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漢字文學/(한자교육)署名運動

禮法과 人間尊重

好學 2012. 6. 20. 21:33

禮法과 人間尊重


 河有楫
成均館 元老 / 本聯合會 指導委員



사람은 다른 동물에 비해서 대체로 壽命이 길다. 수명이 길기 때문에 성장 速度가 매우 늦다. 세 살 이전까지는 젖을 먹으며 부모님의 품을 떠나지 못한다. 어린애가 최소한 열세 살은 되어야 혼자 버려져도 자기 생명을 보존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 완전하게 생활하려면 스무 살은 되어야 하며, 오늘날은 직장을 구하고 결혼하고 해서 한 가정을 구려 나가려고 하면 서른 살 정도가 되어야 하는데, 그동안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비용은 대개 부모로부터 도움을 받는다.
聖人이 禮法을 제정할 때 그 근본취지는 ‘報本’ (조상에 보답함)에 있었다. 자기가 부모로부터 받은 것에 대해서 일부나마 갚겠다는 정신에서 나온 것이다. 예법 가운데서도 喪禮와 祭禮가 더욱 그러하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三年喪을 지내고 喪主 노릇 하는 것은, 부모님의 은혜를 다 갚지는 못하지만, 부모님 품에서 젖을 빨며 대소변도 구별하지 못한 3년이라는 기간만이라도 부모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잊지 말자는 정신에서 나온 것이었다.

예전에는 일반 서민들도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9일을 넘긴 뒤에 장례를 치렀다. 어제까지 살아 계시던 부모님의 육신을 흙구덩이 속에 차마 묻지 못하겠다는 자식 된 사람의 不忍之心(차마 어찌하지 못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다. 禮法의 측면에서나 人情의 측면에서 정성을 다하여 喪禮 절차를 진행하였다. 9일 이전에 장례 지내면 渴葬이라 하여 남들의 비웃음을 샀고, 그 자식들은 그 지역사회에서 불효자로 낙인이 찍혀 사람대접을 받을 수가 없었다.

1945(乙酉)년 光復되기 바로 직전인 음력 6월 12일에 筆者의 증조모 되시는 江陵金氏께서 3년여의 병환 끝에 81세로 세상을 떠났다. 병석에 누워 계신 동안 필자의 조부 내외분과 부모님 내외분께서 지극정성으로 간호하다가 初喪을 당했던 것이다. 당시는 日帝의 暴虐함이 극도에 달한 시기인지라 농촌 가정의 궁핍상은 筆舌로 형언하기 어려웠고, 또 三伏더위에 장마까지 겹쳐 그냥 앉아 있어도 땀이 비 오듯 하여 정말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런데 門中會議에서 음력7월2일을 葬禮日로 결정하였다. 선비 家門에서 8대 宗婦를 渴葬으로 치를 수가 없고, 踰月葬(돌아가신 달을 넘겨 장례를 지냄)을 해야 하기 때문에 이렇게 결정한 것이었다. 喪主인 내 祖父 형제분들은 30도가 넘는 暴炎속에서 상주노릇에  정성을 다하셨다. 20일 동안 弔問客은 줄을 이어 찾아드는데, 잠시도 哭을 그칠 틈이 없었다. 마음으로 運命하면서 계속 哭을 하고 절을 하고 또 절은 하였다. 그때 필자의 나이 17세였는데 저러다가 우리 조부 형제분마저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하고 매우 우려가 될 정도였다.

그 眞情에서 우러나와 哀痛해 하시는 형상은 정말 보는 이로 하여금 슬픈 감정이 저절로 일어나게 했다. 그리고 弔問 인사를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 내가 받은 感銘은 한 평생 세상을 살아가는 데 큰 밑거름이 되었다.

“사람답게 살아야 하겠다.” “부모나 조상의 恩德에 보답해야겠다.” “弔問을 경건하고 철저하게 해야 하겠다.” “모든 일에 정성을 다해야 하겠다.”는 등등 우리 조부 형제분들과 조문객들이 보여준 擧止에서 배운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필자가 이런 報本 정신으로 살아갈 때 필자의 자식이나 손자들도 배우는 바가 있을 것이라 확신하며, 산 교육이란 것이 정말 이런 것이라는 것을 오늘날까지도 切感하고 있다.

우리 나라 傳統慣習에서는 弔問客들을 일회성 방문객으로만 대접하는 것이 아니고, 정성을 다해서 맞아들이고, 그들이 기울인 弔問의 정성을 잊지 않고 代를 이어 후손들에게 전해 주었다. 그래서 喪家에서 哀感錄을 마련해 두는 것이 관례였다. 哀感錄은 初喪이 났을 때부터 三年喪을 마칠 때까지 조문을 온 분들의 姓名, 字, 貫鄕, 居住地 등을 楷正(해서체의 반듯한)한 글씨로 정리해 둔 기록이다. 그리고 후손들은 이를 잘 간직하여 집안 역상의 하나로 삼았다.
수 백년이 지난 뒤에 後孫들이 그 哀感錄을 펼쳐 보면 “우리10대조는 어떤 분들과 交分이 두터웠구나!” “우리 8대조 장례 때는 어떤 분들이 참석했구나!” “우리 집안과 어떤 집안과는 대대로 世誼(대대로 사귀어 온 정의)가 있어 왔구나.” “내 5대조의 활동무대는 영남권이었구나.” 등등을 알 수 있으니, 집안의 역사로서 族譜 못지 않게 중요한 자료가 된다. 간혹 형편상 직접 조문을 오지 못하고 人便이나 郵便을 통해서 慰狀(위로의 글)을 보내온 분의 경우는 哀感錄에 錄名은 같이 하되 성명 위에 ‘紙問’(편지로 문안 함)이라고 표기하여, 직접 조문 온 분과 구분하였으니, 조문 온 것에 대해서 얼마나 정중하게 감사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의 집에는 9대 哀感錄이 소중히 잘 보존되어 오고 있다.

哀感錄을 이렇게 중요하게 생각한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이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네 가지 예법이 冠婚喪祭인데, 그 가운데서도 옛날 어른들은 喪禮를 가장 중시했다. 이는 돌아가신 분이 마지막 가시는 길을 살아 있는 자손들과 친지들이 최선의 禮를 갖추어 보내드리는 절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聖人 孔子는 “나라의 지도자급의 사람들이 마지막 보내는 喪禮 禮法을 신중히 하고, 멀리 계신 조상을 追慕하는 제사를 지낸다면, 백성들의 德이 厚하게 되어질 것이다.” (愼終追遠, 民德歸厚矣) 라고 말씀하셨다. 사람들 사이의 人事 가운데서도 弔問 인사가 가장 큰 인사고, 가장 중요한 儀禮였다. 그래서 아무리 친한 관계라도 3년 상을 지내는 동안에 조문을 하지 않으면 絶交하던 것이 선비 사회의 不文律이었던 것이다.

앞에서 기술한 여러 가지 내용들은 먼 옛날이야기가 아니다. 1960년대 전후까지만 해도 우리 나라의 喪家에서 일반적으로 행해지던 禮法이었다. 그러면 오늘날은 어떠한가? 禮法이 무너져 내려 사람이 禽獸의 지경에 들어간 지 오래다. 朝鮮初期 우리 나라에 使臣으로 왔던 明나라의 陳鑑은 본국에 돌아가 皇帝에게 우리 나라를 ‘東方禮義之國’ 이라고 稱讚하였다. 실제로 우리 先人들은 중국 사람들보다 더 철저히 예법을 지켜왔다.

지금은 어른을 忽待하거나 심지어 虐待까지 하는 기사가 날마다 신문 방송을 장식하고 있고, 離婚率 세계 2위, 自殺率 세계 1위, 出産率 세계 최저 등 좋지 않은 기록이 우리 나라에 다 모여 있다. 그리고 傳統家族制度의 해체가 아니라 家庭解體의 위기에 몰려 있다.
왜 이럴까? 그 이유는 지도층을 포함한 국민 대다수가 마음가짐이 驕慢하고 物質만 추구하며, 快樂과 安逸만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가까운 例 로 國家 살림을 총책임지고 있는 大統領의 실질적인 政治․經濟 분야의 코치라 할 수 있는 某 靑瓦臺 政策室長이란 者가 최선을 다해서 나라 살림은 걱정하지 않고, 妖妄한 사기꾼 여인에게 놀아나 국가 예산을 탕진하고 妻子息을 기만한 사건에서 지금 우리 사회의 단면을 진단할 수 있다.

이런 모든 현상은 禮法을 버렸기 때문이다. 그 者라고 마음에 끌리는 여인이 없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가 탈선하려는 감정이 일어날 때 이를 제어시켜 줄 수 있는 힘이 바로 禮法이다. 예법을 소홀히 한 혹독한 代價는 이렇게 엄청나다. 탄로가 안 나서 그렇지 이 사건 외에도 이런 일은 곳곳에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예법을 崇尙하면 남이 안 보는 곳에서도 자율적으로 바르게 살아갈 수가 있다.
이렇게 禮法이 중요한데 그 가운데에서도 喪禮가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지금 우리 나라 사람들은 禮法 가운데서 喪禮를 가장 귀찮아하고 소홀히 한다. 父母喪을 당하면, 완전히 옛날처럼 장례절차를 따르지는 못한다 해도, 禮法에 밝은 친척이나 가까운 사람에게 諮問을 구하여 가능한 한도 내에서는 禮法을 준수하여 상례를 치르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전통적인 상례는 다 사라지고 그 가운데서 일부만 남아 있다. 우선, 부모상을 당하여 정중하게 訃告를 내는 사람이 없다. 얼마 전까지는 전화로 알리더니, 지금은 휴대폰 문자메시지나 컴퓨터 이메일로 알려온다. 그런 방법을 연락을 받고 보면 매우 불쾌하지만, 弔問을 빠뜨릴 수 없는 관계에 있을 경우 어쩔 수 없이 조문을 가기는 하지만, 喪家(지금은 모두 병원 영안실 혹은 장례식장)에 가면 불쾌한 정도는 더욱 더 심해진다. 부모를 읽은 喪主의 태도를 보면 정말 할말을 잃어버리게 된다. 喪主된 者가 조문을 온 사람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이빨까지 드러내고 소리내어 웃는 자도 있고, 일을 주선한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자도 있다.
자기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 주었고, 자식을 위해 한평생 고생만 하다가 숨을 거두어 이제 떠나보내면 다시는 볼 수 없는 마지막 단계에서 자식의 태도가 이래서야 되겠는가? 웃음이 어떻게 나올까? 자기 집에서 키우던 애완견이 죽었다고 온 가족이 몇날 며칠을 슬퍼한다는 기사도 보았다. 자기를 낳아준 부모가 애완견보다도 못하단 말인가?

옛말에 ‘자식이 죽으면 그 아픔은 자기 무덤가지 가져간다.’는 속담이 있다. 이 속담은 그냥 옛말이 아니다. 부모들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우리 주변에 간혹 자식을 잃은 분들을 보면 평생 그 자식을 잊지 못하다가 죽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이처럼 부모들은 자기가 죽기 전에는 그 아픔을 잊지 못하는데 어째서 자식들은 장례도 치르기 전에 부모의 시신을 옆에 두고 만인 앞에서 不孝한 행동을 表出시키고 있단 말인가? 이렇게 되면 앞으로 그 자식들은 孝를 어디에 가서 보고 배울 수가 있을까? 우리 모두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다.

20~30년 전에는 자기가 사는 인근에서 천하의 망나니로 소문난 사람이라도 부모 喪禮는 鄭重하게 치르며 사람 구실을 했는데, 지금은 지식인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더 예법을 무시하고 있으니 심각하다. 유명한 대학교 總長을 지낸 어떤 인사는 부모상을 당하여 부부가 고향에 와서 장례를 치르면서 자기 고향집이 불편하다고, 인근 도시에 있는 호텔에 가서 잠을 자고 오는가 하면, 또 우리 傳統學問을 연구하는 어떤 著名한 학자는 문상을 갔더니, 자기 친구들과 어울려 이야기하면서 너털웃음을 웃고 있었다. 이러고서 청소년들에게 “부모에게 효도하라.”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 “바른 길을 걸어라.” 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설령 그런 말을 한들 어떻게 청소년들이 듣겠는가?
성인의 말씀에 “나라가 망하려면 禮가 먼저 망하고, 가정이 망하려 해도 예가 먼저 망한다.”(國將亡, 禮先亡. 家將亡, 禮先亡.)라는 말이 있다.

지금 우리 나라가 바로 이런 지경에 처해 있다. 예를 바로잡지 않으면, 나라가 바로 도기 어렵다. 경제 수준만 높다고 先進國이 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살 수 있는 精神文化의 수준이 높은 세상이 되어야 올바른 선진국이다.

북쪽에서는 紅巾賊이 침략하고 남쪽에서는 倭寇들이 猖獗하던 衰亡의 길을 걷는 高麗王朝 말기에, 대학자 圃隱 鄭夢周선생은 禮法普及運動을 적극 추진하였다. 시대착오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분은 예법을 살리지 않고서는 나라가 나라 모양을 갖출 수 없고, 가정이 가정의 모양을 갖출 수 없으며, 사람이 사람의 모양을 갖출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지금 사회가 혼란하고, 범죄가 증가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정이 사라지는 것은 예법을 소홀히 여기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예법을 소중히 해야 한다. 예법을 중요시하는 것이 곧 인간의 尊嚴性을 회복하는 길이고, 자신을 보호하는 길이다.

환경보호가 중요하다고 한다.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사람의 정신을 바로잡는 禮法回復은 더 중요하다. 우리 모두 이점을 명심해야 하고 예법이나 도덕 회복을 위해 대대적으로 운동을 펼쳐나가야 하겠다. 세상 되어 가는 것이 너무 慨嘆스러워 그 가운데 喪禮의 側面에서 문제점을 짚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