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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숲이 나에게 말을 건다네

好學 2011. 7. 23. 22:35

[ESSAY] 숲이 나에게 말을 건다네

 

 

 

변광옥 국립산림과학원 난대산림연구소장

수많은나무들 중에 마음에 드는 나무를
간택하기란 쉽지 않았다.
눈이 시리도록 수만 번 숲을 보고 나무를 보았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때가 더 많았다.
그러다 기대 이상 좋은 숲을 만나면
끼니도 잊은 채 산속을 누비기 일쑤였다.

아름다운 숲을 만들어 가는 사람들이 어디 한둘일까. 그렇지만 나는 숲에게 하나밖에 없는 애인이고 싶을 때가 있다. 숲은 나에게 보람이고 안식처다. 숲은 공평하다. 말이 없다. 산과의 만남이 벌써 40년 됐다. 그때 자식을 둔 부모는 다들 같았다. 당신 대(代) 보다는 좀더 나은 직업을 갖게 하려는 일념들이 가득했다. 내 아버지라고 다르셨을까. "판검사는 못되더라도 농사일은 애비 대에서 끝내라."

조상 대대로 이어온 농사일이고, 농사가 천직인 줄 아셨던 아버지였지만 자식의 앞날이 걸리자 다른 분이 되셨다. "할 것이 없으면 면서기라도 하라." 얼마나 농사일이 힘드셨으면 자식에겐 멍에를 씌우지 않으려 하셨을까. 어린 마음이지만 마구 흔들렸다.

나는 칠 남매를 둔 부모님의 심정을 모른 척했다. 차마 면서기는 못하겠다고 아버지의 뜻을 뿌리치고 나왔다. 그 뒤 학업을 마치고 어려운 가정 형편을 돕겠다고 산림 공무원이 되면서 산과의 인연이 시작됐다. 딱히 어떤 화려한 사명감이 있어 택한 일도 아니다. 어떻게 보면 궁여지책이었을지도 모른다.

초임 발령을 받고 직장생활의 첫발을 디딘 곳은 인적도 드문 산간오지였다. 해발 팔구백 고지쯤 되는 곳이다. 지금은 숲이 우거져 그늘도 있고 숲이 만들어 내는 풍광이 좋아 많은 사람이 찾아가고 있지만, 당시만 (1970년대 초) 해도 산은 온통 쓰지 못할 잡목과 풀로 꽉 차 있었다. 일제 강점기와 6·25동란을 겪으면서 산은 벌거벗은 채였다.

일러스트= 정인성 기자 1008is@chosun.com

숨이 막힐 정도로 우거진 잡목 사이로 나무를 심고 가꾸기 위해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오르내리는 일이 반복됐다. 지루하고 답답했다. 가끔은 산속에 주저앉아 눈물을 찔끔거리며 다른 직업은 없을까 고뇌했다. 그때마다 산이 나를 달랬다. 이 민둥산을 누가 입혀도 입혀야 되지 않겠는가. 산이 나를 부를 때 차마 뿌리치기 힘들었다.

그러기를 수차례….어느 날 어리석은 가슴에도 변화는 찾아왔다. 숲은 참을성 있게 나를 가르쳤고, 나도 조금씩 적응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생각이 변하니 사람이 바뀌었다. 아침 저녁으로 주변에 가라앉는 산의 향기를 아시는가. 고목 등걸을 타고 넘나드는 다람쥐의 재롱이 언제 제일 귀여운지 아시는가. 그게 느껴지다니 신기한 일이었다.

그 무렵은 전국적으로 1년에 5억 그루가 넘는 나무를 심을 때다. 인부들과 한두 달 산속에 갇혀 살다 보면 내 모습은 산적이나 다름없었다. 산림공무원이면 누구나 경험했을 일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 산하는 해를 거듭할수록 발갛게 드러냈던 등허리를 감추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에겐 '산 넘어 산'이란 말이 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그대로 삶이었다. 산이 푸르러지면서 새로운 고강도 미션이 생겼다. 해외 의존도가 높은 목재 자원을 자급자족할 수 있도록 산림을 개조해가라는 것이다. 뜻은 좋았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질 좋은 목재를 얻자면 유전자가 우수한 종자를 심어야 했다. 동물세계에서도 우수한 새끼를 얻기 위해선 어미와 아비가 좋아야 하듯, 좋은 신랑·신붓감의 나무를 찾기 위해 전국 산야를 누비는 고행이 기다리고 있었다.

수많은 나무들 중에 마음에 드는 나무를 간택하기란 쉽지 않았다. 눈이 시리도록 수만 번 숲을 보고 나무를 보았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때가 더 많았다. 그러다 기대 이상 좋은 숲을 만나면 끼니도 잊은 채 산속을 누비기 일쑤였다. 백두대간은 산이 높고 계곡이 깊은 만큼 우량한 나무들이 많다. 내 발길이 안 닿은 곳이 없다.

한번 산에 들어가게 되면 일주일 이상 산속에서 생활해야 한다. 산이 깊어 이동하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다. 일 년에 두세 달은 이런 생활로 나무와 씨름해야 미래에 산림자원으로 쓸 만한 신랑·신붓감 나무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런 일들이 이웃의 눈에는 무척 좋은 직업으로 보였나 보다. 매일같이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서니 그럴 만도 했겠지. 어느 날 옆집 주인이 매일 여행만 다니느냐고 부러운 듯 말을 걸어왔다. 나는 그냥 빙긋 웃었다. 차라리 달콤함 오해로 놔두고 싶었다. 어찌됐건 초창기에 계획된 조림 물량을 다 심기 위해 산속에 갇혀살던 시절보다는 나은 생활이니까.

지난 여름에 모처럼 관광버스를 타고 중학교 동창들과 시골을 내려가게 됐다. 평소 승용차를 운전하며 고속도로를 달릴 때는 좀처럼 보지 못했던 숲을 볼 수 있었다. 차창 밖으로 눈부시게 다가오는 산들은 정말 많이 달라진 모습이다. 버스에 탔던 동창들도 숲이 울창해졌다는 사실을 공감했다. 어릴 때 뒷동산에 올라 미끄럼을 타던 추억이며, 낙엽을 긁어 땔감으로 쓰던 이야기들로 지난 시절을 회상하느라 버스 안이 시끌벅적했다.

어느새 나무를 심고 가꾸어 온 지 40여년의 세월이 흘러 산은 울창한 숲이 되었다. 나의 젊음이 녹아있는 숲이다. 앳돼 보이던 나의 얼굴에도 세월의 흔적이 새겨지고 있다. 이제 숲의 모습도 어엿한 청장년의 모습이다. 하늘을 찌를 듯 왕성하게 치솟는 숲이 나에게 말을 건다. 내가 청년이었을 때 나를 달랬던 숲이 늙어가는 내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준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를 달래는 것은 숲이다. 언젠가 내가 쉴 곳도 여기라고 속삭이는 것 같다. 가슴이 뿌듯해진다. 모두들 자신이 맡은 영역에서 조국에 봉사했겠지만 나는 헐벗은 국토를 푸른 강산으로 만드는 데 작은 힘을 보탰다. 그 숲이 내게 말을 건다. 참, 고생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