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韓國信仰人]

이세종 1

好學 2011. 12. 17. 06:20

이세종 1 
 

 

1.성경을 읽고 그대로 실천하였던 이공

 

예수님의 참된 제자 이세종 선생님은 한국의 토속적인 냄새를 물씬 풍기는 분이다. 그는 10여년 이상을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다가 40세가 되어서야 예수님을 믿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얼마나 열심히 성경을 읽고 말씀에 합당한 삶을 살았는지 몇 해 후에는 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그에게 성경을 배우기 위해서 모여들었다. 동네 사람들은 그를 이처사라 불렀으나 정작 자신은 이제 세상에서 공(空)을 친 사람이니 이제부터 이공(李空)이라 불러달라고 하였다. 이공은 밤이면 성경을 암송하고, 낮에는 인근 마을의 젊은이들을 모아놓고 성경공부 시켰다. “파라. 파라. 깊이 파라.”고 하면서 철저한 영적 생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의 제자 중의 한 분이 “맨발의 성자”라고 불리는 이현필 선생이다. 그리고 이공은 특히 순결사상을 강조했다. 이러한 순결사상을 따라 개신교 수도단체인 ‘동광원’이 탄생되었다.
이공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만물을 매우 사랑하였다. 그는 독사도 죽이지 않았고, 자기 발 밑에 깔린 개미의 죽음을 보고 울었다. 산길을 갈 때에는 칡넝쿨이 사람에게 밟히지 않도록 옮겨 놓았다. 이처럼 그는 산천초목과 금수곤충까지도 사랑했으며, 모든 생명 가진 피조물을 경외하며 살았다.
그는 예수님을 믿은 순간부터 세속적인 소유를 모두 버리고 철저히 오직 주님 한 분만을 따르고자 하신 분이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어린아이와 같이 믿고 실천했던 분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일제 36년의 암울하던 시기에 전남 일대를 밝게 비추는 빛으로 사용하셨다. 이세종 성자의 진실된 삶을 살펴보면서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밝고 거룩한 빛이 비춰지기를 소망해본다.

 

2.불신자 시절

 

1880년, 전남 화순군 동광리에서 삼형제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의 이름은 ‘영찬’이었다. 어려서부터 착실하고 정직해서 무슨 일에든지 부지런하고 충직했기 때문에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일찍 부모를 여의었기 때문에 글을 배우지 못하였다. 형님 댁에 같이 살던 그는 28세 때 동광리에서 20여리 되는 청풍면 차동으로 갔다. 그곳에서 10여년 동안 머슴을 살았다.
남의 머슴을 살면서 혼자 노력하여 한글을 배웠고, 부모대신 형과 형수에게 효도하였다. 짚신을 삼아도 제일 좋은 것은 형과 형수에게 주었다. 그리고 가장 나쁜 것을 자신이 신었다. 성격은 솔직하고 급하였다. 그리고 한 번 자기 비위에 맞지 않으면 천만금이 생긴다해도 하지 않았고, 한 번 결심하면 하늘이 무너져도 그대로 했다. 산에 나무하러 갈 때에도 ‘그 날 몇 짐을 하리라’고 작정했으면 뼈가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그대로 하였다.
그는 나이 30세에 자신보다 16살이 어린 소녀를 결혼식조차 못 올리고 데려와 살았다. 그녀의 이름은 문순희였는데, 나이도 너무 어렸지만 아주 무식한 처녀였다. 결혼을 한 이공은 십년 작정을 하고 돈을 모으기로 결심했다. 그는 지게 발이 닳도록 열심히 일을 했다. 겨울에는 콩 잎사귀 죽으로 끼니를 때우면서 돈을 모았다. 그래서 10년 후에는 동광리 부락에서 제일 가는 부자가 되었다.

 

3.자식을 얻기 위해 산당(山堂)을 짓다

 

그는 열심히 일하여 많은 돈을 벌었으나 아내가 생산하지 못하였으므로 큰 고민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자식을 얻고자 무당의 권유로 천태산 중턱에 산당을 짓기로 했다. 산당을 짓는 동안 그는 상가집의 연장은 빌리지도 않았으며, 재료는 제일 좋은 것을 사용했고, 샘물은 삼중으로 파서 정한 물을 구별시켰으며, 마당에는 연못을 파고 정원도 꾸몄다.
이렇게 산당을 3층으로 준공한 후에 무당과 함께 살면서 제사상을 차리고 정성을 바쳤다. 그런데 얼마 후에 무당이 병들어 죽게 되었다. 하늘같이 받들던 무당의 장례를 치르면서 그는 모든 정성이 허사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예수님을 믿은 후에 이 산당은 성경을 가르치는 곳으로 사용되었다.
그는 다른 사람의 지도나 가르침이 없이 혼자서 성경을 읽었다. 그러던 중에 ‘레위기’를 읽어보니 거기 나오는 제사법이 자기가 산당에서 차려놓고 지냈던 제사법과 비슷하여 신기하게 생각했다. 성경을 계속 읽는 동안 그는 산당에 열두 제상을 차려놓고 촛불을 켜고 매일 공을 드렸던 것이 헛수고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한 하나님만이 참된 신(神)이며 그동안 자신이 잡신에게 공을 들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특히 그는 신약성경을 읽는 중에 기독교의 위대함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그후 그는 그동안 해온 미신 행위를 모두 버리고, 산당에 꾸며 놓았던 것들을 모조리 불사르고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다. 잡신을 섬기기에 열심이었던 만큼 그는 하나님을 섬기는 데도 정성이 지극했다. 그는 나이 40세 때 노나복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예수님을 믿고 너무도 기뻐서 천태산 기슭 바람재 위에 높이 올라서서 아랫도리가 벗어진 줄도 모르고 두 손을 치켜들고 춤을 추며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억조창생 만민들아! 다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

 

4. 회개와 변화

 

이공은 예수님을 믿은 후 철저히 회개하는 삶을 살았다. 그는 예수님을 믿기 전에 지었던 죄를 일일이 떠올리고 모두 배상해주었다. 세상 사람들이 흔히 하는 버릇대로 남의 밭머리를 지나다가 콩잎을 뜯어먹은 것을 생각하고 그 콩밭 주인을 찾아가 죄를 자복하고 그 값을 변상해주었다. 또한 자기 돈과 곡식을 퍼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였다. 특히 늙은이와 어린애가 많은 집을 찾아다니며 나눠주었다. 거지나 나그네가 찾아오면, 함께 식사를 하였다. 이공은 예수님을 믿고 열심히 성경을 읽으며 연구하였다. 밤에 혼자 앉아 성경을 읽을 때면 “오! 그러십니까.”라고 하면서 혼자서 자문자답(自問自答)하였다. 그래서 사람들 사이에는 이세종이 하나님과 이야기한다고 소문이 돌았다.
그는 성경을 한구절 읽고 그대로 실천하려고 최선을 다하였다. “예수를 믿으려면 철저히 믿어야 한다. 죽도 아니고 밥도 아니게 믿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성경에 가르친 대로 실행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그는 ‘땅 끝까지 이르러 나의 증인이 되라’(행1:8)고 하신 말씀을 보고 전도하기 시작했는데, 자신이 살던 동광리뿐만 아니라 이웃 마을까지 찾아다니며 하루도 쉬지 않고 전도했다. 십자가를 만들어 들고 다니면서, 만나는 사람들 모두에게 하나님을 공경해야 한다고 했다. 때로는 식사도 잊고 전도하였다. 한 번 전도하러 갔던 집을 계속 찾아갔기 때문에 한 집을 다니는 데에만 짚신 세 켤레가 닳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누가복음 19장에 나온 삭개오를 보고 큰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4배가 갚겠나이다”(눅19:8). 그는 이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여 자기에게 빚진 모든 사람들의 빚을 다 탕감해주었다. “여기 있소! 당신의 문서 도로 받으시오. 모조리 탕감해 드리는 것이니 안심하시오.” 그는 빚진 사람을 불러다 그들이 보는 앞에서 빚 문서를 불질러 버렸다. 물건이든 돈이든 모두 탕감해 주었다. 이렇게 해서 이공이 예수님을 믿은 후에 마을 안에는 그에게 빚진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게 되었다.
이러한 덕행을 보고 면(面)에서 그의 송덕비를 경찰지서가 있는 통정리 마을 길에다 세워주었다. 그러자 이를 알게 된 그는 사색이 되어 면사무소를 찾아가 통사정을 하면서 “사람의 유언이나 송덕비는 그가 죽은 다음에라야 하는 것이지 산 사람에게 무슨 송덕비를 세웁니까?” 하면서 자기가 한 일은 그런 비를 세울 일이 못되고 자기의 이름은 세상에 나타낼 만한 것도 못되니 제발 그 비석을 없애달라고 하였다. 여러 번 눈물로 사정하는 그의 진심을 알고는 할 수 없이 면에서 그 비석을 땅에 파묻어 버렸다. 조그만 일에도 생색을 내며 공명심에 사로잡히는 작금의 세태와 얼마나 다른가!
그는 외출할 때는 반드시 몸에 구제할 돈 얼마와 자기가 사사로이 쓸 돈 얼마를 따로 가지고 다녔다. 구제할 돈을 따로 가지고 다니다가 구제를 받아야 할 사람을 만나면 누구라도 주저하지 않고 주었다. 그는 물질을 사용하는 방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첫째는 복음 전도비, 둘째는 세금, 셋째는 남에게 갚을 것, 넷째는 구제비, 다섯째로 접대비로 책정하였다. 그리고 나서 남은 돈이 있으면 그것으로 생활하고 없으면 굶어 죽는 경우가 있어도 그렇게 쓰라고 했다.
남을 구제하는 정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구제는 자기가 쓸 몫에서 떼어내어서 구제해야 참 구제이다. 자기가 먹을 것 안 먹고 해야지, 먹고 입고 쓸 것을 다 쓰고 남은 것을 구제하는 것은 가치 없는 일이다. 헐벗은 사람에게 옷 한 벌 준다해도 자기가 입은 옷이 다 해어져 누더기가 되기까지 입으면서 주어야 참 동정이 된다.”

 

5.청빈거사(淸貧居士)

 

이세종 선생님은 예수님을 믿은 후, 사람들이 자기를 ‘이공(李空)’이라 불러주기를 바랐다. 왜냐하면 자기는 이 땅에서 예수님을 위해 공(空)을 친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철저한 자기부인의 정신이었다. 하루는 여제자 오복희씨가 이공에게 “저는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묻자, “얻어 먹어라”고 단도직입적으로 한마디 할 뿐이었다. 스승의 충고를 생각하고 또 생각해보아도 자기는 도저히 그 교훈대로 실행하지 못할 것 같았으나 여러 해 동안 망설이다가 어느 겨울 눈오는 날 그녀는 맨발로 거지처럼 얻어먹으러 나섰다. 탁발을 실행했다. 구걸하러 다니면서 냉정히 거절하며 주지 않는 집을 거듭 세 번씩이나 드나들면서 자기를 부인하는 훈련을 했다. 입으로는 “날빛보다 더 밝은 천당”이란 찬송을 부르면서….


이공 자신은 예수님을 믿고부터는 믿는 일에 아예 퐁당 빠지려했다. 거지가 되려하고, 남 보기에는 미친 사람 같고 이단자 같이 되려고 각오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도 그 정신을 넣어 주려고 훈련을 시켰다. 이공의 음식이나 행색은 거지나 다름이 없었다. 지나치게 검소했다. 잘 입으려 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사치스럽고 좋은 듯싶은 것은 저주스러워 못 쓴다고 하면서 헌누더기로 만족했다. 이공은 기도 중에 “도인(道人)은 화려하면 못 쓴다”는 영음을 세 번이나 들었다고 한다. 노자는 말하기를 “성인은 몸에는 거친 옷을 입으나 가슴 속에는 玉을 품고 있다”고 했고, 장자는 “참다운 성인은 혁혁한 광채를 벗어버리고 평민과 범인(凡人) 속으로 피신한다. 덕이 뛰어나면 외형은 잊어버린다”고 했다.
이공도 말하길, “좋은 옷을 입고 길을 가보라. 그가 지나가면 사람들이 부러워 뒤를 돌아보지 않겠는가? 그러나 다 떨어진 누더기를 입고 간다면, 아무도 돌아다 볼 사람이 없다. 내가 사치한 옷을 입고 다니면, 남들이 부러워서 빚을 내서라도 그 흉내를 내려할 것이 뻔한 일이니, 이는 내가 그 피값을 빨아먹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므로 참 君子는 사치한 옷을 입고 다니지 못하는 것이다.”
유행은 사람들의 모방심리를 이용해서 퍼져간다. 거기서 여러 가지 범죄가 파생되는 법이다. TV에서 어떤 유명 연예인이 입던 옷이나 악세사리 등이 순식간에 유행을 타고 급속히 전파된다. 유행의 죄는 맨 먼저 시작한 사람의 죄다. 이공은 외식(外飾)을 원수라고 믿었다. 꽃뱀이나 독사의 겉모양은 화사한 무늬가 있는 법이다. 그는 “사람은 겉보다 속을 아름답게 단장해야 한다. 속이 진실해야 한다. 겉을 꾸밀수록 속은 텅텅비고 거짓되어 간다. 예수 믿는 사람들도 겉을 꾸미는 재주에 능하고, 서로 만나면 손잡고 흔들며 웃고 야단이나 속에는 시기, 질투, 미움이 꽉 차있다.”고 탄식했다.


이공은 겉과 속이 다르지 않았다. 안과 밖이 다르지 않은 생활, 꾸밈없이 사는 일이 그의 즐거움이요 자랑이었다. 그는 늘 말하기를, “내 속을 다스리는 일이 천하를 다스리는 일이다”고 믿었다. 한 번은 어느 교회에서 설교를 부탁하여 갔는데, 세상에서 보기 드문 우스운 모자를 쓰고 거지옷을 입고 갔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의 설교보다도 그 꼴이 신기해서 거지가 설교를 한다고 모여들어 법석이었다.


이공은 의식주 문제를 초월하며 살았다. 먹는 문제, 입는 문제를 초월했고, 성(性)문제도 초월했다. 그는 심신을 자기 마음 먹은 자유자재로 통솔할 수 있었다. 특히 그는 음식에 대한 절제가 철저했다. 육식은 전혀 않고, 생선도 먹지 않았으며, 남의 집에서 명절 음식을 가져온 것도 먹지 않았다. 이공 자신이 금식하는 일은 보통이었으나, 남에게는 장려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의 지나친 음식대접을 극히 조심하여 좀 더 먹는 다 해도 변소 한 번 더 나녀오게 하는 수고 밖에 더 유익한 것이 없다고 가르치면서, 배부르기를 구하기 보다 먼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한다고 했다. 둘러 앉아서 성경 공부를 하는 시간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음식을 들지 않았다. 공부가 끝난 다음에야 “성경 공부는 공사(公事)요, 음식먹는 일은 사사(私事)다. 이제 공사가 끝났으니 사사로 돌아갑시다”하며 음식을 먹었다.


그는 남을 구제할 경우에도 자기가 먹을 분량에서 얼마를 덜어서 구제하였다. 혹시 교회에서 위임식이나 무슨 큰 잔치가 벌어져 초대를 받으면, 이공은 참석은 해도 음식은 먹지 않고 자기 몫으로 내놓은 것을 가지고 나와서 구경꾼들에게 나눠 주었다. 그리고는 탄식하기를 “이렇게 하니 전도가 안됩니다. 교인들은 먹지 못하더라도 믿지 않는 마을 구경꾼들을 잘 대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했다. 이세종은 음식 중에 찰밥을 가장 좋아했다. 어느날 그는 찰밥 생각이 너무나서 아내에게 찰밥 좀 하라고 했다. 아내가 5홉 쯤 되는 찰밥을 해 주었더니, 그는 밖에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면서 “아이구, 이 놈은 죄인 놈이오. 이 놈이 잘못이오”하면서 가난한 사람들 생각이 나서 못먹고 앉았다가 기어이 밥그릇을 들고 나가 이웃에 있는 가난한 집을 찾아다니면서 나눠주었다. 눈이 내리는 어느날, 식혜를 먹고 싶어해서 아내가 찹쌀 식혜를 만들어 주었더니, 두어 술 떠 먹고는 더 먹지 못하고 통곡하면서 “이 놈이 진작 어느 도랑물에라도 빠져 죽지 않고 이제껏 살아온 것이 이런 먹을 것이나 탐내서 죽지 못했던가?”하면서 탄식했다.


언젠가는 능주라는 곳에서 선교사 20주년 기념식이 있었는데, 이세종은 무명옷을 입고 갔다가 불쌍한 거지를 보고는 그만 옷을 바꿔 입었다. 거지의 옷은 검은 옷에 이까지 있고 작아서 볼쌍사나왔지만 그는 태연히 참석했다.
이세종은 한 때 등광리에서 첫째 가는 부자로 삼층 산당을 짓고, 매일 진수성찬에 좋은 옷 입고, 장자(長者)행세를 하던 자였는데 예수를 믿고 철저히 변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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