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漢字文學/(한자교육)署名運動

單語長과 의미 밀도

好學 2012. 6. 21. 21:59

單語長과 의미 밀도
― 知識 폭발의 知性誌 시대 ―


 

安秀吉

서울大學校 名譽敎授 / 本聯合會 理事長


자세히 調査해 보지도 않고 남의 作品을 批判하는 것은 피해야 할 일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 放送이 있는 곳이라면 가는 곳마다 듣게 되는 ‘되고 song’(某이통사?)은 나에게는 妙하게 懶怠하고 퇴패한 느낌을 줘서 本能的으로 경계심이 든다.

移動通信社 들이 지난 수년간 돈을 얼마나 많이 버는 지 “販促”이라 해서 휴대폰을 거의 공짜로 주기도 했고, <“移通社 宣傳 빼놓고 뭐 다른 선전이 있나?” 할 정도> 宣傳도 많이 하는 데, 한동안  ‘힘의 과시’를 主題로 하더니 그 다음에는 頹廢風 宣傳으로 한국의 美風良俗을 해쳐왔다. 즉 노골적인 ‘힘’의 禮讚장면도 많았고, <頹廢風 主題 中에는> 가운데 누운 女子가 ‘돌아누우면서’ 남자를 바꾸는 것을 聯想케 하는 畵面도 있었다.

휴대폰 加入者요금이 지나치게 비싸다는 것을 모두가 다 아는 데 政府는 移通社들에게 충분히 價格競爭을 시키지 않았으니, 移通社들은 매달 몇 萬원씩 納入해 주는 고객을 他社에게 놓칠세라 <宣傳에 巨金을 부어> 流行 ‘테마 song’를 사서 “뭐뭐하면, 어떻게 어떻게 하면 되고”, 또 “어찌 어찌 되면 뭐뭐하면 된다”라는 소리가 Ubiquitous(유비퀴터스?)하게, 다시 말해 ‘가는 곳마다(同時遍在)’ 들리게 하니, 우리는 基本料와 使用料 비싸게 물고, ‘條件反射’실험의 경우와 같이 되풀이 되풀이 같은 曲을 듣게 돼서, 2중으로 害를 입고 있는 것이다.

유비퀴터스(Ubiquitous)의 원 뜻

‘Ubiquitous’의 原義를 잘 나타내는 하나의 例를 들자면 作家 Charles Perrault가 쓴 “Les Sabines”이라는 小說에 하나의 肉體인 12명의 Sabine이 登場해서 “ubiquitous:遍在”하면서 즉 흩어져 있으면서도 强姦 등 苦樂感覺을 12명이 함께 느끼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이 바로 Sabine란 한사람의 同一 육체가 ‘同時에 가는 곳마다 存在한다’는 ‘ubiquitous’의 元 뜻인 것이다.

상기 ‘…하면 되고 Song’의 來歷을 찾아보자니, 恒時的인 時間 부족에 시달리는 筆者의 사정이 그 젊은 作曲家가 만들었다는 “…하면 되고 Song”의 原 歌詞를 찾을 길도 없는 속에서, 들리는 데로의 느낌이 주는 바  <‘근본적으로 解決해야 한다’가 아니고> ‘눈가림으로 피하고 보자’는 이 멜로디-의 노래에는 게다가 飜案이 너무 많아서 여러 가지로 말을 바꿔가면서 ‘難關회피풍조’를 傳播하고 있다.
그 많은 飜案 들이 한결같이 ‘하는 척하면 되고’라는 不誠實한 느낌을 온 사회에 傳播하고있으니 <게다가 사람들이 歌詞를 바꾸는 데도 ‘남비體質’을 發揮해서 한꺼번에 ‘飜案 song’들이 쏟아져 나오니> 우리 消費者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다소곳이 길들여질 수밖에 없고, 따라서 이제는 지쳐서 할 수 없이 떠밀려, 筆者 역시 <마땅히 精誠을 다 해야 할 때에> “…하는 척하면 되고”로 誘導되기 시작하고 있다.

筆者가 살아온 時代는 월등히 秩序가 있었기 때문에 問題가 생길 때마다 根本으로보터 解決을 해야 했고 “뭐뭐하면, 어떻게 어떻게 하면된다”는 ‘그 자리 모면’ 勸獎은 단적으로 ‘웃음 흘리면서 根本問題는 피해버리라’는 男子답지 못한 逃避誘惑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頹廢性 句節 들이 유행하는 事情으로, 짐작컨대 이제 한국 社會에 심지 굳게 處身하는 사람은 少數派가 된 듯하다.  
  
國際社會 知性人 들의 지식挑戰

그러한 韓國社會 분위기를 옆으로 하고 國際社會 지성인들의 學的호기심은 자못 眞摯한 것 같다. 특히 몇 개 知性誌는 지난 몇 달간 內容이 튼실한 科學技術 등 專門知識 解說의 붐(boom)을 이루고 있다. 'IHT'나 몇 개의 日刊 ‘(NY, LA, London) TIMES’ 諸紙나, 週刊誌 'TIME', 그리고 영국 주간지 'ECONOMIST' 등은 ‘經濟分析’이나 ‘社會관찰’, 그리고 특히 ‘頭腦’나 ‘DNA’문제를 <단 한 號나마 거를세라> 자주 다루고 있다. 다시 말해 그러한 最高知性誌 들은 <편하고 느낌 좋은 感覺印刷物에 안주하지 않고 딱딱하고, 知的난관을 만나면 오히려> 즐겨 ‘challenge’하는 讀者層을 겨누고 있는 것이다.
이 媒體들은 결국 ‘어려운 느낌을 주는 主題’라고 해서 避해버리고, 知的 好奇心 넘치는 讀者들의 向上心을 外面하면 이제는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다.

‘Challenging’이란 말이 ‘挑發’이라면 이곳에서는 ‘知性도발’, 즉 “이거 內容이 좀 어려운 편인데...”하고 筆者가 다룰까 말까 주춤거렸다간 오히려 讀者들이  ‘어! 나를 Easy-going으로 봤어?’라고 反撥해서 “나도 한번 머리를 쓰겠다”고 다가서는 ‘知的도발’을 뜻한다.
이러한 國際 知性誌들의 동향에 대해서 과연 어느 만큼의 한국 知性人들이 <달려들어> 自身의 知的限界에 挑戰하고 있는 지 그 數字를 把握하기가 쉽지 않지만 다음과 같이 가늠을 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英語圈이 아닌 프랑스 빠리에서 英文으로 발행하는 <他紙에서 品格높은 글들을 사오기도 해서 販賣價가 더 비싼> 대표적인 知性紙 IHT는 다행히 한국에서도 印刷돼서 街販되고 있지만 한국에서의 普及은 難航을 겪고 있는 지 販賣하고 있는 부-스가 많지 않는 것 같다. 심지어는 내노라하는 大學校入口 街販臺에서까지 陳列됐다가 얼마 안 가서 없어지곤 하는 것을 보면 期待했던 만큼 學生讀者가 많지 않았다는 것에 쉽게 짐작이 간다.
그래도 Internet에서 읽는 讀者의 수가 있으니까 상기 知識爆發 風潮의 ‘마지막 버스 ’를 우리나라 知性人들이 또 노치고 있다고 쉽게 말 할 수는 없을 것이다.

但 걱정이 되는 것은 작금 한국社會 출판물 全般에서 관찰되는 ‘漢字의 소멸’을 감안할 때, 漢字語彙의 대량 消滅은 필경에는 글을 쓰고 어려운 內容을 다루면서 全體 글 부피가 지나치게 커지는 傾向이생겨, 結局 韓國新聞들의 記事는 內容이 어려운 學術問題 등을 紹介할 때 글을 시작하다가 어느 程度의 길이가 되면 適當히 끝내버리고 마는 傾向을 갖게 되는 것이다.
<漢字라해서> 術語들을 抹殺하고, 그것을 긴 說明句로 代替하고 있으니 單語들이 길어진다면 意味密度가 떨어지고 글자數가 더 많은 新造語(例: ‘出口’대신 ‘나가는 곳’)들이 全體的인 意味전달效率을 떨어뜨리고 있으니 限定된 紙面에 綜合的으로 보아 傳達되는 總정보량이 줄어드는 現象이 생기게 마련이다.
결국 있어야 할 單語가 없어지고, 짧은 單語들 대신 더 긴 ‘說明句’/說明文을 늘어놓고 있으면 그렇게 해서 길어진 글은 도중에 讀者가 지치기 때문에 著者는 高難度 內容에 全力投球를 못하고, 쉬운 內容만을 다루게 된다는 뜻이다.
이러한 韓國語의 機能不足이 漢字消滅에서 起因하는 것이라면 그것이야말로 ‘陰性的으로 다가왔다가 드디어 一國의 言語의 機能縮退를 招來하게 된 ‘文化的 危機’인 것이다.  

言語加工이 심해서 國語 機能이 縮退되면 사람들 머리 씀도 退化

우리 祖上들은 예부터 글을 濃縮하고, 字間에 공백을 絶對 두지 않았는데 이는 ‘종이를 아끼는 목적’만이 아니고 글의 내용에 陶醉하기 위해서, 즉 내용의 高密度를 통한 ‘흥취의 爆發’을 위해서도 字間에 공백을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다.(杜甫詩나 陶淵明 詩를 드문 드문 여기저기에서 字間을 떨어뜨려놓으면 興이 깨지고 덜 陶醉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들이 享有했던 것은 ‘論理의 明快’ 以上의 것이었다)    

한글專用을 하면 不可避하게 띄어쓰기 등 빈 자리가 많아지는 한 편, 單一 術語대신 說明句 等 複數個 單語가 들어서게 되면 그들間관계에 신경을 써야 하게 된다. 그런데 이와 같이 讀書를 하면서 한참 글 內容에 빨려들고 있을 때, ‘사이 띄우기’라는 ‘물타기’를 하는 字間공백 等을 우리는 예부터 嫌惡해 왔다.
지금도 ‘사이띄우기’용 빈칸을 싫어해서, 지난 10년 全幅的으로 ‘띄어쓰기’ 時代로 移行한 다음에도 이로 해서 苦痛을 겪은 끝에 <될만한 곳이라면> 이제는 部分的으로나마 붙여쓰기를 되살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單語를 바꾼 결과 旣存單語와 新造語가 완전히 等價가 된다하더라도 그것은 사람들이 써왔던 言語習慣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니 混亂을 가져오는 것이다. 新造語 등 變化로해서 理解가 완전치 못한 느낌이면 다시 說明을 追加하느라 글이 길어져 內容密度는 다시 떨어지고 限定된 紙面에 結局은 情報傳達능력이 낮은 것으로 되는 것이다.

‘한글單語로의 바꿈’은 결국 世代間 단절을 겨눈 것

도대체가 世代間 ‘斷切’에 뜻을 두고 新語를 대량 制定해서 語文을 人爲的으로 바꿔 ‘써왔던 말’을 그대로 쓰지 못하게 한다는 것은 大衆을 위해서는 苦痛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별 뜻 없이 單語가 더 길어진다는 것은 歷史를 통해 어느 時點에서나 사람들이 좋아한 일이 없고 따라서 인간 本性에 逆行하는 일인 것이다. 다시 말해 言語에 손을 대서 낱말이 길어지는 일은 理性社會에서는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革新열광’ 性向의 사람들은 젊어 한 때 재치 좋게 新流行語를 만드는 等 ‘創意’를 하는 것도 좋으나 그와 같은 일을 通해 <온 世上에 物議를 일으키는 일보다는> 결국 ‘內容은 바꾸되 用語는 바꾸지 않는 것’, 卽 外形이 아니고 實 내용의 改善에 뜻을 두는 것이 진정한 智慧임을 알게 될 것이다.   

上述한 바 外紙들에 종종 실리는 ‘Challenging한 글들’을 韓國讀者 들이 즐겨 읽고, 同種의 글을 다음에도 期待하는 지 與否는 그 讀解者가 읽어낸 정보/지식들을 흡수/飜案해 韓國語版 知識으로 머리 속에서 다루며서 겪게 되는 어려움의 크기에 달려 있을 것이다. 즉 國語의 機能(다른 言語와 比較했을 때)이 强하냐 그렇지 못하냐에 달려있는데 상기 ‘內容’을 읽어내서 머리 속에 한국말로 그려내는 讀解者(또는 中間筆者)가 原文에서 新語, 新表現, 또는 新槪念 等을 만나게 되는 경우 ‘說明文章이나 句節’이 아닌 하나의 韓國語 ‘單語’를 찾아 苦悶하다가 찾지 못하면 (臨時方便으로나마) 造語를 할 때도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이 不可避한 造語를 하게 될 때 漢字를 熟知하고 있는 것이 有利할 것은 물론이다.    

一國의 言語 自體의 機能限界는 젊은 世代에게도 불리

같은 모양으로 ‘韓國語 어휘의 限界’라는 어려움을 겪고 있을 젊은이들의 글을 <우리 잘 아는 site들의 도움을 받아> 들여다봤더니 中堅語 漢字單語를 찾거나, 쉽게 造語해가면서 넘길 수 있는 部分을 <愛國한다고> 漢字단어를 기피하고 構造복잡한 說明字句로 代替해 說明부분의 字句의 길이가 <不適切하게> 긴 說明文으로 만들고 있고, 또 英單語를 그대로 쓰게 될 때에도 <제법 긴 英語單語인데도> 차라리 陽化해 alphabet로 쓰는 것이 아니고 <마치 무엇인가를 두려워하는 듯>當該 英單語를 한글로만 쓰는 등 해서 읽기 힘들게 하고 있을 때가 많았다. 다시 말해 옛사람들의 경우와 같이 별의별 궁리를 다 해가면서 ‘讀者의 완전理解’를 위해서 진지하게 努力하는 熱誠은 있어 보이지가 않았던 것이다.

<讀者의 理解 여부를 생각하지 않는> 다른 事例를 들어 보자면 일반적으로 긴(長) 委員會 名稱 등을 縮約하는 경우를 들 수 있다. 委員會의 긴 이름을 중간중간 2-3개의 音素를 골라 이어 쓰면 短縮語(略稱)가 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은 無責任의 極致라 하겠다. (高分解能인 漢字들을 選擇해서 엮는 것이 아니고 <自體로는 뜻이 없는> 音素를 드문드문 뽑아내서 묶은 ‘音素들의 모임’은 短縮語가 될 수가 없는 것이다.)  
2000년전의 漢字略語는 玉篇찾으며 推理라도 할 수 있을망정 누가 20년전에 썼던 ‘옥떨메’라는 戱謔을 記憶하는가! (당시 ‘옥떨메’란 “옥상에서 떨어진 메주”와 같이 못생긴 사람을 뜻한다고 했다.)
연거푸 “삼패를 했다”는 文章도 무책임하게 한글로 써 놓기만 하면서 연타로 ‘이긴 것인지, 진(敗)것인지’ 그 正確한 뜻을 알고 모르는 것은 ‘당신네들 몫’이라는 데 이것은 ‘communication: 意思疏通’이 아닌 것이다.  

韓國社會가 계속 ‘세종대왕’과 ‘訓民正音창제’를 유난히 浮刻시켜 40년을, 또는 80년을 “한글전용=愛國者”라는 觀念을 머릿속에 박고 또 박았으니 드디어는 사람들이 한글專用派 들에게 ‘물려받은 “억지”만 머릿속에 刻印됐나’ 하는 것이고, 反對로 ‘없으면 필요한 單語를 만들어 가면서도 理解가 되는 글로 다져가는 努力’이 皆無한 듯해서 그 <‘한글’에 대한 各自의 忠誠度 表明에 지나치게 매달려왔던> 사람들은 비록 自由로운 생각을 標榜하고 있지만 오히려 新版 (固定觀念에) ‘묶여 있는 사람’이라는 印象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

比較하면 나타나는 여러 言語의 內容密度 限界

國語의 ‘意味密度’라는 本論에 돌아와 國語로서의 ‘韓國語’의 기능과 能力한계를 餘他言語 및 言語의 (있다면) 理想型과 비교하면 다른 양상을 보게 된다.
  
지난 2007년 11월의 아시아·太平洋경제協力體(APEC)를 위해서 부산 바닷가에 高價의 建物을 짓고(누리마루) 會議를 開催했는데 그 때 우리의 有能한 ‘同時통역자’들이 했던 活躍을 통해서 재미나는 現象을 하나 觀察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그곳에서 使用됐던 諸般 言語들의 情報傳達 효율이 言語에 따라 相當한 차이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東南亞 언어의 경우는 그 演說의 내용 含量이 크지 않아서 同時通譯者가 發音과 표정 관리를 충분히 할 수 있는 정도의 느린 實情報흐름 速度였지만 西歐의 언어, 특히 프랑스語의 경우 이 西歐사람들의 평상시의 ‘意味密度다지기’의 言語습관이 드러나, 通譯者들의 ‘멘트’는 말의 發音 속도도 높이고 文章길이를 줄이기에 최선을 다한 飜譯이였던 것을 觀察하게 됐다. 發言이 된 演說내용을 飜譯해서 限定된 시간에 그 내용 全量을 消化하느라 진땀을 빼는 現象이 관찰됐던 것이다.
다시 말해 言語마다 그 效率(Entropy)이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文壇은 한 때 무리한 復古노력

8․15 光復後 우리 言語가 겪어온 역사를 살펴보면 ‘意識化된 사람’들이 文壇을 掌握해서 지나친 ‘復古’强要를 했던 것 같다. 일부 作家들의 경우 <朝鮮朝 등 지난 날 글들에 사용됐던 事例가 皆無하다고> ‘물음표’등 西來의 記號 들까지 忌避하는 極端의 ‘復古’를 하고 있는데 이러한 지나친 언어加工, 그리고 이에 따른 ‘國語機能의 縮退 招來’는 이 나라 國語의 競爭力을 爲해서도 삼갔어야 했다.

여기에 역시 意識化된 사람들의 ‘기존 權威의 破壞’ 노력의 一端을 보게 되는데 “쫀쫀한 것을 相對해야 하는 世上”(본지 2007년 2월호 참조)에서 指摘한바와 같이 그러한 수작들의 蠢動은 機會 있을 때마다 하나 하나 指摘이 되어야 ‘意圖的인 加工’이라는 長期공작을 되잡을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한국 사회의 刮目할만한 발달 앞에 ‘모든 漢字 단어가 “衒學”으로 몰리는 시대’는 이제는 完全히 지나간 것이다. 韓國語는 가능한 最大限의 表現능력과 30년 前의 大語彙와 文語表現의 正確한 論理言語를 되찾아야 한다.    

思惟와 探究로 얻어진 知識의 전달에 뜻이 있는 사람이라면 글을 씀에 있어서 한국어, <또는 外來語로 정착이 되어 있지 않는 單語>, 그리고 때로는 英語 등 외국어를 그대로 써야 讀出이 빠르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지나친 옛表現과 俚諺재창조(‘누리마루’等) 고집에는 안타깝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大量의사소통時代에 語文 加工이란 國家와 전체 言衆을 위해서는 ‘Serious(重且大)’한 문제로서 年少者, 또는 意識化에서 벗어나지 못한 一部계층에 맡겨둘 수 없는 일이다.

우리나라가 겪고 있는 것과 같은 急變의 시대에는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 우리의 ‘피와 살’인 漢字 中堅語들을 消滅시킬 것이 아니라> 우리는 韓國語 語彙를 전폭적으로 다 活用해야 하는 것이다.

‘하고 song’의 멜로디-를 빌려 “한글專用이라면... 한글만 쓰면 되고...” 하면서 大勢(?)에 편승해서 안주/安住할 수 있는 계제는 아닌 것이다.

全世界 識者들은 知性을 硏磨하고 있는 데…

다시 위에서 설명한 바 國際知性誌들의 challenging한 내용, 특히 두뇌와 DNA, 그리고 다시 proteomics와 RNA 遍在의 新解釋 等까지도 大衆的인 주간지 ‘TIME’에서 다루고 있는 것을 보면, 이러한 글들을 우리國語로 消化함에 있어서, 진정 이제까지 우리 韓國語가 科學技術 및 正確한 法條項 等 高度의 思惟內容 描寫 等을 제대로 堪當해왔는지 再檢討를 해봐야 할 段階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젊은이들이 語文實力이 弱해서 <읽으면서 疑問이 생기지 않는> 明快한 文章을 作成하지 못하는 樣相이어서, 지금 우리 한국이 겪고 있는 것은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는> 커다란 文化危機인 것이 정면에서 認識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