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漢字敎育추진총연합회」創立 10주년의 意義
李 應 百
서울大學校 명예교수 / 本聯合會 共同代表
I
우리 나라에 漢字․漢文이 들어온 것을 아주 늦추 잡아도 漢武帝가 우리 땅에 漢四郡을 설치한 元封 3년(B.C. 108)을 더 내려올 수는 없다. 그로부터 2천여년, 漢字․漢文은 文字 없던 우리 나라에 表記 道具 구실을 하면서 우리 文化를 高度로 성장시켜 新羅 때 이미 元曉와 崔致遠 같은 高僧 大儒가 나와 名聲을 드날리고, 書架를 그득 메운 先人들의 허다 文集은 民族 文化의 源泉的 寶庫로 개척의 손을 기다리고 있다.
漢字․漢文이 들어오자 우리 先人들은 그것으로 ‘赫居世 一云 弗矩內’와 같이 우리말 表記를 시도했고, 壬申誓記石에서와 같이 우리말 語順에 따른 漢字作文을 해 봤으며, 慶州 南山 新城碑에서와 같이 文脈 사이에 읽기 補助 수단으로 吏讀을 삽입했으며, 鄕歌에서와 같이 漢字의 音이나 訓을 따라 읽으면 우리말이 되게 適用하기도 했다. 鄕歌의 表記方式[鄕札]은 漢字를 우리말 表記에 이용한 가장 발달된 것이었으나, 國字 發明에까지는 이르지 못한 채 시들고 말았다.
그러다가 15세기 中葉(1443)에 이르러서야 朝鮮朝 世宗大王에 의해 訓民正音이 創制됨으로써 비로소 자유로운 우리말 表記 器具를 갖추게 된 것이다. 그러나 世宗大王은 訓民正音 序文에서 밝혔듯, 단지 제 뜻을 펴지 못하는 ‘愚民’의 日用에 편리하게 할 뿐[日用耳], 그것으로 學問까지 가능하다고는 보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訓民正音이 나온 뒤에도 文集이나 公式文書는 거의 대부분 계속 漢文으로 씌어 왔던 것이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도 西浦와 같이 우리말로 詩文을 쓸 것을 강조한 이도 있어 時調, 歌辭, 小說, 日記, 隨筆, 紀行, 內簡 등에 좋은 作品들이 나오기도 하였다.
漢字․漢文은 文化의 位差가 몹시 높았던 中國文化를 단시일에 흡수, 우리 文化의 수준을 급속도로 높인 공이 큰 반면, 우리 固有語의 발달을 위축(萎縮)시키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오늘날 국어辭典 수록 語彙의 70%가 漢字語이며, 그것은 중요 公式文書나 論文, 著書의 척추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 속에 오늘을 사는 우리는 漢字․漢文과 인연을 끊을 수 없는 運命에 놓여 있다. 그뿐 아니라 漢字는 이미 東洋文化圈에서는 하나의 共通文字로 되어 있어 그 地域을 旅行하거나 文化에 접할 때 무척 편리한 媒介體 구실을 하고 있다. 더구나 無限廣大한 中國大陸에의 길이 열리고 있는 오늘날, 漢字의 필요성은 더욱 强調되고 있다.
한편 表音文字인 한글과 表意文字인 漢字의 슬기로운 折衷的 운용은 우리의 文字生活의 能率을 最高化시킬 수 있는 가장 훌륭한 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뜻을 분명히 파악하고 讀書能力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漢字의 이러한 强點으로 해서, 光復後 한글 專用의 敎育政策이 그토록 끈덕지게 추진돼 왔으나, 社會에서는 의연히 필요에 따라 漢字를 쓰고 있는 것이다.
모든 語學은 어릴수록 능률을 올린다고 言語學者들은 주장한다. 漢字야 말로 더욱 그러하다. 초등학교 6년이라는 긴 세월을 한글로만 敎育을 하는 어리석음을 하루 바삐 청산하고 漢字를 국어 敎科書를 비롯하여 모든 敎科書에 직접 混用하는 것은 敎育을 효율적으로 進行할 수 있고, 語彙擴張과 讀書力 伸張을 폭발적으로 提高시킬 수 있는 길이다.
II
광복 후 오늘까지 초․중․고 교과서의 漢字表記는 다음 네 期로 나뉘어 나타났다.
1. 漢字倂用期 1945~1964. 8
2. 漢字一部混用期 1964. 9~1970. 2
3. 漢字除去期 1970. 3~1975. 2
4. 漢字部分倂用期 1975. 3~현재
첫째 漢字倂用期
이 시기에는 전과목에 걸쳐 內容 理解上 필요하다고 느낄 때에는 아무 제한 없이 漢字를 괄호 속에 넣어 表記한 시기로 약 20년이라는 긴 동안 계속됐다. 문장 表記에서 ‘학교(學校)’와 같이 한글과 한자(漢字)를 병용(倂用)하였으므로 이 시기를 한자(漢字)병용기(倂用期)라 한 것이다. 병용(倂用) 형태는 학교(덧말:學校)와 같이 한글 위에 漢字를 작은 글자로 副記한 예도 있으나, 앞에서와 같이 漢字를 괄호 속에 넣는 식이 가장 흔히 쓰였다.
一般 出版物에서는 아무 제한이 없고, 다만 大學을 제외한 각급 학교외 敎科用 圖書에 한해서 가해진 漢字倂用 형태는 1948. 10. 9 법률 제 6호로 公布된「한글 전용에 관한 법률」1)에 根據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 법률이 공포되기 전의 美軍政廳 문교부에서 펴낸 교재가 벌써 학교(덧말:學校)와 같은 漢字 倂記식을 취하고 있는 것을 보면, 한글 전용의 정책은 해방 후 間一髮의 시간적 여유도 주지 않은 채 곧장 실천에 옮겨졌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일찌감치 서둘러진 한글 전용 정책은 자연 文字生活面에서 脆弱性을 드러내게 됨으로써 그 <補充策>으로 1951. 9 文敎部에서는 常用漢字 1,000字를 제정 公表했다.
그 뒤 문교부는 1957. 11에 문교부의 文字頻度調査(3,312자)에 나타난 漢字의 사용 빈도를 참작하여 300字를 추려서 1,000字에 합친 1,300字를「임시 허용 한자」라는 명목으로 공포하기에 이르렀다. 임시 허용이란 뜻은 앞으로 한글 전용 시기가 올 때까지 임시로 쓸 수 있게 한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위의 常用漢字를 포함한 임시 허용 한자는 다음 漢字一部混用期에 이르러 비로소 각급 학교 ‘국어’ 교과서에 적극적으로 반영되게 되었다.
둘째 漢字一部混用期
이 시기는 20년간의 漢字 疏外 내지 한글 전용 정책 추진에 따른 副作用에 대한 社會的 要求로 1957년에 선정한 임시 허용 한자 1,300字를 初․中․高 ‘국어’에 混用하여 적극적으로 敎育한 시기다. 國定 ‘국어’에 한해 混用하고, 다른 科目은 종래와 같이 倂用했으므로 漢字一部混用期라고 했다. 그런 점에서 이 시기는 廣義의 漢字倂用期라고도 할 수 있다.
初․中․高 국어 교과서에 대한 1,300字의 字數 배당을 보면 다음과 같다.
초등학교 4학년 200자
초등학교 5학년 250자 600자
초등학교 6학년 150자
중학교 400자
고등학교 300자
계 1,300자
이 시기에 1,300자 범위를 넘는 漢字라도 꼭 필요할 때에는 倂用期와 같이 괄호 속에 넣어 처리했다. 이 混用期는 설령 그 기간이 단지 5년이라는 짧은 기간이긴 했으나 이 동안 學習은 필요에 따라 행해진다는 原理 그대로 漢字學習은 실로 刮目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것은 그 기간에 교육을 받은 사람들의 漢字의 驅使 능력이라든가 한자에 대한 自信感 같은 것으로 충분히 推察할 수 있다.
이러한 모처럼의 漢字學習 정상화의 機運은 1968. 12. 24 국무총리 훈령 제 68호에 의해 1969학년도 2학기를 마지막으로 드디어 終焉을 고하고 말았다.
셋째 漢字除去期
이 時期는 모든 敎科用 圖書에서 漢字를 완전히 제거해 버린 시기다. ‘정부는 1948. 10. 9에 제정된「한글 전용에 관한 법률」의 실천을 위하여 정부 공문서 규정(1965. 2. 24. 대통령령 제 2056호)2)으로, 공용 문서는 한글로 쓰도록 하고 있으나, 이의 실천이 잘 되지 않고 있으므로, 다음 사항을 지시하니 한글 사용에 철저를 기하도록 할 것’이라고 시작한 국무총리 훈령 제 68호는 <1. 한글 전용> 항 끝 쪽에 다음과 같은 단서를 붙여 놓았다.
다만, 한자가 아니면 뜻의 전달이 어려운 것은 괄호 안에 상용 한자3)의 범위 안에서 한자를 표기해도 무방하며, 1970. 1. 1부터는 완전히 한글로만 표기하도록 한다.
이 但書의 후반부에 의해 1970학년도부터 1974학년도까지 만 5년 동안 大學 과정과 高等學校 古典一部4) 및 漢文을 제외한 모든 敎科用 圖書에서는 설령 뜻의 어려울 때 로마字에 의한 原語 倂記는 허용할지언정 漢字는 완전히 除去하고 만 것이다. 이 때부터 국어 科目은 물론, 다른 科目의 교사들도 순한글로 표기된 漢字語의 뜻풀이로 많은 시간을 허비하는 異常風潮가 생기게 된 것이다. 槪念이 명확히 잡히지 않는 單語들이 섞인 文章의 내용이 제대로 理解될 수 없을 것은 물론이요, 따라서 語彙의 擴張과 適用에 의해 가능한 作文力의 伸張이 극도의 不振을 가져오고야 말았다. 이러한 무리한 상태가 계속되는 동안 문교부로서는 1971. 12. 1부터 漢文敎育用 基礎漢字 제정 작업에 착수하여, 1972. 8. 16에 中․高用 각 900자씩 1,800자를 확정 발표하고, 이듬해 3月부터 이를 中․高 漢文敎科書에 한하여 使用하기 시작했다.
넷째 漢字 部分倂用期
중․고 漢文敎科書와 고등학교 ‘국어’의 古典 표기 一部를 제외한 모든 敎科用 동서가 순한글로 表記되어 씌어 온 5년간의 冬眠期는 1975학년도 신학기를 기하여 부분적으로 깨어나기 시작했다. 우선 中․高의 國定 ‘국어’에 한하여 필요한 漢字를 倂用하고, 거기에 나타난 漢文敎育用 基礎漢字를 익힘문제에 適宜 배당하여 意圖的인 학습을 加하게 하였다. 다음 해부터 國史를 비롯하여 反共道德 등 국민 정신에 관계되는 과목에도 倂用의 폭을 넓혔으나, 여타 과목은 여전히 순한글 表記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時期를 漢字의 部分倂用期라고 해 본 것이다.
우리는 그 동안 文字政策에서 많은 迂餘曲折을 겪어 왔다. 그러한 오랜 陣痛은 우리에게 敎育의 效率面에서나 文字生活의 能率面에서난 漢字를 적절히 混用함이 편리하다는 값진 결론을 가져다 주었다. 이제 우리는 60年代 후반기에 우리가 실험하여 無理 없는 가운데 敎育的 成果를 거둔 混用 形態를 국어에서 비롯하여 全敎科에 펼칠 것과, 또한 漢字 敎育의 시기를 초등학교 과정에까지 치켜올릴 것을 바라는 바이다. 이는 光復前에 이미 實驗이 끝난 것인바, 더구나 오늘날의 우리의 총명한 二世들에게는 學習에 흥미를 일으키게 할지언정 成人들이 걱정하듯 그렇게 무리한 負擔感은 갖지 않게 되는 것이다. 難易度의 調節과 字源 등의 接近 方法으로 흥미 있는 指導를 하면 漢字 自體의 학습은 물론 知能도 폭발적으로 伸長할 것은 贅言을 더할 필요가 없다. (이상 李應百 著「資料를 통해 본 漢字․漢字語의 實態와 그 敎育」(1988. 亞細亞文化社) 참조
III
1970년부터 한글專用敎育政策 실시를 감지한 愛國志士들이 1969. 7. 31 一石 李熙昇 先生을 會長으로 모시고 韓國語敎育硏究會를 창설해 1973. 10. 30 會誌「語文硏究」를 창간하고, 1991. 6. 22 사단법인 韓國語文會(理事長 南廣祐)를 創立 活性化하여, 2008. 가을호(139호) 내오면서 國漢 混用 敎育의 연구와 論文을 發表해 우리 나라 語文敎育 政策 是正 提高에 큰 貢獻을 했다.
1985. 9. 15 韓國語文敎育硏究會 編「한글과 漢字」(一潮閣刊)에 의하면 다음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동안 漢字 교육 復活에 衷心 노력하신 一石 李熙昇 선생을 비롯하여 劉鳳榮, 趙容郁, 金能根, 李相殷, 吳之湖, 金觀鎬, 申淳彦, 李崇寧, 金成植, 柳正基, 李太熙, 朴魯春, 南廣祐, 金貞欽 여러분이 他界했다. 그토록 애를 쓰셨는데 生前에 漢字 公敎育의 확실한 결말을 보지 못하신 것이 죄송스럽다.
劉鳳榮 선생은 大學生들의 漢文 실력 부진을 안타까이 여기고, 金能根 선생은 漢字의 傳統文化 계승 발전의 필요성을 力說하였으며, 李相殷 교수는 한글 專用敎育의 七大 弊害와 그 是正策을 강조했다. 畵家 吳之湖 선생은 초등학교 국어에 漢字語를 漢字로 바꿔 인쇄해 실험 학교에 무료 配布하여 漢字 교육 실천을 하였으며, 萬海精神에 心到한 金觀鎬 선생은 世宗精神과 우리의 反省을, 申淳彦 변호사는 漢字 살리는 語文敎育 是正을 促求하였다. 心岳 李崇寧 교수는 한글 專用 뒤에 올 問題들을 力說하였으며, 西洋哲學者 金成植 교수는 文化上의 孤兒가 되지 않으려면 國漢混用敎育을 해야 한다고 하였다. 漢字敎育을 力說하다 파면 당한 柳正基 교수는 한글專用의 重大 弊害를 力說했다. 李太熙 전 檢察總長은 초등학교에서의 漢字 교육 어렵지 않다 하였으며, 朴魯春 교수는 한글專用과 한글날을 파헤쳤으며, 南廣祐 교수는 한글專用 반대, 國漢混用의 語文政策 是正으로 生을 걸었다. 物理學者인 金貞欽 교수는 國漢混用에 대한 科學的 考察을 했다. 이상은 위 책에 들어 있는 他界하신 분들의 語文敎育 是正에 기울이신 平素 意見의 一抹이다.
生存者로서 趙淳 전 副總理는 漢字 學習의 當爲性을 주장했으며, 科學者 安秀吉 교수는 言語의 엔트로피와 情報密度를, 위 책을 편집한 申昌淳 교수는 漢字語의 한글 表記 비판을 썼다. 李應百 本人은 學校에서 漢字의 早期敎育이 필요한 까닭을 게재했다.
이 외에 傳統文化硏究會 李啓晃 회장은 「한자교육 국민운동연합」을 구성하고「국어기본법」에 대한 근본적 검토를 추진하는 한편 「한자 한문교육 총서」로서 李熙昇 외 「漢字는 國語의 기본이다」, 南廣祐 외「漢字文盲 이대로 좋은가」, 李應百 「漢字를 아는 것이 國力이다」를 간행했다.
IV
올해는, 1998년 11월 17일(火)에 創立한 전국漢字교육추진총연합회의 창립 10주년이 되는 해다.
본회 창립 후「世界로 약진하는 한국의 새 1000년을 대비한 文字政策 학술대회」를 4회에 걸쳐 世宗文化會館 대회의실에서 대성황리에 실시했다.
제 1회 1999. 4. 26(月) 오후 2시
제 2회 1999. 5. 25(火) 오후 2시
제 3회 1999. 6 29(火) 오후 2시
제 4회 1999. 9. 13(月) 오후 2시
4회 실시 전인 1999. 8에 회지 月刊「한글+漢字 문화」創刊號를 4x6 배판 134면으로 刊行했다. 2007. 11에 100호 기념호를 내고, 2008. 10에 111호를 냈다.
한글+漢字문화는 漢字 교육을 초등학교부터 추진할 것을 끈덕지게 강조하고 있지만, 우리 나라 文化 藝術 관계 人士를 망나해 文化 예술의 종합지적 성격을 띠어 讀者層이 점점 넓혀지고 있는 有數 月刊誌다.
이것이 결간 없이 갈수록 내용이 충실하게 추진되는 데는 陳泰夏 理事長의 노력이 가장 크지만, 계속 경제적 뒷받침을 하는 仁濟大學校와 白病院의 白樂晥 博士의 誠意가 절대적이고, 有志 회원들의 적극적인 協調가 크다.
90高齡에도 본 연합회 首席代表로 서울 시골 할 것 없이 적극적으로 나서 도우시다가 他界하신 閔寬植 전 文敎部長官의 功을 잊을 수 없다. 한글專用 政策 추진으로 서슬이 시퍼런 朴正熙 政府 시절, 大統領 앞에서 부리핑 차트에 國漢混用을 해, 알아보기 쉽다는 大統領의 칭찬을 받고, 1972. 8. 16에 漢文敎育用 基礎漢字 1,800자를 제정 公布해, 1975년부터 중․고「국어」에 900자씩 괄호 안에 倂用해 漢字 교육의 脈이 끊어지지 않게 한 功이 절대적이다.
특히 漢字 교육은 초등학교부터 추진하는 뒷받침으로 전임 敎育部長官은 물론 전임 國務總理 20명 전원의 協調를 받아 내는 데 큰 寄與를 한 것이 무엇보다 돋보인다.
그리고 생각나는 것이 본 聯合會 首席代表의 한 분인 鄭秉學 博士다. 漢字文化圈內의 共通常用漢字 制定을 목표로 1991. 11에 韓國 서울에서 國際漢字振興協議會를 創立, 제1회 學術大會를 열고, 제2회를 1994. 1 서울에서, 제3회를 1996. 11 일본 東京에서 가질 때, 南廣祐 박사가 漢字文化圈내 共通常用漢字 1,996字 案을 내 놓았다. 제4회를 1997. 4 中國 蘇州에서, 제5회를 1998. 5에 台北에서, 제6회를 2001. 6 서울에서, 제7회를 2003. 10 일본 東京에서, 제8회를 2007. 10 中國 北京에서 가졌다. 이때 다음 大會는 韓國에서 共通常用漢字 5000~6000字의 比較字典을 편찬 발간하기로 했다.
2008. 9. 5 漢字文化圈內 共通常用漢字 制定을 위한「國際漢字討論會 18年」을 발간했는데 李大淳 현 회장과 文洪植 사무총장의 노력이 컸다. 그 속에 8회에 걸친 회의 內容과 관련 사진, 신문 보도 내용이 소상하게 들어 있어, 관련자는 물론 漢字文化圈內 有志들에게 큰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특히 2006. 4월에 他界하신 鄭秉學 전 회장의 靈魂이 큰 위안을 받으시리라 冥福을 빈다.
마무리
이상으로 韓國의 語文史에서 本 聯合會의 位相을 밝혀 보노라 마음을 썼다.
지금생각하면 1964. 9~1972. 2까지 약 8년간 敎育을 받은 이들이 漢字力이 가장 잘 갖추어져 漢字 섞인 日刊紙나 선배들의 碩․博士 論文도 제대로 읽을 수 있었고 직장에서도 각기 제구실을 했으리라 생각이 든다.
그때 초․중․고 全科目 敎科書에 混倂用된 서로 다른 漢字가 3,503字였다. 따라서 3,500자 정도의 漢字를 能力 檢定의 대상으로 하면 큰 무리는 없으리라 본다.
社會의 필요성으로 漢字能力 檢定試驗 應試者가 갈수록 늘어가는 오늘, 초등학교부터 漢字 1,000자를 公敎育으로?국어?에 1학년에 50자, 2학년에 100자, 3학년에 150자, 4학년에 200자, 5․6학년에 각각 250자를 露出 混用하고, 현재 괄호 속에 넣은 중․고 국어의 漢字 괄호를 벗기고, 다른 과목 교과서에는 1964년대처럼 필요한 漢字를 混用, 또는 倂用할 것이다.
本 聯合會의 漢字敎育 公用化가 초등학교부터 성취되기를 切實히 冀願한다.
註
1) 대한민국의 공문서는 한글로 쓴다. 다만, 얼마동안 필요한 때에는 한자를 병용할 수 있다.
2) 정부 공문서 규정 제7조(문서의 용어) ①에 보면 “문서는 한글로 띄어서 가로 쓰되, 표준어를 사용한다. 다만, 법규 문서는 뜻의 전달이 곤란한 경우에 한하여 괄호 안에 한자를 넣어서 쓴다.”라 하였다.
3) 여기서 이른 ‘상용 한자’는 임시 허용 한자 1,300자를 뜻함.
4) 고등학교 國定 국어 교과서의 古典 표기 중 漢字 처리(70년도부터) (문교부, ‘한글 전용 편람’에서 抄錄)
1. 國漢混用의 원전은 그 漢字에 ( )를 붙여 현대 漢字音을 한글로 표기 삽입한다.
<보기> 海東(해동) 六龍(육룡)
2. 原典의 漢字에 당시의 음이 한글로 붙여 있는 것으로, 어학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은 원전대로 표기한다.
<보기> 나랏말미 中듕國귁에 달아
3. 원전의 漢字에 당시의 음이 한글로 붙여 있는 것이라도 학습에 지장이 없는 경우에는 漢字를 삭제한다.
<보기> 강호에 병이 깁퍼 듁님의 누엇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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