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후서 - 개론
▣ 그리스도인과 성경-베드로후서 1장
베드로후서의 핵심 단어는 지식이며, 거짓 교훈의 위험에 대하여 쓰고 있다. 베드로전서에서 사단은 우는 사자로 나타났는데 그것은 성도들에게 곧 임할 불 같은 박해를 주제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드로후서에서 사단은 속이려 하는 뱀으로 나타난다(요 8:44-45). 교회 내부에서 일어나는 거짓 교훈은 외부로부터 오는 박해보다 훨씬 위험한 것이다(행 20:28-32).
박해는 언제나 교회를 정결케 하고 강하게 했다. 그런 반면에 거짓 교훈은 교회를 약화시키며 그 증거를 파괴한다. 거짓 교훈과 마귀의 거짓말에 대항하여 싸우기 위한 유일한 무기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따라서, 베드로가 지식을 강조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1. 지식의 은사(1:1-4)
구원은 믿음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자리에 이르는 인격적인 체험이다. 요한복음 17장 3절에서 구원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 정의하신 바를 살펴보라. 그리스도에 관하여 단순히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그를 인격적으로 알아야만 한다(빌 3:10). 우리가 그를 믿으면 그는 자기의 의를 우리에게 주시며(고후 5:21) “우리의 구원“이 되어 주신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의 말씀, 곧 하나님의 “보배로운 믿음“과 “보배로운 약속“을 주셔서 경건한 삶을 살게 하셨다. 이 말을 기록했을 때 베드로는 요한복음 6장 68절에 나오는 그의 고백을 생각했을 것이 분명하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우리는 성경에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생명과 경건함 모두를 갖게 된다. 사람의 저작물들이 성경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을지는 모르나, 사실상 성경만이 우리의 영혼에 생명을 부여할 수 있다.
4절에 나와 있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정의를 살펴보라. 그리스도인은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가족으로 태어났으므로 하나님의 성품을 지닌다. 외적으로 “그리스도처럼“ 살려고 애쓰나, 내적으로 이러한 신의 성품을 결여한 죄인들은 잃어버림을 당하며 속임을 당한다. 베드로후서 2장 20-22절과 비교해 보라. 거기에는 거짓 그리스도인에 대한 묘사가 나와 있다.-이들은 세상의 오염은 피하였으나 타락은 피하지 못하였다. 즉, 단지 외적으로만 씻기워졌을 뿐, 내적으로는 변화되지 않았다.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머리“로는 가지고 있으나 마음에서의 믿음은 없다.
-이들이 진실로 구원받은 것이 아닌 것은 그들이 잠시 후에 옛 생활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거짓 그리스도인들은 씻김받았던 “개“나 “돼지“와 같다. 이들은 결코 새로운 성품을 받아 양이 되지는 못한다."
2. 지식에서의 성장(1:5-11)
“이러므로(이외에)...“ 이는 구원 이외에 무엇이 더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가족으로 태어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신령한 것에서 또한 성장해야 한다. 그러려면 힘쓰거나 열심을 내야 한다. 게으르고 부주의한 그리스도인은 성장하지 못한다. 베드로는 신자의 생활에서 나타나게 되어 있는 신령한 특성들을 열거한다.
줄에다 구슬을 끼우는 식으로 이러한 미덕들을 “더해 가라“는 제안이 아니다. 그보다는 하나가 성장하여 다른 것이 되도록 우리를 돕는다는 뜻이다. 이것은 “미덕들의 꿰미“가 아니라 망원경의 부분들과 같은 것이다. 한 부분이 또다른 부분으로 인도해 가는 것이다.
우리는 믿음(구원하는 믿음)에 덕 또는 찬양을 공급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기 위하여 구원받았다. 우리의 믿음을 입증하는 유일한 방법은 덕을 끼치는 삶을 사는 것으로 가능하다. 우리는 덕에, 지식 또는 도덕적인 분별력을 공급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옳고 그른 것을 모른다는 사실은 참으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지식에 이어 절제 또는 자기 통제가 나온다. 자기 통제는 인내 또는 참음으로 이끌어 간다. 이것은 시련의 때에 그리스도인이 “지탱하는 능력“이 된다.
우리는 인내에 경건을 공급한다(3절). 이 단어는 “바른 예배“ 또는 헌신된 생활을 나타내는 하나님께 대한 의존성을 뜻한다. 형제 우애가 그 다음의 덕인데, 형제들에 대한 사랑을 뜻한다. 마지막 덕은 자비 또는 사랑이라고 베드로는 말한다.
그리스도인이 성장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사실을 알아차릴 수가 있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세 가지 특성이 있다.
-그는 게으른 자이다. 즉, 그리스도를 위하여 힘쓰지 않을 것이다.
-그는 열매가 없다. 즉,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지식은 그의 생활에서 열매를 맺지 못한다.-그는 소경이다. 영적인 통찰력이 없다. 그는 영적으로 근시안이며, 신령한 발전이 결여된 배후에는 보잘것 없는 기억력이 도사리고 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행하신 일을 잊는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러나, 베드로 자신도 잊었던 일이 있었다. “베드로는 주의 말씀이 생각나서...“(눅 22:61).
따라서, 그는 “더욱 힘쓰라“고 두번째로 말한다. 당신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그리스도인은 스스로 구원하거나 그 구원을 스스로 지킬 수가 없다. 그러나, 참된 신자의 표지를 소유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것은 자신의 책임이다(살전 1:4-5). 이러한 사실이 그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넉넉히 들어가게 하시리라“는 확신을 갖게 할 것이다. 이것은 “불 가운데서“(고전 3:15) 구원을 받기보다 훨씬 나은 것이다."
3. 지식의 근저(1:12-21)
“하지만 이것이 참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베드로는 변화산 상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가졌던 그의 경험을 언급함으로써 답한다(마 17:1-13/눅 9:27-36). 베드로는 그가 몸(장막)에 더이상 오래 머물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요 21:18 참조).
“벗어나다“라는 말은 실제로는 “탈출“이란 뜻이다. 누가복음 9장 31절에서는 이와 동일한 단어가 “별세“라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그리스도인이 죽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이 세상에서 다음 세상으로 들어가는 승리의 탈출인 것이다.
복음의 멧세지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 만든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다. 복음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지냄과 부활의 진리에 근거한 것이다. 베드로는 여기서 영광 중에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것을 가리키고 있으며, 산상 변화는 이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사건이다. 그 산에서 그리스도는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셨으며, 그가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그 영광을 나타내실 것이다. 모세와 엘리야가 거기 있었는데, 이들은 죽은 신자들(모세)과 죽지 않고 데려감을 받은 사람들(엘리야)을 대표한다. 그리고 제자들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그의 영광을 볼 믿는 유대인을 대표한다.
베드로의 사역이 일차적으로는 이스라엘에 대한 것이었던(갈 2:7-8) 반면, 바울의 사역은 이방인에 대한 것이었음을 명심하자. “지상에 설립된 영광스런 왕국에 대해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어떤 약속들이 있는가?“라는 질문이 일어났었다. 베드로는 이 질문에 대하여 예언의 말씀을 버려지지 않았으며 도리어 보다 확실하게 되었다고 대답한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변형은 왕국이 임할 것이라고 확신케 하는 것이 되며, 또한 그의 변형으로 말미암아 입증되었던 확실한 예언의 말씀을 우리는 소유하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구약 예언을 “영해“하거나 이 예언들을 교회에 적용시켜서는 안 된다. 신약 말씀처럼 문자 그대로 그것들을 받아 들여야 하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어느 날 이 예언들을 성취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예언의 말씀을 어두운(더러운)데 비취는 빛에 비유한다. 그에게 있어서 세상이란 어둡고 음침한 지하 감옥이며,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지는 유일한 빛이다! 우리는 인간의 사상이 아니라 이 말씀을 간직해야 한다. 머지않은 어느 날 샛별이신 그리스도께서 떠올라 자기 백성을 집으로 데려가실 것이다. 교회에게는 그리스도가 동트기 직전 가장 깜깜될 때에 나타난 샛별이 되시며, 이스라엘에게는 의로운 해로서 심판과 치료를 가져 오시는 그런 분이시다(말 4장).
로마 카톨릭은 20-21절을 남용해 왔다. 이 구절들은 그리스도인이 성경을 읽거나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말씀은 읽혀져서 순종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건네 주도록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사사로이“는 “단독으로“라는 뜻이다. 성경은 “단독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즉, 하나님의 여타의 말씀과 상관없이, 그리고 처음에 그 말씀을 주신 성령님과 상관없이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예언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므로 자연인의 생각으로는 해석되어 질 수가 없다. 성령께서 말씀을 주셨으니 그가 우리에게 말씀을 가르쳐야만 한다(고전 2:9-16/요 14:26/요 16:13-14).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성경이 확실함을 감사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성경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성경을 신뢰할 수 있는 것이다."
▣ 거짓 교훈들에 대한 경고 - 베드로후서 2장
본 장은 복잡한 장으로서 유다서와 비교될 만한데, 똑같은 구절들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 거짓 교훈의 위험은 너무도 큰 것이어서, 성령께서는 우리를 경고하시기 위하여 베드로와 유다를 사용하셨다!
거짓 선생은 몰라서 거짓 교리를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사도행전 18장 24-28절에서 우리는 아볼로가 모르고 거짓 교리(요한의 세례(침례)를 가르쳤던 것을 보는데, 그는 거짓 선생은 아니었다. 수 세기 전 교회의 위대한 지도자들 중에서도 우리가 성경적인 것이 아니라고 믿는 교리들을 주장한 사람들이 많았다(교회와 국가의 결합 등).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거짓 선생들이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거짓 선생은 진리를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거짓말을 가르치며 그의 동료들로부터 재정적인 이득을 얻으려 하여 자신을 선전하는 자들이며(2:3/2:14), 그는 마음대로 범죄하며 살 수 있는 자들이다(2:10/2:13-14/2:18-19). 속임수를 쓰며(2:1/2:3), 자기의 공상들을 짜맞추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킨다.
1. 그들의 정죄(2:1-9)
베드로는 거짓 선생들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에 의해 심판을 받아 결박될 것이라는 점을 단언함으로써 이 부분을 시작한다. 1절은 거짓 선생들의 방법을 완전히 요약하고 있다.
-이들은 교회의 회원들로서 사람들 중에 나타난다.
-이들은 위선의 탈을 쓰고 은밀히 역사한다.
-이들은 참된 교훈과 나란히 거짓 교훈을 들여오며 나중에는 자기들의 말로 대신한다
-그들의 삶은 자기들이 입으로 가르친 바대로 살지 않는다.
다른 말로 해서, “이단“은 그저 거짓 교훈일 뿐만 아니라 거짓 교훈에 기초한 거짓 생활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을 “양의 옷을 입은 이리들“이라고 표현하신다(마 7:15/고후 11:13/고후 4:1-2). 불행히도 거짓된 길은 참된 길보다 더욱 인기가 있다(2절).
그런데 예수님은 또한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진다고도 하셨다(마 13:33). 사람들은 거짓 선생들을 선택하여 따를 것인데 그것은 거짓 선생들이 자신들을그리스도보다 더 높이기 때문이며, 또한 사람들이 인기 있는 성공한 사람들을 숭배하려 하기 때문에 그렇다. 거짓된 길은 신앙 생활하는 중에서도 죄 가운데 빠져 살게 하기가 십상이다!
2장 3절에 나오는 “지은 말“이란 “흉내내는 말“ 혹은 “만들어낸, 짜 맞춘 말“이란 뜻이다. 헬라어로는 “플라스토스“인데, 여기서 영어의 “플라스틱“(pl-astic)이라는 말이 파생되었다. 베드로는 거짓 선생들이 성경에 있는 성령께서 주신 말씀을 떠나(고전 2:9-16), 그들의 이론에 적합하도록 그들 자신의 말들을 만들어 낸다고 한다. 또는 오늘날 복음주의자인 것처럼 위장하는 “신정통주의자“들과 같이 우리가 사용하는 성경 말씀들을 사용하여 새로운 의미들을 만들어 낸다. 이들은 우리의 어휘들을 사용하지만 우리가 사용하는 사전은 사용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하는 말이 아니라 그 의미이다.
창세기 6장에 죄를 범하여 지금은 타르타루스(깊은 구렁)에 갇혀 있는 천사들(4절에서는 지옥으로 번역되었지만, 지옥에 가 있는 자는 아직 아무도 없다)과 홍수 이전의 세계,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를 인용한다. 이러한 경우들에 연루된 사람들은 종교의 형태는 가졌지만 활력을 불어넣는 참된 믿음은 갖지 못했다(딤후 3:5).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시기 앞서 세상에는 굉장히 많은 “종교“가 있게 될 것이지만 주님을 믿는 참된 믿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또한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의 가족, 롯과 같이 그의 참된 성도들을 보존하시고 구원하실 수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노아는 환란을 통과하여 보존을 받게 될 믿는 유대인들의 표상이며, 롯은 멸망이 임하기 전에 “데려감을 받을“ 교회의 성도들을 표상한다. 이 거짓 선생들은 성공한 것처럼, 그리고 안전한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어느날 하나님은 그들을 멸하실 것이다!"
2. 그들의 특성(2:10-16)
교만(10-11절)-이들은 어떤 종류의 지배나 통치라도 경멸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정부, 여자에 대한 남자의 머리됨, 자녀들에 대한 부모의 머리됨, 목회자의 지도력 등 이 세상에 “통치권“을 세우셨다. 그러나 거짓 선생들은 그들 자신의 길로 “달리고“ 싶어한다. 천사들조차 하나님께서 주신 권위들을 경멸하지는 않는다(유 1:8-9).
무지함(12절)-오늘날 거짓 선생들이 성경의 가르침에 대해 의도적으로 얼마나 어두운 체하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다(벧후 3:5). 그러나, 이들은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무지한 자들이여!“ 또는 “구시대인이여!“라고 한다.탐욕(13-14절)-그릇된 교훈과 그릇된 삶은 잘 조화된다. 이 사람들은 사치스럽게 살았고 굳세지 못한 사람들을 그들의 가르침으로 “유혹하였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주님을 발견하도록 도우면서도 자신은 죄 가운데 살았던 “종교적인 지도자들“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이름이 수치를 당해 왔던 것은(2절) 비극이 아닐 수 없다.
탐심-그 어느 때보다도 오늘날 종교적인 “돈벌이“가 성행하고 있다. 3절은 그런 선생들이 사람들을 상품화하기 위하여 그럴 듯한 말을 사용한다고 지적한다. 18절은 그들이 “허탄한 자랑의 말“을 사용한다고 말한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종교적인 수다장이들이 사실은 그들의 주머니를 터는 소매치기인 것을 깨닫지 못하고 그들을 따르기를 기뻐하는 견고하지 못한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베드로는 한 예로서 발람의 경우를 든다(민 22-25장). 그는 자기의 은사를 돈을 버는 데에 사용했고 이스라엘을 죄 가운데로 인도했던 하나님의 선지자였다."
3. 그들의 주장들(2:17-22)
이들은 그 추종자들에게 만족을 주겠다고 약속하지만 그들의 영적인 갈증을 해소시키지는 못한다. 물 없는 우물보다 더 쓸데 없는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허탄한 자랑의 말(종교적인 선전)을 하는 이 선생들은 겉으로 보아서는 진실한것 같고 도움을 줄 것 같지만 바람에 떠도는 구름, 곧 아름답긴 하지만 목마른 사람에게 어떠한 도움도 주지 못하는 구름으로 드러나게 된다. 오늘날 수 백만의 사람들이, 도움을 주겠다고 약속은 하나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 그런 거짓 종교들을 따르고 있다.
이들은 자유를 약속하지만, 사람들을 속박으로 인도해 간다. 베드로는 여기서 약간 빈정거리는 수법을 사용한다. 자신들이 죄의 노예들이면서 어떻게 그 누구를 자유롭게 할 수가 있는가! 12절에서 그는 이러한 사람들을 “이성없는 짐승“이라고 불렀고, 이제 그들을 개, 돼지들로 칭한다!
베드로가 “구원을 잃은“ 어떤 사람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님을 명심하라. 만일 그가 그런 뜻으로 말한 것이라면 그가 베드로전서 1장 3-5절에 쓴 것과 모순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베드로전서 2장 25절에서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양으로 비유하지 개나 돼지들로 비유하지는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성품을 받았으며(벧후 1:4) 세상의 부패와는 무관하게 되었다. 양이 토한다거나 더럽혀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은 양이 깨끗한 동물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베드로는 거짓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묘사하기를, 그들이 외적으로는 불결한 것을 씻어냈으나(종교적인 개혁) 내적으로는 새로운 성품을 받지 못한 자들이라고 하고 있다. 사실상, 개나 돼지를 씻을 수는 있어도 그 본성을 바꿀 수는 없다. 이 사람들은 의의 길을 알며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는 있었으나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영접하지는 못하였다.
이들은 외적인 불결함은 씻어냈으나 내적인 부패는 여전히 지니고 있었다. “신앙을 고백한 사람들이기는 하나 신앙을 소유한 사람들이 아닌“ 이런 자들은 구원을 경험한 것 같았지만 때가 되면 그들의 본성에 맞는 생활로 되돌아가 표류하였다. 개는 토한 것을 도로 먹으며 돼지는 다시 진창으로 돌아가야만 한다(잠 26:11 참조).
우리는 거짓 선생들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 대신에 자신을 높이며 흉내내는 말과 “허탄한 자랑의 말“을 함과, 돈버는 것을 강조하고,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과대한 주장들을 하며, 그리고 정욕과 죄가 감추어진 삶을 사는 것으로 그들을 간파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성실하게 가르치는 길 외에는 달리 이들과 싸울 수가 없다. 그러나, 어느 날 하나님께서 그들을 밝히 드러낼 것이며 심판하실 것이다."
▣ 주의 날-베드로후서 3장
본 장에서 베드로는 어린 양들과 양떼를 돌보는 사랑의 목자로 나타난다. 그가 “사랑하는 자들아“란 말을 네 번이나 사용하기 때문이다. 이 말이 나올 때마다 엄숙한 권고의 말이 나온다.
1. 사랑하는 자들아... 기억하라(3:1-7)
본 서신에서는 “생각하게 함“이란 단어가 핵심 단어였다(1:12-15). 베드로 자신은 잊어버리는 죄를 범했었기 때문에(눅 22:61), 하나님의 말씀을 잊지말라고 독자들에게 경고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그들이 “진실한“ 마음을 갖게 되기를 원하였다. 즉, 2장에서 말하고 있는 거짓 교훈들과 섞이지 않은 마음을 원하였다. 그는 구약의 예언자들과 신약의 사도들을 지적하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 전체를 뜻하는 것이다(1:19-21).
베드로가 변호하고 있는 교리는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돌아오셔서 그의 왕국을 세우시며 1,000년이 차면 새 하늘과 새 땅을 맞아들이신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교회의 휴거, 즉 그리스도께서 공중에 은밀하게 돌아오시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살전 4:13-18).
물론 세상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비웃을 것이며(유 18절), 모든 역사가 그 방향으로 움직여가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한다. 오늘날의 지도자들에게서 우리가 듣는 말은 “만사가 있는 그대로 계속된다! 하나님은 역사를 단절시키고 시간의 과정에 개입하시지는 않으실 것이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하나님이 분명히 역사를 끊고 인간들을 심판하실 것임을 증명하기 위하여 구약의 예들을 인용한다. 그는 창세기 1장 1절을 인용하여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한 데에서부터 시작한다(5절). 그리고서 그는 창세기 1장 2절의 세상을 소개하는데, 이 세상이 하나님께 심판을 받았다는 것이다(6절).
이를 창세기 6장의 홍수 사건이라고는 볼 수 없다. 왜냐하면 홍수는 사람들을 멸망시켰지 땅을 멸망시킨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것을 창세기 1장 1절과 2절 사이에 있는 사단의 심판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7절은 세상이 이제 “불을 저장하고“ 있어 심판을 위한 준비가 이미 끝났음을 시사한다! 현대원자론이 가르치는 것을 보라 ! 만약 6절을 홍수와 연관지어 버리면 “인간이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음을 확실히 알고 있는데 하나님은 죄를 심판하신다“는 것과 같은 주장을 하게 될 것이다."
2. 사랑하는 자들아... 잊지 말라(3:8-10)
사람들의 역사관은 날수나 햇수의 개념으로 보지만 하나님께 있어서 시간은 언제나 영원한 현재이다. 천 년이 그에게는 하루에 지나지 않는다(시 90:4). 그러나, 하나님은 느린(더딘)분이 아니시며, 적절한 때가 되면 행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왜 그의 심판, 곧 주의 두려운 날을 연기하고 계신가? 그것은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주의 날“은 대환란이라고 알려진 심판의 시기이며, 교회가 하늘로 올리워간 후 이 세상에 임할 것이다(계 3:10/살전 5:8-9). 밤에 도둑은 어떻게 오는가? 사람들이 전혀 생각지 않은 때 갑자기 온다(마 24:43/눅 12:39/살전 5:2/계 3:3/계 16:15).
사람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할 그 때에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 위에 임할 것이다(살전 5:3).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서 그를 데리러 공중에 임하실 때 미비된 상태로 있지는 않을 것이나, 세상은 그리스도의 진노가 부어질 때 방심한 채로 맞이하게 될 것이다."
3. 사랑하는 자들아... 힘쓰라(3:11-14)
이것은 베드로가 힘쓸 것에 대하여 세번째로 언급한 곳이다. “너희가 구원받은 바를 굳게 하라(1:12), 더욱 힘쓰라(1:5-), 예수님이 오실 때를 위하여 준비하기를 힘쓰라(3:14).“ 베드로는 요한이 요한일서 3장 1-3절에서 적고 있는 내용인 바, 그리스도의 재림이 경건한 삶을 살도록 크게 자극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모든 것이 불타버릴 것인데 왜 세상과 세상 것들을 위하여 사는 것인가? 이것은 롯이 소돔으로 옮겼을 때 범한 실수였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어떤 소망이나 평화를 찾지 않는다. 그는 현 세상이 더욱 나빠질 것과 마지막에는 심판을 받을 것임을 알고 있다. 그렇다. 그리스도인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어느 날 이 땅에 돌아오셔서 그의 원수들을 심판하시고, 1,000년간의 통치를 시작하실 것이며, 그렇게 한 후 약속된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룩하실 것이다(계 21:1-). 우리의 책임은 그분 안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2:13), 평강 가운데 세워지는 것이다."
4. 사랑하는 자들아 삼가라(3:15-18)
베드로는 하나님의 계획이 늦추어 지는 것처럼 보인다고 설명하면서 상세한 내용을 위하여 바울의 글을 참고하게 한다. 베드로가 바울의 편지들을 성경이라고 부르는 것에 주목하면 흥미롭다! 베드로는 왜 바울을 언급하는 것일까? 그것은 베드로의 사역이 일차적으로는 이스라엘을 향한 것이었고 이스라엘의 소망이 지상 왕국을 건설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바울의 사역은 이방인들과 교회를 위한 것이었으며, 이 시대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계시한 것은 바울로 말미암아 주어졌다.
세상은 2,000여 년 간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려 왔다. 그리스도는 왜 늦어지시는 것일까? 바울은 그의 편지에서 그 이유를, 외관상으로는 늦어지는 것 같지만 그 동안에 하나님은 그의 교회를 세우고 계신다고 밝힌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러한 일들이 노아의 때와 비슷하다고 말씀하셨듯이, 노아 이전의 상황과 비슷하다(벧전 3:20).
유감스럽게도 바울의 멧세지에서 이 세대를 위한 하나님의 프로그램을 보지못하는 사람들은 성경을 왜곡시켜 성경이 말하지 않는 바를 조작해 낸다. 예를들면, 로마 카톨릭은 바울의 것을 베드로에게 몰래 갖다 놓는다! 이들은 이스라엘부터 떨어져 나온 한 독립된 실재인 그리스도의 몸에 관한 교리를 거부하고서 로마 교회를 “하나님의 지상 왕국“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어떤 진실한 그리스도인들도 구약의 모든 예언들을 유대인들에게서 교회에로 옮겨 그리스도의 문자적 지상 통치에 관한 진리를 제거하고 있다. 물론 베드로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사람들을 곁길로 인도하여 결국 자신만이 아니라 그 추종자들까지 정죄에 이르게 하는 거짓 선생들에 관해 말하고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강림에 대하여 알며 거짓 교훈의 위험을 알아서 조심해야만 하며, 그렇지 않으면 말씀 안에 있는 우리의 굳건한 태도가 불법과 불순종으로 빠지게 될 것이다. 이 경고를 유다서 1장 24-25절에 나와 있는 놀라운 약속과 비교해 보라.
우리는 어떻게 해야 떨어지지 않을 것인가? 성장하는 것뿐이다! 어린아이들은 일어설 만큼 강하지 못하고 성숙해 있지도 않기 때문에 자꾸만 넘어진다. 말씀을 먹지 않아 주님 안에서 성장하지 않으려는 “어린 그리스도인들“은 흔들리기 쉽다. 이 악한 세상에서 그들은 말씀을 먹고 기도하며 영적 근육을 단련시킬 시간을 반드시 가져야 한다.
베드로전서의 주제는 은혜였고, 베드로후서의 주제는 지식이었다. 따라서, 베드로는 은혜와 지식에서 자라가라고 우리를 권면함으로써 이 두 책을 종합하고있다. 이것은 단순한 성경 지식만이 아니며, 성경을 통하여 얻는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인 것이다. 우리는 그를 더 잘 아는 자리에 이르러야만 한다(빌 3:10). 불행하게도 지식에서는 자라가면서도 결코 은혜 안에서 성장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즉, 성경 진리를 머리로는 익히면서도 생활에서 성경 진리를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다. 베드로는 균형잡힌 생활을 하라고 경고한다. 말씀을 배우며, 말씀대로 생활하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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