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歷史,宗敎,哲學/[동양철학]한국·中國·인도

韓半島에 비친 두 유대人의 빛과 暗黑

好學 2012. 6. 15. 23:24

                                               韓半島에 비친 두 유대人의 빛과 暗黑
                                                     6.25전쟁 58주년을 맞아 쓴 체험자의 메시지


                                                                                                田英培
                                                                                               培材大學校 名譽敎授 / 本聯合會 指導委員

빛과 暗黑의 韓半島

어떤 사진작가가 제2차 세계대전의 慘狀을 사진에 담으려고 독일 베를린을 찾았다. 廢墟속에 교회 한 채가 폭격에 맞아 반쯤 남아 있었다. 작가는 그 교회를 찍으려 했다. 그러나 가까이서는 교회 鐘塔의 十字架까지 찍을 수 없었다. 그래서 얼마쯤 뒷걸음치는데 발길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露宿者들의 천막이었다. 이 이야기는 實話로서 오늘의 교회역할이 무엇인가를 암시하기도 하지만, 또한 우리 韓半島의 實相을 말해주는 상징적인 이야기가 된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그 원인을 巨視的으로 보면 韓末 先祖들의 所以와 日帝의 韓半島 侵奪과 光復政局에서의 지도층간의 理念的 分裂에서 비롯되었다할 것이나, 微視的으로 보면 두 유대人의 빛과 그림자에서 그 근본 원인을 찾을 수 있겠다. 南韓의 自由와 平和, 그리고 豊饒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정신과 신앙을 믿거나 용인한 결과요, 北韓의 암흑과 빈곤은 칼 맑스의 無神論 추종과 인간을 偶像化한 결과라 할 것이다. 그 眞實은 인공위성을 통해 克明하게 나타났다.(사진)
따라서 6.25 남북 이데올로기 전쟁의 배후에는 두 유대人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빛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는 중요한 신앙적 가르침을 ‘宗敎’라고 한다. ‘宗’자의 자의는 ‘대들보’라는 뜻으로 象形文字의 내력으로 보면 ‘집(宀) 안에 단을 쌓아(示) 神을 모신다’는 뜻이라 그렇게 쓰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영어 ‘religion’은 그 뜻이 보다 구체적이다. 그 어원은 라틴어 religio 또는 religare이다. 그 글자를 분석해 보면 ‘re’는 ‘다시~하다’의 뜻이고, ‘ligare'는 ‘묶는다’(bind back)의 뜻이다. 그러므로 Religion의 의미는 다시 묶는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神들과 人間을 再結合한다(bond between man and the gods)는 의미이다.
人類文明의 초창기부터 종교 문화가 있었다. 기독교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발생했다. 티그리스․유프라테스江 사이는 땅이 肥沃해 인근의 각종 종족들이 몰려와 살았다. 그들은 ‘죽음의 限界狀況’을 의식해 나름의 종교를 갖게 되었다. 그들의 종교는 形象이 있어 쉽게 볼 수 있는 달을 숭배(worship of moon)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뒤늦게 먼 사막지역에서 온 아브라함 族屬은 ‘갈데아 우루’에 정착하면서 볼 수 없는 抽象的 존재의 神, 즉 여호와(Jehovah)를 숭배하여 믿었다. 그래서 그곳의 土着民에게 同化되지 않고 자신들만이 고유한 正體性을 갖고 살아왔다. 그들이 곧 유대人이다. 그들의 民族史는 오늘날까지 『舊約聖經』을 통해 전해져 온다. 그 유대人 중 세계사적 宗敎思想家가 나왔으니 곧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의 행적과 교훈은 『新約聖經』에 담겨 있다. 유대人들의 그 두 책은 神의 존재와 人間의 종교와 經濟生活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경제라는 측면에서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共産主義者였다.

“네가 穩全하고자 할진데 가서 네 所有를 팔아 가난한 者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寶貨가 네게 있으리라”(마태 19:2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富者가 天國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富者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태 19:23-24). 이렇게 가난한 者와 富者들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두었지만 사실 예수 그리스도는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로 기적을 행해서 어른만 5천명을 먹이고도 남을 만큼 대중의 경제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能力者였다.
그러나 한편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는데 나는 머리 둘 곳이 없다”(누가 9:28)고 한탄했으니 사실 그 자신은 가난하고 고독하게 살았다. 그러나 그의 弟子들은 스승의 理想을 철저히 실행하여 共産社會를 이루고 살았으니 즉 “믿는 사람들이 다 함께 있어 모든 物件을 서로 通用하고 또 財産과 所有를 팔아 各 사람의 必要를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였으니”(사도행전 2:44-46) 말이다. 그들이 그렇게 모두 慾心을 버리고 共同體 社會를 이루어 살 수 있었던 비결은 그들에게는 하나님을 믿고 讚美하는 종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生의 철학자 쇼펜하워(Arther Schopenhauer, 1788~1860)는 모든 종교의 핵심은 慾心의 종말은 죽음이라는 진실을 깨달아 가는 禁慾主義(asceticism)에 있다 했다. 예수와 그 제자들은 벌써 그 진실을 깨달아 실천한 사람들이었다.

세계적인 시사 주간지 ?Time?誌(1999.12.3.)는 지난 한 세기 동안에 살았던 가장 위대한 영혼의 소유者로 간디(Mahatma Gandhi, 1869~1948)를 선정한 바 있다. 그는 원래 共産主義者였다. 공산주의야말로 인도의 가난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공산주의에 神이 없는 것을 발견하고 그 사상을 버렸다. 우리는 6.25 남북전쟁 경험을 통해 공산주의의 殘惡性과 그 이론의 虛構를 학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休戰線 이북은 물론 이남에도 극소수이기는 하지만 공산주의 실체를 모르고 추종하는 얼간이들이 있으니 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제 부모를 ‘동무’라 하고 제 뜻과 다르다고 ‘殺父會’까지 조직한 悖倫兒들에게 무엇을 배우겠다는 것인가? 그 야만의 잔재들에게 우리는 언제까지 시달려야 할까? 나는 소년시절에 만주에서 공산주의를 체험했고 6.25전쟁 중에 부친을 잃는 피해를 당했다. 그리고 30여년간 강단에서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의 허상과 解放神學을 강의해 왔다. 그 강의의 요점을 적어 오늘의 左派 無神論者들에게 ‘빛의 선물’로 주고 싶어 이 글을 쓰게 되었다.

腹部 禮拜者 칼 맑스

李明博 정부가 출발하면서 “理念을 버리고 實用을 택했다”했을 때 나는 가슴이 철렁하는 느낌을 받았다. 배(腹部)를 神으로 삼아온(로마서 16:18, 빌립보서 3:19) 칼 맑스(Karl Marx, 1818~1883)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배(경제)만을 생각한다면 ‘먹이와 Sex와 勢 싸움’만 노리는 DOG와 다름이 없다. DOG라는 글자를 뒤집어쓰면 GOD가 된다. 이 점을 깨닫고 이념과 철학의 중요성을 생각해야 한다. 사람은 떡만으로 살 수 없는 생각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GOD의 실재를 믿지 못하면 사람도 DOG처럼 살기 쉽다. 부모의 은혜를 모르면 누구나 패륜아가 되기 쉬운 이치와 같다.
칼 맑스는 독일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유대人이다. 그는 人類歷史를 가진자(bourgeois)와 못 가진자(proletarians)로 단순화하여 나누고 역사는 그 두 계급간의 투쟁사(a history of class struggle)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는 근세사의 異端者로서 최초의 포스트 모던니스트(post-modernist)가 되었다. 旣存의 모든 歷史的 價値를 폐기해야 한다고 했으므로 그는 가는 곳마다 배척 당하고 추방되어 말년에는 영국 大英博物館 도서실과 셋방 다락에서 가난에 시달리면서 30여년간 經濟만을 연구하며 살다 죽었다. 그의 사상은 獨創的인 것이 아니었다. 당시 유행하던 각종의 유토피아 社會思想(Blanquism, Populism, Anarchism, Chartism, Utopianism, Syndicalism)과 포이에르바하(Feuerbach Ludwig 1804~1872)의 『基督敎의 本質, 1840』, 헤겔(Hegel, G.W. Friedrich, 1770~1831)의 변증법 이론 등을 섞어 그 사상들을 반대로 생각하여 “精神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物質이 인간을 지배한다”는 辨證法的 唯物論을 제창해 인간을 한갓 動物化했다. 따라서 1840년경부터 불기 시작한 유럽의 제1차 산업혁명기에서 고달픈 생활을 하는 노동자와 빈곤자들의 歡心을 사게 되었다. 모든 私有財産은 盜品(things of thief)이라고 선언한 칼 맑스와 엥겔스(Engels Friedrich, 1820~1895)의 共産黨宣言(1848)은 무식하고 가난한 者들의 福音이 되었다. 그리하여 1차 인터내셔날(International, 1864~76)을 시작으로 國際 共産主義運動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세계는 소련을 중심으로 한 동독․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헝가리․유고․알바니아․불가리아․루마니아․아프가니스탄․몽고․중공․쿠바․라오스․캄보디아․베트남과 北韓 등으로 자유세계와 대치하는 이른바 冷戰時代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이데올로기의 냉전체제는 오래갈 수 없었다. 역사학자 Edward Keenan이 “소련의 이데올로기는 內的 活力素와 社會的 妥當性의 결핍 때문에 소멸될 수밖에 없다.”(Soviet ideology has died for lack of inner vitality and social relevance.)고 한 말대로 지구상에서 현재 共産主義 이데올로기는 거의 소멸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北韓의 金日成을 세습한 金正日 일당은 그 마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체제의 모순 때문에 活力을 잃어 바야흐로 북한 주민이 餓死直前에 있다. 빛에 의해 어둠이 살아지듯 그들은 오로지 核을 개발하며 발버둥치고 있으나 결국 빛된 自由의 힘을 거슬리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요즘의 北核不能化의 조짐은 공산주의자들의 상투적 술수의 일환일 것이니 절대로 긴장을 놓아서는 안될 것이다.

빛은 生命을, 暗黑은 死亡을

기독교 攝理史觀맑스의 唯物史觀예수 그리스도의 사상
여호와神 신앙
神앞에서의 평등
救世主
God is always right
選  民
敎  會
예수의 再臨
永生福樂
地  獄
神本主義․民主主義 世界맑스의 사상
唯物辨證法 신앙
物質앞에서의 平等
맑스
Communist is always right
프로레타리아
共産黨
革命의 勝利
現生福樂
資本家의 處斷
人本主義․共産主義 世界
부처님 손바닥 안의 손오공 놀음이라던가. 人類歷史를 다시 쓰겠다고 한 칼 맑스이었지만 그의 사상은 럿셀(Bertrand Russell, 1872~1970)이 그의 『西洋哲學史』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실상 기독교 사상을 뒤집어 모방한 것에 불과했다. 그 모방을 대비해 본다.(도표)
예수의 攝理史觀이 역사에서 오랫동안 실험된 生命의 빛이라면, 칼 맑스의 唯物史觀은 역사실험을 통해 廢棄된 암흑이다. 모든 動植物은 빛 없는 암흑에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햇빛은 생명의 근원적 힘이다. 햇빛 없이 생명 없다. 햇빛 아래서만 인간은 그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햇빛은 그러므로 하나님이 본체이며 사랑이다.
스웨덴벌크(Swedenborg Emmanuel, 1688~1772)는 “良心은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任在다.”(Conscience is God's presence in man)라고 했다. 使徒 바울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喪失한 마음대로 내버려두어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했으니 곧 모든 不義, 醜惡, 貪慾, 惡意가 가득한 者요, 수군수군하는 者요, 誹謗하는 者요, 하나님이 미워하는 者요, 凌辱하는 者요, 驕慢한 者요, 자랑하는 者요, 惡을 圖謀하는 者요, 父母를 拒逆하는 者요, 愚昧한 者요, 背約하는 者요, 無情한 者요, 無慈悲한 者라 이 같은 일을 行하는 者는 死刑에 該當한다고 하나님이 定하셨다”(로마서 1:28-32)고 했다. 공산주의 실천의 전위대였던 레닌(Nikolai Lenin, 1870~1924)이나 스탈린(Joseph V. Stalin, 1879~1953)과 毛澤東, 金日成은 그런 자들이었다. 소련 공산세계에서 탈출한 노벨賞 수상자 솔제니친(Aleksandr lsayevich Solzhenitsyn, 1819~?)은 “西方世界는 1918년이래 공산주의에 대해 計算錯誤를 해왔다”고 경고한 바 있다.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는 수많은 人命을 학살한 惡漢으로 기억하면서 더 많은 人命을 殺傷한 레닌은 러시아의 恩人 또는 英雄으로 여기고 있는 아이러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공산주의와 그들의 전위대에 대한 無知는 그들의 共産革命 哲學에 대한 무지이기도 하다. 오늘의 한국사회의 左傾主義者들의 발광 역시 같은 맥락에서 나타난 현상이다. 우리는 늦었더라도 다음과 같은 공산주의 철학과 그 陰謀를 확실히 깨달아 다시는 그들의 음모에 농락 당하지 말았으면 한다.
칼 맑스는 말하였다. “도덕이란 支配層의 이익과 통치에 적용되는 階級道德(class morality)을 지칭한다.” 레닌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 공산혁명의 이론가 니케프(Nechaev)는 “혁명의 성공을 촉진하는 모든 것은 도덕이며 혁명을 방해하는 모든 것은 부도덕이다.”라는 詭辯으로 공산주의 전위대 대원들을 의식화시켰다. 그리고 그는 또 “공산주의 철학에는 두 가지 원칙이 있다. 하나는 내가 弱할 때는 너희들에게 自由를 요청할 것이다. 왜냐하면 自由는 너희들의 원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强해지면 너희들로부터 自由를 빼앗아 버리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自由는 나의 원칙이 아니기 때문이다.”(When I am weaker, I ask you for liberty because it is your principlebut when I am stronger, I ask it away from you because it is not my principle. (Herold H. Fisher, The Communist Revolution, Stanford University Press, 1955. p. 8) 레닌은 “거짓말도 백번 이상 반복하면 진실이 된다”라는 궤변으로 인류에게 악행을 저질러 왔다.
이 같은 비이성적, 비인간적인 敎條的 綱領을 신앙했기 때문에 공산주의 집단은 殺人集團, 테러集團化되었던 것이다. 그 같은 反人倫的 행위를 세습한 北韓의 金正日 집단에 대해 어리석게도 감상적이며 낭만적 생각으로 ‘퍼주기’로 일관했던 과거 10년간의 우리 左派指導層의 무지를 다시 반복하지 말았으면 한다.

빛의 使者 A. 링컨과 F. 페로우티카

인류역사는 暗黑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빛은 어둠을 사른다. 인간에게 부여된 生命의 빛 自由와 人權을 가로막는 세력은 결코 영속될 수 없을 것이다. 그 빛된 정신은 初期 그리스 정신을 부활시킨 文藝復興(Renaissance, 14~16세기)과 히부리 종교전통을 계승하려는 宗敎改革(Reformation, 16세기)을 통해 현격히 진전되었다.
더욱이 그 정신은 ‘인간과 하나님간의 새로운 조화’(new balance between man and God)를 지향함으로 미국 憲法의 골격을 이루는데 기여한 록크(John Locke, 1632~1704)의 사상과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절대적 人間尊嚴性 존중사상으로 말미암아 더욱 발전되었다.
그와 같은 선각자들에 의해 계발된 高潔한 정신이 탁월한 정치지도자 링컨(Abraham Lincoln, 1809~1865)에 의해 정치적으로 실천되었으니 미국의 南北葛藤 해결이 그것이다. 링컨은 “민주주의의 중심과제는 個人의 要求와 社會의 要求를 조화(to reconcile)시키는데 있다.” “奴隸에게 自由를 줌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自由人이 되어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신념하에 使命을 다하여 마침내 미국사회의 黑白間 갈등을 풀고 미국의 국가적 정신적 기반을 확고히 했다. 미국의 시사주간지 ?Time?誌는 40주년 기념호(1963.5.10.)에서 링컨의 指導力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음에 우리는 깊이 유의하여 배웠으면 한다.
“링컨은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는 政治와 체념을 모르는 忍耐心과 기회주의가 아닌 融通性에 잔인하지 않은 강인함과, 敎條的이거나 常識을 초월하지 않는 宗敎性에, 감상적이지 않는 친절함과 인간을 偶像化하지 않으면서 獻身的인 사람이었다.”(He was politic without being unprincipled, patient without being resigned, flexible without being opportunistic, toughminded without being brutal, determinded without being fanatical, religious without being dogmatic or unworldly, tender without being sentimental and devoted to man without being unworshiping him.)

이는 143년전의 링컨이 미국사회의 갈등을 해결한 역사적인 일이거니와 우리는 最近 東西冷戰시대의 갈등을 선도적으로 해결하는데 공헌한 또 한 사람에게 주목하게 된다. 즉, 체코슬로바키아의 政治評論家 페로우티가(Ferdinand Peroutka, 189~?)가 그 사람이다. 그는 맑스와 엥겔스의 共産黨 宣言(Communist Manifesto, 1848)에 대한 答辯으로서 民主主義 宣言(Democratic Manifesto, 1962)을 발표하여 共産治下의 自國民을 깨우쳐 東歐共産圈의 魔手에서 제일 먼저(1968) 벗어나게 만든 공로자다. 그 선언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1) 객관화된 인간(an object man)은 주체적 인간(a subject)으로 되어야 한다. 政治的 權限이 없는 인간은 정치적 권한이 있는 市民(a citizen)이 되어야 한다.
2) 복종(subjugation)으로부터 자유스러워야 한다. 인간은 누구나 천부적 물질적 힘과 본능적 결핍, 그리고 본능적 무지에서 벗어나 본능적 힘을 회복해야 한다. 生活하기 편해야 하고 신변은 항상 安全해야 한다.
3) 정부 관료에 대한 국민의 영향(people's influence)이 지속적으로 증가되어야 한다. 정부 관료가 국민의 私生活을 통제하거나 苦痛을 주는 권한의 남용을 막아야 한다. 국민의 의사기능이 정부관료 기능보다 더 强化되어야 한다.
4) 민주주의의 첫 과제는 국가를 변형시키는 것이다. 또한 자본주의 본질 역시 변형시킴에 있어 生産이 自存的 神性(independent diety)으로 되는 것을 방지하고, 생산의 인간적 통제를 강화(a humanistic control of production)해야 한다. 生産은 社會法에 의해 관리되고 社會的 良心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 良心이 결여된 곳에는 稅金을 부과해야 한다.
5) 생활함에 있어 物質的 생활의 표준성이 適期에 이행되고 생활의 표준적 인식이 계속 확대되어야 한다. 더욱이 文化的으로 精製(refinement)되고 理念的이 되어야 하고, 前보다 더 즐거운 생활이어야 하고 인간의 존엄성이 존중되어야 한다.
6) 사회는 더욱더 知的으로 되어야 한다. 이성적 대화는 지속되어야 한다.
7) 진보는 정서적으로 正直해야 하고 공포가 없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8) 情報의 보급이 방해되어서는 안 된다. 認知된 眞理는 절정에 이르도록 해야 한다.
9) 차별대우(discrimination)의 장벽은 즉시 제거되어야 한다. 닫힌사회는 개방되고 世襲된 자리는 없어야 한다.
10) 地域에서 부과하는 제재(limitation)는 완화되어야 한다. 각 사람들의 생활방식은 서로 交流되어야 하고, 배경이 서로 다른 사람이지만 同一한 책을 읽고 같은 信念을 나누며, 같은 原理와 科學의 혜택을 누려야 한다.(Ferdinand Peroutka, Democratic Manifesto, Michigan state University Press, 1962, p.6-7)

페로우티카는 이 같은 내용의 민주주의선언에 이어 “민주주의이란 권력은 부패되며 또 절대적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하는 것을 인식하는 제도”(Democracy has grown from the recognition that power corrupts and absolute power corrupts absolutely.)라고 하면서, 無産者의 獨裁를 표방하는 공산주의는 절대적으로 부패하여 결국 亡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의 예언은 적중되어 챠우세키治下의 체코슬로바키아는 東歐共産圈에서 가장 먼저 망해(1968) 自由民主化 되었다. 그 후 連鎖的으로 유럽의 공산권이 무너지는 것을 우리는 똑똑히 보와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엄연한 역사적 眞實을 北韓은 물론 南韓의 左傾政權이 어리석게도 10년간이나 外面하다가 국민들로부터 강한 심판을 받았다. 빛의 승리였다. 끊임없이 모순을 극복함으로 민주주의는 둘이 아닌 하나의 세계를 創造하는 제도(Constantly coping with contradiction, democracy creates one world, not two.)이다. 페로우티카의 말이다. 資本主義 역시 인간다움 그 자체(capitalism humanize itself)이다. ‘人間다움’이란 스미스(Adam Smith, 1723-1990)가 말한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을 가진 자기희생의 사랑을 베푸는 정신을 뜻한다. 이 天賦的이고 人間的인 民主主義 制度下에서는 공산주의는 설자리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태초에 “하나님이 自己形象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創造”한(창세기 1:27) 섭리 때문이다. 하나님의 形象이란 自由와 사랑이다. 자신만이 자유와 사랑을 누리려고 하면 그 사람은 결국 惡魔처럼 되는 것을 우리는 역사에서 얼마나 많이 보와 왔는가? 예수와 칼 맑스는 그 점에서 차이가 있다. 실존주의 신학의 아버지 키에르케고르(Sören Aabye Kierkegaard, 1813~55)는 “진실로 非凡한 사람은 진정한 普通사람이다”(The truly extraordinary man is truly ordinary man.)라고 했다. 普通 사람은 자기와 남의 자유를 똑같이 동등하게 여기는 사람(마태 7:12) 즉 同病相憐의 사람이다.

不屈의 정신을 묘사한 ?Faust?의 저자 괴테(Johann W. von Goethe, 1749-1832)는 죽는 순간에도 “나에게 빛을!”이라고 외쳤고, 처칠(Winston Churchill, 1871~1965)은 늘 영국 국민에게 “결코 포기하지 말라”(never give up)고 말했다.

北韓땅에 自由와 人權의 빛이 비쳐지지 않는 한
우리 南韓도 결코 自由로울 수 없다.
우리는 절대로‘善한 빛의 싸움’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이는 우리 7천만 韓民族에게 부여된
歷史的 使命이며 사랑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