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文學/[그리스도를 본받아]Thomas

[31]. 모든 피조물을 경멸하고 창조주를 찾는 일에 관하여

好學 2012. 3. 23. 21:42

[31]. 모든 피조물을 경멸하고 창조주를 찾는 일에 관하여

 

 

1. 주님, 제가 사람이나 어떤 피조물들에 의해 전혀 훼방받지 않는 경지에 이르려면 아직 더 많은 당신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다른 것들이 나를 붙들고 있는 한 저는 자유로이 당신께 날아갈 수가 없습니다.

 

당신께 자유로이 날아가기를 원하는 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나에게 비둘기 같은 날개를 주어 멀리 날아가서 편히 쉬게 하리요?(시편 55:6)"

 

한결같은 눈으로 사는 것보다 더 평온한 삶이 어디 있으며(마태복음 6:22), 세상에서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것보다 더 자유로운 삶이 어디 있으리이까?

 

그러므로 사람은 마땅히 모든 피조물들을 초탈하고 자신을 온전히 버리며 마음의 황홀경 가운데서 당신을 바라봐야 하오니, 당신은 만물의 창조자시요 피조물 중에 당신 같으신 이가 결코 없습니다.

 

사람이 피조물에 얽매여 있는 한 마음의 자유를 얻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관조적인 사람이 매우 적은 이유가 바로 그것이오니, 피조물과 썩어질 것들로부터 온전히 돌아설 수 있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2. 이를 얻기 위해서는 영혼을 들어올려 줄 은총이 많이 필요합니다.

 

사람이 영적으로 들어올려져 모든 피조물들로부터 자유로워지고 하나님과 전적으로 연합되지 않는 한, 그의 지식과 소유가 아무 소용 없습니다.

 

영원하시고 무한하신 유일한 하나님 외에 다른 어떤 것을 위대하게 여기는 자는 결국 작은 자가 되며 비천하게 땅에 구르리이다.

 

하나님 이외에는 그 어느 것도 무()이니, 마당히 무로 여겨져야 합니다.

 

깨우침을 받은 경건한 신앙인의 지혜와 유식한 학자의 지식 사이에는 크나큰 간격이 있습니다.

 

사람의 연구로 고생스럽게 얻어진 학식보다 위에서부터 하나님의 은헤로 얻어진 지식이 휠씬 더 고상합니다.

 

 

3. 많은 사람들이 관조를 바라지만, 관조를 얻는 데 필요한 훈련들은 행하려 하지 않습니다.

 

큰 장애 중 하나는 사람들이 자신을 온전히 낮추는 데는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표적과 보이는 것에만 의지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시적인 낮은 것들만 늘 갈망하고 온전한 마음의 반성과 함께 내적인 문제에 관심 두는 일은 심히 게을리 하니, 우리가 무슨 영에 의해 이끌리고 있는지, 과연 우리가 영적인 자라 불릴 수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4. 오호라, 반성이라고는 한 순간 얄팍하게 하고서 다시 곧 일에 착수하니, 우리의 행위에 대한 엄격한 검토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갖고 있는 애정의 대상에 대해 신경쓰지 않으며, 우리의 모든 행위 안에 담겨 있는 부정함에 대해 애통해 하지 않습니다.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하였으므로 대홍수가 뒤따르게 되었던 것입니다(창세기 6:12, 7:21).

 

그 이후로 우리의 내적 애정은 더욱 부패하게 되었으며, 거기서부터 우러나오는 우리의 행동 역시 부패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니, 이는 우리 안에 생기가 부족하다는 증거입니다.

 

정결한 마음으로부터 선한 삶의 열매가 생겨나옵니다.

 

 

 

5. 우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 일을 하였는가는 묻지만 그가 얼마나 높은 덕의 원칙을 가지고 행동하였는가는 별로 숙고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가 과연 용감한지, 부자인지, 늠름한지, 재주가 많은지, 좋은 작가인지, 훌륭한 가수인지, 좋은 노동자인지 묻곤 하지만, 그가 얼마나 심령이 가난한지, 얼마나 참을성 있고 온유한지, 얼마나 경건하고 신령한지는 별로 말하지 않습니다.

 

본성은 사람의 외적인 면을 보지만, 은총은 내적인 것을 주목합니다.

 

본성적인 사람은 종종 실망하지만, 은총의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하므로 결코 속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