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韓國信仰人]

이성봉 목사의 생애와 설교 2

好學 2012. 1. 28. 22:48

이성봉 목사의 생애와 설교 2

 

- 그의 부흥설교에 대한 설교학적 분석 - 정인교 박사(본 대학, 실천신학)

 

 

Ⅲ. 이 성봉 목사의 생애


이성봉 목사의 생애는 그의 사역을 중심으로 목회사역에 헌신하기 전단계, 목 회자로서 헌신한 시기, 그리고 부흥사로서 활동한 시기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런 구분은 단지 표면적인 연대기적 구분만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실 존적 고민과 종교적 체험, 그리고 각 시기를 지탱하고 연결하는 모티브가 내재 되어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A. 제 1 기 : 소명을 위한 몸부림(1900-1924년)


이 시기는 이성봉 목사가 1900년 7월 4일 평남 강동군 간리에서 부친 이 인 실과 모친 김 진실 사이의 장남으로 출생하여, 6세에 기독교에 입문하고, 중화 경의학교를 거쳐 신천 경신 소학교를 14세에 졸업하고, 26세에 신학에 입문하기 전까지를 의미한다.

그는 신앙심 깊은 어머니의 교육 아래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냈고, 6세에 기 독교에 입문한 뒤 평양 선교리에 있는 선교리 감리교회까지 40리 길을 통교하 는 등 이미 유년기부터 기독교 신앙과 접맥되어 성장하였지만, 그의 신앙은 부 정적 범주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가정교육은 대단히 엄격하여, 소년 이 성봉이 부모의 명을 거역하면 종아리를 맞든지 쥐가 우글거리는 광 속에 가둘 정도였고, 이러한 교육의 엄격 성은 그의 인격형성에 기본적 예절과 상식을 존중하는 규범으로 긍정적인 영향 을 미쳤다고 보여진다. 무엇보다도 진실한 신앙의 소유자였던 어머니는 이 목사 가 6∼7세 될 때부터 그를 위해 기도하며 신앙의 바른 교육을 위해 힘썼는데, 비록 그가 청년기의 방황을 심하게 앓긴 했지만, 이런 유아기의 신앙 교육은 결 과적으로 이 목사를 하나님께 묶어두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 시기에 이 목사가 신앙의 본질적 문제로 인해 심각하게 고민한 흔적은 보 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목사는 청년시기의 상당부분을 신앙에서 떠 나 있었는데, 이는 환경적인 영향이 더 큰 작용을 했다. 경신 소학교를 졸업한 뒤 경제적인 이유로 학업을 중단하게 되면서 그는 깊은 실의에 빠지게 되었고, 이런 실의는 그로 하여금 지금까지 아무 생각없이 믿어온 기복적 신앙의 종말 을 경험하게 하였던 것이다.

깊은 신앙적 동기가 없이 가정환경과 유아기적 낭 만에 의해 시작된 소박한 신앙은 험난한 현실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가 하나님, 천당, 내세, 지옥을 부인하고 불공평한 세상을 저 주하며 물질에 대해 그의 온 관심을 집중시키게 된 것은 이런 류의 신앙이 다 다를 수 있는 자연스런 결과였다.

이런 맥락에서 이 시기는 경제적인 면에서나 인간적인 면에서 이 성봉에게는 대단히 어렵고 부정적인 시기였지만, 동시에 역설적으로 이 시기야말로 그의 평 생을 바꾸는 결정적인 시기이기도 했다.

 

이 전환을 가져오게 된 결정적인 전기는 그가 21세 되던 해에 그에게 찾아온 이름 모를 병마였다. 이 일로 그는 6달 간을 평양 기흘병원에 입원하게 되었 고, 그 기간동안 그는 인생과 죽음에 대해 비로소 깊이 있는 사색의 시간을 갖 게 된다:


죽음 아래 모든 것이 다 매장을 당한다. 돈을 많이 벌어보려 하지만 백 만 장자도 죽어버리니 허사요, 땅을 사고, 뫼를 사고, 밭을 사고, 고대광실 같은 집을 지어도 나 죽으면 땅 한평, 수의 한 벌, 관 한 개 밖에 못 가지 고 가는 것이며, 천문지리 상통하는 많은 지식을 가졌어도 나 죽을 날자 알지 못하고, 영웅호걸 미인들도 죽음 앞에서 다 항복하고 마는 것 아닌 가!


이와 같은 인생에 대한 깊이 있는 관조는 이 성봉 자신의 불우한 처지로부터 나온 자기한탄적 의미가 적지 않으나, 후에 그의 사역에서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만 가치를 두게 만드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동시에 이 사건이 대단히 중 요하다고 하는 것은 그가 병상에서 인생무상(人生無常)만을 염세적으로 읊조린 것이 아니라 신앙인으로서의 자신의 모습을 직시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


나는 이제죄인임을 알았다. 법률상으로지은 죄, 도덕상으로지은 죄, 양심상으로지은 죄 등등정수리에서 발끝까지 나는죄인임을 절실히 깨 달았다.


육체의 고통을 통해 이 목사는 자신의 속사람을 바라보게 되었고, 죄의 심각 성과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있는 자신을 목도하게 된 것이다. 이런 신앙 의 자각을 바탕으로 이 목사는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헌신을 다짐 하게 된다 :


 

하나님, 한번만살려주십시오. 이제야 깨달았나이다. 한 번만 살려주시면이 몸을 주께마치고, 이 사실을모르는 불쌍한 인간들에게또한 나의 뒤 로오는 후배청년들에게 이것을증거하겠나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전하겠나이다.


병을 통한 이러한 헌신의 다짐은 그후 이 목사의 생애를 바꾸는 구체적인 동 기가 되었고, 동시에 이 체험은 이후의 그의 신앙과 신학, 그리고 설교에서 대 단히 중요한 형성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즉 죽음으로부터 고침받은 체험과 병 상에서의 중생의 체험은 그의 인생을 하나님 위에 세우게 되는 동기가 된 동시 에 그로 하여금 평생 동안 '하나님 제일주의'를 지향하게 만드는 동인(動因)이 되었다.


B. 제 2 기 : 목회자의 모범(1925∼1937년)


이 성봉 목사가 헌신을 결단하고 신학에 입문하게 된 것은 그가 26세가 되던 1925년 3월의 일이다. 그의 표현대로 3년간 계속된 신학수업은 그에게 '지적으 로는 별게 없었으나 영적인 부흥과 말씀을 통해 신앙의 지도'를 받게 했던 생산 적인 기간이었다.

특히 이 기간 동안 이 목사는 영적으로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여전히 놓여 있던 죄의 문제 때문에 고민하던 시기였고, 이것을 해결함 받은 시기였다.

 

신학수업 기간 중에 그는 이미 청량리교외에서 유년 주일학교를 맡아 사역하 는 한편, 방학 중이던 1927년 여름에는 경북 김천교회에서 여름 성경학교 강사 로 활동하여 큰 부흥을 가져오는 등, 이미 그때부터 교역자와 부흥사로서의 가 능성을 보여준다. 특히 신학생 시절에는 선교사들의 횡포와 학생에 대한 열악한 대우 그리고 교수진에 대한 불만 등으로 동맹휴학 사건(1926년)이 터졌을 때, 화해자로서 그가 보여준 중립적 입장의 고수는 만사를 하나님께 맡기고 감사함 으로 매사에 임해야 한다는 그의 성숙한 신앙과 인품을 드러내준 사건이었다.

 

그의 신학수업 기간 동안에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은 졸업을 앞둔 시점에 겪은 거룩한 소명의 체험이다. 사역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과 자신없는 상태에서 영 적인 갈급을 느끼고 있던 이 목사에게 이 체험은 사역에 대한 확신과 자신감, 그리고 불타는 소명감을 일깨워준 사건이었다.

 

그의 표현대로 전도생활의 좋은 준비 기간으로서의 신학교 3년 수양을 마친 뒤, 이 목사는 본격적인 목회의 길로 나서게 된다. 사실 그에게 목회는 처음으 로 개척하여 부임한 수원교회(1928∼1930년), 목표교회(1930∼1936년) 그리고 신 의주 교회(1936∼1937년)등에 지나지 않았고, 그 기간도 9년에 불과했으나, 그의 목회는 목회의 이상과 귀감으로 자리잡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의 목회를 통해 드러나는 특징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그의 목회는 철저하게 구령열에 불타는 복음 전도자의 사명으

로 일관 하였다. 그에게는 이 복음 사역보다 더 시급한 일이 있을 수 없었다. 이러한 사 명 때문에 그는 온갖 조소와 멸시를 무릅쓰고 성결교회의 초대 전도 방법인 노 방전도에 따라 나팔을 불며 농촌지역을 순회하였고, 매일처럼 개인기도와 가정 집회를 쉬지 않았다. 그의 관심이 영혼구원에 있었기에 당연히 그는 교인들에게 철저한 회개를 요구했고, 또 죄를 질책하는 설교가 많을 수 밖에 없었다. 이런 것들은 일시적인 부작용으로 그의 사역에 어려움을 가져다 주기도 하였으나,동시에 그 모든 것을 넘어서는 풍성한 수확이 그의 목회 사역기간 동안 이어졌 다.

 

둘째로 이 성봉 목사의 목회는 철저히 영적인 체험이 동반된 목회였다. 이것 은 두 가지의 의미를 갖는데, 그중 하나는 목회현장에서 이적과 기사가 나타남 으로써 그의 목회에 대단히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그의 자서전이 전 하는 바에 의하면 첫 목회지인 수원교회 시절부터 병자가 일어나고 귀신들린 자들이 놓임을 받는 이적으로 많은 결실을 보게 되었는데, 이적을 동반한 이런 현상은 그가 부흥사로 활동하던 시대에도 지속되었다.

 

또 다른 의미는 이 목사 자신과 관련된 것인데, 그는 목회 사역기간 중에도 여러번 신비한 영적 체험을 하게 된다. 대표적인 경우가 수원 목회기간 중에 과 로로 병상에 누운 상태에서 이루어진 영적 체험과 신유이다(1928. 8. 12.):


... 그때 하늘로부터 십자가가나타났다. 나는 분명히주님이 달리신 그십자가를 보았다. 감격하여붙들고 애통하며 나의모든 죄를 자복했다... 그(예수)는나를 어루만져 주시며천국으로 가자고 올라가는것이었다... 한 참 가다보니수정같은 맑은 요단강물이 흐르고 저편에서화려하고 찬란 한 천성이보였다. 그런데 어디서찬송소리가 들렸다. 갑자기정신이 회복 되며 온몸에서 식은 땀이쭉 쏟아졌다... 아프던내 몸이 거짓말처럼완전 히 나았다.

 

이러한 영적 체험은 이 목사 자신의 말처럼 그후로 그의 신앙생활을 격려하 여주고 소망 중에서 살게 하고 현실보다 내세를 더 그리워하며 하나님만을 의 지하게 하는 동력이 되었고, 언제나 매너리즘에 빠지기 쉬운 그의 목회 생활과 말씀사역 그리고 목회사역에 긴장을 불어넣는 활력소가 되었다.

 

셋째로 이 목사의 목회는 철저히 기도로써 풀어가며 하나님께 맡기는 하나님 제일주의의 목회였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적인 동기에 따라서 행동하지 않았고, 또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끌어가려고 하 지도 않았다. 오직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순종하는 마음으로 기다릴 뿐이었 다. 가령 당시 다른 교단의 감독정치 하에서 자신이 개척해 견실하게 성장시켜 놓은 수원교회를 사임하고 목포로 내려간다든지, 혹은 이 목사 자신의 표현처럼 제일 재미있게 일한 신의주 교회를 총회의 명에 의해 사임하고 부흥목사로 사 역해야 하는 것 등에 인간적 서운함이 없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뜻밖에도 고향과는 전혀 반대쪽인 멀리 전라도 목포로 파송받았을 때 나는 정신이 아득함을 어찌할 수 없었다. 그리고 막상 수원교회를 떠나자니 수 년간 갖은 어려움을 다 겪어 가면서 세워놓은 아름다운 성전을 남에게 맡기고, 약하고 어려운 셋방살이 교회로 가야하니 육정으로 생각할 때 기가 막혀 안 가 려고 많이 발버둥도 쳤다.

 

특히 목포 교회의 목회는 이 목사에게 영적, 정신적, 육체적으로 많은 어려움 과 시험을 가져다 주었다. 신비주의로 나가는 부인을 책벌한 사실에 앙심을 품 은 그녀의 아들에게 심한 구타를 당하기도 했으며, 사랑하던 청년들이 이 목사 의 목회에 불만을 품고 반기를 들기도 하였다. 이런 어려운 상황 가운데도 이 목사는 모든 것을 주께 맡기고 나아가면 주께서 해결해 주실 것이지, 인간의 수 단방법을 써서는 안된다는 자세로 일관하였다. 이것은 단순히 인간의 성정(性 情)을 인내로써 참는다는 소극적 인내가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고 하 나님께 맡기는 적극적 신앙의 발로를 뜻한다.

 이 목사의 목회가 오늘의 목회자 모두에게 귀감이 된다는 것은 이 목사가 인간이면서도 하나님의 차원에서 살려 했던 교훈을 남겨주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넷째로 그의 목회는 여러 면에서 풍성한 결실을 맺은 목회였다. 우선 그가 사 역하는 곳마다 수많은 영혼구원의 결실을 보았는데, 가령 그가 개척한 수원교회 가 그가 목회하는 동안 400여명의 교세를 갖춘 견실한 교회로 성장하게 되었다 든지, 목포교회에서는 6년을 시무하는 동안 암태교회, 임자도 교회, 후중도 교 회, 그리고 압해도 교회 등 지교회를 개척한 일, 마지막 목회지인 신의주 교회 에서는 직원 50명을 포함 모두 1000여명의 교세를 갖춘 대형교회로 성장시키고 마천동 등지에 지교회를 개척한 것 등이 이를 잘 반증한다.

 

그의 업적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그가 부임하는 곳마다 교회의 신증축 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일부 현대교회들이 기업적 발상에서 기존의 훌륭한 건 물들을 두고도 화려하고 웅장한 교회를 세운다든지, 혹은 여러 여건상의 어려움 으로 인해 많은 목회자들이 교회 신축을 기피하는 현상들과 비교해 볼 때, "죄 있는 장소, 불의한 집, 개인의 집은 좋은 집이 많은데 주님의 성전이 셋집일 수 없다"는 신앙의 발로에서 불가능한 상황 가운데서도 교회 건축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그의 신앙과 생각은 오늘날 목회자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하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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