러나 쉬고자 하는 뜻을 지녔사오나, 신의 아비와 할아비가 벼슬을 받은 바 없음을 생각했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신이 通政監司가 되었사오니 追贈(從二品 以上의 벼슬아치의 父․祖父․曾祖父에게 官位를 내려주는 일)의 행운을 얻게 된다면 신의 소원을 이루는 것이라 여겼나이다. (그리하여) 신이 全羅監司가 되자 날마다 신임 都事가 내려와 신의 病狀(身病으로 職務遂行이 어려워 辭職한다고 하는 글월)을 받아 돌아가기를 바랐었습니다. 마침 盧稹(노진)이 내려왔으므로 사직의 글월을 바치려고 하였사온데 갑자기 부르시는 召命을 받잡고 올라오니 (또) 전하의 칭찬과 사랑이 너무나 크고 분에 넘치어 차마 속히 물러가지 못하옵고 머물러 있으며 오늘에 이르렀나이다. 엎드려 비오니 聖明하옵신 전하께서는 시작과 끝마침을 모두 가엾게 보살피시어 이 세상 부모의 은혜를 다할 수 있도록 하여 주옵소서.” 이에 주상전하께서는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아마 전하께서도 신의 간절한 뜻을 헤아리시는지라 차마 박절하게 내치지 못하고 생각하시는 듯하였다.



위에 인용한 일기는 眉巖과 宣祖大王 사이의 對話 한 대목이지만, 거기에 經書의 口訣釋義와 關聯된 그 當時 우리 나라 學術, 文化, 敎育의 懸案이 含蓄的으로 提示되어 있다. 그리고 또 眉巖은 어떻게 歸去來의 辭職을 請願하는지, 經筵이 끝난 자리에서 벌어지는 임금과 신하의 情談이 430여 년의 時空을 넘어 우리들의 書齋에 그림인 듯 파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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