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韓國信仰人]

이성봉 목사의 생애와 설교 1

好學 2012. 1. 28. 22:46

이성봉 목사의 생애와 설교 1 

- 그의 부흥설교에 대한 설교학적 분석 -



정인교 박사(본 대학, 실천신학)


 

Ⅰ. 들어가는 말 : Ⅱ. 부흥설교의 특징과 역사

Ⅲ. 이성봉 목사의 생애 : Ⅳ. 이성봉 목사의 신학 경향성

Ⅴ. 이성봉 목사의 부흥설교에 대한 설교학적 고찰 : Ⅵ. 나오는 말


Ⅰ. 들어가는 말


본 소고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부흥사로 한국교회사에 한 획을 그은 이 성봉 목사의 설교를 연구하는 것이다. 이 작업을 위해 우리가 먼저 할 일은 설교의 한 장르로서의 부흥설교(Revival Preaching)가 갖는 특징과 설교사에서 이 유형이 어떻게 이어져 왔는가 하는 것을 살피는 것이다. 이 작업은 한편으로 이 성봉 목사의 정체성을 부흥사로, 그리고 그의 설교를 부흥설교로 평가하고 있는 기존의 입장이 보다 구체적인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 필요한 작업이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일반적으로 설교가 설교자의 신학, 사상, 심성(心性), 상황, 회 중에 따라 차이를 보일 수 밖에 없음을 고려 할 때, 이 목사의 설교가 일반적으 로 부흥설교 속에 포함되는가를 찾아내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다.

 

부흥설교의 일반적 역사와 특성을 살펴본 다음, 우리는 3장에서 이 성봉 목사 의 생애를 소명 이전, 목회기, 부흥사역기의 3기로 나누어 살펴볼 것이다. 특별 히 이 작업에서 우리는 이 성봉 목사의 신비적 체험이 그의 사역에 어떤 영향 을 미쳤는지와 목사 이전의 인간 이 성봉의 인품, 목회자로서의 철저성 그리고 부흥목사로서의 전형성에 우리의 관심을 집중할 것이다.

4장에서는 이 성봉 목사의 저서와 설교를 통해 드러나는 그의 신학적 경향성 을 다루게 될 것이다. 특별히 설교란 설교자가 가진 신학을 토대할 수 밖에 없 다는 점에서 이 작업은 이 성봉 목사의 설교와 신학의 접맥 여부를 자연스레 드러낼 것이다.

 

이러한 예비적 고찰을 토대로 5장에서는 본 연구의 중심 테마인 이 성봉 목 사의 부흥설교를 설교학적 관점에서 연구, 분석하게 될 것이다. 이를 위해 설교 의 가장 기본 구도인 본문과 상황, 즉 이 목사의 부흥설교가 요청될 수 밖에 없 었던 당시 시대상과 그의 부흥관을 간략히 살펴보고, 이 시대를 향해 그가 외친 설교의 주제와 본문과의 상관성, 메시지를 담아 나른 설교형식, 회중에의 전달 문제 등을 살펴보게 될 것이다.

 

이 소고의 마지막 6장은 본 소고의 결론 부분으로서 한국교회 부흥운동에서 이성봉 목사가 차지하는 위치와 입장을 살펴보고, 교회가 있는 한 지속될 수 밖 에 없는 부흥설교의 올바른 방향과 발전적 전망을 다룰 것이다.




Ⅱ. 부흥설교의 역사와 특징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4)라 는 성경말씀과 같이 기독교는 영(靈)이신 하나님을 신앙하는 종교이다. 따라서 기독교의 설교 역시 그 본래적 의미에서 영이신 하나님을 이야기해야 하는 종 교적 담화(religiöse Rede)이고, 따라서 영적인 차원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즉 일차적으로 영이신 하나님을 말해야 하는 것이 설교이고, 설교는 단 한번의 구 원사건과 이 사건의 현재화, 즉 하나님의 현존의 경험(Errinnerung und Begegnung)이라는 신적 차원을 가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동시에 설교는 회중이라는 구체적 대상과 상황을 전제하지 않을 수 없고, 이 회중을 이끌어가야 할 교육적, 목회적 차원 역시 설교가 감당해야 하 는 몫이다. 게다가 기독교가 하나의 종교로서 자리를 차지하면서 설교는 교회의 내부-외부로부터 제기되는 질문과 공격으로부터 기독교 신앙을 변증하는 역할 까지도 수행해 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런 경향은 설교 그 본래의 영적 차원 외에 또 다른 차원, 즉 지적, 정보적, 교육적 차원을 설교에 요구하게 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설교를 그 성격상 두 가지 흐름, 영적인 설교와 지적인 설교로 나눌 수 있다. 이 두 가지는 설교의 역사 속에서 주기적으로 반복되어 왔다.


1) 역사적으로 볼 때, 이런 대립은 먼저 고대교회의 교부들이 보여준 성서해 석에서 그 희미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기독교 최초로 우화적 해석(Allegorie) 을 도입했던 Origenes(185∼254년)가 영적 해석의 상징이라면 동시대의 안디 옥학파는 이에 반대하여 문자적 해석을 강조했다. Origenes는 그의 저서 De principiis(기독교의 주요 교의에 관하여)에서 다음과 같은 입장을 피력한다:


성서문서들은 성령을 통해 쓰여졌으니 문자대로의 뜻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어떤 다른 의미도 갖고 있는데, 이는 대부분 숨겨져 있는 것이 다. 기록되어 있는 것은 말하자면 거룩한 비밀과 신적인 것들의 모상(模 像)에 관한 암시일 뿐이다. 전체 율법이 영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전 교회 안에 하나의 견해가 있을 뿐인데, 이에 반해 율법이 본 래 의미했던 것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학문과 지혜의 말씀 안에서 성 령의 은혜가 수여된 그런 개인에게만 알려져 있는 것이다.


이런 입장 위에서 Origenes는 본문 속의 황소는 세상적 욕망의 상징이 되어 야 하고, 양은 어리석은 생각을, 비둘기는 위험한 공상을 뜻하는 것으로, 우물가 에 물을 길러 나아온 리브가는 사람이 어떻게 성서의 샘에 나와 성령의 물을 길을 수 있는지에 대한 심오한 교훈을 담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고 설교해야 한 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그의 영적 해석은 특히 구약본문의 경우 문자적, 도덕적 으로 덕성함양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할 수 있는 한계를 극복케 한다는 점 에서 긍정적일 수 있으나, 성서를 탈역사화(Enthistoriesierung), 영성화 (Spiritualisierung)한다는 면에서 대단히 조심스런 해석방식이라 아니할 수 없 다.

 

동시대의 안디옥 학파는 알레고리가 가지는 이러한 위험을 직시하고, 본문을 비판적으로 연구하고 성서의 문자적 의미를 역사적으로 해명하는 것을 그 대안 으로 내세운다. 즉 정확한 성서의 자구와 본문연관, 성서의 평행구들이나 시대 사적 윤곽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이런 해석을 근거 한 설교는 당연히 알레고리적 해석에 근거한 설교가 저지르기 쉬운 오류들로 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이 방법 역시 객관적 접근, 냉철 한 이성적 사고에 의존하게 됨으로써, 회중들이 설교로부터 역사적 정보는 얻을 수 있으나 자신을 성서 속에 대입시키기 어렵다는 약점이 있다. 전자가 지나친 주관화, 회중의 본문 인물과의 동일화로 나간다면, 후자는 일정한 거리를 둔 건 조한 관찰적, 지적 강연으로 내닫기 쉬운 약점들을 갖고 있다.

 

2) 고대교회가 성서해석이라는 측면에서 영적, 지적 강조의 평행을 이루고 있 었다면, 중세 후반기에서 스콜라 신학에 바탕을 둔 설교와 그 뒤를 이어 등장한 신비주의의 영적 설교는 이 두 요소의 주기적 반복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성장이라 할 수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콘스탄틴 대제에 의해 기독교가 카타콤에서 지상으로 올 라온(313년) 이래 교회는 건물, 교리, 교회법, 예전 등 모든 면에서 종교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갔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러한 발전은 긍정적인 것임에 분명했 으나, 설교 자체만을 놓고 볼때는, 오히려 예배의 한 의식과 순서로 전락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교회가 핍박받던 시대에 예배의 중심으로 자리잡았던 설교의 역할은 비록 5 세기와 13세기에 이르러 다소간 활력을 되찾기는 했지만, 근본적으로 M. Luther의 종교개혁을 맞기 이전까지는 의식중심의 예배에서 설교 본래의 위치 를 찾지 못한 채 기나긴 침체의 터널을 지나야 했,고 심한 경우에는 공예배에서 조차 생략되는 시련을 감내해야 했다.

 

이러한 중세 교회의 분위기로부터 잠시나마 설교의 중요성과 위치를 부각시 킨 것이 바로 13세기 스콜라 신학에 바탕을 둔 설교이다. 그 때까지의 설교가 본문이 없는 설교, 이적과 기사 및 성인찬미, 풍자해석, 과장법의 특징을 갖던 것과 비교해 볼 때, 이 설교는 스콜라 철학의 분석적 논리적 방식을 설교에 도 입한 새로운 방식의 설교였다.

다양한 주제의 도입(introductio thematis)과 그 뒤를 이은 2, 3, 4부로의 주제 구분(divisio thematis: 이 중에서 고대 수사학의 산물인 3중 분할은 청중을 덜 지치게 하다는 점에서 권장되었다), 그 뒤를 따른 소분할(subdivision: 소대지), 분할 뒤에는 선포와 확신 부분(declartio et confirm!!atio partium)이 설교의 정교한 형식으로 통용되고 있었고, 이 구조는 다 양한 예화와 교부들의 저작에서 인용한 증빙귀절들로 채색되어 설교되었다. 이 때의 설교가 분석적, 논리적 그리고 지적 측면에 치우친 설교의 경향성을 보 였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지나친 공론, 머리카락을 쪼개는 것과 같은 세세한 구 분, 지리한 세부묘사 등의 특징을 갖는 설교는 회중의 가슴에 차츰 건조함으로 자리잡게 되었고, 이런 설교 자체의 문제점은 그 당시의 사회와 교회, 성직자와 성도들의 부패 등과 같은 외적인 요인과 맞물려 설교의 쇠퇴를 가져오게 되었 다.

 

스콜라 설교의 쇠퇴에 이어 새로운 신앙운동과 설교가 등장하게 되는데, 이것 이 바로 독일과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한 소위 신비주의의 영적 설교이다. Clarke이 정의한 것처럼 신비주의(Mysticism)는 "사람이 신적 감화력에 대해 완전히 자기자신을 피동적으로 복종시킴으로써 무한한 존재(Infinite Being)와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신앙"인데, 이 신앙에 의하면 인간 영혼 속에는 신과의 접촉점(Anknüpfungspunkt)이 있기 때문에 어떤 중보자도 필요치 않으며, 이 접 촉점은 영혼의 근저에(Seelengrund) 있는 하나님의 거주장소인 바, 절대자인 초 월자가 유(有)의 모습으로 인간영혼 근저에 있는 무(無) 속에 은혜로 나타난다 는 것이다. 중세 신비주의의 대표적 인물인 Meister Eckhart는 이것을 영혼의 불꽃(Fünklein der Seele)으로 부르는데, 바로 이 접촉점이야말로 자기초월과 인 간의 모든 영적 생활의 경험을 가능케 하는 기본원리로서 인간 안에 한정된 초 월적 원리를 의미한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이 영적인 경험의 통로로 인도하기 위해서는 영과 정신 에 대하여 악한 존재인 육체와 물질을 부정해야 하며, 이를 위해 신비주의는 청 빈과 독신생활, 복종을 강조하는 금욕적 생활을 강조한다. 동시에 육체와 물질 에 대한 부정은 현세에 대한 무관심과 초연이라는 초윤리적인 이념과 직결되어 기성질서나 제도에 대한 강력한 비판으로 나타나게 된다.

특히 M. 엑크하르트에게서는 "인간의 영혼 속으로 탄생하시는 하나님"이야말 로 그의 개인적, 목표일 뿐아니라 선포의 목표, 그리고 전 구속사의 의미 자체 였다. "만일 이 탄생이 내 안에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만사가 나를 돕는 게 무 엇이란 말인가? ... 그것이 내안에 일어나는 것, 그 안에 모든 것이 들어있다"는 그의 고백은 그의 입장을 잘 드러내 준다.

 

신비주의 설교의 일반적 특징이 하나님과의 직접적 교통(Communication)과 연합, 마음 속에 탄생하는 신에 대한 강조, 성경이나 교회의 권위보다 개인적 체험의 강조, 말씀의 출생과 인간의 영혼 안에서의 아버지 등의 주제에 집중되 고 있다면, 에크하르트의 경우에는 무엇보다도 영혼의 정결, 청결, 순전함 등 이 우선적으로 부각된다. 중세의 신비주의가 적지 않은 물의를 일으키며 부정적 이미지를 심어준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또 이 운동은 기존의 교회 밖에서 주로 소그룹의 형태로 나타난 운동이기 때문에 교회 전체가 관련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 설교가 탁발승들과 연결되면서 설교가 예배의 맥락을 벗어나게 된 점과 또한 교회 밖의 형식도 소그룹 차원과 접맥되어 교회와 대칭되는 평신도 경건생활(Laienfrömmigkeit)의 효시를 이루었다는 점, 그리고 교리적 건조한 틀 을 깨고 종교 본래의 영적 차원에 주의를 집중했다는 점 등은 신비주의적 설교 가 보여준 긍정적 측면 가운데 하나이며, 동시에 설교의 지적 성향에 대한 극복 의 몸짓이라 보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3) 이러한 영적, 지적 설교 사이의 시이소같은 순환은 개신교 내에서도 예외 없이 발견되는데, 우리는 그 효시로서 종교개혁 뒤에 나타난 정통주의 (Orthodoxie)와 경건주의(Pietismus)를 꼽을 수 있다.

17세기에 들어와서 정통주의는 독일을 중심으로 한 유럽의 개신교회가 구교 와 재세례파의 공격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지향한 신앙과 신학의 흐름을 일컫는 말이다. 이 때의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성도를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육성할 수 있는가?"하는 것었다. 이런 관심 하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생동력 대신에 하나님 말씀에 대한 가르침이, 직접적으로 말씀을 듣는 대신에 역사적인 연구가 강조되었고, 성경에 대한 축자 영감론(Verbalinspiration)적 이해가 확산됨에 따 라서 성경을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 대신에 하나님의 구원행위에 대한 교과서 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런 상황 하에서 설교는 회중의 삶을 변화시키는 하나 의 사건이라기보다는 단순한 전달과 가르침, 그리고 참된 교육을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이해되었다. 즉 이때의 설교는 철저히 정보의 전달(Vermittelung der Information)에 일차적 관심이 쏠린 교육설교(Lehrpredigt)였다.

하지만 이렇게 경직된 정통주의는 오래갈 수가 없었다. 정보와 지식에 억눌린 인간의 영성은, 역사가 보여 주듯이, 결코 긴 세월 동안 압사당할 수 없는 것이 다.

정통주의를 극복하면서 관심을 교육(Belehrung)으로부터 인간을 일깨우는 데 로(Erbauung) 돌린 영적 운동은 바로 경건주의이다. 이 운동은 한 마디로 참 그리스도인이 되려는 운동이며, 형제사랑의 운동, 영적 각성운동이다. 이 때의 전반적인 관심은 개인, 개인의 주관주의(Subjektivitaet) 그리고 개개인의 경건 성 촉진에 모아져 있었다. 따라서 이때의 설교 역시 교육보다는 일깨움을 목적 으로 한 성서의 구원진리, 근본적인 갱신, 급격한 변화에 집중되어졌다. 즉 설교 는 각 개인을 향한 선포(Verkündigung ad homine)였고, 설교는 바로 개인의 삶 을 변화시키는 신앙체험의 장소였다.

 

4) 이상에서 살펴본 흐름들이 광의적 의미의 영적 설교의 발흥이었다면, 지금 부터 살펴볼 내용은 보다 협의적 의미의 영적 설교, 즉 대중 집회에서 행해졌던 인간의 영혼구원과 삶의 변화를 촉구했던 갱신의 설교, 심령의 부흥설교와 관계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첫 번째 인물로서 우리는 17세기에 도탄에 빠진 영국 사회를 복음으로 변 화시킨 위대한 설교자 John Wesley를 들 수 있다. 언제나 역사의 흐름이 그러 하듯이, 새로운 분위기와 운동의 등장은 그것을 필요로 하는 구체적 상황을 전 제로 할 수 밖에 없는데, Wesley의 시대도 역시 정치, 사회 종교적으로 혼란과 문란의 극치를 이루던 상황이었다. 우리의 관심을 당시의 설교와 종교계로 국한 해서 보면, 그 당시는 계시를 이성으로 대치하고 자연을 찬양하는 합리주의가 신학계를 지배하고 있었으며, 이성을 중시한 나머지 종교의 신적 영감을 무시하 는 주지주의적 종교 생활이 주종을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합리성의 추구는 교회로부터 역동적 성격을 앗아 갔고, 성직자들의 설교도 역시 Gold Smith가 지적한 것처럼 "메마르고 방법론적이며 사랑이 결핍된 열정 부재", 그래서 "회 중보다 원고와 천장을 번갈아 바라보며 설교하느라 조는 청중을 발견하지 못할 정도"였다. 따라서 성직자들에게서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구령운동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화이 지속되었고, 그 결과로 빈민 노동자를 비롯한 많은 대중 이 교회의 목회권 밖에 방치되었다. 대부분의 영국민이 영적 무기력 상태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며, 교회와 설교는 이들을 회개와 구원의 길로 나오게 하는데 아무런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하던 상태, 즉 영적 차원을 상실한 머리의 종교와 설교 그 자체였다.

이런 상황에서 Wesley의 일차적 관심이 교회 밖의 무수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데로 모아지게 된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 의 설교는 "믿음에 의한 의에서 복종(롬 10:6), 하나님의 독생자를 믿는 믿음"을 통한 구원문제, 회개와 성령, 설결한 삶 등에 집중되었다.

 

특이한 것은 기존의 방식과 달리 Wesley가 George Whitefield(1714∼1770)의 뒤를 이어 야외를 설교무대로 삼아 대중전도에 주력했다는 점이다. 즉 Wesley의 설교는 그 내용이 영적 각성을 촉구한다는 점에서 당시의 교회설교와 구별되었을 뿐 아니라, 그가 택한 야외설교는 대중을 대상한 본격적인 심령부흥 과 각성의 설교라는 점에서 이전까지의 소그룹 설교와 차이가 있다.


5) 보다 협의적 의미에서 부흥설교는 미국에서 일어났던 대각성운동(The Great Awakening movement)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부흥운동은 Jonathan Edward(1703∼1758년)와 George Whitefield (1714∼1770년)로 대변되는 제1차 각성운동과(1726∼1770년), Timothy Dwight(1752∼1817년)의 지도 아래 예일 대학을 중심으로 일어난 제2차 부흥운동(1790∼1835년), 그리고 19세기 중반 이 후 Charles G. Finney(1792∼1875년), 천막집회의 선구자 Peter Cartwright(1785 ∼1872년), 그리고 Dwight Layman Moodt(1837∼1899년) 등에 의해 주도되었던 제3차 부흥운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1차 각성운동은 청교도 공동체로 출발한 신대륙이 반계약제(Half-Way Covenant), 이신론, 합리주의, 낭만주의, 범신론적 신비주의 등과 같은 신사조 의 유포로 인해 경건을 잃어버리고, 세속적, 향락적 물결에 휩쓸려 회중의 교회 참석이 둔화되고 영적 침체현상에 빠지는 상황을 배경으로 나타났다. 이 운동의 대표적인 인물인 J. Edward는 일곱 차례나 신대륙을 전도여행하면서 집회소, 헛간, 광야, 짐마차 등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회개와 믿음에 대한 설교를 하였 다. 이 시기의 설교는 에드워즈의 설교에서 보여 주듯이 주로 죄에 대한 경고와 이신득의, 구속의 은총을 강조하는 데 치중하였고, 집회의 분위기도 역시 넘치 는 감정적 열정으로 가득하였다.

 

제2차 각성운동은 미국의 독립전쟁, 국가와 교회의 법적 분리, 그리고 편만한 사회불의라는 외적 상황과 뉴잉글랜드의 부흥운동(The Second Great Awakening in New England)의 영향으로 예일 대학에서부터 타오르기 시작하 였다. 이 학교의 총장이었던 Timothy Dwight는 실질적으로 대학 내의 부흥운 동을 주도하였는데, 당시 지식층에 만연하던 회의주의, 이신론 추종, 성경권위의 부인 현상의 위험성을 폭로하면서 설교를 통해 영적, 도덕적 대각성의 필요를 역설하였다. 이로 인해 대학 내에 부흥의 불길이 일어나 학생의 1/3이 회심하 였고, 다른 대학으로 퍼져나가는 도화선이 되었다.

한편 서부에서는 장로교 목사인 James McGready(1758∼1817년)의 인도 아래 소위 "캔터키 부흥"이라 불리우는 열정적 부흥운동이 전개되었는데, 다른 지역 의 부흥운동과 달리 며칠씩 집을 떠나 집회에 참석하며 지난 날의 악한 생활을 통회하고 몸부림치며 경련과 기괴한 발작이 회중 사이에 일어나는 등 극단적인 흥분현상이 나타나곤 하였다.

이 때의 설교 내용도 역시 '하나님의 주권', '인간의 타락', '중생의 필요', '구속 의 능력' 등으로 특징이 나타난다. 이 시기의 감정적 열정을 통반하는 부흥회 는 그 이후 미국 복음주의 교회의 특성으로 자리잡게 되었고, 미국 교회의 구조 적 변화를 촉발시켜 교파형 교회의 확립, 해외선교운동, 복음주의적 설교와 경 건주의, 감정에 호소하는 부흥회 등 미국교회의 틀을 구형하는 계기가 되었다.

19세기 이후의 부흥운동은 C. G. Finney에 의해 활성화되었는데, 이전의 감정 에 호소하는 방식을 지양하고 이성적, 토의적 방식을 설교에 도입하였다. 이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먼저 이성적으로 부합되고 또 확신될 때 가능하다는 그의 신념에서 나온 것이다. 무엇보다 이 시기는 기도가 강조된 기도의 기간, 몸부림치는 열정이 없는 대신에 개인 전도열의 향상, 평신도 지도자들의 활동, 복음주의적 설교와 성령체험을 강조하는 운동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상에서 우리는 영적 설교와 부흥 설교를 광의적 차원까지 확대하여 이것이 부상하게 된 배경과 각 시대마다의 특징을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이 작업을 통해 드러나는 특징을 몇 가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신비주의, 경건주의에서 나타난 광의적 의미의 영적 설교는 대중적 설 교가 아닌 소수의 그룹만을 대상으로 행해졌으며, 열광주의적 성격보다는 주로 깊은 사색과 명상을 통한 하나님 체험을 지향하는 그들의 사조에 맞게 개인의 경건(Frömmigkeit)과 영혼의 청정을 촉진하는 데 주안점이 주어졌다. 당연히 열 광주의적 분위기 하에서 감정에 호소하는 형식이 아닌, 지극히 정적인 수도원적 명정의 분위기와 형제애적 따뜻함이 이들의 분위기였다.

이에 반해 Wesley와 미국의 부흥운동에서 나타난 협의적 의미의 부흥설교는 영혼구원이라는 구체적 목적을 가진 본격적 대중집회에서 행해진 설교이다. 잠 자는 영혼을 일깨우고, 죄를 신랄하게 지적하며 성령충만을 기본적인 테마로하 여 설교가 행해지다 보니 자연 이성이 아닌 감정에 호소하는 설교가 될 수 밖 에 없었고, 회개와 새로운 삶에의 결심, 주님에 대한 영접 등으로 집회의 분위 기는 뜨거울 수 밖에 없었다. 비록 설교의 내용과 목표 자체가 마음을 도려야 하는 아픔을 수반하는 것이었지만, 이를 위해 마련된 특별집회는 새 생명과 새 차원을 자각하는 일종의 영혼의 축제일 수 밖에 없었다. 기성교회의 격식에 매 인 예배와 설교에서 느낄 수 없는 축제적 넉넉함이 이 집회와 설교의 특징이다.

 

둘째로 부흥설교에서 다루어지는 테마는 딱딱한 교리나 지식의 축적을 목적 한 교리설교가 아니라 영혼의 문제, 죄의 심각성, 구원의 당위성, 그리스도 안에 서의 거듭난 삶, 성령충만 등이 주를 이루고 있다. 물론 이런 경향성은 후대에 서 보이는 본격적인 부흥설교에 보다 부합되는 관찰이지만, 중세나 근세의 영적 설교도 역시 영혼의 문제를 심도있게 다루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었다.

영적 설교는 이성보다는 감정을 주된 전달 통로로 삼았다. 특히 대중집회에서 는 보다 효과적인 전달을 위해 찬양과 기도, 악기 등이 열광적인 분위기를 조성 하는 도구로 동원되었다.

 

셋째로 부흥 설교자들은 대개가 심오한 종교적 체험을 그들 사역의 바탕에 깔고 있다. 물론 중세 신비주의 설교자인 M. Eckhart에게서는 아랍철학을 통해 전달된 신플라톤주의에 영향받았다는 사실 이외에 다른 심오한 종교적 체험에 대한 정보를 발견할 수는 없으나, 본격적인 대중 집회의 설교자들은 올더스케잇 의 회심체험을 한 웨슬리, 성경을 읽는 중 하나님의 현존을 체험한 Jonathan Edwards, 2∼3년 간의 갈등 끝에 회심하여 성령세례의 체험을 하고 부흥사 의 길로 나선 Charles G. Finney 등에게서 보이는 것처럼 종교적 체험을 그들 사역의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영혼사랑에 불타던 사람, 끊임 없는 기도의 사람, 그리고 말씀에 대한 깊이있는 사고를 지닌 자들이었다.

 

넷째로 부흥설교자들의 설교는 대체로 평이하고 알아듣기 쉬운 설교였다. 중 세를 풍미했던 수사학적 기교에 의지하기보다는 '될 수 있는대로 단순하게, 대 중적으로, 통상적으로'(simpliciter et pueriliter et populanteret trivialiter)라는 M. Luter의 설교방법에 부합하는 설교를 주로 행했다. 주로 일상대화에서 사용 하는 통상적 언어, 다양한 제스쳐, 정열적이며 애절한 호소, 그리고 간단 명료한 개요와 논리적 전개가 부흥설교자들이 보여준 설교이다. 집회에 모여든 회중의 다양성과 뚜렷한 목적을 지향하는 집회의 성격을 고려할 때, 이것은 지극히 바 람직한 선택이라 할 수 있다.

이상에서 부흥설교의 특징과 개략적인 역사를 살펴보았는데, 이제 우리는 아 직 남아있는 한 가지의 문제를 이제 이 장에서 다루어야 한다. 그렇다면 부흥집 회란 어떻게 정의될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일반적인 부흥운동이나 상술한 대중 집회로서의 부흥집회와는 또 다른 형태의 부흥회가 이미 한국교회에 뿌리내린 지 오래이고, 이 형태가 외국의 경우와 달리 목회적 측면에서 한국교회의 성장 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끼쳐온 게 현실인 실정에서 이성봉 목사의 부흥사로의 정체성과 그의 설교를 평가하는 데 이 질문은 대단히 중요한 기준이 된다.

 

이와 관련하여 김진환은 부흥운동을 "하나님과 역사의 만남의 역사요, 만나서 힘을 얻어 어떤 새력에도 담대히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것이요, 죄악을 깨치 고 하나님의 질서를 확립하는 것"으로 보면서, 포괄적으로 접근한다. 이에 반 해 Charles G. Finney의 정의는 보다 구체적이다: "복음이 교회의 공식적 삶 밖 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호소라면, 부흥이란 교회 내에서의 호소이다... 그리스도 인들의 처음 사랑을 되찾게 하는 것이요... 침체된 교회를 깨우는 것이다."

 

이 정의들로부터 우리는 개교회의 부흥회에 대한(대중 부흥운동이 아닌) 이중 적 이해를 얻게 된다. 즉 이미 믿는 자들을 다시 영적으로 각성시키기 위해, 또 다른 하나는 불신자들을 각성시켜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려는 특정한 목적 하에 일정 기간 동안 지속되는 집회가 곧 부흥회이다. 이 중에서도 특히 전자의 이해 가 더 중요한 의미를 획득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인데, 이는 부흥사를 불신 자에게 전도한다는 의미가 강한 전도자(Evangelist)로 부르는 외국의 경우와 대 조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만큼 한국에서는 목회적 차원과 부흥회가 밀접하 게 연결되어 있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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