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韓國信仰人]

고당 조만식

好學 2012. 1. 25. 21:03

 

<고당 조만식>

 

 

권력의 시절, 아! 그리운 고당 조만식
송삼용 지음/ 생명의말씀사

서점가에서 관심이 있는 주제 중에 하나가 '리더십'이다. 사람들은 지도력을 발휘해서 조직을 잘 지도하고 영향력을 발휘하고자 하는 마음에 리더십에 관심을 가진다. 하지만 또 다른 한 편에서 보면 진정한 리더십을 가진 사람이 없는 시대에 존경하고 따를 리더를 갈망하는 데서 오는 관심이기도 하다.

난세가 영웅을 낳는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한국의 상황에서 그런 리더십을 가진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다. 그런 점에서 <고당 조만식>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고당 조만식>은 그의 삶에 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진정한 지도자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고당 조만식은 민족의 큰 스승이요 시대의 등불이다. 그는 많은 사람이 존경하고 따랐지만 결코 자만하거나 자신의 명예를 높이는 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더구나 그는 말만 앞서는 지도자가 아니었다. 그는 행동하는 지도자였다. 고당은 정치적인 것에 처음부터 관심을 두고 살지 않았다. 일제 강점기 때 그는 민족을 깨우고자 교육에 먼저 열정을 쏟았다. 그러나 그는 교육은 물론 경제, 언론, 체육, 종교, 농촌운동, 청년활동, 반공 등 각 분야에 손길을 뻗쳤다.

그가 각 분야에 관심을 가진 것은 선각자였기 때문이다. 선비 집안에서 한학을 배웠고 나중에 일본 유학을 통해 서구 문물을 배웠던 고당은 자신이 명예나 영달을 위한 목적으로 살지 않았다. 기독교를 젊은 나이에 소개 받고 믿게 되었던 그는 자신의 배움의 목적을 오직 하나님과 민족을 위한 것으로 삼았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잘 알고 계셨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의 음성과 뜻에 관심을 두셨으며 그분의 뜻대로 순종하셔서 십자가를 기꺼이 지셨다. 고당은 그리스도를 안 뒤에, 그의 삶의 근간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었다.

더구나 그는 자신의 삶의 주권을 그리스도께 내어 드렸다. 그래서 그는 사람을 보거나, 권력을 지향하지 않고 낮아지고 섬기고 사랑하는 삶을 살았다. 또한 오직 나라를 생각하고 젊은이들을 바르게 가르치는 일에 힘을 썼다. 그는 민족의 십자가를 스스로 진 사람이었다. 옳은 것에 대해서는 양보하지 않았다

고당은 한정교라는 친구에게 예수를 소개받았다. 그리고 신학문의 권유도 한정교로부터 받았다. 그가 신학문을 결심했을 때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술 때문에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염려했다. 고당은 술을 끊기로 작정하고 마지막으로 친구들과 술자리를 했다. 그는 친구들에게 금주는 물론 결별을 선언했다. 더구나 그 다음날 술이 깨지 않은 상태로 숭실학교 초대교장인 배위량을 찾아가 입학 의사를 밝혔다. 술냄새를 풍기는 청년을 쳐다본 배위량은 "공부는 무엇하려구 하나?"고 물었다. 고당은 "공부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겠소"라고 했다.

 

▲ 고당 조만식

그의 말은 그 이후 변함이 없이 지켜졌다. 우리와 성정이 같았던 고당이지만 그는 심지가 굳었다. 약속대로 오직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살았다. 그의 삶의 행적 가운데 보이는 것들이 그것을 잘 말해준다. 그가 일본 유학시절 유학생들이 감리교와 장로교로 나뉘어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자 그는 한 민족 사람들이 나뉘어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며 장감 초교파 연합교회를 설립해 예배를 드렸다. 또한 그는 지연 중심의 사람 차별을 하지 않기 위해 출신 지역을 묻지 않을 만큼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사랑을 보여주었다.

민족적 화합을 강조했던 고당은 민족 공동체 정신으로 무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해방 이후 사분오열된 정당과 정치인들의 모습에 가슴 아파했다. 저자는 책에서 고당의 이런 모습을 두고 "고당의 한 민족 공동체 사상은 '하나님도 한 분'이요, '교회도 하나'요, '민족도 하나'라는 성경의 정신을 실현한 것이었다'고 쓰고 있다.

<고당 조만식>에서 우리는 그의 사상이 성경과 한문학, 그리고 비폭력의 삶을 살았던 간디와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본다. 그는 결코 정치적인 제안에 현혹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3.1 만세 운동을 통한 비폭력의 삶을 철저하게 따랐다.

역사의 인물을 탐구한다는 일은 쉽지 않다. 전기를 구성한다는 것은 특별히 역사적 사실과 증거자료를 철저하게 고증할 필요가 있다. <고당 조만식>은 저자의 근면성을 잘 드러나게 한다. 또한 목회자답게 고당의 이야기를 신앙적 측면에서 잘 부각시키고 있다. 그러면서도 인간적인 고당의 면면을 그리고 있다.

이 책을 통해 감동을 받는 것은 고당의 삶이 철저하게 살신성인적이라는 점이다. 시대의 어두움 가운데 그의 삶은 군림하여 자기를 높이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삶에는 자기희생의 그리스도의 정신이 짙게 배어있다. 그는 북한에 공산당이 지배하면서 정치일선에 들어선다. 그리고 소련에 의한 신탁이 진행되자 단호하게 신탁을 반대한다. 고당의 제자가 열아홉 번을 찾아와서 설득했지만 그는 고개만 저었을 뿐이다. 상황이 급하게 돌아가는 가운데 남쪽에 있던 이승만 일행이 밀사를 보내 그를 남쪽으로 내려 오도록 요청한 일이 있다.

그러나 고당은 결국 남한 행을 마다하고 평양에 남기로 결심한다. 그의 결심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그는 공산당에 의해 짓밟히고 있는 불쌍한 동포들을 내버려 두고 혼자 남하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의 결심은 마치 골고다의 십자가를 지고자 결심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과 같다. 죽음을 택한 고당의 순결한 신앙은 오늘날 권력에 최선을(?) 다하는 정치인들 모습과 너무 대조적이다.

권력을 탐하더라도 민족과 국가를 생각하는 지도자가 이 땅에 있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 특별이 <고당 조만식>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더욱 들었다. 나라가 뒤숭숭한 가운데 고당이 그리운 것은 그의 사심없는 나라 사랑과 사람을 사랑한 그의 삶의 모습이 아른 거리기 때문이다.

[출처: 교회와 신앙]

*****

1913년 봄, 조만식은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31세의 나이로 오산학교에 부임했다. 그는 부임과 동시에 기숙사에서 학생들과 동거동락했다.
매일 삶으로 보여준 조만식의 실천적인 교훈은 학생들에게는 큰 도전으로 다가왔다.

추운 겨울 이른 아침, 조용하던 기숙사 주변에서 쨍쨍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학생들이 기숙사 방에서 나와 소리가 나는 곳을 찾아 나섰다. 그러다가 화장실에서 바닥을 내리치고 있는 조만식 선생을 발견했다.

“아니, 선생님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아무 것도 아니야. 화장실 배설물이 넘쳐 울려서 꽁꽁 얼어버렸구먼.

이걸 좀 깨야 용무를 보지 않겠어. 허허허!”

학생들은 몸 둘 바를 몰라 안절부절 못했다.

그 중 한 학생이 앞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선생님, 저희들이 하겠습니다.”
“아니야. 다 됐어.”
선생님이 자신들을 위해 동이 트기도 전에 일어나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자 학생들은 큰 감화를 받았다.

이런 일도 있었다.
해마다 겨울이 되면 눈 때문에 학교 정문이 막히곤 했다. 그 때도 고당은 꼭두새벽부터 나가 정문에서부터 운동장까지 모두 쓸었다.

당시 오산학교에서 고당으로부터 지도를 받았던 한경직 목사는 고당에 대해 이렇게 피력했다.
“나는 일생동안 여러 은사들에게 배워왔지만 학생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며 실제로 모범을 보여주며 그의 전 생애를 희생한 교육자는 오직 고당 한 분뿐이라고 생각한다.”
고당은 무슨 일이든 말없이 실천했다.

‘고당 조만식’(생명의 말씀사)에서 인용.
****

 

<조만식 (曺晩植 1882∼1950) 설명>
독립운동가· 정치가. 호는 고당(古堂). 본관은 창녕(昌寧). 평안남도 강서(江西) 출생.
출생지 : 평남 강서(江西)
주요수상 :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970)

1905년 평양 숭실학교에 입학하면서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1908년 일본 세이소쿠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정칙영어학교)]를 거쳐 1910년 메이지대학[明治大學(명치대학)] 법학부를 졸업하였다. 년간 영어를 공부하였는데, 그 무렵 인도의 독립운동가 M.K. 간디의 무저항주의· 인도주의· 민족주의에에 공감하여 이를 독립운동의 본보기로 삼았다.

  메이지[明治]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1913년 귀국하여 이승훈(李昇薰)이 설립한 오산학교(五山學校)의 교사로 있다가 2년 뒤 교장이 되었다. 1919년 교장직에서 물러난 뒤 3·1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체포되어 1년간 복역하였다.

1921년 평양그리스도청년회 총무와 산정현교회(山亭峴敎會)의 장로가 되었다. 1922년 오윤선(吳胤善)과 함께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奬勵會)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어 국산품장려운동을 벌였다. 평양기독교청년회총무, 산정현교회 장로를 지냈으며, 1923년 송진우(宋鎭禹)·김성수(金性洙) 등과 연정회(硏政會)를 발기, 민립대학기성회(民立大學期成會)를 조직하였으며, 1927년 신간회(新幹會) 활동에 참여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실패, 그 후 숭인중학(崇仁中學) 교장이 되었으나 1926년 일제의 압력으로 사직하였다. 

1927년 신간회(新幹會) 결성에 참여하였으나 역시 일제의 방해로 좌절되었다. 1930년 관서체육회장을 지내고 1932년 《조선일보》 사장에 취임, 언론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높이는 동시에 비폭력·무저항·불복종의 민족주의운동을 호소하였다. 1943년 지원병제도에 반대하여 구금당하기도 하였다.

광복 후 평양에서 평안남도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여 위원장에 취임하였고 조선민주당을 창당하여 당수로서 반탁운동(反託運動)을 전개하다가 소련군에 의해 연금되기도 하였다. 1945년 광복이 되자 평남건국준비위원회 ·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이 되어 활약하였다. 소련군정청에서는 북조선인민정치위원회를 설치하고 그에게 위원장 취임을 권유하였으나 거부하였다. 그 해 11월 조선민주당을 창당, 당수가 되어 반공노선을 내세우고 반탁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어 소련군정청 당국과 공산주의자들은 조선민주당을 접수하고 그를 고려호텔에 연금, 협박과 회유를 하였으나 끝까지 굽히지 않았고, 월남(越南)을 종용하는 제자들의 간청도 거절하였다. 그 후 6·25전쟁 때 평양형무소에서 끝내 월남하지 않고 있다가 1950년 10월 18일에 공산당에 의해 총살당했다고 전해진다. 1991년 유발(遺髮)을 국립묘지에 안장하였다. 1970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그는 평생을 기독교정신에 입각하여 살았으며, 민족주의자로서 일관된 삶을 유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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