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敎育 1/원고[절기,헌신예배]

아브라함 시대의 믿음의 사람들

好學 2012. 4. 22. 21:02

 

아브라함 시대의 믿음의 사람들

 

                                                                                                               

창12:1-3,

창14:18-20, 욥1:1-22

 

 

 

아브라함과 욥은 사는 곳은 달라도 동시대나 그 전후 200년이 넘지않은 시대안에 살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 이유는 성경학자들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주전 2166년에 태어나 주전1991년(175세) 까지 살다가 죽었다.

그리고 욥은 주전1900년대에 태어나 1700년경까지(200세~ 이상) 살다가 죽은것으로 말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구원사적 계보에 의해서 잘알려진 인물이지만 욥은 익명의 저자에 의해서 어떠한 어려운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신앙하여 입술로도 범죄치 않는 그의 의로운 신앙세계를 보여주고 있으며 욥을 중심으로 한  영적인세계와 그로인한 악과 고통을 다루고 있고  욥과 같은 의로운 사람들이 왜 고난 당하는 지를 보여 주고 있다. 

 

욥의 시대적 배경은 역사적 사실을 언급한 부분이 없고 죄와 고통에 관하여 친구들과의 하나님과의 대화형식으로 되어있기에  욥기서에 기록된 지명이나 낱말, 단어, 삶의 방식등을 통해서만이 추적할수 밖에 없다.

 

이 욥이 실제의 인물이냐 혹은 지어낸 이야기냐 하는 논란은 있을수 있으나 하나님을 신앙하는 삶의 방식이 아브라함 당시의 모습과 일치되는 부분이 많기 때문에 입에서 입으로 구전으로 전해내려온 이야기를 따라 지혜문학이 성행한 솔로몬시대때에 기록된것이 여겨진다.

 

그 이유는

 

첫번째로

욥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처럼 씨족중심의 사회로 많은 자녀를 낳으며(2절) 욥또한  자기 가족을 신앙을 위해 아브라함과 같이 가족의 제사장역할을 이미 감당하고 있다는 것이다.(창12:8, 창35:1-6, 욥1:2-5)

 

두번째로

욥의 부귀가 족장시대의 관례에 따라 유목민으로 (욥1:14)가축의 수효로 측정되었다는 점이다.(욥1:3, 비교 창12:6)

 

세번째로

족장시대에 쓰는 하나님에 대한 명칭이 샤다이(전능한)라는 말이 무려 욥기서에 31회나 기록되었다.

아브라함 가족들외에 이러한 용어를 쓰는 가족이나 민족이 없었다.

 

 

네번째로

욥기서1장1절에 우스라는 지명이름과 15절 스바사람, 17절에 갈대아 사람이라는 내용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아브라함 당시이전의 시대에 해당된다고 볼수 있다.

스바사람이나 갈대아 인들이 욥의 가축을 빼앗고 칼로 욥의 종들을 죽이는 힘의 시대에 있었는데 아브라함이 바로 그 지역의 출신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참고: 아브라함(갈대아우르에서 하란으로 이주 가나안으로 들어옴-애굽- 다시 가나안으로) 창11:31

         욥(우스에 거주 동방사람 동방사람이라 함은 동쪽의 아들들이란 듯으로 가나안 땅의 동쪽 지역에 살고있는 사람들을 통칭

         하는 말이다(욥1:3)

         이 욥의 종들이 스바사람이나 갈대아인들에게 공격을 받아 죽임당하고 재산을 탈취당했다.욥1:15, 17 )

 

다섯번째로

욥의 년수를 대략 200년정도로 짐작하는데 이는 아브라함 족장시대의 수명과 비교가 되기 때문이다.

욥이 고난을 받고 난뒤에 살았던 년수가 140년이었다.(욥42:16)

 

고난 받기 그전에 아들일곱과 딸셋을 두었는데 열명의 자녀였다.(욥1:3)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인정할만한 믿음의 소유자이며 물질로도 축복을 받은 안정적인 가정이었다.

그 주위에 신앙의 친구들이 많다는 것은 고난받기전에도 오랜세월을 살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려준다.

그런세월을 대략 더듬어보면 60년이상의  세월이 흘렀다고 짐작할수 있다. 

 

이처럼 욥의 수명이 아브라함 족장시대나 그 이전의 수명과 비슷하기에 아브라함시대의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다.

 

어떤 학자들의 역사적 기록에 의하면 욥은 아브라함 보다 조금 늦게 태어났다고 보기 때문에 같은시대에 함께 있는 시기는 거의 없다고 보고있다.

 

하지만 어떤학자는 욥의 수명이 아브라함 보다 훨씬 오래 살았기에 수명에 따른 연도별로 추정해보면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와 같은 시기에 살았던 사람일수도 있다고 말하기도한다.

데라(205세)  욥(200세 혹은 그이상) 아브라함(175세)

 

어쨓든 욥은  아브라함 당시보다 훨씬 이전의 사람이거나 아브라함과 동시대에 살거나 아니면 그 후대에 살면서 지역적으로는 따로 떨어져 각각 다르게 살아가는 신앙의 사람이었을수도 있다고 한다.

 

사람의 수명은 노아 이후부터 급속히 짧아지기 시작했으므로(창6:3) 우연찮게도 욥은 데라가 살았던 시기의 사람의 수명과 비슷하다.

 그래서 욥을 아브라함 이전의 사람이나 아브라함 시대때의 사람으로 생각하고 싶다.

 

 그러므로 보는 각도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이제부터는  욥은 아브라함의  시대의 인물로 설정을 해놓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보자

 

이처럼 욥은 아브라함이 살던 그 시대에 하나님이 흡족한 신앙의 사람으로, 동방의 큰자로까지 인정받고 있는 사람이었다.

(욥1:3,8)

 

욥의 신앙으로 인해 그 가족들은 모두 하나님을 제대로 신실하게 믿어왔고 하나님은 욥을 온전하고 정직하여 악에서 떠난자라고 하면서 흡족하셨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신앙의 사람을 제쳐두고 하나님의 존재도 제대로 알지못하는 우상장사꾼의 아들 아브라함을 택하여 믿음의 조상이 되어 이스라엘을 이루고 택한백성이 되게하신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던게 아닌가 싶다.

 

사실 그렇다.

이세상은 죄악많은 세상이지만 그 당시에도 하나님을 열심히 섬긴 사람들이나 민족들이 있었다.

 

노아의 세아들로 인해 자손이 많이 번창하여 세상에 흩어졌어도 노아의 신앙행적과 그 세아들이 직접 경험한 하나님의 전능한 역사를 입에서 입으로 구전으로 전수되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많았다는 것이다.

 

어떤 때는 이 구전이 잘못 와전되어 수많은 후손들은 다시금 홍수로 인해 멸망당하는 일이 없도록 오히려 시날평지에 바벨탑을 쌓아 흩어짐을 면할려고 하다가 하나님의 뜻을 대적한 교만한 행위가 되어버려 온인류의 언어가 혼잡케되는 빌미를 갖게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셈과 함과 야벳의 후손들가운데서는 노아의 신앙전승을 붙잡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로 살게 되었다.

(욥의 세친구, 엘리후 그리고 멜기세댁.....)

그가운데서 노아의 장자 셈의 후손들은 구속사적인 은혜의 이끄심으로  그 조상들의 신앙유산을 따라 하나님의 신앙을 잊지않고 철저히 섬겨온것으로 짐작할수있다.

 

그리하여 그중 욥과 같은 인물이 나올수 있었다.

 

물론 욥이 셈족계열의 후손인지는 정확하게 알려진바는 없지만 기록자는 성경을 보는 가운데 그 비슷한 이름과 지명을 통해 유추해볼수 있었다.

 

욥기서1장1절에 우스땅이라 했는데 이 우스는 그 당시는 지명이었지만 셈의 후손들중의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셈의 다섯번째 아들인 아람에게서 장남 우스가 태어났다.(창10:23)

 

욥1장15절에 스바사람이라고 했는데 이 스바는 함의 첫째아들인 구스에게서 장남 스바가 태어났다.(창10:7)

땅의 지명이름은 어떻게 해서 정해지겠는가?

 

세상에 흩어져 정착하여 살때는 그 가문의 시조가 그 땅의 주인이 되는것이다.

그러면 그지역은 우스땅이 되는것이고, 스바땅이 되는것이고 하란땅이 되는 것이고 가나안땅이 되는것이다.

 

그런데 욥기서에 보면 함족계열인 스바의 후손이 셈족계열의 우스라는 후손들의 자녀들을 괴롭히고 약탈하고 있음을 욥기서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결국 노아가 셈,함,야벳에 대한 축복과 저주가 그대로 그 후손에게 임하여서 함족계열의 후손들은 알게모르게 셈족후손들에게 영적 축복권을 빼앗겨 그 질투심으로 악한짓을 일삼고 있는 것이다.  

 

이제 조금 더 정확하게 살펴보면 욥은 셈의 5번째 아들인 아람에게서 욥의 조상이라고 할만한 우스가 태어났다.

이 우스가 그이후 얼마나 더 오랜 세월이 지났는지는 모르지만 우스땅에 욥이 살았던 것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셈의 3번째 아들인 아르박삿 에게서 그 혈통을 이어받아 노아의 10대손으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왜 하나님의 선택이 셈의 장자인 엘람에게서 나오지않았는지는 알수없지만 신앙의 족보에는 엘람이름이 빠져있고 3째아들인 아르박삿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처럼 셈의 아들들 가운데서도 그 믿음의 혈통이 오래 전승되지 못하면 이방인의 소수민족중의 하나로 사라지게 되었다.

 

이스라엘의 전통적 방식은 항상 아버지로부터 장자로 그 모든 가문의 정체성으로 이어지지만 이처럼 구속사적 족보에는 때때로 차자나 막내가 그 바통을 이어받는 일들이 비일비재함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이 등장하기 까지는 이러한 셈,함,야벳의 후손들중 많은 사람들이 노아가 전수한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생활을 하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그이유는 노아가 홍수이후 삼백오십년을 더 살았다.

그리고 무지개 언약을 기억하면서 자신을 온전히 드리는 번제를 드렸을 것이다.

홍수 이후에 태어난 셈함야벳의 후손들도 이와같은 하나님을 섬기는 노아의 모습을 통해 자연히 신앙전승이 되었을것이다.

 

욥도 그러한 신앙을 이어받아 하나님을 섬기며 가정의 제사장으로 번제를 드렸고 전혀 의외의 인물인 멜기세댁은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까지 불리며 아브라함을 축복하였다. 

 

 

욥기서 전체를 보면 노아의 신앙전승을 계승한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그의 예배생활을 보면 아브라함보다 훨씬 고차원적이고 깊고 헌신된 것임을 보여준다.

 

부스사람 엘리후나 데만사람 엘리바스나 수아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 욥과다른 지방에서 살고있어도 그들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정신을 욥기서를 통해 그대로 보여주고 있으며 창세기의 멜기세댁도 살렘왕 으로서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의 사역을 감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신비는 너무도 놀랍고 신묘막측하다.

 

하나님께서는 이렇듯 하나님을 섬기는 의로운 사람들을 통해 시온의 백성들로 택하지 않으시고 우상장사꾼의 아들 아브람을 통해 그 후손들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였는가 하는점이다.

 

이왕 믿음의 조상을 세우실때 욥이나 멜기세댁과 같은 하나님을 깊이알고 의로운 신앙을 가진 사람을 택하여 쓰실것이지 왜 하필 하나님의 존재도 모르는 신앙의 사람이 아닌 아브람을 택하였는가 하는 점이다. 

 

아브람이 어떤 자인가?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장사꾼의 아들 데라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첫째아들이라서 무엇보다 우상장사하는 아버지 일을 열심히 잘도운 인물일것이다.

이런 하나님을 잘알지 못하는 인물이 욥이나 엘리후 그리고 멜기세댁과 같은 인물을 제치고 하나님의 택함을 입었다는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섭리가 있을것이다.

 

물론 아브라함은 그 혈통상으로는 셈족 계열의 후손으로 노아의 신앙전승을 이어받은 자였겠으나  언제부터인지 자기조상으로 부터 잘못된 신앙전승에 의해 알지못하는 신의 형상을 만들어 복을 빌어먹고사는 그렇고 그런 약하고 보통사람의 일반적인 모습으로 살아왔다.

 

당시 족장중심의 씨족 공동체 사회인지라 가문을 번창시키고 혈통을 이어가기 위해 결혼도 자기 가족중 배다른 이복누이인 사라를 자신의 아내로 삼았다.

하지만 사래는 얼굴은 이뻤지만 (창12:14-15)잉태치 못하는 여자였다.(창11:30)

그래서 형제중 유독 자기가정만 아이도 없이 오랜기간동안 외롭게 살았다.

 

하란에 정착하여 아버지와 형제들과 함께 우상을 만들어 팔아 생계를 이어가는 삶을 살았지만 자식이 없어 항상 온가족들의 염려를 받고 있는 아브람으로서는 장남으로서 인생의 여러가지면을 고뇌할수 있는 시간을 가질수도 있겠다.

 

비록 행복을 가져다 주는 우상을 만들어 팔아먹고 사는 자였지만 자신에게는 이런 깎아만든 신조차도 행복을 맛볼수 있는 자식조차 허락하지 않는 그러한 삶속에서 깍아만든 나무조각의 형상의 신이 아닌  인격적으로 대화할수있는 알지못하는 어떤 신에게 끊임없이 자기 영혼의 갈증을 호소하였는지는 모르겠다.

 

드디어 그는 나이 75세때 자기 영혼의 목마름과 갈증을 해소받을 만한 알지도 못하고 보이지도 않는 신을 만나 말씀을 듣게 된다.

(창12:1-3)

 

무엇보다 그 신은 자기의 원함을 잘 알고 있었듯이 아버지를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면  자식없는 너의 가정에 자식을 하늘의 별과같이 많게하여 민족을 이루고 열국의 아비가 되게하겠다는 말씀을 받는다.

 본적도 없고 만난적도 없는 신의 음성을 듣게될때 그 말씀이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그 약속의 응답을 이루기 위해 그는 떠날 채비를 갖추었다.

이과정에서 그는 가족들과의 많은 이야기와 갈등을 가졌을것이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야할 장남이 느닷없이 떠난다고 하였을때 아버지 데라와 그 가족이 받을 충격을 생각해보라....

 

드디어 그는 자신의 아내와 조카롯만이 함께 동행하게 된다.

그는 그 즉시로 그말씀에 응답하여 즉시로 아버지와 동생을 남겨두고 아내와 조카롯 그리고 하란에서 모은 재산중 자기의 것을 챙기고 종들을 데리고 떠난다.

 

가족을 책임져야할 장남 아브람이 늙은 아버지와 동생을 놔두고 보이지도 아니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떠난것은 남은 가족들로서는 이해가 안되었을것이다.

 

그래서 아버지와 동생은 하란에서 그대로 남아있게 되었다.

이때 아버지 데라의 나이가 145세였다.

아버지의 가업은 둘째아들인 나훌과 함께 할수밖에 없었다.( 나훌의 손자 라반이 집안신을 섬김 드라빔창31:19,30,32,35)

 

말씀의 약속은 받아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품을 떠났지만 육신으로서는 변화받지 못한 아브라함은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다.

그래서 그의 삶은 그때부터 가시밭길같은 인생이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땅에 왔지만(창12:5-7) 그의눈과 육신에 비친 환경은 너무도 기근으로 인해 척박하여 나일강을 따라 풍요롭게 펼쳐진 애굽으로 내려가 살게된다.

 

하나님의 뚯에 따라 지시한 가나안땅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깨어지지못한 육적인 연약함으로 기근을 견디지 못하여 애굽으로 내려간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자기아내를 누이라고  합리적인 거짓으로 속여 애굽왕에게 넘겨주는 비극이 일어났던것이다.(창12:11-13)

그댓가로 아브람의 손에 누이를 넘겨준 댓가로 애굽왕으로 부터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나귀와 낙타를 얻게되었다.(창12:16)

 

이처럼 아브람의 신앙여정을 보면 욥이나 멜기세댁과 같은 훌륭한 신앙을 가진 인격의 소유자가 아닌 삶을 위해 상황에 따라 인간적인 방법으로 목숨을 위해 합리적인 거짓말도 할줄 아는 그 삶자체가 어렵고 고통스러웠던 삶이었던 것이다.  

물론 아브람의 좋은 성품도 성경에서 많이 보여주고 있다.

 

자기와 지금껏 함께한 조카롯에게 땅을 먼저 양보하는 미덕을 보여주었고, 조카가 전쟁으로 포로로 잡혀갔을때 자기 종들을 이끌고 조카롯을 구출하기 위해 싸움도 불사했으며, 조카가 사는 소돔성을 위해 하나님의 사자에게 중보를 요청하는 덕스러운 마음씨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역시 씨족중심의 혈통사회에서는 누구나 형제애에 대한 가장으로서의 당연히 가질법한 모습이엇다.

하나님의 택한 자였기에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선지자라는 호칭도 얻었다.(창20:7)

그는 약속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었지만 그의 육신적 삶은 순간순간 허물로 넘어지는 연약한 모습이었다.

 

그래서 아브라함 마음에 그 약속의 말씀이 희미해지고 잊혀질 무렵 하나님은 또다시 나타나셔서 그에게 언약의 말씀을 내려주셔서 그의 믿음이 다시금 힘을 낼수 있도록 역사하셨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언약은 첫언약후 10년주기로 3번씩이나 그 언약을 상기시키셨다.

창12장(75세때), 창15장(85세), 창17장(99세)

 

하나님은 이처럼 아브람이 그약속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떠나 살아갈수 밖에 없는 육신의 연약함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이루기 위해서 세번씩이나 그 약속을 상기시켰던 것이다.

 

처음과 나중이신 하나님, 알파와 오메가이신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욥이라는 살던 시대적 세월의 차이는 있었지만 시간을 초월해서 얼마든지 그당시 하나님만을 섬긴 욥이나 엘리후 멜기세댁등을 거룩한 믿음의 조상으로 택할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헌신한 모습을 보지않으시고 마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들고 믿음으로 나간 아브라함만을 지켜보셨다.

 

 

시간을 뛰어넘어 다른곳에서 살고 있는 욥.......

욥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자라고 불리움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조상으로 선택받지 못했다.

 

그 역시도 한때나마 자신에게 찾아온 극심한 고난이 있었지만 입술로 하나님을 부정하는 죄를 범하지도 않았다.(욥1:21-22, 욥2:10)

그래서 그 아내가 하도답답해서 오히려 욥을 보고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할 정도였다.(욥2:9)

 

신앙의 친구들이 찾아오자 그는 자신을 자책하며 태어난 날을 저주하며 자기 중심의 생각들의 소리를 내게 된다.

많은 친구들의 신앙적 위로가 있었지만 다 위선으로 들린다.

 

친구의 소리를 들을수록 욥은 지금까지 하나님만을 섬겨온 신앙이 왜 고난을 받게 되는지 하소연한다.....

결국 이런 모습들이 욥은 의인이었을지라도 자기 중심의 소리를 내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그러나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을때 그는 모든것을 알게 되었고 자신이 얼마나 무가치하다는것을 알게되었다.

그리고 회개했다.

이런 신앙의 고백으로 하여금 욥은 이전보다 더많은 복을 받으며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았다.

 

아브라함보다 비교할수 없는 나은 신앙인데 왜 그를 선택하지 않았을까?.......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검증된 욥이나 그시대의 훌륭한 하나님을 신앙하는 엘리후나 멜기세댁과 같은 사람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조상으로 선택하지 않으시고 욥과는 반대의 삶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을 한번도 만난적 없고 잘 모르는 우상장사꾼의 아들 아브람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조상으로 삼았을까?

  

여기에 놀라운 하나님의 뜻이 있다.

이 모두가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믿음으로 살아가는것 같으나 안으로 들어가보면 차이점을 많이 가지고 있다.

 

이미 욥이나 엘리후나 멜기세댁과 같은 그 당시 사람들은 노아의 신앙전승을 이어받아 그 말씀의 전승대로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안에서 누리는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아브람은 그렇지 못했다.

 

같은 셈족의 혈통이라도 아브람은 그 가족들로부터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못했으며 하나님께 대한 잘못된 신앙관으로 오히려 우상을 만들어 파는 장사꾼의 아들로 자랐다.

 

거기다가 자기중심적인 자아가 강하여 위기때는 법에 저촉되지 않을 정도록 합리적인 거짓말로 우리기를 모면하여 나가는 일반적인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택하여 믿음의 조상으로 이스라엘의 아버지로 삼았던 것이다.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을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믿음의 의를  이루기 위함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고 하나님으로 부터 놀라운 은혜를 받기위해 하나님을 위해 우리의 옳은 행실을 가지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받아들이게 하는것이 아니다.

 

믿음은 우리의 소망이 끊어지고 어느것 하나 기대할수 없는 절망감으로 마음이 무너졌을때 약속의 말씀을 들을때 마음에 이미 받은것으로 여겨 믿고 의지하고 나아가게 하는 것을 믿음이라 한다.

 

눈에 보기에 불가능하다고 여기는것들과 이성적으로도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것들을 말씀앞에 굴복하고 마음으로 믿고 아멘하고 받아들여 나아가는 삶을 믿음의 삶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불가능한 그것을 말씀했을때 믿고 나아간 아브라함의 모습을 보고 믿음의 의로 여기셨다.(히11:1-2)

 

그렇다. 믿음은 믿을수 있는것을 믿고 나아가는게 믿음이 아니다.

그것은 알고 나아간다는 것이다.

알고 나아가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해가 안되고 알수없지만 마음에 받아들여 나아가는 것이 믿음이다..

믿음은 우리가 보지못하는 것을 믿게 하는것이 믿음이다.

믿음은 우리가 알지못하는것을 사실로 받아들이게 하는것이 믿음인것이다.

믿음은 우리가 믿을수 없는것을 믿는것이 믿음인것이다.

 

이러한  믿음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직접 그모습을 보여 나타나신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역사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눈으로 실지로 보면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하는것 만큼 잘믿는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눈앞에 나타나 천국을 보여주며 믿으라고 하면 안 믿을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눈에 보이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속에서 역사하는 존재이다.

우리의 육신으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감당할수가 없기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속에서 누림을 갖을수 있도록 성령을 주셨다.

 

그러므로 성령이 아닌 우리육신의 경험을 통해 받아들여지고 우리가 옳다고 여겨지는 행위를 가지고 나아가고자 하는 모든것을 하나님은 거부하신다.(롬3:27, 4:4)

 

오늘날 믿음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이끄심을 눈으로 보고 확인하게 하는 이러한 경험의 유혹에서 물러서라.

 

사단은 이러한 가운데서도 광명한 천사처럼 변장하여 우리의 영적 갈급함을 신비나 이적등을 통해 보여주고는 마치 믿음의 역사인양 달려가게 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의를 이루기위해서 그 영광을 완전히 감춘채 인간이 믿음으로 나아가게 하시고 믿음으로 세우기 위해서 하나님은 철저하게 말씀으로만 약속하시고 그 말씀의 약속을 믿고 나아가라고 하는것이다.(롬10:17)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의를 소유하게 되는것이다.(롬4:3,5,13, 20-22)

  

하나님께서는  그 당시 욥과 같은자를 택하여 믿음의 조상으로 삼지않으시고  연약한 아브라함을 선택하셔서 인간의 이성으로서는 믿을 수없는 약속들을 믿고 의지하여 바라보게 함으로서 그래서 하나님의 의가 옳은것임을 알도록 하시기 위해 그를 약속의 말씀만을 의지하여 이끌려 나아가도록 이끄셨다.

 

이것이 믿음이다.

 

어느누구라도 욥과 같은 하나님을 잘아는 자가 약속의 말씀을 받고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면 그는 그렇게 될수 있는 당연한 조건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믿음으로 세운자가 아니라 신앙의 기준된 자격에 의해 세운자들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이와같이 하나님의 택함을 받기 위해  이미 기준된 욥이나 모세 다윗 바울등과 같은 그러한 인물이 되기위해 열심과 노력 정성을 가질것이다.

 

믿음의 의는 그것이 아니다.

누구나 다 십자가에 나오라고 한다.

 

누군가의 믿음과 신앙을 본받아서 내열심과 내수고와 내정성을 가지고 주님앞에 나오라는것이 아니라 그 모습 그대로 나오라는 것이다.

 

이것이 주님께서 각사람에게 임하시고 역사하시는 은혜의 약속인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어느누구라도 실수가 있고 허물이 있다할지라도 약속의 말씀에 의지하며 믿고 나아가는 자들을 믿음의 의라 여기신다.

 

 무엇이든지 잘섬기고 잘믿고 의롭게 생활하는 그런 욥과 같은 사람이 아닌 믿을수없는 연약한 조건을 가진 그래서 항상 넘어질수 밖에 없는 아브람을 선택함으로서 오늘날 누구라도 하나님앞에 말씀에 의지하여 나아오는 연약한 자들을 믿음의 후사로 세우신다.

 

그래서 연약한자의 대표자인 아브람을 믿음의 조상으로 이스라엘의 아버지로 삼았던 것이다.

 

나를 위한 대속의 희생을 이루신 놀라운 그일을 육신으로 확인하고 눈으로 보는 경험이 아니라 이 사실을 마음에 약속의 말씀으로 받게 될때 우리도 아브람과 같은 믿음을 소유하여 믿음의 후사로 영적이스라엘이 되어 네가 이제야 나를 사랑하는줄 알았도다 하는 놀라운 주의 음성을 듣게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다 끝난것은 아니다.

그 약속의 말씀이 완성이 되기까지는 오랜시간이 걸려야 한다.

약속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았지 그 연약한 육신은 그대로 이기때문에 육신의 소욕은 항상 믿음과 싸워야만 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그 믿음의 의를 확인하기 위해서 약 40년이라는 세월을 걸리면서까지 훈련시키시는 것이다.

아브람75세소명 100세때 이삭낳음  이삭의 나이 20세쯤 아브라함 나이115세쯤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번제로 드림 자기생명과도 같은 이삭을 하나님께 드리고자 했을때 하나님께서는 비로서 아브라함의 믿음의 완성을 이루신것을 확인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스라엘백성들도  마찬가지다.

출애굽하여 영적죄악의 도시에서 벗어났지만 자기육신을 벗어버리기 위해서는 40년이라는 세월을 광야에서 보내야 했다.

 

오늘날 우리들도 마찬가지다.

나를위한 주님의 놀라운 대속의 사실을 약속으로 받았지만 우리는 이세상에서 자기 육신과의 많은 싸움을 해야만 한다.

그래서 그 모든싸움이 끝나게 될때 우리는 믿음의 후사로 서게될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때 욥이나 엘리후 같이 신앙좋고 내 옳은 행위로 떳떳하게 되어서 하나님을 만나는게 아니다.

나는 비록 연약하고 부끄럽지만 아브라함과 같이 약속의 말씀을 받아가진 믿음을 가지고 만나는 것이다.

 

믿을수 없는 조건을 가진자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나아가게 되었을때 하나님은 그것을 믿음의 의로 여기신것이다.(롬3:28) 

  

아브라함은 그 약속의 말씀을 들을때 바랄수 없는 가운데 믿음으로 나아갔을때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했기 때문에 믿음의 의를 얻었다.(롬4:18)

이것이 하나님의 의다.(롬4:13)

 

그래서 하나님은 그당시 의인이라 여기는 욥과 같은 자를 선택하지 아니하시고  다른 신의 형상을 만들어 파는 우상장사꾼의 아들을 약속의 말씀으로 믿음의 완성을 이루기 위해 선택하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