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 개론
▣ 야고보서-개요와 서론
▣ 주제:온전한(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실천적인 믿음
(1:4/1:17/1:25/2:22/3:2 에서 “온전한“이란 성숙을 의미한다.)
1. 온전한 사람과 고난/1장
온전한 행위-하나님의 목적 /1장 1-12절
온전한 선물-하나님의 선하심 /1장 13-20절
온전한 율법-하나님의 말씀 /1장 21-27절
2. 온전한 사람과 봉사/2장
믿음은 사랑으로 입증됨 /2장 1-13절
믿음은 행위로 입증됨 /2장 14-26절
3. 온전한 사람과 말/3장
권면 /3장 1-2절
사례들 /3장 3-12절
(1)재갈과 사공의 키 /3장 3-4절
(2)불과 짐승 /3장 5-9절
(3)샘과 나무 /3장 10-12절
적용:참된 지혜 /3장 13-18절
4. 온전한 사람과 성별 /4장
우리가 싸워야 하는 원수들 /4장 1-7절
(1)육체/4장 1-3절
(2)세상/4장 4-5절
(3)마귀/4장 6-7절우리가 간직해야 하는 권면들/4장 8-17절
(1)교만에 대한 경고/4장 8-10절
(2)비방에 대한 경고/4장 11-12절
(3)자기 확신에 대한 경고/4장 13-17절
5. 온전한 사람과 재림 /5장
그릇된 일에 대해 인내하라 /5장 1-11절
말함에 있어 순전하라 /5장 12절
시련당할 때에 기도하라 /5장 13-18절
끈기있게 구령하라 /5장 19-20절"
▣ 야고보서 서론
▣ 저자:신약에서 야고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셋이나 된다. 즉, 세배대의 아들이며 요한의 형제인 야고보와, 알패오의 아들이며 사도 중의 하나인 야고보, 그리고 주님의 동생인 야고보이다. 이 편지를 쓴 사람은 아마도 주님의 형제 야고보인 듯하다(막 6:3/마 13:55).
그리스도께서 사역하시는 동안 야고보와 그의 형제들은 불신자들이었다(막 3:21/요 7:1-10). 야고보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에 특별한 방문을 받았는데(고전 15:7) 이 일이 그를 구원으로 인도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가 다락방에 모인 신자들과 함께 있었던 것을 보게 되는데(행 1:14) 베드로가 무대에서 사라지자(행 12:17)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유명한 회의를 인도했던 사람이 야고보로서, 그가 최종적인 결정도 내렸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9-10절에서 야고보의 지도력을 인정하였으나, 갈라디아서 2장 11-14절에서 그는 야고보의 율법주의적 영향력에 대해 비평한것 같다. 사도행전 22장 17-26절은 야고보가 유대인의 율법면으로 상당히 기울어 있다는 사실을 증거한다.
▣ 서신:이러한 율법주의적 유대적 강조점이 야고보서에 명백히 나타난다. 이 편지는 분산되어 “널리 흩어진“ 유대인들에게 보내진 것이다(1:1-2/벧전 1:1/요 7:35 참조). 전문적인 용어로 “흩어진 유대인“이란 팔레스틴에 살고 있지 않으나 “모국“과의 지속적인 관련을 맺고 있어 가능할 때는 절기에 본국으로 돌아왔던 유대인들을 말한다. 사도행전 2장에서, 세계 각국으로부터 예루살렘에 온 경건한 유대인들이 많이 있었다는 사실을 주목하라.
이러한 유대인 공동체들 중의 몇은 이스라엘의 박해와 추방으로 인한 결과로 이루어졌거나 또는 사업적인 이유로 인해 자생적으로 형성되었다. 물론, 사도행전 11장 19절은 많은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예루살렘의 박해로 인하여 해외로 흩어졌다는 것을 알려 준다. 이 유대인들은 구별된 공동체를 이루어 외국땅에서 유대인의 생활 방식을 지켜갔었을 것이다.
야고보가 편지를 보내는 대상은 로마제국(특히 수리아 지방)내에 흩어져 있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이며, 주후 약 50년 경에 기록되었다.
야고보서의 유대적 색채는 여러 면에서 나타난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5장 14절에서 교회(에클레시아-불러냄을 받은 몸)라는 말이 나오면서도 2장 2절에서는 회당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그리스도의 이름은 두 번 언급되었으며(1:1/2:1), 예화들은 모두 구약에 나오는 것들이거나 아니면 자연에서 비롯된 것이다. 야고보서는 율법에 대한 그리스도의 영해(靈解)였던 산상설교와 유사한 구절들이 많다. 야고보서와 베드로전서 간에도 많은 병행 구절들이 있다(이것 역시 흩어진 유대인들에게 씌어진 것이다).
이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참된 신자들이었으나 유대인 공동체 안에 살면서 유대인의 방식을 따르고 있었다. 이들은 거듭났으며(1:18) 주의 재림을 기대하고 있었다(5:7). 이 서신에서는 바울 서신들에서 발견되는 바와 같은 잘 발전된 교회의 교리들을 기대하지는 말라. 성전이 여전히 서 있었고 유대인의 많은 회당들은 그리스도인의 회당이 되었다. 그리고 여전히 한 몸에 대한 온전한 이해가 모든 사람들에게 깨우쳐지지 않고 있었다.
▣ 기본적 주제:본 서신 전반에 걸쳐 드리워진 두 주제가 있다. 곧, 외부로부터의 박해와 내부로부터의 문제들이 그것이다. 신자들은 시련을 통과하고 있었고 야고보는 그들을 격려하려 하였다. 그러나, 공동체 내부에는 분열과 죄들이 있었으므로 야고보는 이들이 죄를 자백하고 버리도록 도우려 하였다.
핵심 사상 중의 하나는 완전함, 또는 영적인 성숙(개요 참조)이다. 이 사람들은 주 안에서 자라야 할 필요가 있었으며, 그들이 당면하는 여러 가지 시련들은 그들이 하나님께 순종할 때 그들을 성숙하도록 도울 것이다.
▣ 야고보와 바울: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문제에 관해서, 야고보와 바울 사이에는 아무런 상충이 없다. 야고보서는 갈라디아서가 아직 기록되지 않았을 때 씌어졌으므로 모순을 일으킬 수도 없는 것이었다! 바울은 사람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고 설명하며(롬 3-4장), 야고보는 사람의 믿음이 행위로 증명되지 않는다면 죽은 것이라고 설명한다.
우리는 행위로 구원받은 것은 아니지만, 우리를 구원한 그 믿음은 선한 행위로 우리를 이끌어 가는 것이다."
▣ 믿음의 시련-야고보서 1장
그리스도인의 성숙을 시험하는 가장 좋은 것 중의 하나는 환란이다. 그리스도인이 개인적인 시련들을 통과할 때 그가 참으로 소유하고 있는 믿음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를 알게 된다. 하지만 시련은 우리의 믿음을 나타내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성품을 발전시킨다. 야고보서의 대상자였던 그 유대인들은 시련을 경험하고 있는 중이었으며, 그는 그들을 격려하고자 하였다.
이상한 일은 야고보가 그들에게 기뻐하라고 말하고 있는 점이다. 1절에 나오는 “문안“이란 단어는 “기뻐하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인은 문제들의 와중에서도 어떻게 기뻐할 수 있을까? 야고보는 제1장에서 그리스도인이 환란의 때에 갖게 되는 확고부동함을 보임으로써라고 이에 대답한다.
1. 하나님의 목적을 확신할 수 있다(1:1-12)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경험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롬 8:28). 우리는 이 세상 일들을 관할하시며 모든 사건의 배후에 목적을 가지고 계시는 사랑의 하늘 아버지를 모시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시련들이 밀어닥칠 것을 예상해야 한다. 야고보는 “만일 너희가 여러 가지 어려운 시험에 빠지면“이라고 말하지 않고 “만나거든“이라고 말하고 있다 1장 2절에 나오는 “시험“이란 “검사, 연단“의 의미가 있는 반면, 1장 13절의 시험은 “악을 행하도록 유혹함“이라는 뜻이다.
시련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의 자녀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성품을 온전케 하는 데에 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성숙(온전)하기를 원하시며, 성숙함은 인생이라는 실험실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시련들은 견딤을 뜻하는 인내를 산출하며(롬 5:3), 인내는 다시 믿는 자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보다 깊이 성숙하도록 인도한다.
하나님은 요셉을 통치자로 세우시기 위하여 그에게 13년간이라는 시험의 기간을 두셨다. 베드로는 모래에서 반석으로 변화하기까지 시험의 학교에서 3년간을 보냈다! 바울은 많은 시험들을 통과하였으며, 그 모든 시험들은 그의 성품을 성장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다. 물론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는 중에 하나님을 신뢰하기에는 믿음이 필요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심중에 거룩한 목적을 지니고 계심을 알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께 더욱 순복하게 된다.5-8절에서 야고보는 이러한 믿음의 문제를 다루며, 믿음이 기도 중에 표현된다고 본다. 우리가 언제나 하나님의 목적들을 이해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사단은 “하나님은 정말 돌보시는가?“라는 물음으로 우리를 자주 유혹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기도가 개입한다. 우리는 우리 아버지께 지혜를 구할 수 있으며,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혜를 주실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두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된다.
그 말은 망설임, 또는 의심을 암시하며, 문자적으로는 “두 영혼을 품다“라는 뜻이다. 두 마음을 품은 그리스도인들은 시련을 겪는 동안 안정을 찾지 못하고 이리 저리 요동한다. 한 순간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다음 순간에는 하나님을 의심한다. 시련 중에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반드시 안정을 찾게 한다(벧전 5:10).
야고보가 편지를 보내는 회당들에는 가난한 사람도, 부자도 있었으나(2:1-9/5:1), 야고보는 시련들이 그들 모두에게 유익을 준다고 지적한다. 가난한 사람에게 시련은 주 안에서 그들이 부요하다는 것과 더이상 아무 것도 잃을 것이 없다는 것을 상기시키며, 부자에게는 감히 부를 위하여 살거나 부를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12절은 우리가 시험과 시련의 때에 주장할 수 있는 놀라운 축복과 약속이다."
2. 하나님의 선하심을 확신할 수 있다(1:13-20)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에 그의 백성에게 고난을 허락하시거나 시험당하도록 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이 성장하며 하나님의 은혜의 새로운 축복을 경험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이들이 이같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시련들과 시험들을 통과하는 데에 있다. 이 구절들에서 야고보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강조하며 시련의 때에 하나님께 대하여 반항하는 그리스도인을 경고한다(1:13/1:20).
우선, 야고보는 시련과 시험(유혹)을 조심스럽게 구분하고 있다. 하나님은 시련들을 보내셔서 우리 안에 가장 좋은 것을 가져다 주신다(아브라함의 예-창 22:1). 그러나, 사단은 유혹을 보내어 우리 안에 가장 나쁜 것을 가져다 준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서 시험하시는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범죄케 하는 시험(유혹)은 우리의 본성으로부터 생겨나기 때문이다.
야고보는 죄를 “낳는다“고 묘사한다. 외부로부터 미혹됨으로써 내부에 욕심이 일어나며,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게 되고, 결국 죄는 죽음을 초래한다! “끌다“와 “꾀다“는 사냥 용어들이며 그 말들은 무엇인가 잡기 위해 유혹의 미끼를 사용하고 있는 사냥꾼이나 낚시꾼을 상상케 한다.다음으로 야고보는 하나님은 좋은 은사만을 주시며, 좋은 은사는 하늘로부터 오는 것임을 상기시킨다. 하나님은 빛이시다. 그의 선하심은 멀리 떨어져 있는 별과 같이 깜박거리는 것이 아니며, 일식에서처럼 회전함으로 인해 생기는 그림자도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으며,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들 가운데 첫열매들로서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일어날 일의 “본보기“이다(롬 8:23).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시련이 올 때 말하거나 불평하는 데 빨라서는 안 된다. 오히려 말씀을 듣는 데 빠르고, 말하는 데 더디며 성내는 데에도 더디어야 한다. 결국, 하나님은 우리가 인내할 때, 그리고 화를 내지 않을 때에 우리의 삶을 통하여 그의 뜻을 성취하신다."
3.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확신할 수 있다(1:21-27)
“듣기는 속히 하라“는 구절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문제를 대두시키며, 이 문제는 이 부분의 주제가 된다. 야고보는 “첫열매“와 “심긴 도“(말씀)에 대하여 말할 때 농사에 대한 예화를 들고 있다. 그는 마음이 밭에 비유되며 말씀이 심겨진 씨로 비유되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가리키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마 13:1-9/마 13:18-23).
만일 그리스도인이 말씀을 받고 시련 가운데서 말씀으로부터 힘을 얻으려 한다면 가라지들을 뽑아내야만 한다! “넘치는 악“은 가라지, 곧 “무성하게 자라난 사악함“으로 번역될 수 있다! 마음의 밭은 말씀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그의 생활에서 죄를 짓고서도 시련으로 인해 하나님께 대해 통분히 여긴다면 그는 그것으로 인해서 말씀과 축복을 받을 수 없다.
22-25절에서 야고보는 비유를 바꾸어, 도(말씀)를 거울(유리)로 묘사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마치 거울이 하는 것처럼 우리가 어떠한지를 나타낸다. 그리스도인이 말씀을 살필 때에 그는 자신을 바라보게 되어, 마음을 살피고 죄를 고백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말씀을 들여다보고 읽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읽은 말씀에 순종해야만 한다.
23절에서 그는 거울을 무심결에 힐끗 쳐다보아 자신의 얼굴이 더럽다는 것을 알고서도 자기 일을 계속하는 사람을 묘사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이런 식으로 읽는다. 그들은 성경을 잠깐 훑어보고 그들의 삶에서 일어난 죄들을 살핀 후에도 그대로 성경을 덮고 자기의 일을 계속한다. 이러한 태도는 자기 기만이다. 실제로 그들은 스스로를 해치고 있는데도 자신이 영적으로 더 나아졌나고 생각한다.
25절은 우리가 말씀을 조심성없이 힐끗 들여다 볼 것이 아니라 주의깊게 주시하고 연구하며, 그것을 통하여 자신들을 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다음으로는 말씀이 하라는 대로 순종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에게 복이 될 것이다. 사람을 복되게 하는 것은 성경을 읽는 일이 아니라 말씀하시는 대로 순종하는 것이다. 야고보는 말씀을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라고 부르고 있다. 왜냐하면 말씀에 대한 순종은 영적 자유를 산출하기 때문이다(요 8:30-32). 그리스도인의 삶을 영위한다는 것은 속박이 아니라 놀라운 자유인 것이다!
22-25절은 말씀을 들여다 보는 것으로 신자의 사적인 생활을 묘사했고, 26-27절에서는 말씀을 실천하는 것으로 신자의 공적인 생활을 묘사한다. “경건하다“는 말은 “종교의 외적 실천“을 뜻한다. 성경의 그 어느 곳에서도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종교“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하나의 기적이요, 새로운 출생이며, 신성한 생활이다. “만일 자신이 경건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생활로써 그것을 입증하라“고 야고보는 말한다.
순전한 종교의 특징은 무엇인가? 그것은 절제(재갈물린 혀-3:2)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며, 정결한 생활 등이다. “돌아 본다“는 말은 필요에 처한 사람들을 희생적으로 돌본다는 뜻을 암시한다. 참된 종교는 형식이나 의식의 문제가 아니라 통제받는 혀, 희생적인 봉사, 그리고 정결한 생활의 문제인 것이다.
야고보는 본 장에서 여러 번 “온전한“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1장 1-12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온전한 사역을, 1장 13-20절에서 하나님의 온전한 선물을, 1장 21-27절에서는 하나님의 온전한 율법을 본다. 하나님의 온전한 사역은 우리를 성숙케 하는 하나님의 사역이며, 하나님의 온전한 선물은 시험의 때에 우리에게 베푸시는 그의 선하심이며 그의 온전한 율법은 우리를 강하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를 붙들어 주는 말씀인 것이다."
▣ 사랑과 믿음-야고보서 2장
갈라디아서 5장 6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라고 설명한다. 믿음의 이러한 양면성이 본 장에서 논의된다. 근본적인 개념은 진정한 성경적 믿음이란 죽은 것이 아니며 사랑으로 나타나고(2:1-13), 행함으로 나타난다(2:14-26)는 데에 있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믿지 가슴으로 믿지 않는다. 이들은 기독교의 사실을 믿는 역사적인 신앙은 가지고 있으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믿는 구원받는 신앙은 가지고 있지 못하다.
1. 믿음은 사랑으로 입증된다(2:1-13)
“가지고 있지 않다“는 말은 사실상 “실천하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우리는 단순히 믿음을 소유하고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그것을 실천해야만 한다. 신앙을 고백한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이렇게 믿는 사람들이 많으며, 사단도 일반적인 의미로는 “하나님“을 믿는다(19절).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인격적인 믿음을 말한다. 영혼을 구원하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란 어떻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명확한 위탁인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영광“(원문에는 “영광의 주“로 되어 있지 않음)으로 불리우고 있는데, 이는 그리스도께서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시기 때문이다(히 1:3). 이 서신을 읽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영광“이라 하면 구약에서 성막과 성전에 거했던 하나님의 영광인 바 신적 현현(Shekinah)의 영광과 그리스도를 동일시하는 것이 되었는데, 이제 그 영광은 믿는 자와 교회 안에 거한다(골 1:27/골 3:4/롬 8:30/요 17:22).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나타내는 방법은 무엇이겠는가? 그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며 또한 그들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다고 생각함으로써 사랑을 표할 수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심판하거나 다른 사람들을 정죄해서는 안 된다. 가난한 사람들보다 부자들을 더 존중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무서운 죄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부요하도록 하시기 위해 가난하게 되셨기 때문이다(롬 2:11/딤전 5:21 참조).
야고보는 가난한 사람이 회당에 오면 사랑으로써 영접해야 할 것과 부자에게한 것과 같은 그런 똑같은 은혜를 보여 주어야 할 것임을 담대하게 주장한다. 사람은 외모로 판단할지 모르나, 하나님은 마음을 보신다(삼상 16:7). “금가락지를 낀 사람“(여러 개의 “번쩍거리는“ 금가락지를 끼고 있음을 암시한다)이 초라한(더러운) 옷을 입은 사람보다 하나님 보시기에 더 훌륭한 것은 아니다. 유대인들은 높임을 받는 자리(눅 14:7-11)와 칭찬받는 사람들이 되는 것을 좋아했는데, 불행하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 역시 이를 좋아한다!
과연 사람을 외모로 취한다는 것은 그처럼 죄악된 일인가? 한 가지 예로, 그렇게 하면 우리가 판단하는 자가 되나, 하나님만이 사람을 정직하게 판단하실수 있다(4절). 여기서 “구별한다“는 말은 “나눈다“는 뜻이며, 그것은 1장 8절에서 제시한 두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 우리를 되돌아가게 한다. 이런 류의 판단은 거짓된 가치관을 보여 준다(5-6절).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가난한 자가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분명하게 언급하셨기 때문이다(눅 6:20/마 5:3).
야고보는 부자들이 성도들을 압제하며 그들을 법정으로까지 끌고 간다고 상기시킨다! 가난한 자를 높이지 않음으로써 이 신자들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가난한 자를 멸시하였다(잠 14:31).
7절에서 야고보는 부자가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그리스도의 이름을 훼방하기조차 한다“고 상기시킨다. 더구나 신자를 위한 “최고 법“(황금률)은 사랑의 법이다! 야고보는 레위기 19장 18, 34절을 인용하나, 마태복음 22장 34-40절에 있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롬 13:8-10/갈 5:14 참조).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것은 죄이며, 계명 하나를 어기는 것은 율법 전체를 범하는 죄가 된다! 동일한 하나님께서 모든 계명을 주셨으며 모든 계명을 순종하고 실천해야만 한다. 물론, 야고보는 그리스도인을 모세의 율법 아래로 다시 얽매이게 하려는 것이 아니며, 새 언약 하에서도 여전히 지속되는 도덕법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심판을 받을 자처럼 말하고 행동해야 하는데, 이는 우리가 모세의 법으로서가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에 기록된 사랑의 법, 보다 준엄한 “자유의 법“으로 심판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2. 믿음은 행함으로 입증된다(2:14-26)
야고보가 바울과 모순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아님은 말할 것도 없다. 로마서 4장 1-5절에서, 그리고 갈라디아서 3장에서 바울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의롭게 되는가(의로운 신분을 가지게 되는가)를 말하고 있는 반면에, 야고보는 우리의 구원을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입증할 것인가를 말하고 있다.
우리의 생활에 나타난 변화를 보지 않고서는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세상은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죄인이 구원을 받는 것은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지만(엡 2:8-9), 행함으로 인도해 가는 것이 믿음이다(엡 2:10).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말하는 바에 달려 있지 않고 생활에서 어떻게 행하느냐에 달려 있는 문제인 것이다. 14절에서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는 말은 “그와 같은 종류의 믿음이 그를 구원하겠느냐?“고 해석될 수 있다.
우리는 위대한 업적을 이룬 행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믿음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작은 일, 실제적인 행위로 말미암아 믿음을 보여 주게 된다(14-16절/ 요일 3:16-18). 행위로 인도하지 않는 믿음은 살아 있는 믿음이 아닌 죽은 믿음이다(17, 26절). 18절에 하나의 도전이 나온다.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이것은 보일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있어서 믿음이 표현되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실천적인 사랑의 순종으로 말미암는 데에 있다. 마귀도 죽은 믿음은 가지고 있다(19절). 마태복음 8장 29절과 사도행전 16장 17절을 읽고 귀신이 그리스도를 무엇이라고 인정했는지 알아보자. 그러나, 이러한 류의 믿음은 그를 구원할 수가 없다!
야고보는 구약으로 돌아가 행함으로 이끄는 믿음의 실례를 두 가지로 제시한다. 첫째는 아브라함이다(창 22:1-19). 아브라함은 아들 얻기를 열망했었는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아들을 주기로 약속하셨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매 이것이 그를 구원하는 데 필요한 의가 되었다(창 15:1-6/롬 4:1-5).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기를 이삭을 통하여 그가 바다의 모래와 하늘의 별들과 같은 수 많은 자녀들을 갖게 된다고 하셨다. 그런 다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제단에 바치라고 요구하셨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으며 따라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두렵지 않았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죽은 자로부터 일으키실 수 있음을 믿었다고 히브리서 11장 17-19절은 말한다!
간단히 말해서, 아브라함은 그의 행위로 말미암아 자기의 믿음을 입증하였다. 말씀에 대한 그의 순종은 말씀을 믿는 믿음의 증거였다. 그의 믿음은 그의 순종의 행위로 온전해졌다(성숙하게 되었다). 역대하 20장 7절과 이사야 41장 8절에서 “하나님의 벗“이라고 한 것을 보라.
야고보의 두번째 예화는 라합이다(수 2:1-/수 6:17-27). 이 여인은 소문난 죄인이었으나, 그 이름이 그리스도의 계보에 들게 된다(마 1:5). 히브리서 11장 31절은 그녀가 믿음의 여인이었음을 지적한다. 그녀는 저주받은 여리고 성에 살았는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모든 원수들을 심판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녀는 하나님께 대하여 자세히 전해 들은 그 보고를 믿었는데(수 2:10-11), 이는 “믿음이 들음에서 나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또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는데에도 유의하자(수 2:9/수 2:21).
라합은 두 정탐군이 그녀의 집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고 있는 신자였음을 명심하라! 그녀는 두 정탐군을 받아 들이고 보호한 행위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입증하였다. 그녀는 이스라엘과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생명의 위협을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행위로 입증된 믿음 때문에 여리고의 심판과 불로부터 구원을 받았다.
24절은 전체의 문제를 요약한다. 행함으로 이끌지 않는 믿음은 구원하는 믿음이 아니다. 비통한 일이지만, 이런 “죽은 믿음“을 가지고 입술로만 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 즉, 교회 회원들이 너무도 많이 있다. 이들은 그들의 입술로는 고백하지만(14절) 생활로는 고백한 것을 부인한다. 이것은 바울이 디도에게 편지를 쓸 때 설명한 것과 똑같은 진리이다.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딛 1:16).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들이다“(딛 2:14). 이것이 바로 “너희가 믿음이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후 13:5)고 바울이 경고하는 이유이다.
이 말은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결코 죄를 짓지 않는다거나, 하나님께 순종함에 있어서 실패하는 일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요일 1:5-10). 이것은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생활에서 습관적으로는 죄짓지 않는다는 뜻이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열매를 맺으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한에서 행보한다.
이 전반의 문제가 에베소서 2장 8-10절에 요약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구원-“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구원을 얻었나니...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하신 일:성화-“우리가 그의 만드신 바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하시는 일:봉사-“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 혀-야고보서 3장
그리스도인의 성숙은 고난에 대한 태도(1장)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써(2장) 말할 수 있다. 이제 야고보는 그리스도인의 언어가 그의 성숙성에 대한 또다른 시험이라고 말해 준다. 우리는 매일 너무도 많이 보고 듣고 하여, 말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를 잊고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언어의 기능을 주셨을 때, 이는 건설을 위한 도구를 준 것이기도 하고 파괴를 위한 무기를 준 것이기도 하다.
1. 권면(3:1-2)
이 교회들에서는 가르치는 문제로 맞서 있었던 것이 분명한데, 야고보가 “너희는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가르치는 자들은 듣는 자들보다도 더 엄격한 심판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미숙한 그리스도인들이 채 준비도 되기 전에 선생이 되려 하는 것은 슬픈 일이다. 이들은 복된 큰 지위를 얻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하나님께 보다 준엄한 심판을 요청하고 있기 때문이다.
야고보는 우리 모두가 다방면에서, 특히 우리가 말하는 데서 걸려 넘어진다는 점에 동의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사실상 자기의 혀를 조종할수 있는 사람은 자신의 온몸을 어거한 자로 입증하는 셈이다! 1장 26절을 다시 읽고, 성구사전을 사용하여 잠언에 나와 있는 혀에 대한 많은 관련 구절들을 살펴보라. 베드로는 이 진리의 좋은 사례이다. 복음서에서 우리는 그가 성숙하지 못한 육적인 제자였던 동안에 자기의 혀나 몸을 관할하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오순절 이후에 그가 받은 영적인 훈련은 잘 조절되는 언어구사로 나타나게 되었다."
2. 예증(3:3-13)
야고보는 혀의 위력에 대한 예를들기 위해 세 쌍의 비유를 사용한다.
방향을 결정하는 힘:재갈과 키(3-4절)-4절에 있는 “키“는 물에서 방향을 잡는 배의 기구이다. 우리는 말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때가 흔하지만, 그릇된 말은 듣는 이를 그릇된 길도 인도할 수가 있다. 게으른 말, 의심스러운 이야기, 반만 진실인 것, 또는 의도적인 거짓말은 삶의 경로를 변경시킬수 있으며 파멸로 이끌어 갈 수 있다.다른 한편, 성령으로 말미암은 바른 말은 한 영혼을 죄에서 벗어나 구원으로 향하게 할 수 있다. 말(馬)에게는 마부가 필요하며 키는 키잡이를 필요로 하듯, 우리의 혀에는 우리를 다스릴 주님이 필요하다!
파괴하는 힘: 불과 짐승(5-8절)-물건의 크기가 그 가치나 그 위력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혀는 몸에서 작은 지체이지만 큰 파멸을 불러올 수 있다! 혀는 자랑하기를 얼마나 좋아하는가! 혀가 말하는 바가 마음에서 나는 것임은 물론이다(마 12:34-35). “작은 불이 거대한 숲을 태우고 만다!“ 해마다 수많은 목재들이 부주의한 캠프자들과 흡연자들로 인해 유실된다. 작은 불꽃이 온 숲을 불로 휩싸이게 할 수 있다.
혀는 불꽃과 같다. 거짓말과 잡담과 미워하는 말들로 인해 온 가족이나 교회가 흥분될 수 있는 것이다(잠 16:27). 불에서 생긴 “검댕“으로 연루된 모든 사람을 더럽힐 수 있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했을 때 그리스도인들로 증거케 할 능력을 주는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지옥불을 붙이는“ 그런 것이 될 수도 있다.
야고보는 혀를 길들일 수 없는 사납고 유해한 짐승에 비유한다. 혀를 길들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하나님만이 그의 영을 통하여 혀를 어거하실 수 있다. 혀는 침착하지 못하고 제멋대로 군다. 이것이 얼마나 독을 퍼뜨리는지 알 수 없다! 신령한 혀는 양약 같아서(잠 12:18) 상하게 하지 않고 낫게 해줄 것이다.
기쁘게 하는 힘:샘과 나무(9-12절)-한 샘이 신선한 물과 소금물을 동시에 낼 수 없으며, 한 혀가 축복과 저주를 동시에 말할 수도 없다. 우리는 기도와 찬양을 통하여 “하나님께 축복을 돌리면서“ 또한 분노와 인내하지 못하는 것으로 “사람들을 저주하는“ 때가 얼마나 흔한가!(잠 18:4 참조)
그리스도인들은 그 혀를 통하여 말씀의 “생수“가 흘러가도록 하게 할 필요가 있다. 혀가 일관성이 없을 때는 마음에 무슨 잘못이 있는 것임과 마찬가지로 한 나무가 두 종류의 열매를 맺을 수는 없다(잠 13:2/잠 18:20-21 참조). “입술의 열매“(히 13:15)는 반드시 신령한 것이어야 한다.
이제 여섯 가지 비유를 살피고 난 신자는 사단이 그의 혀를 주장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 분명하다. 그릇된 시간의 그릇된 말은 마음을 상하게 할 수도 있고 사람을 타락시킬 수도 있다. 시편 141편 1-4절은 우리의 매일의 기도가 되어야 한다."
3. 적용(3:13-18)
야고보서의 핵심 주제들 가운데 하나는 지켜 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인도를 받는 실천적인 생활이다(1:5 참조). 그리스도인들이 개인적으로나 또는 교회에서 그들의 문제들을 처리하는 데에 있어 이러한 실제적인 지혜가 결핍되어 있다는 것은 비극이다.
“신령하다“는 것을 비실용적이라는 뜻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이는 진리에서 거리가 먼 말이다. 성령께서 우리를 이끄실 때 그는 우리의 마음을 사용하시며,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빛으로 사실을 보며 문제의 중요성을 따지게 되기를 기대하신다. 야고보는 여기서 두 종류의 지혜가 있음과 신자가 이를 분별해야 함을 시사한다. 믿는 자의 혀는 위로부터 난 참 지혜로 채워지거나 아니면 아래로부터 난 거짓 지혜로 채워질 수 있다.
거짓 지혜(14-17절)-마음에 씁쓸함과 질투심이 생길 때 이것은 혀로 표현될 수 있다. 이것은 그 사람의 가르침이 얼마나 신령한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다. 만일 그의 혀가 사랑하는 마음에서 난 성령의 통제를 받고 있지 않다면 거짓 지혜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거짓 지혜를 믿으며 심지어는 그것을 자랑하기까지 한다면 이는 얼마나 비극적인 일인가! 이들은 그 지혜가 성경과 모순되는 것을 알며,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에 위배되는 거짓말조차도 한다!
거짓 지혜는 세상에(지상적), 육신에(감각적), 마귀에게(마귀적) 속한 것으로 이 셋은 믿는 자의 큰 적들이다. 한 교회나 한 가족이 거짓 지혜를 따를 때에는 반드시 시기와 분열과 혼란이 일어난다. 슬픈 일이기는 하지만 이것이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 사역자들이 처해 있는 상황이다. 성령과 말씀에 겸손히 의존하는 대신 이들은 아이디어를 얻기 위하여 세상을 바라 보며, 힘을 얻기 위해 육신을 바라봄으로써 마귀의 수중에서 놀아나게 된다.
참 지혜(17-18절)-진실로 현명한 사람은 스스로 현명하다고 선전하는 법이 없다. 그의 일상생활(좋은 대화나 행동)과 태도(온유함) 등을 보면 알 수가 있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지만(고전 8:1), 신령한 지혜는 그를 겸손하게 하며 오만해지지 않도록 지켜 준다. 거짓 지혜가 세상과 육신과 마귀에게 그 근본을 두고 있는 반면, 참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다“(1:17 참조).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성령으로 말미암아 오는 것으로, 인간의 정신에서 창출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참 지혜는 성결하므로 하나님의 말씀에는 오류가 없다. 그것은 화평하다. 그래서 그것은 화평과 화합으로 이끌어가며, 결코 불화로 이끌어 가는 법이 없다(4:1-10 참조). 화평과 화합을 얻으려는 인간의 방법은 성결함을 희생해야만 했다. 사람은 성결함보다 평화를 앞에 둔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순전한 말씀에 엎드리기만 하면 거기에는 언제나 화평이 깃들 것이다.
위로부터 난 지혜는 또한 관용적이다. 이것은 인내와 삼가하는 것을 뜻한다.육신이 혀를 조절할 때에는 절제나, 또는 다른 이의 말에 경청하려는 뜻이 없어 말이 홍수처럼 넘치게 된다. 잠언 29장 11절은 “어리석은 자는 그 노를 다 드러내어....“라고 말하고 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인내로써 관용하며 설득하는 방법을 사용하지만 위협하거나 고발하지 않는다.
“양순하며“는 의지를 양도한다거나 또는 온당한 것에 기꺼워한다는 것을 뜻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판단하거나 정죄하는 데 빠르지 않고, 긍휼로 가득차며 그의 생활에는 선한 열매들이 가득하다. 그는 요동함(편파적임, 1:6/2:4)이 없다. 비록 양도하기는 기꺼이 하지만 진리에 대해 타협하는 데는 기꺼워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참 지혜는 위선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가 하는 말은 진실하며 참된 동기로 뒷받침된다. 18절은 혀의 또다른 비유를 첨부하는데, 혀는 자라서 열매를 맺게 되는 씨를 심는다. 만일 혀가 하나님의 조절을 받는다면 의와 화평의 열매를 맺을 것이다."
▣ 세상적인 것들-야고보서 4장
본 장은 신자들 사이에 육적인 분열과 논쟁이 있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한가지 원인은 많은 사람들이 선생이 되려고 이기적인 욕심을 부린 것이다(3:1). 그러나, 그 근본적인 원인은 영적인 것이었다. 사람들의 생활에는 진정한 성별됨이 결여되어 있다. 형제들이 연합하는 대신 불화하여 동거하는 것은 비극이다(시 133편)!
1. 우리가 직면해야 하는 원수들(4:1-7)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세상, 육신, 마귀와 싸우고 있음을 3장 15절에서 살펴보았다. 에베소서 2장 1-3절도 이와 똑같은 내용을 열거하고 있는데,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생활이 묘사되어 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세상과 육신을 위하여 살며 마귀에 의해 지배를 받는다. 사람이 구원을 받으면 그는 성령을 받게 되어 새로운 본성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이러한 대적들과 싸워야 한다.
육신(1-3절)-“정욕“이란 단어는 감각적인 열정만을 의미한다고 볼 수는 없다. 그것은 전적으로 욕심을 뜻한다. 이러한 욕심들은 몸의 지체를 통하여 일하며 육신을 자극시켜 문제를 일으킨다. 몸 자체가 죄악된 것이 아님을 명심하라. 몸을 지배하는 타락한 본성이 죄악된 것이다.
육신이란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인간의 본성이며, 이것은 마치 세상이 하나님으로부터 소원한 인간 사회인 것과 같다. 이것이 바로 로마서 6장이 우리 몸의 지체를 성령께 굴복시키라고 권면하는 이유이다(롬 8장/ 갈 5장 참조). 1장 5절에서는 우리의 욕심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를 보라.
2절에서 야고보는 그들의 죄악된 행위들을 묘사하고 있는데, 그들은 욕심을 내며, 얻기 위하여 죽이며(갈 5:15), 그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이들은 기도했을 때에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즐거움을 더하려고 이기적으로 구했다. 육신은 사람을 기도하도록 격려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람이 내적으로 자신과 싸울 때는 외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화평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음은 물론이다.
세상(4-5절)-그리스도와 결혼하고서도(롬 7:4) 여전히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고후 11:2-3) 영적인 간음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를 “간음“이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우상이 그들의 헌신을 하나님에게서 빼앗아 갔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불러냄을 받았다면 어떻게 세상과 벗될 수 있겠는가?(요 15:18-19)
우리는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혔으며 세상은 우리들에 대해 그러하다(갈 6:14). 신자들이 세상과 가지는 관계에는 네 가지의 위험한 단계들이 있다. 즉, 벗됨(약 4:4)과 사랑(요일 2:15-17), 본받음(롬 12:1-2)과 세상으로 판단받음(고전 11:32)이다. 이러한 예가 롯의 경우이다(창 13:10-13 / 19장 참조).
믿는 자가 세상과 벗이 되면 하나님과는 원수가 된다. 그는 우리 안에 내주하시며 우리의 사랑과 충성을 시기하기까지 사모하시는 성령을 근심케 하는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속에서, 세상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 방식을 보기란 슬픈 일이다. 사실상, 그들이 구원을 받았는지 안받았는지를 말하기조차 어렵다!
마귀(6-7절)-그리스도인이 세상과 육신을 위하여 살 때 교만해지며, 마귀는 이 지점에서 역사하게 된다. 그것은 교만이 마귀의 가장 좋은 무기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보다 많은 은혜를 주고자 하신다. 그것은 사단이 줄 수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사단을 대적하는 데에 말씀을 사용해야만 하며(눅 4:1-13), 성령께서는 이렇게 대적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를 회개하고 자신을 낮추기를 거절하는 교만한 사람을 도우실 수가 없다. 은혜는 높은 자들을 위하여 있지 않고 낮은 자들을 위하여 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 순복해야 하며, 그리고는 마귀에게 효과적으로 대적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원수들 중의 어떤 하나라도 진행하고 있는지를 알기 위하여 그리스도인이 자기의 마음을 검토해 보는 것은 중요하다."
2. 우리가 간직해야 하는 권면들(4:8-17)
그는 이제 세 가지 중요한 경고들로 전환하여 이 그리스도인들에게 회개할 것을 촉구한다. 교회에서 각 사람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지 않으면 화평이란 있을 수 없다.
교만에 대한 경고(8-10절)-전쟁과 싸움이 있는 곳에는 어디나 교만이 있기 마련이다. 때문에,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은 화평의 씨앗을 뿌린다(3:13-18). 교만은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하며 우리의 마음과 손을 더럽힌다. 이것은 또다시 두 마음을 품는 죄가 되며, 근본적으로는 항복하지 않은 것이다.“마음을 성결케 하라“는 말은 세상을 사랑하거나 성령을 근심케 하지 않으며 정조를 지키는 충성된 마음을 가지라는 개념을 내포한다. 이러한 신자들은 웃음과 세상적 기쁨을 가지고 유쾌한 가운데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건전하고 진지하게 되어 그들의 삶에서 죄를 물리쳐야 할 필요가 있었다. 야고보는 그들이 스스로 낮추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높이실 것이라고 약속한다(마 23:12/눅 14:12/벧전 5:6/잠 29:23 참조).
비판에 대한 경고(11-12절)-사람이 세상적인 마음, 교만을 가질 때는 반드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데 빠른 법이다. 이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싸움도 그 기원을 여기에 두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판단하며 피차 비방하고 있었다. 여기서 다시 혀의 문제가 나온다!(1:19-20/1:26/3:5-6) 얼마나 많은 교회들이 증오하며 비판하는 혀로 인해 분열되고 수치를 당하였는지 알 수 없다!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분별력을 지녀야 한다고 가르친다(살전 5:21-22/요일 4:1-6). 그러나, 이 말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마음이나 동기를 판단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마태복음 7장 1-5절에서 예수님은 신자들이 먼저 자신의 죄들을 판단하기만 한다면 다른 사람들의 죄에 대해서 도움을 줄 권리를 가지게 된다고 가르치신다.
만일 내 눈에 들보를 가지고 있다면 다른 사람의 눈에 티끌이 들어 있다고 비판할 권리가 어디 있겠는가? 먼저 내 자신의 장애를 제거하기까지는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을 만큼 명확하게 볼 수가 없다! 사랑과 긍휼이 없이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판단하면 우리는 자신을 입법자로 세우는 것이 되지만, 하나님만이 유일한 입법자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화하여 가는 중에 있다! 만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사람들은 얼마나 잘 순종하는지를 보지 않고 법에 순종하는 데에 자신을 온전하게 바쳤다면 우리의 교회들은 화합과 화평을 소유하게 되었을 것이다. 야고보는 12절에서 판단할 권리를 가지신 유일한 분은 형벌을 내릴 권세도 가지신 분임을 암시하고 있는데, 하나님만이 이러한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
자기 신뢰에 대한 경고(13-17절)-교만, 비판, 자기 신뢰는 모두 함께 다닌다. 겸비한 사람은 범죄하는 형제를 위해 기도할 뿐만 아니라 그를 그리스도께로 돌이키려고 사랑하기까지 한다. 겸비한 사람은 매일 매일 계획을 짜면서 “주께서 허락하시면“이라고 말할 줄을 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신자들은 그들의 계획을 자랑으로 여기며 그들이 얼마나 성공적인가를 보이려고 애쓰고 있다. 이들은 큰 도시로 가서 사업을 일으켜서 부자가 되어 돌아올 작정이었다.
야고보는 이러한 육신적인 자랑과 자기 신뢰는 위험한 것이라고 경고한다. 우선 첫째로 그들은 내일 일도 알지 못하는 자들이다. 하나님만이 아실 뿐이다. 내일을 자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되겠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삶 자체는 확실하지가 않아서 떠도는 구름과 같다(욥 7:7/시 102:3). 우리는 생애가 언제 끝날른지도 모르는 것이다!
우리는 “주께서 허락하시면 살리라“고 말해야 한다. 모든 신자들은 인생이 짧다는 사실에서 눈을 떼지 말아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 90:12). 알지 못하는 미래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은 죄이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하거나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보지도 않은 채 계획을 세울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전혀 고려에 넣지도 않고 있다. 이들은 미래에 대해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세상의 죄인처럼 살고 있지만, 결국 그는 모든 것을 상실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눅 12:15-21).
17절은 본 장의 요약이 되기도 하며 고의적인 행위로도 범죄하지만 소홀히 함으로도 범죄할 수 있음을 지적한다. 우리가 행하는 것만이 죄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는 것도 죄가 된다. 옛 청교도들이 “범하는 죄“와 “행치 않는 죄“에 대하여 말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인생은 너무도 짧은 것이어서 낭비하도록 버려둘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그가 재림하시기 전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우리의 삶을 계산해야만 한다. 이제, 본 서신의 마지막 장에서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주제로 다루어진다."
▣ 마지막 때-야고보서 5장
본 마지막 장에는 몇 가지 잡다한 문제들이 있기는 하지만, 핵심 사상은 그리스도의 재림인 것 같다(7-9절).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진심으로, 고대할 때에는 그의 매일의 삶에서 그 증거들을 보게 될 것이다.
1. 부당한 때에 인내함(5:1-11)
그 당시는 부자와 가난한 자들 사이에 큰 격차가 있었음을 명심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바 “중류 계층“이 주류를 이루는 사회가 아니었다. 복음은 가난한 대중에게 호소한 듯하며, 몇몇 예외는 있었지만 부자들은 그리스도를 거절하였고 가난한 그리스도인들을 억압했던 것 같다.
부자들의 죄(1-6절)-야고보는 몇 가지 죄를 열거하면서 부자들이 앞으로 닥칠 심판을 위해 준비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첫째로, 그는 재물 쌓음을 지적하고(1-3절), 부자가 재물을 쌓는 것은 쇠잔해질 것을 위함일 뿐이라고 한다. 그들의 금과 은과 옷(마 6:19-20)은 단지 녹슬고 삼킨 바될 것이다. 그 부유함이 쇠잔해짐으로써 오늘날 자기 본위적인 부자들에게 증거가 되며, 심판날에 다시 그들에게 불리한 증거가 될 것이다. 이들이 재물을 쌓았지만 그들은 “마지막 때“임과 심판이 다가오고 있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야고보는 아마도 예루살렘의 멸망과 로마의 침략을 가리키고 있는 것 같다.
야고보가 열거하는 두번째 죄는 삯을 훔치고 있다는 것이다(4절). 왜냐하면 이러한 부자들은 가난한 자들의 정직한 삯을 보류해 두었기 때문이다(레 19:13). 이들은 사기수법으로 삯을 훔치고 있었으나, 그들의 죄가 그들을 들추어 낼 것이었다. “돈이 말해 준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경우에 있어서는, 훔친 삯이 공의 때문에 하나님께 소리질렀으며 또한 가난한 일꾼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만군의 주“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전투하시는 면“에서의 칭호이다(사 1:9/롬 3:29). 하나님은 자기 군대와 함께 오시어 이런 도적들을 심판하신다!
세번째로 언급된 죄는 낭비하는 생활이다(5절). 물론 하나님은 우리가 생활의 축복을 누리기를 원하신다(딤전 6:17).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궁핍한 자들에게서 훔치면서 낭비하고 사치스럽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이러한 사람들은 낭비스럽게 사치하고 제멋대로 소비하며 살고 있었다. 그들은 정당하지 못하게 돈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야고보는 이들을 단지 도살당하기 위해 살찌우고 있으면서도 무감각하게 한정없이 먹어 대는 가축에 비유하였다!
마지막의 죄는 부당함이다(6절). 부자들은 권력을 이용하여 가난한 자들을 능욕하고 죽이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은 대항하지 않았으며, 그들의 경우를 의로우신 재판장의 손에 맡겼다(롬 12:17-21).
가난한 자들의 인내(7-11절)-야고보는 그리스도의 강림에 대한 약속에서 선을 고정시키라고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한다. “인내“라는 말은 신자들이 게으르게 앉아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견디다, 즉 짐을 지며 주께서 오시기까지 전투를 한다는 개념을 수반한다. 야고보는 이런 인내의 교훈으로 경종을 울리는 몇 가지 예화를 사용한다.
● 농부(7-8절): 농부가 씨를 뿌리고 그 땅을 가꾸지만 즉시로 곡식을 거두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 땅에 비를 내려 물을 대시면 그 때에야 비로소 추수를 하게 되는 것이다(이른 비는 10-11월에, 늦은 비는 4-5월에 왔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인은 “낙심하지 말찌니 때가 되면 거두리라“는 것을 알고서 인내해야만 한다.
● 심판자(9절): 그들이 당한 시련들은 몇몇 그리스도인들을 분명히 비판적이 되게 했고, 교회 내에 원망하는 사람들이 있게 하였음에 분명하다. 야고보는 그들이 심판하지 말았어야 한다고 상기시킨다. 심판자이신 그리스도께서 문 밖에서 계신다! 주님은 호소하는 말을 듣고 속히 오셔서 일들을 바로 잡으실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서 투덜대며 원망하는 것은 심각한 죄이다.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께서 임하고 계시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면 우리는 원망이나 비판을 그처럼 많이 하지 않을 것이다.
● 선지자들(10-11절): 야고보는 죄인들의 수중에서 고난을 당했으나 그들의 문제를 하나님의 손에 맡겨 승리를 거둔 구약 신자들에 대해서 말한다. 욥은 그 전형적인 표본이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시련을 당하도록 허락하셨을 때, 비록 욥은 하나님이 행하고 계신 일을 이해하지 못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 심중에 놀라운 목적(목표)을 가지고 계셨다.
우리의 삶에 어떤 시련들이 닥치더라도 하나님은 사랑과 자비로 충만하시며 모든 것들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2. 말에 순전함(5:12)
야고보는 법적인 맹세는 금하지 않았는데, 이는 예수님이시라도 심문받으실 때 맹세하셨기 때문이다(마 26:63-64). 야고보는 모두가 정직한 말, 곧 맹세로 약속은 “뒷받침“할 필요가 없는 그런 말을 하라는 뜻이다. 부자들은 그들의약속들을 지키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개인적으로 손해가 나는 일이라 해도 자기의 말을 언제나 지켜야 한다."
3. 시련 중에 기도함(5:13-18)
성경의 그 어느 곳에서도 그리스도인이 안일한 생활을 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은 없다. 다만 성경은 시련이 올 때에 어떻게 하라는 말을 해준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을 당하는데, 즉 하나님이 특별히 계획하신 시련을 통과할 것이다. 그들은 어떻게 행해야 할 것인가? 기도하라! 야고보는 하나님께서 그 고난을 옮기실 것이라고 약속하지는 않으나 그 시련을 견디는 데에 필요한 은혜를 주실 것이라고 제시한다. 바울을 기억하라(고후 12장).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병이 들 것인데 15절에 나와 있는 바로는 이 병이 죄의 결과로 되어 있다(고전 11:30 참조). 이들은 어떻게 행해야 마땅한가? 교회의 지도자들을 불러 기도를 요청하라. 로마 카톨릭은 이 제안을 그들의 “종부성사“(일종시에 성유를 바름)의식으로 바꾸어 놓았다. 사람이 죽기 직전에 사제가 그에게 기름을 바르고 그를 위하여 기도를 한다. 이것은 그의 영혼이 영원에 임할 준비로 간주되는 것이다.
그러나, 야고보는 장로들이 그 사람의 몸을 치료하는 것으로 이 사역을 말하고 있다. 인간의 죄를 사하는 데에는 제사장과 관련될 일이 아무것도 없다. 더우기, “기름을 바르다“는 단어는 “안마“(massage)를 나타내는 일반적인 말로서, 마가복음 16장 1절에서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장사하기 위해 준비하는 데에서 사용되었다. 기름은 당시 보편적인 약품이었고, 의사들은 흔히 기름을 바르고 환자를 맛사지했다(눅 10:34). 우리는 전신을 문지르는 카톨릭사제를 본 적이 없다! 그렇다. 여기서의 모습은 성도들이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건강을 위하여 공급하신 수단들을 사용한다는 묘사이다.
야고보는 16절에서 교훈을 요약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범죄하였을 때 그들의 죄를 고백해야 했고 서로를 위하여 기도해야 했다. 다시 말해서, 여기서는 신자들이 그들의 죄를 사제에게 고백해야 한다는 경미한 암시조차도 나와 있지 않다(요일 1:9 참조).
야고보는 기도를 믿었다. 사실상, 전승에 의하면 그가 너무도 기도에 시간을 많이 보내어 그의 무릎은 딱딱해지고 못이 박혔다고 한다. 하나님은 기도를 통하여 효과적으로 역사하시지만, 그 기도는 깨끗하고 헌신된 마음으로부터 나와야만 한다. 야고보는 기도의 능력에 대한 모범으로서 엘리야를 든다(왕상 17장이하 참조).
“성정이 같은“이란 말은 “다른 사람들과 같은 본성을 지닌“이란 뜻이다(행 14:15 참조)엘리야가 위대한 기도의 사람이 된 것은 그의 타고난 은사가 아니라 그의 헌신과 믿음이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이 시간을 내어 기도하는 시간으로 삼기만 하면 그들을 위하여 오늘날도 경이로운 일들을 이루실 것이다.
4. 끈기있게 구령(救靈)함(5:19-20)
우리는 자기 자신의 시련에 둘러싸인 나머지 잃어버린 사람들과 곁길로 나간 형제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잊어 버릴 수가 있다. 이 구절들의 근본적인 의미는 성도들이 방황하는 형제들을 주께로 돌이키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회심하다“는 말은 “다시 되돌린다“는 뜻이다. 성도가 진리로부터 미혹되기란 참으로 쉬운 일이다.
불순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심각한 징계와 죽음을 맞기까지 할 위험에 처할수 있다(고전 11:30). 사랑으로 우리는 그를 위험에서 벗어나게 하여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도록 힘써야만 한다. 이렇게 할 때에 우리는 그를 죽음(하나님의 징계)에서 구하고 있는 것이며, 사랑으로 그의 죄가 가리워지는 것을 보는 것이다(벧전 4:8 참조).
그러나, 우리는 이 말을 또한 잃어버린 자들에게 적용시킬 수도 있다. 머지않은 장래에 임할 그리스도의 재림을 볼 때, 우리는 증거하는 일에 헌신해야 할 필요성이 얼마나 큰지를 느끼게 된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진실로 믿는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들을 구령하지 않을 수 없다."
'好學의 聖書槪論 > [신약성경개론] 개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베드로후서 - 개론 (0) | 2012.02.05 |
---|---|
[스크랩] 베드로전서 - 개론 (0) | 2012.02.05 |
[스크랩] 히브리서 - 개론 (0) | 2011.12.14 |
[스크랩] 빌레몬서 - 개론 (0) | 2011.12.14 |
[스크랩] 디도서 - 개론 (0) | 2011.12.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