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敎育 1/원고[청소년교육]

바나바(5) "죽어도 좋을 진리를 품는 사람"

好學 2012. 2. 4. 07:07

본문말씀 : 갈라디아서 2:11~16
설교제목 : 바나바(5) "죽어도 좋을 진리를 품는 사람"


성경상의 인물 중 가장 덕망이 있고, 다른 사람을 품을 수 있는 사람은 바나바임.  그런데 이 같은 인간관계 중심의 사람의 약점은 진리를 놓치고 타협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는 점임. 교회의 진리는 성령 안에서 하나되는 것임.

오늘 본문의 배경은 안디옥 교회에서 발생한 사건임. 안디옥 교회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섞여 있는 교회임. 물과 기름처럼 도저히 하나가 될 수 없는 이들이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었음. 그런데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사람들이 있었음.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온 율법주의자였음. 베드로는 이들이 “왜 유대인인 당신들이 이방인과 함께 지내느냐”는 비난이 두려워 하나가 되었던 이방인을 피했음.

바나바도 마찬가지였음. 이를 두고 긍정적으로 보면 쓸데없는 충돌을 피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음. 그러나 바울이 문제를 제기햇음. 바나바는 바울에 앞서 아니라고 할 것을 아니라고 할 기회를 놓쳣음.

안디옥 교회는 최초로 선교사를 파송한 선교의 귀한 모델이 된 교회였으며 아름다운 교회였음. 가진 모든 것을 통해 하나됨을 누리는 좋은 교회였으며 그러기에 강한 교회이기도 했음. 그러면서도 유대인은 이방인에 동화되지는 않았음. 역사상 최초로 유대인과 이방인이 복음으로 하나가 된 교회였음.

하나되게 하는 것은 복음의 핵심 진리임. 바울은 오늘 본문 2장 14절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는 복음의 진리를 내걸어 베드로에게 이를 시비하였음. 에베소서 2장 14절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라는 말씀처럼 복음은 벽을 다 깨어 버리고 나누어진 것을 합치게 만듬. 하나됨은 교회의 본질임. 교회가 이능력 가지고 있어야 함.

교회에서 가장 어리석은 자는 자기자랑하는 자임. 바울은 방금 본 바와 같이 2장 14절 말씀으로 베드로와 바나바에게 질책하였음. 질책한 이후 회복으로 돌아갔음. 2장 15절에서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고 회복의 말을 하였음.

하나님 백성의 특징은 “우리”라는 울타리 안에서 하나되는 것임. 그런데 자기를 분리시키면 하나되지 못함. 언어에는 분리의 언어와 통합의 언어가 있음. 분리의 언어는 우리와 저들,가진자와 못가진자,주류와 비주류 등 이분법으로 자꾸 구분하는 것임.

반면 통합의 언어는 느헤미야 1장 6절 “이제 종이 주의 종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이스라엘 자손의 주 앞에 범죄함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나의 아비 집이 범죄하여” 과 같은 느헤미야의 리더십임. 그는 모든 죄를 자신과 그의  아버지의 잘못으로 돌렸음.

문제를 제기하고 문제를 푸는 방법에도 "우리 안에서 푸는 방법"과 "우리 바깥에서 푸는 방법"이 있음. 전자는 애통하고 아픔을 가지고 풀어내는 것임. 반면 후자는 자신만이 의롭다며 남을 정죄하고 채찍질하는 것임. 후자와 같은 정죄의 방법으로는  해결이 없음. 까발리고 뒤집는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님. 애정을 가지고 우리 안에서  풀어내야 함.

C.S 루이스는 그의 저서 “순전한 기독교”라는 책의 "가장합시다"라는 章에서 사람의 변화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음. 주기도문을 분석하면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할 때 우리는 아직 아들로서의 모습으로 변화되지 않았지만 이렇게 아들행세를 하다보면 아들의 모습이 된다는 논리임. 위장이 현실로 변화하며 친밀한 척 하다 보면 실제 친밀해진다는 것임.

하나님께서 칭의를 해 주시니 성화의 과정을 통해 우리가 의롭게 됨. 이와 같은 논리에서 볼 때 믿음도 일종의 가장하는 것임. 차원이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을 끌어 올리는 방법도 차원 높은 사람으로 취급해 줌을 통해서 가능해질 수 있음. 예를 들어 어머니가 갓난 아기를 두고 그가 모든 말을 알아듣는 것처럼 대화하고 얘기함을 통해 그 아이가 말이 늘게 되고 지혜가 자라게 됨.

율법은 정죄하고 사실을 말하고 평가절하하는 것임. 그러나 복음은 사실을 얘기하는 것이아니라 의인이라 칭의하고 기대하며 하나님 약속대로 믿어주는 것임. 시몬이 어떻게 베드로가 될 수 있었는가? 예수님이 믿어주었기 때문임. 복음도 믿어주고 기대해 주는 것임. 믿어줄 수 있는 사람과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함. 이 땅에서도 아버지가 믿어주고 들어주는 사람임.

제임스 딥슨은 ‘Bring up boys”라는 책에서 미국은 아버지의 몰락으로 무너졌다고 역설하였음. 이유를 보면 지난 30~40년간 페미니스트가 남녀가 똑같다는 논리아래 남성성(男姓性)과 여성성(女姓性)은 학습에 의해 이루어졌다며 남자아이용 완구와 여자아이용 완구의 구분은 안된다고 제소하였다 함. 이러한 결과 가정에서 남자의 모델이 없다 보니 아버지의 몰락으로 이어지고 가정도 따라서 무너지게 되었다는 주장임.

그러나 생태학적 심리학으로 볼 때 남성과 여성은 성 호로몬이 분명히 다르며 그결과 남성성과 여성성도 분명히 다름. 그러므로 진정한 남성은 희생할 줄 알며 스스로 죽을 줄 알며 가정에서 영적 제사장이 되는 신앙의 리더가 되는 것임. 우리 삼일 교회는 남자 성도가 진정한 남성의 모델을 제시하고 있음. 온 가족을 데리고 나와 예배 드리고 무릎꿇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음.
이렇게 아버지의 본래 모습이 살아날 때 이 사회가 살아나게 됨.

결론적으로 오늘 말씀을 다시한번 요약하면, 통합의 언어가 있고 하나됨이 있을 때 능력의 회복이 있음. 그리고 가정과 이 사회에서 이러한 역할을 하여야 할 사람은 다름 아닌 아버지여야 함. 아버지가 제 역할을 다할 때 아버지의 회복이 있으며 그리할 때 인정하고 믿어주고 본이 되는 질서가 회복될 것임.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