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敎育 1/원고[청소년교육]

바나바(3) "깊은 가슴을 가진 기다림이 있는 사람"

好學 2012. 2. 4. 07:04

본문말씀 : 사도행전 15:36~41
설교제목 : 바나바(3) "깊은 가슴을 가진 기다림이 있는 사람"

오늘 본문은 바나바가 마가의 회복을 돕는 장면임. 2차 선교여행을 앞두고 바울과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가는 문제를 두고 서로 싸웠음. 사도행전 15장 38절 말씀과 같이 바나바와 바울은 1차 선교 여행 중 많은 어려움을 겪었음. 그래서 동행했던 마가는 중간에 집으로 돌아갔음. 바울은 중간에 변절한 사람은 안된다고 하였음. 그러나 바나바는 데려가자 하였음.

지금도 바울이 옳은가 바나바가 옳은가 논쟁이 있음. 그러나 누가 옳은가의 문제가 아닌 서로 다르다는 것임. 하나님은 바울은 바울대로 쓰시고 바나바는 바나바대로 쓰심.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가서 더 큰 사역의 열매를 맺었음. 한편 바나바는 마가를 통해 하나님의 사역 잘 이루었음. 효과적인 사역을 위해서는 바울이 옳다고 생각함. 열매 맺는 측면에서는 바울이 맞음. 그러나 사람을 세운다는 측면에서는 바나바가 맞음.

교회는 바울과  같은 사람 뿐만 아니라 바나바와 같은 사람도 있어야 함. 바나바는 실패한 사람 품어주고 세워주고  회복케 하는 능력 있었음.


Ⅰ.바나바의 영성의 뿌리 : 기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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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은 깊은 가슴이 있는 사람이 되게 함. 하나님은 약속을 주신 후 오랜 기다림을 주심. 그 기다림 통해 깊이가 있게 함. 오늘날 많은 성도의 가슴이 메마른 이유는 fastfood 신앙이기 때문임. 세우고 건지기 위해서는 기다림이 있어야 함. 기다려야 성숙이 있고 성장이 있음. 김영랑 시인은 “모란이 피기까지는”이라는 시에서 불가능을 믿고 기다리는 마음을 노래하였음. 바나바의 영성이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노래한 김영랑의 영성과 같을 것임.

로마서 4장 18절에서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라고 말씀하고 있음. 또한 4장 19절에서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라고 말씀하고 있음. 이같이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가운데 믿었음.

기다림과 인내하는 믿음이 있을 때 사람이 살아남. 우리에게 기다림의 영성이 없으니 새생명이 살아나지 못함. 누가복음 19장 탕자의 비유에서 탕자가 돌아온 이유는 기다리는 아버지가 있었기 때문임. 탕자의 비유 주제는 탕자 아버지의 기다림이 있었기에 탕자가 돌아왔다는 것임.

청소년이 방황하고 가슴에 먼지 날리는 이유도 기다리는 아버지가 없기 때문임. 교회가 할 일도 성장하기까지 기다리는 것임. 교회는 시험보는 곳인가? 훈련하는 곳인가? 기다리는 마음 있는 사람이 훈련 가능케 함. “America’s 10 worst president”라는 책은 미국에서 가장 무능했던 10명의 대통령에 대해 쓴 책임.

미국은 43대까지의 많은 대통령을 경험했기 때문에 링컨,루즈벨트 같은 대통령이 나왔음.  우리는 사람으로 따져 이제 겨우 아홉번째 대통령임. 우리도 12번째나 13번째쯤 가면 링컨 같은 훌륭한 대통령이 나올 것임. 백성들이 할 일은 기다리는 것임.

복음도 기다리는데서 나왔음.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기다림을 통해 세례요한이 나왔음. 또한 누가복음 2장 25절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라는 말씀과 같이 시몬이라는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기에 성령이 임재했음. 고린도전서 13장 4절에서 “사랑은 오래 참고”라고 말씀하고 있음. 사랑이 있어야 기다리고 기다려야 성숙이 있음.

기다리는 자가 되어 마가와 같은 사람 세우고 그를 통해 또다른 마가 세우는 자가 되길 바람.

 

Ⅱ.누가 기다릴 수 있는가 : 종의 영성 가져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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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이 숭배의 대상이 되기 위해 힘을 과시해야 한다고 생각함. 그러나 하나님은 숭배의 대상이 아닌 사랑의 대상으로 오셨음.

이사야서 53장 2절 이하에서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듯이 철저히 종의 모습으로 오셨음. 그 이유는 종의 모습 가져야 살릴 수 있기 떄문임. 사랑 때문에 패배하신 하나님의 모습 보여주고 있음.

사도행전 15장 39절에서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 서니”라고 말씀하고 있음. 바나바는 자기의 유익 때문이 아니라 마가 때문에 갈라섰음. 바나바는 마가 하나 때문에 바울과 같은 초대교회에서 기둥이 되는 기회를 놓친 손해를 보았음.

 마가복음 8장에 나오는 백부장의 모습을 놓고 많은 자각을 하게 됨. 자신을 위해 몸부림 치고 희생하는 사람 많지만 다른 사람 살리기 위해 희생하고 자기 위치 포기할 수 있는 사람 많지 않음. 누가 종이 될 수 있는가? 충만한 사람, 채워지는 사람이 가능함. 채워졌기 때문에 낮아질 수 있음.

초월은 더 가치 있는 것 위해 자신의 유익을 포기하는 것임. 예수님은 하나님과 본체시나 종의 형체로 낮아져서 죽으셨음. 내가 얼마나 종이 될 수 있는가는 나의 수준을 결정함. 스스로 부인하고 낮아지면 하나님의 영광 살아남.

요한복음 12장 24절에서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말씀하셨음. 성도는 생명의 핵 품고 죽는 것임. 바나바의 모습임. 생명의 핵 품고 죽을 때 열매가 있음. 끝까지 기다림 통해 영혼이 주께 돌아오고 나 때문에 생명 얻을 수 있게 되길 바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