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히브리서 - 개론
히브리서 개요
▣ 주제:“우리가...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 6장 2절
신자는 자기가 소유한 것을 깨달을 때 영적 진보를 나타낼 것이다.
1. 우월한 인간-그리스도/1-6장
선지자들보다 우월함 /1장 1-3절
천사들보다 우월함 /1장 4절-2장 18절
(권면-말씀에서 떠나 표류함/ 2:1-4)
모세보다 우월함 /3장-4장 13절
(권면-말씀을 의심함 /3:7-4:13)
아론보다 우월함 /4장 14절-6장
(권면-말씀에 대해 무딤/ 5:11-6:20)
2. 우월한 제사장 직분-멜기세덱/7-10장
더 우월한 반차(순위)-아론이 아닌 멜기세덱 /7장
더 우월한 언약-옛것이 아닌 새것 /8장
더 우월한 성소-땅에 있는 것이 아닌 하늘에 있는 것/9장
더 우월한 제물-짐승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 10장
(권면-말씀을 업신여김/10:26-39)
3. 우월한 원리-믿음/11-13장
믿음의 본/11장
믿음의 인내/12장
(권면-말씀에 불순종함/ 12:14-19)
믿음의 증거들/13장"
▣ 히브리서 서론
히브리서는 성경을 연구하는 이들에게 몇 가지 흥미로운 문제들을 제시한다. 설교와 같이 시작해서 편지처럼 끝내는 책이며(13:22-25), 저자의 이름도 적혀 있지 않고 수신자도 명확하게 제시되어 있지 않다. 이 책에 나오는 몇몇 구절은 본래 권면과 격려를 위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을 당혹케하는 데에 사용되어 왔다. 히브리서를 하나의 분리된 책으로서가 아니라 성경전반의 조명 하에서 연구하는 것은 중요하다.
▣ 멧세지: 히브리서의 주된 멧세지는 6장 2절에 요약되어 있다. “우리가...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영적 성숙). 히브리서를 받아 본 사람들은 영적으로 성숙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5:11-14) 미숙한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셨으나 이들은 말씀에 성실하지 못했다. 이들은 말씀을 소홀히 하고 있었으며, 하나님의 축복으로부터 점점 떠나가고 있었다.
저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이 가진 “보다 나은“ 축복들을 보여 줌으로써 신령한 생활에서 전진해 나가도록 그들을 격려하는 데 힘쓴다. 그리스도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분“(완성자)이시다(12:2).
본 서는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삶을 유대교나 여타의 다른 종교 제도보다 더 우월한 것으로 보여 준다. 그리스도는 우월한 인간이시며(1-6장), 그의 제사장직은 아론의 것보다 우월하며(7-10장), 믿음의 원리 또한 율법의 원리보다 우월하다(11-13장).
▣ 저자: 이 책에는 저자의 이름이 나와 있지 않기 때문에 학자들은 여러 세기동안 저자에 관하여 논쟁을 벌여 왔다. 초기의 전통은 바울을 저자로 지목하는데, 다른 견해들은 아볼로, 누가, 복음 전도자 빌립, 마가, 심지어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까지도 제시했다.
저자가 분명히 유대인일 것은, 그가 자기 자신을 그의 유대인 독자들과 동일시한다는 데에 근거한다(1:2/2:1/2:3/3:1/4:1 등). 또한 그는 자신을 디모데와 동일시하고 있는데(13:23), 이것은 바울만이 할 수 있는 일임이 분명하며, 끝맺을 때의 은혜의 축복 기도는 바울 서신의 전형적인 특징이다(살후 3:17-18). 저자는 감옥에 있었다(10:34/13:19).
이 문제는 베드로후서 3장 15-18절에서 해결이 나는 것 같다. 거기서 베드로는 그의 편지를 받는 사람들, 즉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에게 바울도 역시 편지를 썼다고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벧전 1:1/벧후 3:1). 더우기 베드로는 바울의 편지를 성경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제, 바울이 널리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에게 영감된 편지를 셌는데 그 편지가 없어졌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감된 영원한 말씀의 일부가 파기되었다는 것인가? 이러한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성경에서 유대인들에게 보내졌고 저자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은 유일한 책은 히브리서이다.
결론을 내리자면, 바울이 히브리서를 쓴 것임이 분명하다. 문체와 어휘가 바울의 전형적인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저자가 독자의 필요에 따라 문체와 어휘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 “경고들“:베드로조차도 어떤 사람들이 히브리서를 가져다가 “알기 어려운 것“을 잘못 해석하며 스스로 멸망에 이르렀다고 우리에게 전해 준다(벧후 3:16). 이것은 그들이 성경을 왜곡시키거나 그 배경을 무시하고 그것을 곡해하기 때문에, 실제로 뜻하는 바가 아닌 것이 참인 것처럼 오용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의 빛 가운데서 히브리서를 해석하도록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섯 가지 권면들이(13:22 참조) 뒤에 요약되어 있다. 우리는 이 권면들이 신자들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저자가 자신을 수신자들과 동일시하고 있기 때문이다(“우리가 삼갈지니...“, “우리가 어찌 피하리요“,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등). 6장 4-5절이 구원받을 뻔했던 사람을 묘사한다고 하는 것은 성경을 오해하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와 영원한 안전성의 귀중한 교리를 심히 오해한 나머지,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죄를 범할 때에 그들도 역시 다루신다는 사실을 잊은 것이다.
히브리서에 대한 우리의 접근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태도로 인하여, 영적 미성숙의 육적 상태에로 되돌아가는 배교의 위험에 처해 있는 신자들에게 본서가 씌어졌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 되는 것은 하나님의 징계의 손을 부르는 것을 의미했으며,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그들의 상급을 잃는 것을 뜻했다(10:35-36/11:26). 히브리서는 신자들에게 그들의 죄가 그들을 정죄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지는 않다. 왜냐하면 참 그리스도인은 영구히 버림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 다섯 가지의 권면:신실하지 못할 때, 그 신자의 영적 생활이 어떻게 파멸되는지를 보여 주는 경고들에 나타난 영적 퇴보에 유의하자.
소홀히 함으로써 말씀에서 떠나 표류함(2:1-4).
마음이 강퍅하여 말씀을 의심함(3:7-4:13).
나태하여 말씀에 대해 무딤(5:11-6:20).
완고하여 말씀을 업신여김(10:26-39).
듣기를 거절함으로써 말씀에 불순종함(12:14-29).
각 경우마다 하나님의 백성이 영적으로 최선의 상태에 있지 않으면 그들을 징치하시는 것을 상기시키고 있음에 유의하자(2:2/3:15-19/6:8/10:27/12:25). 우리는 이러한 경고나 권면들이 신자들에게 적용되고, 또한 이 땅위에서의 하나님의 징계와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상을 잃게 되는 일들과 관계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구원을 잃을 수도 있다든지, 혹은 이러한 권면들이 인간의 영원한 구원과 어느 정도 관계가 있다고는 보지 않는다.
▣ 핵심 단어 :
히브리서에서의 핵심 단어는 “더욱, 더 좋은“(better- 1:4/6:9/7:7/7:19/7:22/8:6/9:23/10:34/11:16/11:35/11:40/12:24)과, 온전한(perfect- 2:10/5:9/5:14/6:2/7:11/7:19/11:28/11:5/10:1/10:14/11:40/12:2/12:23)이다."
▣ 하나님이 그의 아들로 말씀하심-히브리서 1장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것은 히브리서의 위대한 멧세지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따라서 그의 말씀에 어떻게 반응할지를 주의해야 한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 반응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은 살아계신 말씀이기 때문이다. 제 1장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선지자들과 천사들보다 우월한 분이심을 보게 되는데, 그들은 과거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한 이들이었다.
1. 선지자들보다 더 나은 분이신 그리스도(1:1-3)
그의 인격에 있어서-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나, 선지자들은 다만 종으로 부름받았던 인간일 뿐이었다. 그리스도는 온 세상을 지으셨으며(또는 “모든 세계를 조성하셨으며“), 온 세상을 붙드시는 분이시다. 그의 말씀은 능력이 있으시다! 그가 말씀하시자 온 세상이 있게 되었고, 이제는 그의 말씀이 세상을 다스리며 보존하신다.
그리스도는 또한 만물의 상속자이시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세상 죄를 담당하신 하나님의 제물이시다. 그는 십자가 상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속하셨다.“ 이제 그는 왕같은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 영광 중에 좌정해 계신다. 그의 사역이 완성되었으므로 그는 지금까지 좌정해 계시는 것이다.
그의 멧세지에 있어서-옛 시대에는 하나님의 계시가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주어졌다. 어떠한 선지자도 완전한 계시를 소유하지 못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입을 통해 하셨던 것처럼 이상과 꿈과 상징과 사건들을 통해 계시하셨다.
이 계시들 모두가 그리스도를 지목하였으며, 그리스도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최종적인 계시이다. 그리스도는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이시다! 구약의 모든 계시는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최종적인 계시로 점차 이끌어졌다. 오늘날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았다“고 자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속임수를 쓰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오늘날 계시를 주지 않으신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단번에 주어진 모든 계시로 비추어 주신다."
2. 천사보다 더 나은 분이신 그리스도(1:4-14)
유대인의 종교에 있어서 천사들은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신명기 33장 2절, 사도행전 7장 53절, 갈라디아서 3장 19절에 따르면, 율법은 천사들에 의해 주어진 것이다(「성도」=거룩한 이들, 천사들).
만일 유대인들이 천사들을 통해 주어진 율법에 관심을 기울였다면 천사들보다 더 위대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진 멧세지에 대해서는 보다 더 큰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저자는 천사들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를 보이기 위해 구약에서 일곱 군데를 인용하고 있다.
시편 2편 7절과 사무엘하 7장 14절 인용(4-5절)-만유의 후사이신 그리스도는 보다 큰 기업을 얻으시며, 따라서 보다 위대한 이름을 얻으신다. 시편 2편 7절에서 성부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내 아들“이라 부르시는데, 천사들에게는 이 칭호를 주신 일이 없으시다(구약에서 천사들이 집합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들“로 불리웠지만, 개별적으로는 그렇게 불리운 일이 없다).
이 진술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계된 말이지 그의 베들레헴 탄생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행 13:33 참조).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셨을 때는 한 번도 장사지낸 일이 없는 처녀 무덤에서 “낳은 바 되셨다“. 골로새서 1장18절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라고 지칭한다.
두번째 인용은 솔로몬을 언급한다. 사무엘하 7장 전체를 주의깊게 읽자. 왜냐하면 다윗의 “집“이란 말이 히브리서에 다시 나타나기 때문이다. 다윗은 하나님을 위하여 집을 건축하고자 하였으나 하나님은 솔로몬이 그 일을 할 것으로 작정하셨으며, 또한 친히 솔로몬의 아버지가 되실 것을 다윗에게 약속하셨다. 히브리서 1장 5절은 이 일을 “솔로몬보다 더 큰 이“이신 그리스도께 적용한다(마 12:42).
시편 97편 7절 인용(6절)-아마도 70인경이라고 불리우는 헬라어 역본으로는 신명기 32장 43절을 인용했을 것이다. 이 인용은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돌아오심을 가리키고 있다(“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 “). 천사들이 그리스도의 초림 때에 경배를 드렸던 것처럼 재림 때에도 그리스도를 경배할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더 위대하시다는 증거이다.
시편 104편 4절 인용(7절)-천사들은 하나님의 종들로 지은 바된 영물들이다. 다음의 인용은 그리스도께서 종이 아니라 절대 주권자이심을 보여 준다.
시편 45편 6-7절 인용(8-9절)-시편 45편은 그리스도와 이스라엘의 관계를 그리고 있는 결혼의 시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께서 즉위하심을 명백히밝히시며, 또한 성부께서는 성자를 “하나님!“이라고 부르신다.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관점을 입증하기 위해 모든 가능한 방법으로 이러한 구절들을 왜곡시키고 있다. 어떤 “왜곡된 해석“은 심지어 “주의 보좌는 하나님...“이라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이 구절들은 담대하게 그리스도의 신성을 선포한다. 그는 하나님이시다!
시편 102편 25-27절 인용(10-12절)-여기서 다시 예수님은 “주님“으로 불리운다. 그는 태초부터 계신 우주의 창조자이시다. 우주는 오래된 옷과 같이 낡아져서 산산이 부서질 것이지만 그리스도는 결코 변함이 없으실 것이다. 그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 천사들은 피조물이나, 그리스도는 영원한 아들이시다.
시편 110편 1절 인용(13절)-이것은 히브리서에 나오는 핵심적인 시편이다. 왜냐하면 시편 110편 4절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을 선포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현재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시는 제사장이신 동시에 왕(Priest-King)이시다. 베드로도 사도행전 2장 34절에서 이와 똑같은 구절을 인용한다. 그리스도의 원수들은 그리스도께 아직 절하지 않았으나, 어느날 무릎을 꿇게 될 것이다.
마지막 구절은 천사들의 지위를 요약한다. 이들은 보좌에 오른 아들들이 아닌 섬기는 영들이다. 그리고 그들의 사역은 그리스도의 놀라운 구원 안에서 그와 더불어 후사가 된 우리를 섬기는 것이다.
이 인용 구절들을 복습할 때 하나님의 아들의 위엄과 그 영광을 볼 수 있을 것이다. 4절에서 진술하듯이, 그리스도는 천사들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가지고 계신다. 왜냐하면 고난과 죽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보다 큰 기업을 얻으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성품과 사역과 섬김에 있어서 최고의 위치를 점하신다. 오늘날 비록 그리스도의 왕국이 지상에 있지는 않지만 그는 여전히 왕으로 좌정해 계시며, 이 땅에 의를 세우기 위하여 언젠가는 돌아오실 것이다.
▣ 부가적 연구
3절에 나오는 “형상“(cxprss image)이란 영어의 성품(character)이란 말의 근간이 된다. 그것은 “인“(印, imprint)이라고 번역될 수 있는데, 그리스도는 인간의 육신을 보증하는 하나님의 인(引)이시다. 이 단어는 마태복음 22장 20절에 나오는 “형상“과 똑같은 말인데, 동전에 새긴 가이사의 형상을 가리키고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보는 것은 곧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더 나은“(better)이란 단어(4절)는 히브리서의 핵심 단어이다. 성경에서 이 단어를 찾아 표시해 보라.
사무엘하 7장 14절을 그리스도께 적용함에 있어서 저자는 솔로몬이 그리스도의 모형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다윗과 솔로몬은 그리스도의 왕권에 대한 이중적 표상이다. 다윗은 추적당하고 거절을 당한 “도피하는 왕“이었다. 그러나, 마침내는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솔로몬은 큰 영광 중에서 왕위에 올랐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말하는 것이다. 솔로몬의 통치는 평화로웠고 찬란했다. 솔로몬은 건축자였는데, 우리의 주님도 그러하시다. 솔로몬은 그의 지혜로 유명했는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지혜이시다.
히브리서 1장 10-12절에서 인용되는 시편 102편은 그리스도의 배척자 고난과, 죽음을 나타낸다. 24절은 히브리서 5장 7절과 연관이 될 수 있으며 그리스도의 겟세마네 기도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죽음에서 구원되기를 바라시며 드린 기도였다.
저자는 확실히 구약을 알고 있었다! 히브리서를 공부함에 있어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말씀을 구약과 연관시키는 것이다. 그는 시편에서 많이 인용한다. 그러나, 우리 중에서조차 시편에서 그리스도를 찾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관련된 구절들이 들어 있는 시편을 다 읽어 보면 당신에게 무언가를 더 말해 줄것이다."
▣ 우리의 큰구원-히브리서 2장
본 장은 1장에서의 논점을 계속해서 다루고 있는데, 그리스도께서 천사들보다 나은 분이시라는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논쟁을 중단하고 권면을 하는데, 이 권면은 본 서의 다섯 가지 권면들 중 첫번째 것이다(개요 참조).
1. 권면(2:1-4)
천사들로 말미암아 주신 말씀(구약 율법)이 견고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로 말미암아 하신 말씀도 역시 견고한 것이었다! 만일 하나님께서 구약의 날들 가운데서 그의 말씀에 불순종한 사람들을 처리하셨다면,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경시하거나 거절하는 사람들도 처리하실 것이다!
여기서의 위험은 말씀을 “등한시함으로써 떠내려 가는“ 것이다. “... 언제라도 그 말씀들을 벗어나는 곳으로 떠내려 가지 않기를“(“혹 흘러 떠내려 갈까“)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가장 좋은 번역이다. 3절은 “불신자가 거절한다면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라는 뜻이 아니라, “만일 우리(신자들)가 등한히 여기면... “의 뜻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기 시작하는 데에서부터 영적 퇴보가 시작된다. 10장 19-25절에서 주는 권면을 볼 때, 이 서신의 당시 대상자인 유대인들은 기도를 소홀히 하고 하나님의 백성과의 교제를 소홀히 하고 있었던 것 같다(딤전 4:14 참조).
불순종이란 말은 문자 그대로 “듣기를 즐겨하지 않는“이란 뜻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에 새기지 않는 성도들은 불순종하는 자들로서, 하나님의 징계의 손길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결국, 하나님은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가지 능력“으로 그의 말씀을 확증하셨다(4절/ 행 2:22/행 2:43 참조). 이 말씀이 소홀히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사실상, “등한히 하다“는 말은 마태복음 22장 5절에서 “돌아 보지도 않고“(가볍게 여기고)라고 번역되어 있다."
2. 해설(2:5-18)
1장에서 제시한 바, 예수님이 천사들보다 뛰어난 분이라는 저자의 논증은 “예수께서 인간의 몸을 가지실 때에도 그가 어떻게 보다 뛰어날 수 있는가? 천사들은 자신을 제한하는 인간의 몸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리스도보다 더뛰어난 존재가 아닌가?“라는 새로운 질문을 야기시켰다. 그는 예수께서 친히 육신의 몸을 입으셔야 하는 이유를 설명함으로써 이 물음에 답한다.
마지막 아담이 되기 위함(5-13절)-성경의 그 어떤 곳에서도 하나님께서 천사들에게 장차 오는 세상을 다스리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신 일이 없다. 창세기로 돌아가보면, 하나님은 아담에게 온 땅을 다스리게 하셨다(창 1:26-31). 바울은 시편 8편 5-7절을 인용하는데, 여기서는 창세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축복이 반복되고 있다. 하나님은 사람을 천사들보다 조금 못하게 지으셨는데, 흑은 문자적으로는 “잠깐 동안 하나님보다 못하게“라는 말이 된다. 이 말은 아담과 하와가 시련의 시기에 처해 있었다는 뜻인 듯하다.
이들은 하나님보다 못한 상태로 머물러 있도록 창조된 것이 아니므로, 만약 그들이 범죄하기를 거절했었다면 이들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였을 것이다. 사탄은 그들이 “잠깐 동안“만 하나님보다 못한 상태로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서둘러서 때가 되기도 전에 영광을 주겠다고 약속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죄가 들어왔으며, 이 일은 아담에게서 세상을 통치할 모든 권한을 빼앗아 갔다. 그는 왕이 되기를 중지하고 노예가 되었다. 바로 그 점이 8절에서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저(사람)에게 복종한 것을 보지 못하고“라고 말하는 이유인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보는가 ? “우리는 예수를 본다!“ 그리스도는 마지막 아담이시며, 그의 죽음과 부활은 아담이 하나님께 불순종하였을 때 저질러 놓은 모든 것을 원상태로 회복하였다. 그리스도는 잠깐 동안 천사들보다 못한 자리에 이르셨고, 갈보리 밑바닥까지 낮아지셨다(빌 2:1-12). 그리스도는 세상 죄를 담당하여 죽으시기 위해 육신의 몸을 입으셔야만 했다. 사람들은 가시로 그에게 관을 씌웠으나, 이제는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셨다(벧후 1:17).
세상에는 이제 새로운 가족 관계가 있다. 그리스도는 많은 아들들을 영광으로 인도하고 계신다. 아담은 그의 죄로 말미암아 그의 가족을 죄와 사망으로 몰아넣었는데, 그리스도는 이제 아담의 자녀들을 하나님의 자녀들로 변화시키신다. 그는 우리 구원의 “개척자“(대장)이시며 우리가 따라갈 수 있도록 길을 닦아가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제들인 것은 우리 모두가 그의 거룩한 본성에의 참여자가 되었고, 그의 죽으심을 통하여 하나님께로 구별된 한 가족이기 때문이다(10:10).
그는 시편 22편 22절을 인용하는데, 이는 갈보리에 관한 시에서 부활을 다룬 부분이다. 그는 또한 이사야 8장 17-18절도 인용한다. 이사야의 두 아이는 그 민족에게 보이는 징표였다. 스알야숩(사 7:3)은 “남은 자들이 돌아올 것이다“는 뜻이며, 마헬살랄하스바스(사 8:1)는 “서둘러 탈취하다, 약탈하는 데 재빠르다“는 뜻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이사야 시대에 다른 사람들이 버림받을때에도 구원받은 믿음을 가진 “남은 자“들이 있었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이들이 “이사야의 자녀들“인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는 믿는 자들로 구성된 한 가족, 곧 유대인 중의 남은 한 그루터기를 가지신다. 이들은 장차 다가올 진노에서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마귀를 패배시키기 위함(14-16절)-사망과 또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아담의 죄의 결과였다(창 2:17/창 3:10). 사단은 사망에 대한 두려움을 가장 강력한 무기로 사용해 왔다. 사단은 “사망의 권세“를 전혀 갖지 못한다. 왜냐하면 욥의 경우와 같이 사단은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권세“라는 단어는 권위라기 보다는 “힘“이라는 뜻이다. 사단은 죄인들과 어두움을 주관하는 권세를 가졌으나(눅 22:53), 그리스도께서 흑암의 권세로부터 성도들을 건져내셨다(골 1:12-13). 사단은 하나님의 피조물들을 주관하기 위하여 “사망의 권세“를 움켜쥐었으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이러한 권세의 효력을 깨뜨리셨으며, 죽음을 두려워하여 종노릇하는 사람들을 구원하셨다. 실로,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심으로써 사단을 패배시키기 위하여 사람의 몸을 입으셔야만 했던 것이다(요일 3:8 참조).
16절은 그리스도께서 천사들의 본성을 입지 않고 아브라함의 씨를 입으셨다고 분명히 밝힌다.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는 천사가 되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 되셨으며, 유대인이 되셨던 것이다. 그는 천사들을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다. 타락한 천사들은 결코 구원을 받을 수가 없으나, 타락한 인간은 구원을 받을 수 있다!
동정적인 제사장이 되기 위함(17-18절)-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친히 사람의 몸을 입으신 세번째 이유이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의 약점을 돕기 위하여 동정심 많은 제사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로 고난받게 하셨으며 이러한 고난을 통하여 그의 제사장 직분을 준비시키셨다(10절).
그리스도의 인격은 숙달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인(God-Man)으로서 그는 우리의 필요에 대처하기 위해서 고난을 견디셔야 했다. 그는 베들레헴에서 육신을 입으셨고(요 1:14) 이 땅에서 고난의 생을 사시는 동안 “그의 형제들과 같이 되셨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죄로 여김“을 받으셨다(고후 5:21).
이제 그리스도는 인간 제사장과는 달리 자비롭고 충성된 대제사장이시다. 우리는 그를 의지할 수 있다. 우리가 도움을 받고자 하여 그 앞에 나오면 그는 우리를 도우실 수가 있으시다. “도우신다“는 말은 “부름을 받고 달려온다“는 뜻으로, 의사에게 사용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그를 요청하면 우리를 도우시려고 달려오신다!이상으로 그리스도께서 천사들보다 우월하시다는 그의 논증은 완결된다. 이로써 저자는 그리스도가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분이신바, 그의 인격과 사역에 있어서, 그 이름에 있어서 우월하심을 보여 주었다. 결론은 명백하다. 그리스도는 우월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말씀을 간직하고 순종해야만 한다. 등한히 함으로써 흘러 떠내려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 시편 8편에 대한 부가적 연구
시편 9편의 맨 처음에 나오는 주(註, “영장으로 뭇랍벤에 맞춘 노래“)는 8편의 맨 끝에 속한 것이다. 그것은 “싸움을 돋우는 자의 죽음에 붙여“라는 뜻이며, 사무엘상 17장에서 다윗이 골리앗을 무찌르고 승리한 것을 가리킨다. 골리앗은 하나님의 이름을 조롱하였으나(삼상 17:45) 다윗은 그 이름을 영화롭게 하였다. 하나님은 40일 동안 참람한 말을 했던 “원수를 잠잠케 하셨다“(시 8:2 /시 17:16). 골리앗은 17장 4절과 23절에서 싸움을 돋우는 자로 불리우고 있다. 그러나, 다윗은 어린 아이와 젖먹이 같았을지라도(시 8:2) 하나님께로서 힘입어 원수를 무찔렀다(삼상 17:42 참조).
다윗은 크게 승리한 후 하나님께 고하려고 밤에 밖으로 나갔는데, 그로 인해 시편 8편이 씌어진 것이다. 이 시편을 사무엘상 17장과 함께 정성껏 읽고 어떤 새로운 의미를 주는지 알아보자."
▣ 모세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히브리서 3장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의 우월성에 대한 세번째 논증으로 들어가, 그리스도께서 모세보다 뛰어나심을 다룬다. 물론, 모세는 유대 민족에게 위대한 영웅이었는데 바울이 모세에 대한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입증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믿음이 유대주의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된다. 그리스도께서 제공하신 것이 훨씬 더 위대할 것이었는데도 이 사람들이 어떻게 유대주의로 되돌아갈 수 있었을까?
1. 직책에 있어서 더 위대하신 그리스도(3:1-2)
모세가 비록 제사장의 기능과(시 99:6) 심지어는 왕의 기능을 담당하였지만(신 33:4-7), 본래는 선지자였다(신 18:15-19/행 3:22). 모세는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으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보내심을 받은 “사도“ 또는 “보내심을 받은 자“였다(요 3:17/요 5:36-38/요 6:57/요 17:3/요 17:8/요 17:21/요 17:23/요 17:25).
그리스도는 또한 대제사장이셨는데 이는 모세가 결코 종사해 본 일이 없었던 직책이다. 더구나 그리스도의 직분은 이스라엘의 지상적 소명이 아닌 “천상적 소명“과 관련이 있다. 모세는 이 땅의 백성을 위해 사역하였으며, 이들의 소명과 약속들은 이 땅에 속한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이 땅의 나그네요 순례자들인 하늘나라 백성의 사도요 대제사장이시다.
모세는 율법의 선지자인 반면에 그리스도는 은혜의 사도라고 부언할 수 있다(요 1:17 참조). 모세는 죄를 범하였으나 그리스도는 죄 없는 삶을 사셨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라“(주의해서 관찰하라)는 말을 듣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2. 사역에 있어서 더 위대하신 그리스도(3:3-6)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충성했던 것처럼(민 12:7)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셨다고 분명히 밝히신다(3:2). 그러나, 이들의 사역도 바로 이 지점에서 나눠진다. 모세는 종으로서였으나 그리스도는 아들이시다. 모세는 집 안에서 섬겼으나 그리스도는 집 전체를 관장하신다. “집“은 물론 성전이나 성막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을 말하는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구약의 전인 이스라엘 안에서 종으로 있었으나, 그리스도는오늘날 하나님의 집인 교회의 전반을 관장하는 아들이시다(히 3:6/히 10:21/벧전 2:5/벧전 4:17/엡 2:19 참조). “집“이 “백성“을 뜻하는 데에 대한 한 예를 들자면, 사무엘하 7장 11절에서 하나님께서 “다윗으로 한 집을 이루고... “라고 약속하셨는데, 그것은 그의 가계와 그의 보좌를 영원히 세울 것에 대한 약속이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지상의 전인 반면, 교회는 하나님의 하늘의 전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이 언제나 믿음으로 결정지어 진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구약의 백성들은 오늘날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 두 언약 하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서로 연결시켰던 것도 바로 이 믿음의 연속성이다. 갈라디아서 3장 7절에서 참된 신자들을 “아브라함의 아들들“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그가 “믿음의 조상“이기 때문인 것이다.
모세와 그리스도 사이의 대조에 있어서 두 가지 다른 문제들이 남아 있다. 첫째로, 모세는 종인 반면에 그리스도는 아들이시다. 이 말은 구약에서의 사역이 속박과 노예 상태에 대한 것인 반면, 새 언약 하의 그리스도의 사역은 해방과 기쁨에 대한 것임을 암시한다. 구약의 율법은 “종의 멍에“로 언급된다(갈 5:1/갈 2:4/갈 4:1- 참조). 우리가 하나님의 전에서 믿음으로 누리는 아들됨의 축복된 특권들이 옛 언약 하에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둘째로, 모세는 모형과 그림자로 섬겼으나, 그리스도는 이러한 것들의 성취로 나타나신다(3:5- “장래의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는 참된 밝은 빛을 가지나, 모세 안에서는 우리가 그림자 안에 있게 된다. 바울의 편지를 읽는 사람들이 유대주의로 돌아간다는 것은 성취를 모형과 그림자로 바꾼다는 것을 뜻했다!"
3. 안식을 주시는 데 있어 더 위대하신 그리스도(3:7-19)
4장에서 안식이라는 말이 12회 사용되었는데, 반드시 같은 뜻으로 쓰이고 있지는 않다. 우리는 다음 장에서 이를 상세히 연구할 것이지만, 이 지점에서는 그 기본적인 개념을 소개해야 할 것이다. 저자는 영적인 진리를 예증하기 위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사용한다(고전 10:1-13 참조).
유대인들이 애굽에서 종되었던 것은 마치 죄인들이 세상에서 종된 것과 같으며, 하나님께서 어린 양의 피로써 이스라엘을 구속하셨던 것은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과도 같다. 하나님께서는 축복의 땅을 유대인에게 약속하셨고, 자기 백성들에게 복된 삶을 약속해 오셨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이스라엘은 불신앙으로 반역하였으며, 하나님을 따르기를 거절하였다(민 14장).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여호수아와 갈렙만을 제외한회중 전체를 심판하셨다. 이 두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하며 백성의 결의를 반대한 이들이었다. 유대인들은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해야 했는데, 이는 정탐군들이 그 땅에 갔던 하루를 1년으로 계산한 연수였다! 달리 말하자면, 이 민족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신 12:9/수 1:13-15).
여기서 저자는 그의 독자들에게 경고를 한다. 이 편지를 읽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받았으며 세상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었다. 이제 이스라엘처럼 이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약속하신 복된 삶으로 들어가지 않고 되돌아가려는 유혹을 받았다. 3장과 4장에는 세 가지 다른 안식이 나오는데, 다음 장에서 이를 상세히 다룰 것이다.
-구원의 안식 4장 3, 10절
-시련 가운데서의 승리의 안식-가나안으로 상징된다:4장 11절
-미래의 영원한 안식-하늘의 안식:4장 9절
여기에 나오는 권면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여 약속된 안식으로 들어가라는 것이다. 가나안은 하늘나라의 표상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가나안은 축복과 투쟁, 진보와 승리의 생활에 대한 표상인 바, 우리가 그리스도께 굴복하여 그를 믿고 의지할 때 그 안에서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시험과 시련의 한복판에서조차 우리가 소유하게 되는 것이 바로 현재의 안식이다. 이 안식은 모세나 여호수아(4:8)가 줄 수 없는 것이었다.
바울은 시편 95편을 인용하여 이스라엘의 완악한 마음을 독자들에게 상기시킨다. 이스라엘이 진행하기가 힘들 때 어떻게 하나님을 힐난하고 시험하였는지를 잘 알기 위해서는 출애굽기 17장을 읽어 보라. 믿는 자들이 오늘날 이런 일을 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히브리서의 근본적인 주제를 보게 되는데, “상황이 어려울 때 낙심하지 말고 원수들을 정복하며 온전한 데로 나아가자“는 것이다. 요단강을 건너가서 가나안이라는 우리의 기업을 주장하자!
12절에 나오는 이 경고를 신자들에게도 적용할 수 있을까? 물론 할 수 있다! 불신앙도 그리스도인이 빠지기 쉬운 죄의 하나인데, 이것은 악한 마음에서 생겨난다.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을 믿는 일이 있으면, 우리의 의지와 생활을 그에게 굴복시켜서 매일 인도하심을 받으며 봉사의 삶을 살게 되는 또 다른 일이 있다.
좌절과 불신앙의 “광야에서 방황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여전히 너무도 많다. 이들은 애굽에서 구원은 받았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의 기업을 주장하며 가나안으로 횡단해 들어간 일은 없었다. 유대인들은 피로써 값주고 산 바되었고 구름으로 가리움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이 광야에서 죽었다! 이것은“구원을 잃게되는 문제“인가? 물론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결핍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인생과 축복을 잃게 되는 문제인 것이다.
무엇이 이같은 불신앙의 악한 마음을 일으키는가? 첫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는 것(7, 15절)이며, 둘째는 죄에게 속도록 자신을 방치해 두는 것(13절)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첫째로 우리는 말씀에서 떠나가며(2:1-4) 다음으로는 말씀을 의심한다(3:18-19), 우리는 우리를 돕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권면을 거절하며(3:13) 말씀에 대해 둔감하게 될 때까지 고집부리며 계속해서 불순종한다(5:11-6:20 , 서론 참조).
믿는 자의 삶에서 죄란 실로 거짓된 것이다. 작은 것에서 시작하나 점점 더커지게 된다. 어떤 점에서는 하나님을 의심하는 일이 불신앙의 악한 마음으로까지 이끌어 갈 수 있지만, 자신의 신념에 따라 전진해 가며 그 신념을 굳게 붙들고 있는 사람들은 진실로 그들이 구원받았음과(3:6/3:14) 하나님의 징계와, 마치 이스라엘이 그러했듯 이 생에서의 심판조차도 즐겨 받는 것을 입증해 보여 준다. 불신앙이란 심각한 일이다."
▣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안식-히브리서 4장
본 장은 앞의 3장 11절에서 시작된 “안식“에 관한 주제를 계속해서 다루고 있는데, 사실상 이 “안식“(rest)이라는 말은 이 부분에서 다섯 가지의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다.
-하나님의 안식일:창세기 2장 2절/ 히브리서 4장 4, 10절
-가나안-40년간 광야에서 방황하던 끝에 맞이한 이스라엘의 안식:3장 11절 등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현재의 구원의 안식:4장 3, 10절
-승리한 정복자의 현재의 안식 4장 11절
-미래의 영원한 안식 4장 9절
하나님의 안식일의 안식은 우리가 현재 소유한 구원의 안식 곧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사역으로 말미암은 안식과, 장차 있을 영광된 “영원한 안식“의 모형이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안식은 그리스도인이 믿음으로 행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기업을 주장할 때 갖는 전투와 축복의 생활을 모형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본 장에는 안식의 생활에 관한 네 가지 권면이 나온다.
1.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4:1-8)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안식을 주기로 약속하셨으나, 불신앙으로 인한 불순종 때문에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 하나님은 오늘날도 자기의 백성을 위하여 안식을 주신다고 약속하셨는데, 외관상으로는 불가능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승리를 주시며, 시련의 한복판에서도 평화를 주신다는 약속이다.
우리의 신령한 가나안에서의 “안식의 생활“을 가리켜 6장 1절에서는 “완전(또는 성숙)한 데 나아감“으로, 11절에서는 “소망의 풍성함“, 12절에서는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음“으로 일컫는다. 당시 히브리서의 독자들이 시험의 때를 통과하고 있었다는 사실(10:32-39/12:3-14/13:13)과, 옛날의 이스라엘처럼 옛 생활로 “돌아가자“고 유혹받는 일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승리의 안식을 약속하셨으나 이들은 거기에 미치지 못할 위험에 처해 있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말씀을 주셨으나 “믿음을 화합지“ 않았으며(4:2) 그들의 생활에 적용하지도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이 신자의 생활에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다시 한번 보게 된다.
저자의 논증은 이렇게 전개된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안식을 약속하셨으나(4:1), 이스라엘은 그 안식에 들어가는 데에 실패하였다(4:6). 하나님의 약속이 여전히 서 있는 것은, 여호수아가 비록 그들을 국가적 안식으로는 인도하였지만(수 23:1) 그들에게 이같은 신령한 안식을 주지는 못했기 때문이다(히 4:8). 또 다른 예로서, 수 세기가 지난 후 시편 95편에서 다윗도 이 같은 안식을 말한 적이 결코 없었다.
결론은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는 것이다(4:9). 그는 이러한 안식을 하나님의 안식일에의 쉼과 연관시키는데(4:4, 10), 그것은 지쳐버린 후의 쉼이 아니라 만족한 상태에서의 안식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을 창조하신 후 지치지 않으셨다. 창세기 2장 2절에서의 안식은 완성과 만족을 말해 주고 있다. 이것은 “영혼의 안식“이며, 또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1장 29절에서 “약속하시는 믿음의 안식“이다.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 마태복음 11장 28절의 쉼은 구원이며 선물이다.
승리의 안식은 우리의 헌신과 순종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라는 구절은 하나님의 경고이다. 왜냐하면 그의 자녀들 중에서 이러한 승리의 생활로 들어가지 못하는 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2. 그러므로 우리가 힘쓸지니(4:9-13)
여기서 “힘쓰다“라는 말은 “부지런하다“는 의미로서, “이러한 안식에 들어가기 위해 부지런할지니“의 뜻이다. “부지런하다“는 말은 “흘러 떠내려감“의 정반대이다(2:1-3).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있어서 부주의하거나 게으른 상태로 성숙에 이른 사람은 아무도 없다. 베드로후서 1장 4-12절과 3장 11-18절을 자세히 보면 베드로는 신자들에게 부지런하라고 세 번이나 권면한다. 만일 우리가 부지런하지 않으면 이스라엘의 실패를 반복하게 될 것이며, 약속된 안식과 기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이것은 구원이 아니며,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의 승리임을 다시 주목하자).
이러한 안식에 들어가는 비결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이다! 히브리서 4장 12절은 온갖 영적인 상황에 대한 해결을 제시해 준다. 만일 우리가 말씀이 우리를 심판하며 우리의 마음을 드러내도록 허용한다면 그 축복을 기업으로 받기에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말씀에 대적했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 하지 않았으므로(시 55편) 그들은 40년간 광야에서 좌절하며 방황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은 검이다(계 1:6/계 2:12-16/계 19:13). 그리하여 그 검은 마음을 찌른다(행 5:33/행 7:54- 이스라엘이 재차 말씀에 순복하기를 거절함). 너무도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삼가는 데에 실패함으로 인하여, 축복을 빼앗긴다. 영적으로 성숙하려면 부지런해야 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적용하는 방법이다."
3.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자(4:14)
이 말은 “우리의 구원을 굳게 붙들자“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믿는 도리“란 말은 실로 “동일한 내용의 신앙고백“인 바, 4장 14절에서와 같이 3장 1절, 10장 23절, 11장 13절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그의 믿음을 증거하는 것과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그의 신실함, 그리고 약속된 상급을 얻는 것과 관련이 있다(10:34-35 참조).
광야에서 방황한 유대인들은 구름 아래 있었고 애굽으로부터 구속함을 받았지만 간증이 될 만한 것을 잃었었다. 이들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얼마나 보잘 것없는 증거자들이었던가! 하나님은 그들을 인도해 내셨으나 이들을 이끌어 들일수는 없으셨다! 그들의 불신앙이 그들에게서 하나님의 축복을 빼앗아갔다.
이 일은 바울이 11장에서 위대한 “믿음의 거성“을 그의 독자들에게 상기시키고 있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이 사람들은 모두 다 역경과 시련에 직면했으나 그것들을 극복하고 선한 간증을 남겼다. 히브리서 11장 13절은 이 모든 사람들이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였던 것을 “증거하였다“고(4:14 과 같은 단어임) 말한다. 에녹은 하늘로 들리워가기 전에 좋은 증거를 받았다(11:5).
그 장 맨 끝에 가서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지금까지의 말을 종합한다.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며...“ 믿음이 있는 곳에는 좋은 증거가 있고(11:2) 불신앙이 있는 곳에는 증거가 없다.
믿음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구약시대의 이스라엘은 들으려 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믿음이 없었다.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은 3장 7, 15절과 4장 7절에서 반복되는 경고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삼가는 그리스도인은 좋은 신앙고백을 유지할 것이며, 세상에서 그의 증거를 잃지 않을 것이다."
4.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것이니라(4:15-16)
이 구절들은 신자들이 그의 구원을 잃을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증거이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유혹과 연약함을 아시는 대제사장이 계시며, 그분은 우리가 결코 당하지 않는 시험들을 참으셨다. 시험의 때가 오면 우리는 그리스도만이 주실수 있는 도움을 받고자 은혜의 보좌 앞으로 돌이킬 필요가 있다.바울은 마지막 장들에서 본 주제를 더욱 세밀하게 다룬다. 그러나, 그가 여기서 이 권면을 첨부하고 있는 것은 독자들이 낙담하여 “계속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계속 전진하는 데 필요한 것이 우리에게는 없어!“라고 말하지 못하게하기 위함이다. 물론 당신은 이런 말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신자도 요단강을 건너가 원수를 정복하기에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자비로우시며 “때를 맞추어 돕는 은혜“를 주시는 대제사장이 계신다.
저자가 이 시점에서 “보좌“를 언급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구절은 출애굽기 25장 17-22절에 나오는 황금으로 된 시은소와 관계가 있다. 법궤는 금으로 입힌 나무로 된 상자인데, 모세는 이 궤의 맨 위에다가 양쪽 끝에 그룹이 있는 황금 “시은소“를 두었다. 이 시은소가 하나님의 보좌였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영광 중에 좌정하셔서 이스라엘 민족을 다스리셨던 곳이다. 그러나 구약의 시은소는 은혜의 보좌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 민족은 율법의 멍에 아래있었기 때문이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 1:17). 그리스도는 우리의 시은소이시다(요일 2:2-“화목제물“). 우리가 그리스도께 나아올 때는 심판의 보좌가 아닌 은혜의 보좌로 나오는 것이며, 그는 우리를 만나시고, 말씀하시며, 우리에게 힘을 주신다.
본 장을 다시 읽으면 우리가 구원을 잃으리라는 그런 경고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보다는 우리가 말씀과 기도 가운데 살 수 있도록 격려하기 위함이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신령한 가나안으로 인도하셔서 안식과 축복을 받게 하기 위함인 것이다."
▣ 우리의 위대하신 대제사장-히브리서 5장
처음 두 장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선지자나 천사들보다 더 위대하시다는 것을, 그리고 3-4장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모세보다도 크신 분이심을 보여 주었다. 이제 그는 이스라엘의 첫 대제사장인 아론을 가리키며, 그리스도께서 그보다 크신 대제사장이심을 입증한다. 만일 그의 독자들이 유대주의로 인하여 그리스도를 버린다면 이들은 위대하신 대제사장을 보다 못한 대제사장과 바꾸려고 하는 것이 된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아론보다 우월한 분이심을 세 가지 방면에서 보여 준다.
1. 그리스도는 더 뛰어난 반열에 속하신다(5:1, 4-6)
아론은 사람들 가운데서 뽑혀 대제사장의 직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이 영광을 그의 장자에게 물려 주었으며, 이와 같은 식으로 계통이 이어졌다. 아론은 레위 지파에 속하였는데, 이 지파는 이스라엘 민족을 위하여 제사장 지파로 따로 구별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반열은 보다 뛰어나다! 그 한 가지 예로서, 그리스도는 한갓 인간만이 아닌 육신을 입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인 동시에 인자(人子)이시다! 그는 이러한 제사장직의 영광을 자기 본위적인 방식으로 취하지 않으셨다. 민수기 16장을 보면, 고라의 자손들이 이런 식으로 행하다가 그들의 죄로 인하여 죽었다.
그렇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아들을 임직시키셨다! 여기서 저자는 시편 110편 4절을 인용하는데, 이 구절은 성부께서 성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을 주시는 구절이다. 그는 이 구절을 5절에서 인용한 시편 2편 7절과 연결시키고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이 그의 부활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며, 시편 2편 7절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다루고 있다(행 13:33).
멜기세덱의 제사장 직분은 히브리서 7-10장의 주제이므로 지금은 상세히 다룰 필요가 없겠으나, 그 배경을 알려면 창세기 14장 17-20절을 읽어 보라. 히브리서 7-10장의 논증은 그리스도께서 더 크신 제사장이심을 다루고 있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의 반차가 더 위대하기 때문이다. 곧, 아론의 반차가 아니라 멜기세덱의 반차인 것이다.
“멜기세덱“이란 이름은 “의의 왕“이란 뜻이다. 그는 또한 살렘(Salem)의 제사장, 또는 “평강의 왕“이었다. 아론은 결코 제사장인 동시에 왕(priest-king)은 아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사장이시며 동시에 왕이시다! 그리스도는 보좌에 앉으신 제사장이시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3-4장에서 토론한 안식인 평강에 관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레위 지파가 아니라, 왕의 지파인 유다 지파 출신이셨으며, 멜기세덱은 창세기에서 갑자기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그의 시작이나 끝에 관한 아무런 기록도 없다. 따라서 멜기세덱은 그리스도의 영원한 아들되심을 표상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역시 “시작과 끝“이 없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아론은 죽었고 그의 자리는 채워져야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결코 죽지 않으시며 그의 제사장직은 영원하다! 아론은 지상의 세대를 맡은 제사장이었지만, 그리스도는 하늘 백성을 맡은 제사장이시다."
2. 그리스도는 동정심이 더욱 뛰어나시다(5:2-3, 7-8)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선택이 있어야 할 뿐 아니라 백성을 동정하고 그들을 도울 수 있어야만 했다. 물론, 아론 자신도 한갓 인간으로서 자기 백성의 연약함을 어느 정도는 알았을 것이다. 사실상, 그는 자신과 자기 가족을 위해서 희생 제사를 드려야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백성의 필요와 문제들에 더욱 깊이 들어갈 수가 있으시다! 7-8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이 “고난“을 받으셨음을 말해 준다. 하나님으로서 그리스도에겐 아무것도 필요치 않으셨음을 기억하자. 그러나, 인자로서 대제사장이 되신 날에는 그리스도께서 연단과 고통을 겪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미 2장 10-11절에 언급되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께서 고통을 겪어야 했던 것 때문에 그리스도를 경멸하며 그의 신성을 의심하였을 것이나, 이러한 고난들은 바로 그의 신성의 징표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이 그의 백성을 위해 동정심 많은 대제사장이 되도록 예비하고 계셨다.
7절은 겟세마네에서의 주님의 기도에 관한 언급이다(마 26:36-46).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으로부터“(흠정역에는 이렇게 되어 있음) 구원을 받게 해달라고 기도한 것이 아니라 “죽음에서“(out of death) 구해 달라고 기도한 것임에 주의하자. 그는 십자가에서 구해 달라고 아버지께 기도한 것이 아니라 무덤에서 그를 일으켜 달라고 기도하셨던 것이다. 이 기도는 응답되었다. 물론 그리스도께서는 기꺼이 십자가를 맞이하여,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잔을 마실 준비가 되어 있었다(요 12:23-34).
어떤 사람은 이렇게 질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아론과 같은 인간이 했던 것보다도 우리가 당하는 시련을 정말로 더 잘 알 수 있을까?“물론이다. 첫째로, 그리스도는 완전하신 분으로서, 모든 시련을 완전히 겪으셨다. 그는 사람들과 사단이 제공해야만 했던 온갖 유혹을 맛보시는 온전한 분량의 시험을 받으셨다.
이 말은 그리스도께서 그 어떤 도덕적인 인간이 견딜 수 있었던 것 그 이상의 것을 견디셨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우리들 대부분은 시험이 참으로 어려워지기도 전에 굴복하기 때문이다. 50톤의 무게를 지탱해 낼 수 있는 교각은 불과 2톤의 무게만을 감지할 수 있는 다리보다 시험에 대하여 더 알고 있는 법이다."
3. 그리스도는 더 뛰어난 제물을 드렸다(5:3, 9-14)
아론의 주된 직분은 특별히 대 속죄일에 나라를 위하여 제물을 드리는 것이었다(레 16장).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그 해 내내 백성을 섬길 수 있었으나, 대속죄일에는 모두가 대제사장만을 바라보았다. 왜냐하면 그만이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갈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을 위하여 희생제물을 드려야 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렇지 않았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죄없으신 어린 양으로서 죄 때문에 희생제물을 드려야 할 필요가 없었으며, 그 백성을 위하여 드려야했던 제물은 짐승이 아닌 자기 자신이었다! 이것은 반복된 제물이 아니었다. 자신을 드릴 필요가 있었지만 단 한 번이었고 이로 말미암아 문제는 해결되었다.
그리스도는 아론이나 그의 계승자들보다 참으로 크신 분이시다. 그리스도는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시나, 아론은 이 일을 결코 할 수가 없었다. 수소와 염소들의 피는 다만 죄를 가리울 뿐이었으나, 그리스도의 피는 단번에 모든 죄를 소멸하셨다.
저자는 이제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에 대한 보다 깊은 연구로 들어가고자 하나, 난점을 발견하게 된다. 문제는 그가 우둔한 설교자나 저자인 것이 아니라 청중들이 우둔하다는 점이었다. 그는 6장 1-2절에 열거되어 있는 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단순한 일들인 젖을 먹는 상태에서 단단한 식물(그리스도의 하늘의 제사장 직분)을 먹을 수 있는 단계로 나아가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의 독자들이 자각하고 성장하기 시작하지 않으면 이 일을 할 수가 없다.
젖(복음의 초보,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하신 일)으로 살며, 단단한 식물(그리스도께서 지금 하늘에서 하시고 계신 일)을 먹지 못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대단히 많이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구세주시라는 것은 알고 있으나, 그가 대제사장으로서 그들을 위하여 무엇을 하실 수 있는지는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이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을 만큼 구원받은 지가 오래 되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제2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누군가 그들이 잊고있는 것들을 다시 가르쳐야만 했다! 이들은 말씀 안에서 “경험하지 못했다“(익숙하지 못함. 13절). 역시 하나님의 말씀의 문제가 다시 대두된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관계는 그의 영적 성숙을 결정한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말씀으로부터 멀리 떠내려갔고(2:1-3), 말씀을 의심하였으며(3-4장), 말씀에 대하여 둔하게 되었다. 이들은 믿음으로 말씀에 화합지 않았으며(4:2), 그들의 일상적인 생활에서 실천하지도 않았다(5:14). 이들은 “신령한 지각을 사용하지“ 않았으며(5:14), 따라서 그들의 영적인 생활에 있어서 성장이 둔하고 비효과적이었다. 그들은 전진하는 대신(6:2) 후퇴하고 있었다.
은혜 안에서 자라가는 것은 지식에서 자라는 것에 의존한다(벧후 3:18). 우리가 자신과 그리스도에 대하여 더 알면 알수록 영적으로 더욱 잘 전진해 갈 수 있다. 당신의 영적인 달성은 어디에 와있는가? 젖먹이의 단계에서 아직도 젖으로 살며 불신앙의 광야에서 방황하고 있는가? 아니면, 성숙하여 말씀의 단단한 식물을 먹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하나의 습성으로 되어 있는가?"
▣ 새롭게 하는 회개-히브리서 6장
성경의 그 어떤 장도 히브리서 6장 만큼 사람들을 혼란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신실한 신자들조차 “타락“에 관한 교리로 다투게 되었던 것은 불행한 일이다. 이 구절들에 대해서는 해석들이 분분하다. 그 예를 들어보자.
-이것은 배교의 무서운 죄를 묘사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잃을 수있다는 의미이다.
-“거의 구원을 받을 뻔한 사람들“을 다루고 있다(스코필드 주석).
-이것은 아직 성전이 파괴되지 않은 시기 동안에 생존해 있던 유대인들만이 범할 수 있는 죄이다.
-이것은 “가상적인 경우“ 또는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을 사례를 제시하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견해를 존중해야 하지만, 위에서 열거한 견해들은 거절해야만 한다. 우리는 히브리서 6장이 이 책의 나머지 부분과 마찬가지로 신자들에게 쓰인 것이지만, 신자가 “그의 구원을 잃어버리게 되는 죄“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이 책의 전체적인 문맥과 사용된 단어들을 주의깊게 보면 본 장의 주된 교훈이 회개와 확신임을 발견할 것이다.
1. 호소(6:1-3)
저자는 독자들의 영적인 우둔함을 신랄하게 꾸짖었는데(5:11-14), 이제는 성숙한(완전한)데 나아갈 것을 그들에게 호소하고 있다. 이는 물론 이 책의 핵심 주제이다. “완전“(성숙)이란 단어는 누가복음 8장 14절의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사용된 것과 같은 단어이다(“... 온전히 결실치 못하는... “). 이 단어는 히브리서 6장 7-8절에 나오는 밭의 예화와 연결되어 있으므로 이 뜻을 마음에 꼭 새겨 두자.
“나아 갈지니라“는 호소는 직역하면 “지탱함을 받자, 또는 계속해서 나아감을 받자“는 뜻으로, 1장 3절에서 “붙드시며“라고 번역된 말과 같은 단어이다. 다른 말로 하면 저자는 자기 노력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 곧 온 우주를 붙들고 계시는 바로 그 능력에 자신들을 굴복하라고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드시면 어찌 떨어질 수 있겠는가!
이 유대인들은 전진하는 대신 2-3절에서 설명하고 있는 “초보“를 다시 세우려는 유혹을 받았다. 이러한 초보에 들어 있는 여섯 가지 항목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에 대한 언급이 아니라 오히려 유대주의의 기본적인 교리들을 가리키고 있다. 박해가 극렬해지자 이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신앙고백을 버리고 “곁길로 빠지려는“ 유혹을 받게 되었다(4:14/10:23).
이들은 이미 “유아시절“로 돌아가 있었고(5:11-14), 급기야는 유대주의로 돌아가려는 경향을 띠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와 기독교의 충만한 빛을 드러내기 위해 길을 예비했던 그 기초를 다시 세우게 된다.
이들은 죽은 행실, 곧 율법 아래 있는 행위를 회개했었고(9:14),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보였었다. 이들은 씻음의 교리를 믿었는데 이는 신약적 세례가 아닌 레위기에서의 씻음이다(막 7:4-5/히 9:10 참조). 안수는 대 속죄일을 가리키며(레 16:21), 모든 참된 유대인은 장차 부활과 심판이 있다고 주장한다(행 24:14-15). 만일 이들이 앞으로 전진하지 않으면 후퇴할 수밖에 없을 것인데, 그것은 그림자를 위해 본체를 버리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2. 논쟁(6:4-9)
처음부터 문제가 된 것은 구원이 아니라 회개인 것에 유의하자. “다시 새롭게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4, 6절). 만일 이것이 구원에 관하여 말하는 것으로서 신자가 구원을 잃을 수 있는 것이라면 어떤 신자는 구원을 다시 얻을 수 없다고 가르치고 있는 결과가 된다! “그런데도 구원을 잃는다“고 가르치는 교회들이 타락한 자들을 향해 주께로 돌아오라고 언제나 초청하고 있다! 이것은 비논리적이다.
여기서의 문제는 회개인 것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는 자의 태도이다. 4-5절은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묘사하며(10:32/2:9/2:14 참조). 9절은 저자가 그들이 참으로 구원받았다고 믿었음을 시사한다. 여기서는 “구원받을뻔한“ 사람들이 아니라 참된 신자들인 것이다.
6절에 나오는 두 개의 핵심 단어는 “타락한“과 “십자가에 못박아“이다. “타락하다“의 헬라어는 “배교“라는 말이 유래한 아포스타시아(apostasia)가 아니라 파라핍토(parapipto)로서, 이는 “벗어나다, 길을 잘못들어 방황하다“는 뜻이다. 이 말은 갈라디아서 6장 1절에 나오는 “범죄“라는 단어와 비슷하다(“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따라서 6절은 하나님의 영적인 축복을 맛보았지만 곁길로 벗어났거나 또는 범죄한 신자를 나타내고 있다.
그는 이와 같이 행하였으므로 이제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히 12:15-13) 영적으로 버려지게 될(고전 9:24-27)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이다. 이 말은 상급을 잃는다는 것과 하나님의 비난을 받게 된다는 뜻이지 구원을 잃는다는 뜻은 아니다.
“십자가에 못박아“라는 구절은 “십자가에 못박고 있는 동안에“로 번역되어야한다. 말하자면 히브리서 6장 4-6절은 죄짓는 성도는 전혀 회개에로 인도함을 받을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계속해서 죄를 지으며 그리스도께 욕을 돌리고 있는 동안은, 회개에로 인도함을 받을 수 없다는 뜻이다. 계속 죄 가운데 있는 신자는 그가 회개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삼손과 사울이 이러한 경우에 해당된다. 히브리서 12장 14-17절은 이와 마찬가지로 에서의 경우를 인용한다.
7-8절에 나오는 밭의 예화는 히브리서 12장 28-29절과 고린도전서 3장 10-15절에 주어진 진리, 곧 하나님의 시험의 불에 대한 개념과 연관된 진리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열매를 맺도록 하시기 위해서 구원하셨다. 우리의 삶은 언젠가 시험받을 것이며 인정받지 못한 우리의 행실은 불에 타게 될 것이다. 밭이 불에 타는 것이 아님을 주목하자. 불에 타는 것은 열매이다. 이러한 신자는 “불 가운데서 얻는 것 같은“ 구원을 받는다.
결국 이 난해한 구절이 주는 전체 멧세지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신령한 생활에서 후퇴할 수 있고 그리스도께 욕을 돌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죄가운데 머물러 있는 동안 그들은 회개함으로 인도될 수가 없으며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위험에 처한다. 고집을 부린다면 그들의 생활은 불에 견디는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며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잃는 고통“을 겪어야 할 것이다. 신자들이 죄에 대한 핑계로 “은혜“를 헛되이 하는 일이 없도록 히브리서 10장 30절은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시리라!“고 상기시킨다."
3. 확신(6:10-20)
저자는 독자들이 그의 권면을 오해하지 않도록(벧후 3:16), 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발견할 수 있을 만큼 영원히 보증받는 견고한 귀절로 종결한다. 그는 먼저 그들의 삶을 지적하고(10-12절)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온갖 증거를 나타내야 할 것을 상기시킨다. 우리는 이 세 구절에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것은 참된 신자의 특성이다(살전 1:3/롬 5:5).
그러나, 그는 12절에서 “게으르지 말라“고 경고하는데, 게으르다는 말은 5장 11절에서 “듣는 것이 둔하므로“와 같은 단어이다. 하나님은 약속을 주셨으므로 그들은 축복을 받기 위해 다만 믿고 기다릴 필요가 있다.
다음으로 저자는 인내하는 믿음의 실례로서 아브라함을 든다. 물론 아브라함은 죄를 범하였으며, 같은 죄를 두 번이나 반복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셨다! 결국 하나님의 언약들은 확실성 있는 성도들의 믿음에 달려 있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이 약속들은 오직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달려 있다.
하나님은 창세기 22장 16-17절의 약속을 친히 맹세하심으로써 확증하셨고,이루셨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선함이나 순종으로 말미암아 약속된 축복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이다. 아브라함은 히브리서의 독자들처럼 여러 가지 시련들과 시험들을 통과했고, 하나님은 그를 내내보고 계셨다.
17절에서 저자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행하셨던 것은 “후사들“에게 그의 뜻과 약속의 불변함을 알게 하기 위함이라고 쓰고 있다. 18절에 의하면 이런 후사들은 우리들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자녀가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갈 3장 참조). 그러므로 우리를 확신시키는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이 있는데, 곧 하나님의 약속(하나님은 거짓말할 수 없으시다)과 하나님의 맹세이다. 하나님의 변치 않는 말씀과 하나님의 변치 않는 인격은 우리가 구원받아 영원히 보존된다고 확신하는 데에 필요한 모든 것이다!
우리는 영혼의 닻 같은 “소망“을 가지며, 이 “소망“이 바로 그리스도 그분이시다(7:19-20/딤전 1:1).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하늘에 닻을 내리고 있는데 어찌 표류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확실하고 견고한 닻을 지니며, 우리를 위하여 길을 열어놓고 앞서 가신 “선두 주자“(그리스도)가 계신다. 또한 우리는 언젠가 영광중에서 그와 함께 하게 됨을 볼 것이다.
본 장은 성도들에게 버림받는다는 생각을 들게 하여 두렵게 한다기보다는 회개치 않는 마음에 경고를 하며, 우리가 영원에 닻을 내리고 있음을 확신시키는데 있다."
▣ 그리스도와 멜기세덱-히브리서 7장
본 장은 히브리서의 두번째 부분으로, 우월한 제사장 직분에 대해 소개한다. 이 부분에서의 저자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이 아론이나 땅에서 봉사하던 그의 후계자들의 직분보다 더 낫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함인데(8:4), 이는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이 더 나은 반차(7장)를 따른 것이며, 더 나은 언약 아래서(8장), 더 좋은 성소에서(9장), 더 나은 제물로(10절) 사역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본 장의 핵심 인물은 신비로운 왕이며 제사장인 멜기세덱으로서, 그는 구약전체를 통하여 단 두번 나올 뿐이다(창 14:17-20/시 110:4). 바울은 아론을 능가하는 멜기세덱의 우월성을 입증하기 위해 세 가지를 논증한다.
1. 역사적 논증-멜기세덱과 아브라함(7:1-10)
첫째로, 저자는 멜기세덱을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본다(3, 14절). 그는 제사장인 동시에 왕이었으며, 예수께서도 역시 그러하시다. 아론 계통의 제사장으로서 보좌에 오른 자는 아무도 없다! 사실상 영적으로 말하자면, 그들의 사역은 결코 완성되지 못했기 때문에 앉지 않았다(히 10:11-14). 더우기 멜기세덱은 살렘(“평강“)의 왕이었으며 예수께서도 우리의 평강의 왕이시다.
또한 멜기세덱의 이름이, 하나님의 의로운 왕이신 그리스도께 분명하게 적용되는 “의의 왕“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그의 이름과 직무상으로 볼 때 멜기세덱은 그리스도의 적절한 표상이다.
그뿐 아니라 저자는 또한 멜기세덱의 근원에서 그리스도를 묘사한다. 성경 기록에 관한 한 멜기세덱의 출생과 죽음에 대한 언급이 없다. 물론 이것은 멜기세덱이 부모가 없었다거나 죽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단지 구약의 기록은 이러한 문제들에 관하여 침묵을 지킨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멜기세덱은 그리스도처럼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다.“ 그의 제사장 직분은 영원한 것이다.
그의 제사장 직분이 자연적인 혈통에 의존되지 않았던 반면, 아론의 제사장들은 계보(系譜)의 기록들을 통해 그들의 직책의 정당성을 변호해야만 했다(느 7:64). 아론을 계승한 모든 대제사장은 다 죽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멜기세덱처럼 “계속해서 제사장으로 머물러 계신다“(8, 16, 24-25절),
다음으로 저자는 그리스도를 멜기세덱의 반차와 같이 봄으로써 이제 멜기세덱이 아론보다 더 우월하다는 것을 설명한다. 왜냐하면 아론은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쳤기 때문이다!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축복하였을 때와 마찬가지로 레위도 축복받고 있었다.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빎을 받는 것“은 물론이다. 땅에서, 유대인의 성전이 있는 곳에서, 제사장들은 십일조를 받았다. 그러나, 창세기 14장으로 돌아가 보면 제사장들은 아브라함을 통하여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쳤다. 이것은 분명히 그들이 낮은 것을 보여 준다.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오늘날 신자들은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 십일조를 바침으로써 아브라함을 본받고 있다. 저자는 십일조가 중단되었다거나 그리스도께 십일조를 바치면 그가 기뻐하시지 않는다고 가르치지는 않는다."
2. 교리적 논증-그리스도와 아론(7:11-25)
바울은 멜기세덱이 아론보다 더 탁월하다는 역사적인 기반을 굳게 세운 후, 이제는 교리적인 관점에서 멜기세덱의 우월성을 보여 준다. 여기서 그는 시편 110편 4절을 본 논증의 근거로 인용하며 세 가지 점을 제시한다.
아론은 멜기세덱으로 대치되었다(11-19절)-시편 110편 4절에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께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이로써 하나님은 제사장 직분을 폐지하시는 것이었다. 신적 제사장 직분이 두 가지로 병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반차를 세우셨다는 사실은 아론의 옛 반차가 연약하고 비효과적인 것이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며, 이것은 또한 아론의 기능을 뒷받침해 주었던 율법 역시 폐지되었다는 것을 뜻했다.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케 못할지라“(19절).
따라서 결론적으로, 제사장 직분도 역시 “아무것도 온전케 할 수가 없었으며“(11절), 저들이 드리는 제사로도 온전케 할 수가 없었다(10:1). 물론 히브리어의 “온전함“이란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선다“는 뜻으로서, 무죄함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단어이다. 아론은 육체에 상관된 계명에 의해 제사장이 되었지만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은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16절) 그 기능을 발휘한다. 왜냐하면 아론과는 달리 그리스도는 결코 죽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아론은 맹세로 세움받지 않았다(20-22절)-출애굽기 28-30장에 나오는 정교한 의식들을 통하여 아론과 그의 계승자들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셨지만 그들의 제사장 직분을 인치셨다는 신적 맹세에 대한 기록은 없다. 사실상 하나님은 그들의 사역이 어느 날 끝이 날 것임을 아셨기 때문에 맹세로써 그들의 반차를 인치지 않으셨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하여금 제사장이 되도록 정하셨을 때는 불변하는 맹세로써 그 직분을 확증하셨으며, 이러한사실이 그리스도께서 아론보다 더 우월하심을 입증한다.
아론과 그의 계승자들은 죽었으나 그리스도는 영원히 살아계신다(23-24절)-율법 자체는 거룩하고 선하였으나 육체의 약함으로 인하여 제한을 받고 있었다. 아론은 죽었으며, 그를 뒤이은 자손들도 죽었다. 제사장 직분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영속되지 못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더이상 죽지 않으시며 살아 계신다. 그는 불변하는 제사장 직분을 가지시는데, 이는 그가 무궁한 생명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기 때문이다. 그는 “영원히 살아 계셔서“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여 중재하시며 이로 말미암아 그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가 있으시다. 대체로 25절을 잃어버린 자들에게 적용시키지만 사실상 그것은 주로 구원받은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이며, 이들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매일 중재하시고 계신다."
3. 실천적인 논증-그리스도와 신자(7:26-28)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라는 말은 우리에게 알맞으며, 우리의 필요에 대처하며, 우리의 환경에 적합하다는 뜻이다. 아론의 어떤 후손도 이 구절들에서 그리스도께 주어진 묘사에 적합하지 않다. 그들은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아론 자신도 금송아지를 만들어 이스라엘을 우상 숭배로 이끌어갔으며, 또한 엘리의 아들들도 탐식과 부도덕의 죄가 있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완전한 대제사장이 계신다. 그는 지상의 어떤 제사장보다 거룩하시며 하나님의 존전의 하늘 장막에서 섬기는 그 어떤 직분보다 높으시다. 아론과 그의 후손들은 먼저 자신들을 위해, 다음으로는 백성들을 위해서 날마다 제사를 드려야 했다.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시기에 자기 죄를 위하여 속죄하는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었다. 그가 드린 단번의 제사가 죄 문제를 영원히 해결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염소와 황소의 피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제물로 드리셨다. 우리는 얼마나 위대한 대제사장을 모시고 있는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이런 저런 종류의 약점들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리스도는 모든 죄와 연약함으로부터 자유하신 분이다.
이제는 멜기세덱의 반차가 아론의 반차보다 우월하다는 것이 쉽게 이해될 것이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레위보다 멜기세덱을 더 높였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입증되었고, 시편 110편 4절에서 하나님께서 제사장직을 변역하심으로 율법도 변역하셨다고 명확히 언급하는 것으로서 교리적으로 입증되었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대제사장이 되는 자격을 지닐 수 없기 때문에 실천적으로 입증되었다. 다른 식으로는 생각해 볼 필요도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으며, 그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되신다."
▣ 아론보다 더 위대하신 그리스도-히브리서 8장
저자는 그리스도의 하늘 제사장직이 더 나은 반차에 속하는 것임을 입증한 후, 이제 이 직분이 더 나은 언약을 통하여 수행되는 것임을 보여 준다.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이 행한 모든 일이란 시내산에서 그 민족과 체결하셨던 옛 언약에 입각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새 언약“을 소개하심으로써 그것을 “옛 언약“이라고 부르신 사실은 옛 레위 계통 제사장 직분이 이 십자가로 폐하여졌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 서신을 읽는 독자들이 아론에게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옛 언약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을 뜻한다. 이미 옛 언약은 새 언약으로 대치되었으며(본 장에서), 저자는 새 언약이 더 나은 것임을 입증하였다. 그렇다면 새 언약은 어떻게 옛 언약보다 더 나은 것인가?
1. 더 나은 제사장이 사역함(8:1)
이 구절은 이전에 제시된 논증들의 “종합“이다. “이러한 대제사장(7:26-28 에 묘사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는 말로써 아론보다 더 우월한 대제사장이 있음은 이미 입증되었다.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는 그의 구속사역이 완성되었기에 보좌에 앉아 계신다. 그러나, 아론 계통의 제사장은 어느 누구도 보좌에 앉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레위 계통의 그 어떤 제사장도 보좌에 앉은 일이 없다!
그리스도는 영광 중에 계신 우리의 왕이시며 대제사장이시다. 그리고 더 나은 대제사장이시기 때문에 더 나은 언약으로 우리를 중재하신다. 그가 하늘에서 옛언약을 수행하지 않으실 것은 분명하다. 새 대제사장은 새롭고 더 나은 언약을 요구하신다."
2. 더 나은 장소에서 사역함(8:2-5)
그리스도께서 만일 땅에 계시다면 그는 제사장으로 사역하실 수 없으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레위 지파가 아닌 유다 지파에서 나셨기 때문이다. 당신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계실 때 성전 뜰에 계신 것은 보았지만 성소나 지성소에 계신 것은 결코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은 오직 새 언약의 우월성을 입증한다. 새 언약은 땅에서가 아니라 하늘에서 수행되는 것이다.바울은 또 다른 논증을 덧붙인다. 즉, 하늘의 장막이 본래적인 것이며, 세상의 장막(성전)은 모사일 뿐이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산에서 그에게 계시하신 본을 좇아 장막을 지었다(출 25:9/출 25:40). 유대인들은 그들의 성전과 기구들과 의식들을 존중하였으나 이러한 것들은 다만 그림자들인 것이다. 실체는 하늘에 있었다. 옛 언약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땅에 있는 모형들을 위해 하늘에 있는 실체들을 버린다는 뜻이다.
하늘의 성소에서 섬기시는 하늘의 대제사장이 있다는 것이 어찌 위대한 일이 아니겠는가! 불행하게도 오늘날 선의의 그리스도인조차 옛 언약과 새 언약을 서로 혼합하며 지상적인 것 때문에 천상적인 것을 버리며, 그림자로 인해서 본체를 버리는 일이 있다. 촛대, 분향, 의복, 제단, 세상의 제사장들 등은 모두 옛 언약에 속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천상 사역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3. 더 좋은 약속 위에 세워짐(8:6-13)
새 언약의 약속들이 옛 언약의 약속보다 훨씬 낫다는 것이 본 장의 핵심적인 논거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더 좋은 언약에 기초한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이 더 나은 제사장 직분임에 틀림없다. 사실 그러하다! 먼저 예레미야 31장 31-34절을 읽고 더 나은 약속들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은혜의 약속(6-9절)-8-13절에서 여섯 번이나 하나님은 “내가... 하리라!“(I will)고 말씀하신다. 이것이 은혜이다! 옛 언약은 백성들에게 순종을 요구하는 종의 멍에였다. 그러나, 새 언약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위해 하실 바를 강조하는 것이며, 그들이 하나님을 위해 해야 할 바를 강조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옛 언약에서 무슨 잘못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 자신에게서 잘못을 찾으신다는 점에 주의하자.
율법은 신령한 것이나 사람들은 육신에 속한다. 로마서 7장 14절은 “죄 아래 팔렸도다“라고 말하며, 로마서 8장 3절은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졌다“고 분명히 밝힌다. 다른 말로 하면, 이스라엘의 실패는 옛 언약의 연약함때문이 아니라 인간 본성의 연약함 때문인 것이다. 바로 여기서 은혜가 개입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율법이 할 수 없는 바를 십자가를 통하여 행하셨다!
내적 변화의 약속(10절)-새 언약에 속한 약속을 알아보기 위하여 예레미야 31장 31절을 읽고, 여기에 마음의 내적 변화가 포함된다는 것에 유의하자. 고린도후서 3장에서는 이 놀라운 주제에 관하여 부인하는 설명을 볼 수 있다. 옛 언약은 돌비에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쓰인 것이지만, 새 언약은 인간의 마음과 그 정신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기록되었다!
외형적인 율법은 결코 인간을 변화시킬 수가 없다. 만일 율법이 사람의 행위를변화시킬 수 있었다면 그것은 속 사람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신 6:6-9 참조). 이것이 로마서 8장 4절이 뜻하는 바이다. “율법의 요구(의)가 우리에게서 이루어지게 하려 함이라.“ 물론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게 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한없는 축복의 약속(11절)-개인 전도가 필요없게 될 날이 올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주님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약속의 궁극적인 성취는 왕국의 설립을 기다린다. “다 나를 앎이니라“는 말씀은 구약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라“는 반복된 약속과 유사하다. 여기에는 유대인처럼 이방인도 이 지식을 갖게 되리라는 뜻이 들어 있다.
사죄의 약속(12절)-히브리서 10장을 보면, 옛 언약 하에서는 죄를 생각하게 하였을 뿐 죄를 없게 하지는 못했다고 한 것을 볼 것이다. 염소와 수소의 피가 죄를 덮어 가리울 수는 있었으나 오직 하나님의 어린 양의 피만이 “세상 죄를 지고 갈“ 수 있었다(요 1:29). 새 언약은 짐진 죄인에게 참으로 놀라운 약속을 주신다! 그의 죄가 용서되며 잊혀진 바되는 것이다!
영원한 축복의 약속(13절)-하나님께서 “새 언약“이라고 부르신 사실 자체가 옛 언약은 쇠하고 지나가 버릴 것임을 뜻한다. 히브리서가 기록될 즈음에는 로마의 군대가 주후 70년에 팔레스틴을 침략할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없어져가는 것이니라“는 구절은 잠깐만 지나면 성전과 제사장의 활동이 영원히 멈추게 될 것임을 시사한 것이었다. 그러나, 새 언약은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처럼 영원히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새 언약의 백성을 다루심에 있어서는 아무런 변화도 없을 것이다.
이 새 언약은 언제 들어오게 되었는가? 누가복음 22장 20절 이하와 고린도전서 11장 23-26절은 새 언약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리심으로 세워졌다고 명백히 말씀한다. 히브리서 12장 24절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오늘날 새언약의 중보이시다.
그러나, 예레미야 31장 31절 이하는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이 새 언약을 약속하셨다고 언급한다! 우리는 이 언약을 교회에 적용시켜야 할 무슨 권리를 가지고 있는가? 그 대답은 사도행전의 경륜적인 특성에 놓여 있다.
당신은 사도행전 1-7장이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왕국을 제공하시는 내용임을 회상할 것이다. 성령께서 오순절에 신자들 안에 거하시려고 강림하셨을 때 새 언약은 강력히 이행되었다. 만일 이 민족이 그리스도를 못박은 죄를 회개하고 그를 메시야로 영접하였다면 새 언약의 모든 축복들과 약속들의 뒤따랐을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멧세지를 거절하였고 성령을 거스렸다. 그리하여이 민족은 제외되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하나님은 이방인들을 새 언약에로 인도하셨으며, 믿음을 가진 유대인과 이방인들로 된 놀라운 새 일, 곧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이룩하셨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새 언약에 참여하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장래의 어느 날 “저들이 찌른 자를 보게 될 것이며“, 왕국이 설립되면 이와 같은 동일한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 옛 제사보다 나은 그리스도의 제사-히브리서 9장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이 아론의 직분보다 더 나은 것임을 보았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이 더 나은 반열인 멜기세덱의 반차에 속하며(7장), 더 좋은 언약 곧 새 언약 하에서 직무를 수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8장). 본 장에서는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이 더 좋은 성소로부터 수행되는 까닭에 더 우월한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
1. 옛 언약 하의 열등된 성소(9:1-10)
저자는 옛 언약의 성소(Sanctuary)가 열등했다는 이유를 다섯 가지로 제시한다.
그것은 세상에 있었다(1절)-“세상에 속한“이라는 말은 “이 세상 것으로 된, 땅에 있는“의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하늘에 있는 원형을 제공하셨으나, 모세는 땅 위에 세상의 재료로 장막(성막, 그리고 솔로몬의 성전)을 세웠다. 성소를 정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며 그 곳에서의 섬김도 하나님의 지시대로 이행되었지만, 그 모든 것들은 여전히 땅 위에 있었다. 본 장의 후반부에서 볼 것이지만, 새로운 성소는 하늘에 있다.
그것은 장차 올 일에 대한 그림자에 불과하다(2-5절)-여기서 저자는 구약 장막의 배치와 그 기구들에 대해 기술한다. 2절과 6절에 있는 “첫장막“이란 성막에서의 첫번째 구역인 성소(the holy place)를 뜻한다. 그리고 7절의 “둘째 장막“이란 모세가 만든 두번째 장막이란 뜻이 아니고, 성막의 두번째 구역인 지성소(the holy of bolies)이다.
놋단과 물두멍은 바깥 뜰에 있었고, 첫 휘장(3절에 유의)이 바깥 뜰과 성소사이에 드리워 있었으며, 성소에는 촛대, 떡상, 향단이 놓여 있었다. 둘째 휘장 뒤에는 지성소가 있었고 거기에는 오직 대제사장안이 매년 대속죄일에만 들어갈 수 있었다(레 16장). 지성소에는 언약궤(법궤)가 놓여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의 모형이었고, 하나님께서 새 언약 하에서 주고자 하셨던 위대한 영적인 실제의 그림자였다.
그것은 백성들이 가까이 할 수 없는 것이었다(6-7절)-제사장들만이 뜰과 성소에서 섬길 수 있었으며, 대제사장만이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다. 앞으로 나오겠지만 하늘의 성소는 하나님의 모든 백성에게 열려져 있다.그것은 잠정적인 것이었다(8절)-사람들과 하나님 사이의 휘장은 하나님의 존전으로 가는 길이 아직 열려 있지 않다는 것을 백성들에게 알려 주었다. 9절은 휘장이 가리워져 있는 동안은 장막이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는 것으로, 이것은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모형(표상, 비유)으로 말해 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을 때 휘장이 찢어짐으로써 지상의 성소가 필요없게 되었다.
그것은 마음을 변화시키는 효과가 없었다(9-10절)-날마다 제사장들은 같은 제사를 드렸다. 피는 죄를 가리웠으나 죄를 씻어내지는 못했다. 동물들의 피가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의 마음과 양심을 변화시킬 수 없었다. 이것은 “육체의 예법“, 곧 영혼이나 양심이 아니라 몸을 다루는 의식이었다. 이 의식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충만한 하나님의 은혜의 계시를 기다리는 잠정적인 것이었다."
2. 새 언약 하의 우월한 성소(9:11-28)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여기서 장면이 바뀌어, 바울은 새 언약의 성소(Sanc-tuary)가 왜 우월한지를 설명하며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이 아론의 직분보다 왜 더 우월한가를 설명한다.
그것은 하늘에 있는 성소이다(11절)-그리스도는 “드디어 실현된“ 좋은 일들의 대제사장이시다. 그의 하늘 성소는 모세에게 제시되었던 원형으로서 더 위대하고 더 완전하다. 왜냐하면 이것은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새 창조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이 창조에 속하지 않는다.“ 땅의 장막은 옛 창조, 옛 언약에 속하였으나, 그리스도의 성소는 새 창조. 새 언약에 속한다(24절).
그것은 생활을 변화시키는 데 효과적이다(12-23절)-참으로 대조적이다! 대제사장은 그의 생애 동안에 여러 번 다른 피를 가지고 지성소로 들어갔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피를 가지고 단번에 하나님의 존전으로 나아가셨다! 구약의 제물들은 의식으로 몸을 정결케 했으나(13절) 결코 마음과 양심에까지는 이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모두를 위하여 단번에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는 양심을 깨끗케 하며, 믿는 자에게 불변하는 완전한 신분을 하나님 앞에서 갖게 한다. 유대인의 제반의식은 새 언약 하에서의 하나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와 대조해 볼 때, 단지 “죽은 행실“에 지나지 않았다.
15-23절은 유언의 예를 사용한다. 어떤 사람이 자기 재산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지 뜻을 정하고 결심을 한다. 그러나, 그 유산은 그 사람이 죽기까지는 어느 누구에게도 돌아가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그의 교회에게 줄 영원한 기업을 가지고 계셨으며, 이 기업은 그리스도의 “최종적인 뜻이며 유언“인 새 언약에서 판명된다.
그러나, 그 뜻이 효력을 발생하기 위해서는 그가 죽어야만 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그리스도께서 이 뜻의 효력을 발생시키기 위하여 죽으셨으며, 그리고서 그것을 몸소 시행하기 위하여 죽은 자로부터 다시 되돌아오셨다! 물론 모세아래 있는 첫 언약도 피로써 인쳐졌으며(출 24:6-8) 땅의 성소가 세워졌을 때도 피로써 바쳐졌다. 그러나, 이 짐승들의 피는 단지 의식적 정결은 가져올 수 있었을 뿐, 내적 깨끗함을 주기란 불가능했다.
23절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하늘에 있는 것들도 역시 정결케 한다고 암시한다. 이는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정결케 된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12:22-/엡 2:22)을 가리키는 것 같기도 하고, 하늘에 사단이 나타남으로 인해서(계 12:3-) 하늘 성소를 특별히 정결케 해야 했던 바를 암시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것은 그림자가 아니라 성취이다(24절)-아론의 제사장들은 임시적인 장막에서 섬겼는데 그것은 장막이 장차 올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모형들로 가득 찬, 사람이 만든 장막에서 섬기지 않으신다. 그는 이러한 구약의 모형들의 성취인 하늘 성소에서 섬기고 계신다. 대제사장은 백성들을 위해 시은소에 피를 뿌렸으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존전에서 우리를 대표하신다! 사람들이 감각을 기쁘게 하는 종교적인 의식들에 매달려 그리스도의 위대하신 하늘 사역을 믿음으로 붙들지 못한다면 이는 참으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완전한 제물에 근거한다(25-28절)-그리스도께서 드린 제물의 우월성은 10장의 주제인데도 저자는 여기서 이에 대해 언급한다. 제사장의 사역은 그들의 제물이 확정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결코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최종적인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죄를 단지 가리우는 것이 아니라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다.
이것은 휘장이 찢어져 모든 신자들이 하나님의 존전으로 나아가는 길이 열렸다는 뜻이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나타나시며, 우리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간다. 구약의 유대인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지 못했으며 감히 지성소에 들어갈 생각도 못했으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완전한 사역으로 인해서(“다 이루었다!“)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열린 길이 우리에게 있게 된 것이다.
24-28절에서 “나타나다“라는 단어가 세 번 사용된다는 점에 주목하자. 그리스도께서 죄를 없게 하시려고 과거에 나타나셨던 일(26절)과 우리를 위하여 현재 하늘에 나타나신 것(24절)과, 우리를 영광으로 인도하시려고 미래에 나타나실 것(28절)이 있다. 대제사장이 대 속죄일에 장막 안으로 사라지면 사람들은 그가 다시 나타나기를 기대하며 밖에서 기다렸다. 하나님께서 제사를 거절하셨다면 그는 죽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가 다시 나오면 거기에는 큰 기쁨이 있었다.
우리의 대제사장이 영원한 지성소로 우리를 데리고 가시어 함께 거하려고 나타나신다면 우리는 참으로 큰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 온전한 제물이신 그리스도-히브리서 10장
본 장은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이 자신을 제물로 드리신 우월한 제물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여 우월한 제사장 직분에 대한 부분(7-10장)을 종결짓는다. 저자는 그리스도의 희생제물이 구약의 제물보다 더 우월하다는 세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1. 죄를 없게 함(10:1-10)
구약의 제물들은 비효과적이었다(1-4절)-그 한 가지 예로, 그것들이 모형과 그림자의 시대에 속한 것이었으므로 마음을 변화시킬 수 없었다는 점이다. 이 제사는 “해마다“ 반복되었으며(1절) “날마다“(11절) 행하여졌다. 이같은 사실은 구약의 제물들이 죄를 없게 할 수 없었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대제사장과 그의 조력자들이 제사를 반복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9장 10-14절에 나타난 대로 구약의 의식들은 육체에 관한 일들과 의식적으로 부정함만을 다루고 있었다. 따라서 그것들은 결코 마음이나 양심에 이를수가 없었다. 이러한 의식들은 “죄를 기억나게“ 했으나 죄를 사하지는 못했던 것이다(9:22 참조). 주의 만찬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것이며 우리의 죄를 기념하지 않는다(고전 11:24/눅 22:19).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8:12)
그리스도의 희생제물은 효과적이다(5-20절)-여기서 저자는 시편 40편 6-8절을 인용하는데,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이란 구절을 성령께서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는 말로 바꾸신다. 여기 관련된 참고 구절은 아마도 출애굽기 21장 1-6절이었을 것이다. 안식년이 되면 유대인은 그들의 히브리 종을 자유하게 하라는 율례를 받았다. 그러나, 만일 종이 그 상전을 사랑하여 그와 함께 유하기를 원하면 송곳으로 귀를 뚫어 구멍을 냄으로써 표를 삼고, 그 순간부터 종의 몸은 영영히 그의 상전에게 속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성령은 한 몸을 예비하셨으며, 그리스도는 그의 아버지의 뜻을 따라 그의 몸을 온전히 바치셨다. 그 몸은 세상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희생되어야 할 몸이었다. 시편 51편 10, 16절과 사무엘상 15장 22절, 이사야 1장 11절 이하와 같은 구절들은, 하나님께서 짐승들의 피로부터 완성된 사역이라고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셨다는 점을 명백히 하고 있다. 하나님은 믿는 자의 마음을 원하셨다.
8-9절에서 저자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취하여,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짐승의 제물로 세우신 첫 언약을 폐하시고 그 자신의 피로 새 언약을 세우셨음을 보여 준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심으로써, 우리는 그에게로 단번에 구별되었다(성별되었다)."
2. 결코 반복될 필요가 없음(10:11-18)
서로 상이한 점들을 살펴보자. 구약 제사장은 매일 서지만 그리스도는 앉으셨으며, 구약 제사장은 같은 제물을 자주 드렸으나 그리스도는 한 제물(자신)을 단번에 드리셨다. 한 제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따로 구별된 자들에게 의로운(온전한) 신분을 영원히 허락하셨다. 10절에서는 우리가 단번에 거룩하게 되었다는 것을, 그리고 14절에서는 날마다 우리가 거룩하게 되어간다는 점을 말한다. 이것이 신분적, 점진적 성화이다.
구약의 제물들은 죄를 생각나게 했으나 그리스도의 희생 제물은 죄의 용서를 가능하게 한다. “용서“란 “멀리 옮김“을 뜻한다. 우리는 죄 용서를 받았고 그 죄는 영원히 멀리 옮겨졌다!(시 103:12/미 7:19) 매년 대속죄일에(레 16장) 대제사장은 속죄 염소의 머리에 손을 얹고 민족의 죄를 고한 다음 그 염소를 광야로 끌고가 길을 잃게 하였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처리하셨던 바이다. “더이상 죄를 생각나게 할 것이 없기“ 때문에 “더이상은 죄로 인한 고난도 없다.“ 성령에서 우리의 마음에 증거하시며, 우리에게 약속된 새언약의 축복이 있다(14-17/ 렘 31:33-)."
3.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 놓음(10:19-31)
설명(19-21절)-저자는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죽으심으로써 믿는 자가 갖게 되는 축복들을 재고찰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신분의 보장을 받기 때문에 그의 존전으로 나아갈 담력(문자적으로는 “말할 자유“)을 가질 수있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는 어떠한 휘장도 드리워 있지 않다. 그 장막의 휘장은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그 몸으로 가리워졌기 때문이다(요 1:14).
그의 몸이 제물로 드려졌을 때 휘장은 찢어졌다. 우리가 가진 이 길은 새 언약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길이며, 또한 우리에게 살아계신 대제사장이 계시기에(7:25) 그 길은 산 길이다. 하나님의 집(교회)에는 영광 중에 거하시는 위대한 대 제사장이 계신다!
초청(22-25절)-여기에는 “... 하자“라는 진술이 세번 나온다(6:2).
-흘러 떠내려가지 말고 “하나님께 나아가자.“-시련으로 인하여 흔들리지 말고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굳게 잡자.“
-모범을 보임으로써 다른 신자들이 그리스도께 진실하도록 격려하며 그들을 “돌아보자.“
만일 우리가 서로 책망하려면 사랑으로 해야만 한다(고전 13:5). 하늘에서 오는 우리의 담력은, 땅에서 영적인 성장과 헌신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이러한 신자들은 시련들로 인해서 그리스도인의 교제와 서로 필요로 하는 상호 격려를 소홀히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제사장이시며 우리는 제사장 나라이므로(벧전 2:9), 예배와 가르침과 봉사를 위해 우리는 함께 모여야만 한다. 교회에 출석하는 것은 중요하다! 구약의 유대인은 성막에 들어갈 수가 없었고, 대제사장 역시 원하는 때면 언제라도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하여, 우리에게는 하늘로 나아가는 산 길이 있다! 우리는 아무때나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가 있는 이러한 특권을 이용하고 있는가?
권면(26-39절)-이것은 다섯 가지 권면들 중에서 네번째 것이다(개요 참조). 이 권면은 의도적인 죄를 경고하고 있다. 부디 기억해야 할 것은 이 권면이 신자들에게 하는 것이며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과, 이전의 세 가지 권면에 잇따른 권면이라는 점이다.
부주의한 그리스도인은 말씀을 등한히 여김으로 인해서 떠내려 가기 시작하고, 다음으로 그는 말씀을 의심하며 그 다음으로는 말씀에 대해 점점 무디어진다. 그 다음 단계는 고의적으로 죄를 범하며 자기의 영적 유산을 업신여긴다. 이런 특이한 죄에 관한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살펴보자.
이 죄는 한 때 범한 한 번의 죄가 아니다. 26절에 나오는 “짐짓 죄를 범한즉“이란 말은 “고의적으로 죄를 계속 범한즉“으로 읽어야 마땅하다. 이 말은 요한일서 3장 4-10절에 나오는 동사의 진행형 시제와 같다. “지속적으로, 습관적으로 죄를 짓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지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용서받지 못할 죄들“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고의적인 반역이라고 보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태도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구약에서는 고의적이며 뻔뻔스러운 죄들(출 21:14/민 15:30)에 대해 희생제물을 드리지 않았다. 모르고 지은 죄와 갑작스러운 충동으로 지은 죄는 덮어졌으나 짐짓 지은 죄는 당연히 형벌을 받았다.
29절은 우리의 구원과 그것을 값주고 사신 보혈을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여기신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성부께서는 그 아들을 귀히 여기시고, 성자께서는 그의 피를 흘리셨으며 성령께서는 믿는 자에게 십자가의 공로를 적용시키신다. 우리가 짐짓 죄를 범하는 것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죄를 범하는 것이 된다.저자는 신명기 32장 35-36절을 인용하여 구약의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믿지 않는 자들이 아님) 그들이 심은 것을 거두게 하셨고 고의적으로 불순종하였을 때는 심판하셨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었다는 사실은 그들로 하여금 훨씬 더 큰 의무들을 지게 하였다(암 3:2).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심판하신다(롬 2:16/고전 11:31-32/벧전 1:17 등). 물론 이것은 영원한 심판이 아닌 이 생에서의 징계와 내생에서의 상급의 상실을 말하는 것이다. 34-35절에서는 구원이 아닌 충성에 대한 상급에 관하여 강조하고 있음을 유의하자(고전 3:14-15/고전 5:5/고전 9:27/고전 11:30 참조).
32-39절에서 저자는 6장 9-12절에서처럼 그들이 진정 거듭났는지는 그들의 생활이 입증할 것이라는 놀라운 확신을 준다. 이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그 기초를 둔 사람들 중에 있으므로(합 2:3-4), 진실로 구원을 받지못한 자들이 하듯이 “뒤로 물러설“ 수는 없는 것이다(요일 2:19). 그들의 운명은 파멸에 있지 않고 온전함에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의 마음 속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으며 그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 믿음의 영웅들-히브리서 11장
본 장은 히브리서 10장 32-39절에 대한 실례로서, 역사를 통해 사람들이 불가능한 것을 믿음으로 성취했던 사례를 보여 준다. 10장 38절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진술하며, 본 장은 믿음이 어떠한 형편이라도 이겨낼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1. 믿음의 정의(11:1-3)
참된 성경적 믿음은 “그러기를 바란다“는 정서적인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참된 확신이다(롬 10:17). “실상“이란 말은 “보증“을 의미하며 증거란 “증명“을 뜻한다. 그러므로 성령이 말씀을 통하여 어떤 사람에게 믿음을 줄 때, 그의 마음에 믿음이 생겼다는 사실이 그가 필요로 하는 모든 보증과 증거가 된다.
오스왈드 샌더스(J. Oswald Sanders)박사는 “믿음이란 믿는 영혼으로 하여금 미래를 현재처럼,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처럼 할 수 있게 한다“고 말했다. 믿음을 통하여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본다(1, 3, 7, 13. 27절에 유의). 마음에 참된 믿음이 있으면 하나님은 그의 영으로 그 마음에 증거하신다(2, 4, 5, 33절에 유의).
믿음으로 노아는 장차 올 심판을 보았으며 아브라함은 장래의 한 도성을 보았다. 요셉은 애굽으로부터 탈출할 것을 보았으며 모세는 하나님을 보았다. 반스 하브너(Vancr Havner)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믿음으로 그들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았으며, 멸망치 않을 것을 택하였고 불가능한 것을 성취했다.“
3절에서 창조로 예증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에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믿음은 어떤 사실들을 성취시킨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매 그대로 되었다!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그가 하신 말씀을 우리가 믿을 때 말씀의 능력이 우리의 생활에서 어떠한 일을 성취한다. 옛 창조시에 역사했던 그 말씀이 새 창조에서도 역사하는 것이다."
2. 증거된 믿음(11:4-40)
아벨(4절/ 창 4:3-)-하나님은 피 있는 제물을 요구하셨는데(9:22) 아벨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으나, 가인은 믿지 않았으며 거절하였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을 받으심으로써 그의 믿음을 증거하셨고, 이 증거로 말미암아 아벨은 여전히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다.
에녹(5-6절/창 5:21-24)-사악한 시대에 에녹은 헌신의 삶을 살았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함으로써 이같이 행하였다(유 24절). 그는 자신의 믿음이 보상받을 것을 믿었고, 하나님께서 그를 하늘로 데려가심으로써 그는 죽음을 보지 않았다. 히브리서에 있어서 믿음에 대한 보상의 문제는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진다(10:35/11:26/12:11).
노아(7절/ 창 6장 이하)-아무도 비로 말미암는 심판을 본 사람이 없었으나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그것을 보았다. 믿음은 행동을 이끌어 낸다. 노아의 태도와 행위는 그를 둘러싼 믿지 않는 사악한 세상을 정죄하였다.
아브라함(8-19절/ 창 12장 이하)-여기서 우리는 위대한 “믿음의 조상“을 보는데, 그는 구약에서 가장 위대한 믿음의 본을 보인 이들 중 한 사람이다. 아브라함은 어디로 가야 할지(8-10절), 어떻게 해야 할지(11-12절), 언제해야 하는지 모를 때에(13-16절), 그리고 왜 해야 하는지 모를 때에(17-19절) 하나님을 믿었다. 그로 하여금 고향을 떠나게 했던 것, 순례자로 살게 했던 것, 하나님이 명하신 곳이면 어디든지 가게 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이었다.
그와 사라가 “죽은 자와 방불한“ 상태에 있었을 때에 믿음은 그들에게 잉태할 힘을 주었다. 아브라함과 그의 순례의 후손들은, 히브리서의 독자들이 유혹을 받고 행한 것과는 달리 뒤로 물러서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들의 눈을 하나님께 고정시키고 승리를 향해 전진해 나갔다(13-16절).
이삭(20절/ 창 27장)-그는 아브라함에게서 물려받은 말씀을 믿었으며, 야곱을 축복하였다.
야곱(21절/ 창 48장)-그의 실패들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죽기에 앞서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축복하였다.
요셉(22절/ 창 50:24-/출 13:19/수 24:32)-요셉은 이스라엘이 어느 날 애굽으로부터 해방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바이기 때문이다(창 15:13-16). 요셉이 그처럼 많은 시련들을 통과하고 자기 생애의 대부분을 이방 애굽에서 살았지만 전혀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모세(23-29절/ 출 1-15장)-모세의 부모들이 모세를 숨길 만한 믿음이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가 특별한 아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행 7:20). 모세 자신의 믿음이 애굽에서의 그의 지위를 거절하고 이스라엘과 자신을 동일시하게 하였다.
다시 말해서 그는 잠시 누릴 죄악의 낙을 거절함으로써 믿음의 상급을 바라보았던 것이다(26절). 말씀을 믿는 믿음이 유월절의 구원이 있게 했고(애굽사람들은 문에 바른 피를 보고 얼마나 조롱하였을까!) 또한 홍해를 건너게 하였다.
여호수아(30절/ 수 1-6장)-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여리고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 그 약속을 믿는 믿음이 그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스라엘은 7일동안 그 성을 두루 돌았는데 그 성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어리석게 보였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은 보상을 받았다!
10) 라합(31절/ 수 2장/ 수 6:22-27)-그녀의 믿음의 고백은 여호수아 2장 11절에 나와 있다. 그녀의 믿음은 정탐군들을 구원하여 준 행동으로 옮겨졌다(약 2:25). 그녀는 기생이었지만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며 그리스도의 조상에까지 들게 되었다(마 1:5). 그녀가 또한 자기 가족도 구원하였던 것을 보면 그녀의 믿음은 전파하는 믿음이었다(수 6:23).
11) “다른 이들“(32-40절)-어떤 이들은 이름이 나와 있고 또 어떤 이들은 이름이 나와 있지 않다. 그러나, 이 모든 사람들은 믿음의 거장에 속한다. 저자는 구약의 전 역사를 믿음의 승리에 관한 기록으로 본다. 어떤 승리들은 죽음에서 구원을 받는 것과 같이 공개적이며 기적적이었으나, 다른 어떤 것들은 “연약함에서 벗어나 강하여지고... 의를 이루는“ 것과 같이 개인적이며 평범한 것이었다. 어떤 이들은 믿음으로 구출되었으며, 다른 이들은 고난을 피하지 않았는데 이러한 경우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고난을 이겨낼 은혜를 주셨다.
믿지 않는 세상은 이러한 신자들을 “찌꺼기, 병약한 사람들, 골치거리“로 보았으나, 하나님은 그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비록 사람들이 그들을 거절했어도, 그들 모두는 하나님께로부터 그들을 칭찬하는 믿음의 증거를 받았다(39절). 그들은 모두 축복의 상급을 맛보았다.
비록 믿음이 이 사람들로 약속들(복수형)을 받게는 하였지만, 그 약속의 성취(39절)는 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 약속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13절/ 벧전 1:11-12 참조). 40절은 이러한 구약 성도들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언약에 참여하는 현재의 신약 그리스도인들도 포함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히브리서에는 “더 좋은 것“이 더 좋은 제사장, 희생제물, 성소, 언약 등으로 나타나 있었다.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 약속의 상속자가 된다(6:17-18). 왜냐하면 우리의 영적인 축복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하신 약속들의 결과이기 때문이다(롬 11:13-29). 물론 이러한 약속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제 영적으로 성취되었지만(갈 3:1-) 그것들은 “장차 오는 세상“에서 이스라엘에게 문자적으로 성취될 것이다(히 2:5-9).
본 장이 주는 교훈은 여러 가지이나 몇 가지만을 언급해도 도움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믿음을 통하여, 오직 믿음만을 통하여 역사하신다. 이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며 그의 축복을 받는 유일한 방법이다.
믿음은 말씀과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선물이다. 이것은 우리가 “만들어 내는“ 어떤 것이 아니다.
믿음은 언제나 시험을 받는다. 때로는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이 어리석게 보이지만, 결국은 언제나 믿음이 이긴다.
불신앙은 언제나 심판을 받는다. 이스라엘의 불신앙의 40년에 대해서는 언급되지 않았다(29-30절에 유의).
하나님의 시대는 변화한다. 그러나, 믿음의 원리에 있어서는 구약과 신약이 동일하다."
▣ 구름같이 둘러싼 증인들-히브리서 12장
본 장의 핵심 단어는 인내이다(1-3, 7, 20절). 이 단어는 “시련 아래서 견디다, 진행이 곤란한 때에도 계속되다“는 뜻이다. 이 그리스도인들은 시험의 때를 통과하고 있었고(10:32-39) 포기해 버리려는 유혹을 받았다(12:3). 이들 중에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를 위해 죽도록 부름받은 자는 없었지만,(4절) 더 쉬운 상황은 아니었다. 바울은 이들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계속 강건하도록 지원하려고 세 가지의 격려의 말을 상기시키고 있다(5절에 유의).
1. 하나님의 아들의 모범(12:1-4)
11장에서 그의 독자들은 구약의 위대한 성도들이 어떻게 믿음을 통하여 생의 경주에서 승리하였는지를 회고하여 살펴보았다. 이제 그는 “예수를 바라보자“고 하며 그들의 믿음과 소망을 굳게 하라고 훈계한다. 여기에는 경기장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는데, 관중들은 이전 앞 장에서 열거한 믿음의 영웅들이며, 경주자들은 시련을 통과하고 있는 신자들이다(하늘나라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거나, 여기 이 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알고 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이것은 하나의 예화이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경주에서 이기려고 한다면 달리는 데에 힘들게 하는 무거운 것들과 죄를 제거해야만 한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목표가 되시는 그리스도께 눈을 고정시켜야만 한다(빌 3:12-16 참조). 그리스도는 이미 믿음의 경주를 마치셨으며 우리를 대신하여 이기셨다! 그리스도는 믿음의 주요, 새 길을 닦는 개척자요, 온전케 하시는 분이시다. 알파와 오메가이시며 시작과 나중이시다. 그리스도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가 마치신다! 그는 우리로 승리하도록 내내 지켜보신다.
물론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계실 때 많은 시련을 통과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시는 데 도움을 준 것은 무엇이었는가?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이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목표였는데, 그것은 어느 날 하늘에서 아버지 앞에 그의 교회를 서게 할 기쁨이었다(유 24절/요 15:11/요 16:20-24/요 17:13).
죄에 대항한 그리스도의 전투는 그를 십자가로 이끌어 갔고 그 생명을 값으로 지불하게 하였다. 우리들 대부분은 피흘리기까지 경주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의 임무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다. “그를 생각하라!“ “예수를 바라보자!“ 이것이 경주가 어려워질 때 격려와 힘을 주는 비결이다. 우리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 그리고 우리의 환경에서 눈을 돌려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고정시켜야 할 것이다."
2. 하나님의 사랑의 확신(12:5-13)
5장 12절에서 언급한 대로 이런 그리스도인들은 말씀의 기본적인 진리들을 이미 잊었다. 5절은 그들이 하나님께서 고난에 관하여 말씀하신 바조차 잊었다고 전해 준다. 그는 잠언 3장 11절 이하를 인용하여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있어서 고난은 형벌이 아닌 징계임을 상기시킨다.
징계라는 단어는 문자 그대로는 “아이들을 훈련시킴, 훈육“이란 뜻이다. 그들은 영적인 갓난아이였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성숙시키시는 한 방법은 시련을 과하게 하는 것이었다. 형벌은 재판관의 일이지만 징계는 아버지가 하는 일이다. 형벌은 율법을 세우는 일이나, 징계는 자녀를 더 나아지게 하기 위한 사랑의 증거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징계의 손길에 순복하여 성장해야 할 때에 도리어 거스리는 일이 종종 있다. 사단은 우리가 시련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지 않는다는 증거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는 고난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최선의 증거라고 말해 준다!
신자의 삶에 고난이 닥쳐 올 때에는 몇 가지의 다른 반응이 나타난다. 환경에 저항하며 하나님의 뜻과 맞설 때에는 환경이 더욱 어렵고 힘겹게 된다.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하나님은 더이상 날 돌보지 않으신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당할 일이 아니야!“ 이러한 태도는 영혼의 슬픔과 쓰라림만을 더해줄 뿐이다.
바울은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고 논술한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이요 사생자가 아니라는 최선의 증거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단련하신다는 사실에 있다. 9절에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순복시키지 않으면 우리가 죽을 수도 있다고 말해 준다. 이것이 죽음에 이르는 죄이다.
또는 그리스도인이 포기하고 중단하기도 찬다. 이것은 그릇된 태도이다(3, 12-13절). 하나님의 징계는 우리를 성장하도록 돕는 것이지 우리를 쓰러뜨리려는 매질이 아니다. 바른 태도는 믿음으로 견디며(7절) 하나님께서 그의 온전한 계획을 이루시도록 허락하는 데에 있다. 11절의 “후에“라는 축복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 전진하게 된다. 징계는 우리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는,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이름을 더욱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 3.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12:14-29)
이 부분은 히브리서에 나오는 다섯번째 권고이며, 그 중심 사상은 은혜이다(15, 128절), 여기서는 모세와 그리스도, 시내산과 시온산, 옛 언약과 새 언약 사이의 대조점이 나온다. 율법 하에서는 연기와 불로 뒤덮인 산으로 인해 두려움과 공포가 있었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을 때 사람들은 두려워 떨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이스라엘이 시내산에서 가졌던 경험보다 더 위대한 영적인 체험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하늘의 제사장, 하늘의 집, 하늘의 교제, 그리고 은혜와 사랑의 멧세지를 전해 주는 하늘의 음성이 있기 때문이다.
22-24절의 묘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언약의 축복들에 관한 것이다. 시온산은 곧 멸망될 운명에 처했던 지상의 예루살렘과 대조되는 천성이다13:14/갈 4:26). 거기에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곧 성도를 섬기는 천군 천사와 장자들의 총회(1:6), 그리고 구약 성도들이다.
“온전케 된“이란 말은 영광 중에 있는 신자들이 지금 완전한 부활의 몸을 입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도리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인하여 이제 온전케 된 구약 성도들을 가리키는 말이다(11:40/10:14). 구약의 성도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하늘나라에 간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역의 온전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상의 죽음이 있기까지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명부의 맨 위에는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기록되어 있다. 이 사람들이 어떻게 곧 파괴될 지상의 도성과, 역시 파괴될 지상의 성전, 지상적 제사장들과 제물들로 되돌아갈 수 있었겠는가? 그리스도의 피는 모든 것을 해결하였다! 아벨의 피는 복수해달라고 땅에서 부르짖는다(창 4:10). 그런데 그리스도의 피는 구원과 용서를 위해 하늘로써 말씀하신다. 이것이 은혜이다! 그리스도는 은혜의 사역자이시며, 새 언약은 은혜의 언약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실패하는 일은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실패하는 일이 없다(15절).
바울은 신령한 일들을 업신여기다가 축복을 잃은 한 예로서 에서를 든다. “망령되다“는 말은 “성전 밖에 있다“ 또는 “세상적인, 일반적인“이라는 뜻이다. 에서는 회개하지 않았으므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실패하였다(6:6 에 유의). 신자들은 말씀과 성령의 사역을 의지하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의 은혜에 실패할 수도 있다.
“진동케 하시는 하나님!“ 이것이 본 장을 종결짓는 구절들의 주제이다. 우리들은 아무도 사물들이 진동케 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는 견고함과안전을 즐거워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유대인의 경영을 혼돈케 하고 계셨으며 예루살렘 성전을 헐고자 하시는 것이었다. 물질적인 것들은 신령한 실재들이 제자리를 차지하도록 물러나야만 한다.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인 새성전을 짓고 계셨으므로 옛 성전은 물러나야만 했다. 저자는 하나님께서 어느 날 세상 자체를 진동케 하여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이끄실 것을 보이기 위해 학개 2장 6절을 인용한다.
여기에 실제적인 적용이 있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자!“ 어떻게 우리가 은혜를 받는가? 은혜의 보좌에서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에서 우리를 위해 중재하신다 ! 우리는 하나님을 섬겨야 하지만 옛 율법이나 제도로써가 아니다. 우리는 진동치 않을, 또는 옮겨지지 않을 한 나라의 일부가 되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하고 불변한 신령한 실재 위에 우리의 생활을 쌓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건하게 하나님을 섬기자. 그의 말씀을 간직하고 듣기를 거절하지 말자. 왜냐하면 그의 말씀 안에 우리가 필요로 하는 은혜와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25절의 경고는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책의 다른 경고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이 생에서의 하나님의 징계를 다루는 것이지 내생에서의 심판을 다루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이유로 경건함과 경의를 표해야 한다."
▣ 종결과 실천을 위한 말-히브리서 13장
여기서 우리는 이 서신의 마지막 호소를 대하게 된다. 그는 교리적인 진리를 설명했는데, 이제 신자들을 위한 실천적인 권면들로 종결짓고 있다. 그들의 원수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만일 너희가 그리스도 안에 진실하게 거한다면 모든 것, 즉 친구들, 물질적인 유익들, 성전의 종교적 유산들, 제물들, 제사장직분 등을 잃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은 신자가 아무 것도 잃는 것이 없다고 지적한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의 “물리적, 종교적 제도“에 등을 돌린다(이 경우는 유대주의임). 그리고 그의 시선과 마음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참된 신령한 예배에 고정시킨다. 비록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잃을지라도 그가 소유하고 있는 신령한 축복들을 주목해 보라.
1. 신령한 사랑의 친교(13:1-4)
형제를 사랑함은 참된 신자의 표지이다(요 13:35/요일 3:16/살전 4:9 등).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미움을 받으며(요 15:17-27), 상호간에 형제의 사랑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사랑은 시련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3절/ 고전 12:26 참조)과 친절과 같은 실제적인 방법으로 나타난다. 저자는 구약에서 천사들이 아브라함(창 18장)과 기드온(삿 6:11-)과 마노아(삿 13장)를 방문한 사실을 언급한다.
물론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무엇보다도 먼저 가정에서 나타나야 한다. 따라서 저자는 성적인 죄를 경고하고 있다. 혼인이 대단히 가볍게 여겨지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리는 신자나 불신자를 불문하고 하나님께서 부도덕을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다."
2. 신령한 보화(13:5-6)
1세기 당시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했을 때는 그 값을 치러야만 했다. 이 사람들은 그들의 산업을 빼앗기는 고난을 당했으나(10:34) 그들의 증거를 위해서 기쁨으로 그 값을 지불하고 있었다. 그리스도인들도 욕심에 사로잡혀 세상의 것들을 탐하게 되기란 참으로 쉬운 일이다(딤전 6:6-/눅 12:15). “족한 줄로 알라“는 말씀을 읽기는 쉬우나 그대로 살기는 어렵다! 참된 만족은 많은 것들을 소유함에서가 아니라 우리의 삶을 온전히 그리스도께 맡길 때 온다.저자는 하나님께서 모세(신 31:6-8)와 여호수아(1:5)에게 주신 구약의 약속을 인용하여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시킨다. 그리스도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므로 우리는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어떤 물질적인 것을 탐낼 필요가 전혀 없으며(빌 4:19) 사람들의 비난을 두려워할 필요도 전혀 없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도움이시므로 결코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시 118:6).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뜻 안에 있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그에게는 아무것도 부족할 것이 없으며 또한 결코 해를 당할수도 없다."
3. 말씀 안에서의 신령한 식물(13:7-10)
본 장에는 지교회, 목회자와 성도들의 위치에 관한 세 가지 명령이 나온다.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라“(7절)-아마도 이전에 그들을 인도하였으나 지금은 가고 없는 목회자들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인도하던“이란 말은 목회자가 교회의 신령한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기대하게 한다. 그는 어떻게 인도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이다. 이는 양떼를 위한 신령한 식물이다.
신자들은 그들의 신앙의 모범을 본받아야 하나, 그 지도자들은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구절들은 “그들의 행실의 종말(목표)이 예수 그리스도였음을 깊이 생각하라“고 읽을 수 있다. 목회자들은 오고 가지만 그리스도는 변함없이 동일하시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변함없는 제사장 직분을 본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라“(17절)-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영적 지도자들이 가르치고 생활로 보여 준 바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복해야 한다. 목회자가 되어 사람들의 영혼을 지켜본다는 것은 엄숙한 일이다. 당신의 목회자가 당신에 대하여 자신의 일을 분명히 하는데도, 만일 당신이 말씀에 불순종한다면 그로 인한 슬픔은 당신의 것이 될 뿐 그의 것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목회자의 지도력을 존중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에게 문안하라“(24절)-사람들은 그들의 지도자들에게 말해야 하며 그들과 “말하는 사이“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목회자에게 화를 내게 되어 그와 말하기를 거절한다면 그것은 비극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다.
만일 믿는 자가 말씀을 먹지 않으면 “여러 가지 다른 교훈“을 먹게 되어(9절)영적으로 병들게 된다. 성장하고 성숙해지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는 길밖에 없다(엡 4:14-/히 5:11-14). 우리의 마음은 율법이나 세상의 종교로 말미암지 않고 은혜로 말미암아 세워진다. 그리스도인의 “제물“은 죄를 위하여 단번에 희생이 되신 그리스도이시며, 우리가 그의 말씀을 먹는 것은 그를 먹는 것이 된다."
4. 신령한 제물들(13:11-16)
그리스도께로 향한 히브리인들은 성전과 그것의 제사장 직과 희생제사를 잃었으나,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잃은 것보다 훨씬 나은 것을 얻었다! 그리스도는 성전을 거절하셨고 그것을 “강도의 굴혈“이라고 부르셨다. 또한 예수님은 성문밖에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예루살렘 성을 거절하셨다(요 19:20).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대 속죄일의 제물을 불사르는 것에 비교한다(레 16:27). 왜냐하면 둘 다 “영문 밖에서“ 고난을 당했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유대주의로 돌아가려는 유혹을 받고 있었다. 바울은 “아니다. 되돌아 가는 대신 그리스도와 함께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나아가자 !“고 말한다. “휘장 안“(그리스도와의 친교)과 “영문“(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이란 두 어귀는 히브리서의 이중적인 멧세지라고 요약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어떠한 지상의 성읍도 바라보지 않는다. 그것은 믿음의 옛 영웅들이 했던 것처럼 앞에 놓인 천성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14절/ 11:10/12:27).
제사장들의 왕국에서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신령한 제사를 드려야 한다(벧전 2:5). 신령한 제사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의 영광을 위하여 행하여지거나 주어진 그 어떤 것이다. 15절에서 저자는 입술로 말미암는 찬미도 그러한 한 제사라고 주장한다(엡 5:18-19/시 27:6/시 69:30-31). 선행과 물질적인 축복을 서로 나누는 것 역시 신령한 제사이며(16절), 신자의 몸(롬 12:1-2), 제물(빌 4:18), 기도(시 141:2), 상한 심령(시 51:17), 그리스도께로 인도받은 영혼(롬 15:16) 등도 역시 신령한 제사이다."
5. 신령한 능력(13:17-24)
20-21절의 축복 기도는 이 사악한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 수 있을지를 설명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리스도인 안에서 하늘로써 역사하신다. 그리스도께 주어진 목자로서의 칭호에는 서로 다른 세 가지가 있다.
-선한 목자-양을 위하여 죽는다(요 10:11/시 22).
-큰 목자-양을 온전케 한다(히 13:20-21/시 23).-목자장-양을 위하여 돌아오실 것이다(벧전 5:4/시 24 장).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목자이시며 우리를 돕는 분이시다.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서 역사하사, 그를 위하여 살며 그를 섬길 수 있도록 은혜와 능력을 우리에게 부어 주신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언약 관계 때문에, 성숙과 능력을 위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다.
“온전케 하라“는 것이 히브리서의 주재이다. 6장 2절은 “온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고 말한다. 성숙이란 바란다거나 희망한다고 해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도록 할 때 오는 것이다. 이것은 빌립보서 2장 12-16절, 에베소서 3장 20-21절과 평행을 이룬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하나님은 그가 먼저 우리 안에서 행하시기 전까지는 우리를 통하여 행하실 수없다. 하나님은 또한 그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 안에서 행하신다(살전 2:13). 당신은 하늘의 목자로 하여금 당신을 먹이고 당신을 인도하시도록 허락하고 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당신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성숙하는 가운데 있을 것이며,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끝맺는 인사는 초대 교회의 신자들을 함께 묶는 사랑을 보여 준다. 끝맺는 은혜의 축복 기도는 저자가 바울임을 확인하게 해 주는 것이다(살후 3: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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