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韓國信仰人]

이세종 2

好學 2011. 12. 17. 06:21

이세종 2


 

6.자비심은 물결같이

 

그는 무엇 때문인지 종종 거리를 울면서 다녔다. “하나님, 죄인들을 어떻게 하실라우?” 그는 자비심이 충만하여 걸음마다 눈물을 흘리면서 입으로는 “하나님, 죄인들을 어떻게 하실라우?”하며 끊임없이 하나님께 호소했다. 불쌍한 죄인들을 볼 때는 “인간이 이렇게 살다가 죽은 뒤에는 심판이 있지 않습니까?”하면서 측은해서 못 견뎌했으며, 혹시 잘못한 사람을 볼 때는 꾸지람을 했다가도 돌아서서는 눈물지었다. 남의 물건을 훔친 사람을 보면 답답해 하며 “그것을 가져다가 유익하게 써보지 못할 것인데, 왜 헛수고 하는고?”하고 안타까와 하였다. 특히 신앙생활을 하다가 타락한 사람을 보면 “하나님, 이 사람을 잊지 말아 주소서”하고 밤새도록 기도하였다.


거지가 찾아오면 자기가 먹는 대로 손수 밥그릇을 들고 나가 주면서 다 먹기까지 곁에서 지켜보며 “빨리 먹고 한 집이라도 더 가서 구걸해야지!” 했다. 그는 덕(德)이 아니면 하지 않았다. 남에게 덕을 끼치는 일이 아니면 절대로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덕을 위하는 일이라면 억지로 5리를 가자고 청해도 10리를 같이 가 주었고, 속옷을 달라는 자에겐 겉옷까지 벗어 주었다.
한 번은 어떤 사람이 나타나 주님을 믿은 뒤 이공이 딴 사람으로 변한 것을 이용해서 그의 살림살이가 전부 자기 것이라고 호통을 쳤다. 그 때 이공은 한 마디도 답변하지 않은 채 다만 스스로 탄식하기를 “이제는 나도 죽을 때가 되었나 봅니다” 할 뿐이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말씀그대로 빼앗기는 일이 곧 얻는 일이라고 믿었다. 그렇게 부자로 살던 그가 예수님 믿고 거지 모양으로 다니니 어떤 때는 친척들이 달려들어 자기들에게 주지 않는다고 발악하고, 이공의 살림을 때려 부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원망치 않았고, 그들이 바라는 요구 이상으로 편리를 봐주었다. 이공은 이 세상의 명예와 칭찬 따위는 털끝 만큼도 바라지 않았다. 그런 것은 뜬구름이요 허망한 것이라면서, “사람은 어디를 가든지 자기의 이익만 생각하고 다녀선 안된다. 내가 남에게 무엇을 봉사하려고 해야지, 아름다운 꽃 한 송이를 보고 탐나서 따러갔다간 반드시 시험에 빠질 것이다”라고 가르쳤다. 그는 칭찬받기를 바라는 일에 대하여 말하길, “쓸데 없이 칭찬하는 자도 마귀요, 칭찬받는 자도 마귀이다”라고 했다.


그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산천초목과 금수곤충에 이르기까지 사랑으로 대하였다. 모든 생명 가진 것을 경외하고 넘치는 사랑으로 대하였다. “만물들아! 다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세.” 아름다운 산천과 우거진 숲을 바라볼 때면 그는 한량 없이 기뻐했다.
어느 날 부엌에서 갑자기 풍덩하는 소리가 나길래 나가보니 구정물을 담아 둔 동이 속에서 쥐가 빠져서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이공은 부엌 구석에서 막대기를 주워다 쥐가 기어오르도록 다리를 놓아 주었고 쥐에게 먹을 것을 주기도 하였다. 개미 한 마리라도 자기 발에 밟혀 바둥거리는 것을 보면, “하나님 앞에서 하는 행위를 보아서는 내가 너에게 깨물려 죽어야할텐데 네가 나한테 밟혀 죽다니” 하면서 울기도 하였다. 이공은 ‘동물들이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반역한 죄 때문’이라고 하였다. 사람이 하나님을 반역하니 만물도 사람에게 반역한다고 말하면서 동물들이나 초목이나 무엇이든지 사람에게 매인 것들을 잘 보호하고 아껴주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늘 이공을 따라 다니면서 이런 모양을 곁에서 지켜 본 그의 제자는 말하길, “이공께서는 언제나 말보다 행위로 가르치셨습니다. 오늘날 어디가나 가짜만 많은 세상에서 이공 어른만이 순금인(純金人)이었습니다”고 했다. 이공의 가르침은 누가 듣더라도 엄숙하고 두려웠다.
겸손은 매우 역설적이라 할 수 있다. 낮출수록 높아지며 겸손할수록 고귀해지는 역설적인 법칙, 낮추는 이가 사람일 때 높여주는 이는 하나님이시라는 상관관계에 근거해 있다. 겸손하게 섬기는 자세야말로 하나님 앞에서 소중하고 큰 미덕일 것이다. 이세종 선생님(이공)이 이 땅에서 보여주신 겸손한 생활을 알아보고자 한다.

 

7. 겸손(謙遜)

 

어느 날 이공이 거지처럼 다 떨어진 옷을 입고 길을 가고 있었다. 그가 가는 길에 마침 마을에서 가장 심술궂고 못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가 이공에게 말하길 “어디가? 이리와 봐.” 그 사람은 다짜고짜 이공을 끌고 가더니 길가에 있는 나무에다 새끼줄로 꽁꽁 묶어 놓았다. “꼼짝 말고 이렇게 있어.” 이런 말 한마디하고는 그는 자기 갈 길로 가버렸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불같이 급한 성격이었다. 이웃집 닭이 자기 집 마당에 들어오면 얼마나 급하게 쫓았는지 닭이 날갯죽지가 빠질 정도로 혼을 냈다. 그러던 그가 예수님을 믿고 변화된 후 세상 사람들에게 바보 취급을 받아도 그저 예예하였다. 본래 성질이 불 같으면서도 이런 일을 당하고도 그저 순한 양이 되었으니 얼마나 자기를 죽였겠는가? 이공을 나무에 묶어 놓고 간 사나이는 어디 가서 자기 일을 보면서 아침에 한 일을 깜박 잊었다가 오후에 그리로 지나가게 되었는데 그때까지 이공은 나무에 묶인 채 잠자코 있었다.
“저런, 왜 풀고 가지 않고 여태까지 이렇게 있었소?” 사나이가 미안해 묻는 말에, 이공은 말하길, “매는 것도 법이나, 푸는 법이 또한 있어야 가지오”라고 말하면서 아무런 원망도 않고 그렇게 대답했다.


기독교를 핍박하던 박씨 문중의 어떤 사람이 마을 네거리에서 이공을 들어 비석 위에 올려 놓고 “꼼짝 말라”고 했더니 이공은 온종일 그대로 있었다. 이 자식, 저 자식하여도 그저 예예할 뿐이었다. 저녁 무렵이 되어 이공은 그를 보고 “이젠 내려가도 괜찮을까요?”하고 묻고서 내려왔다. 박씨는 그때 자기의 소행을 몹시 부끄럽게 생각했으며 후에 그 또한 예수님을 영접하여 신앙을 갖게 되었다.


이공이 어느 마을을 지나가는데 마을 개구쟁이들이 길을 막고 서서 지나가지 못하게 하고 팔을 비틀고 괴롭게 하고 어떤 때는 문둥이, 비렁뱅이, 내 아들이라 놀려도 묵묵히 지나갔다. 그러면서 이공은 스스로를 반성하기를 “사자의 입도 막으신 하나님께서 어린아이들의 입 하나 못 막아내서 내게 이런 애매한 말을 듣게 하실 것인가? 아이들이 나를 문둥이라고 욕하는 것은 내 몸이 비록 문둥이가 아닐지라도 내 속에 문둥병이 있는 것을 하나님께서 아이들의 입을 통해서 알려 주심이 아니겠는가? 아이들의 입을 통해서 비렁뱅이라고 하는 것은 비록 내가 세상 사람에게는 비렁뱅이가 아니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야 빌어먹으니 옳은 말이다”하면서 자신을 철저히 낮추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5-8).


그는 자기 마음에 행여 교만심이 일어날까 봐 길을 다닐 때에는 거의 고개를 숙이고 다녔다. 그는 항상 겸손을 배웠고, 예수님처럼 고난으로 순종을 배웠다. 이공은 자기를 높이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 옷이나 태도, 심지어는 꿈에서까지도 교만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옷도 남보다 좋은 것을 입으면 그 옷이 마음에 교만을 일으켜 어느 새 남을 낮게 보고 멸시하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음식을 먹을 때에도 그는 상을 차려 먹지 않고 맨 땅에 그냥 놓고 먹었다. 혹시 누가 밥상을 차려와도 마음이 높아진다고 싫어하고, 자기는 죄인이라면서 맨 땅에 그냥 놓고 먹었다. 그는 어디를 가려면 먼저 스스로 자기 마음을 살펴보아 어떤 동기에서 가고 싶어하는가 반성해 보고, 자기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성령님의 뜻이라고 느껴져야만 비로소 일어섰다. 같은 마을의 어느 집에 찾아 갈 때에도 그랬고, 어디서 유숙하게 되는 경우에도 꼭 성령님의 뜻을 물었다. 어느 집에 들어가기 전에는 우선 대문에서 발을 멈추고 자기 마음을 일단 반성해 보았으며, 마음에 지금 찾아가는 사람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들어가지 않고 그 길로 발길을 돌려 되돌아갔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13:1-3). 이 말씀처럼 사랑이 없이 누구를 찾아간다면 상대편에게도 자기에게도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성령님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처음에는 성령님의 감동이 오는 것인데 이는 누구나 쉽게 받는다. 성령님의 감동은 항상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냥 지나가기 쉽다.
그 다음에는 성령을 받는 것인데 이는 회개하여야 한다. 사람이 햇빛을 받으려면 방에서 뛰쳐나오는 것과 같이 자기에게 달렸다. 회개하고 안하고에 따라 성령님은 들어갔다 나왔다 한다. 그 다음에는 성령 충만을 받는 일인데 이것은 성령님을 완전하게 받는 것이다. 완전하게 받으면 그때는 다시 떠나지 않는다. 이것은 그릇에 물이 가득히 담기면 넘쳐 흐르는 듯한 것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롬8:9).


사람의 마음은 방과 같다. 마음이 거룩한 성전이 되면 성령님이 들어와 계신다. 그러므로 자기를 항상 깨끗이 준비해야 한다. 사실 성령이 내 안에 계시면 더러운 짓을 하려고 해도 못하는 법이다. 성령이 더러움에서 나를 지켜 주는 것이다. 우리가 정과 욕심을 순간순간 십자가에 못박아야 성령을 받기 때문에 성령을 받기 위하여 자기도 애를 써야 한다”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그는 신자가 건전한 믿음생활을 하려면 ‘신비’, ‘경험’, ‘지혜’, ‘지식’의 네 가지를 겸전해야 된다고 하였다.


이공은 사람을 차별 대우하지 않았다. 거지가 구걸하건, 반가운 귀빈이 오건 집 식구들이 먹는 것과 똑같이 대접하였다. 어떤 때 부인이 화를 내면서 거지를 박대하는 눈치이면 아내를 타이르면서 거지도 우리에게 찾아오는 손님이니 똑같이 대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는 주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신 성경 말씀 그대로 실천하려고 했다.


어떤 거지는 구걸하러 와서는 이공 댁에서 평소에 먹는 대로 주니까 너무 형편이 없는 음식이라서 안 먹고 가는 이도 있었다. 때로 이공은 거지에게, “당신은 혹시 마을 잔치 집에 가서 한끼라도 잘 먹었을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만 이 놈은 우리 주님의 은혜를 알고 난 후부터는 지금까지 좋은 음식이라곤 입에 넣어 본 일이 없습니다”라고 했다.


어느 날 이공이 병중에 있을 때, 미국인 노나복 선교사가 지나가다가 소식을 듣고 귤 몇 개를 이공에게 드리고 간 일이 있었다. 그는 병이 회복된 후 계란 얼마를 가지고 선교사를 찾아가서 문병 왔을 때에 잘 대접하지 못한 일을 사과했다. 그는 하나님의 종을 존대할 줄 알았고, 목사를 험담하는 사람이 있으면 책망했다. 한 번은 사람들이 어느 목사를 험담하는 소리를 듣다가 “무슨 소리를 그렇게 하시오. 그래도 목사라면 교인들을 앞에 놓고 남을 가르치는 분이신데 그럴 수 있겠소. 그만 두시오”라고 했다. 그래도 듣지 않고 계속 험담하자, “여보시오, 그만 두라면 그만 두지 왜 그러시오. 그런 말은 남의 험담이란 말이오. 남의 허물을 덮어 주어야지.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하지 않았소”하고 말렸다.
이공은 남들의 칭찬이나 악평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비평에 따라 태도를 달리한 적도 없었고, 언제나 여전히 한 길을 갔다. 자기의 명예나 호평 따위는 꿈에도 기대하지 않았다. 다만 자기의 생활 태도가 성경에 비추어 보아 맞느냐 안 맞느냐 반성할 뿐이었다. 남이 자기를 칭찬하는 일이나 존대하는 일은 절대로 싫어하고, 그런 것은 마귀 대접이라 여겼다. 칭찬이라는 것은 약자가 받으면 교만이 생기는 법이요, 덕이 장성한 사람이 받을 때는 도리어 괴로울 뿐이라고 하면서, 그러기에 칭찬은 무익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명예 따위는 털끝만큼도 구하지 않았다. 오직 진리만을 추구하고 진리대로 살려고만 애를 썼다. 눈 한 번 뜨는 것, 발 하나 옮겨 놓는 것까지도 진리가 아니면 하지 않았다.


그는 늘 지혜롭게, 솔직하게, 양심대로 살라고 가르쳤다. 그는 솔직했고, 남도 솔직한 것을 좋아했다. 솔직하지 않을 땐 책망했다. 무엇이나 사실대로 해야지, 사람이 일부러 꾸며 만든 것은 오래 가지 못하는 법이라고 절대로 금했다. 자기를 아는 사람은 스스로를 낮추며 사람의 칭찬을 즐기지 않는다.
바로 이공이 그런 사람이다. 그는 오로지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 보았다. 자랑은 교만이 되기 쉽고, 교만은 쉽사리 많은 적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겸손은 온전한 처세를 위하여 빼어 놓을 수 없는 덕목이다. 겸손은 지혜로운 자의 몫이며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이기도 하다.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聖經)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感動)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義)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3:15-17).
이처럼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유익한 책이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는 그 속에서 진리를 찾을 것이요 문체를 따질 것이 아니며, 성경을 읽으면서 겸손되이 순직하게, 또한 성실하게 읽을 때 많은 유익을 얻게 된다.

 

8. 성경 연구

 

이공은 세상적인 학문은 많이 접하지 못했으나 그토록 유명하고 많은 이들에게 영적인 감동을 줄 수 있었던 것은 어느 누구보다도 성경을 많이 읽었으며, 그 말씀대로 실천하며 살아가는데 있었다.
“파라 파라 깊이 파라. 얕게 파면 너 죽는다. 뿌리도 깊이 팔수록 좁다. 좁은 길이다. 깊이 파고, 깊이 깨닫고, 깊이 믿어라. 어설프게 파면 의심밖에 나는 것이 없다.”


이공은 제자들을 앞에 놓고 성경을 연구할 때마다 이렇게 권면했다. 참 기독교 진리의 세계는 좁은 길이다. 그는 농부가 밭에서 무 뿌리를 파는 비유를 들면서, 신자는 성경을 깊이 파고 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공 자신이 성경을 연구하는 모습을 보면 성경을 거의 통달할 정도였다. 낮이면 종일 성경을 읽고, 밤에는 암송을 했다. 성경 요절을 밤을 새워가며 암송하고 요지를 표해 놓았다. 제자들 앞에서 자기의 손가락을 펴들고 “성경에 통달한 사람이라야 비로소 손가락 사이로 세상을 내다보게 된다”고 하면서, ‘남을 가르칠 때는 성경을 눈에 대고 내가 배우고, 자기가 자기를 가르칠 때는 성경을 마음에 대고 읽어야 한다. 성경은 마음의 거울이다’라고 역설하였다.


“성경은 그 사람의 믿음의 분량밖에 안 보이는 법입니다. 사람들이 성경이 이렇고 저렇고 말을 하지만 성경을 들고 앉아 말하는 것만 가지고는 다 모릅니다. 신자는 신·구약 성경과 찬송가를 늘 읽고 부르되, 그것을 생선으로 비유한다면 구약은 머리 토막과 같고, 신약은 가운데 토막과 같은데 찬송가는 꼬리와 같습니다”고도 했다.


또 음식으로 비유한다면 성경은 밥이요, 찬송가는 국과 같다고 했다. 누군가 무슨 질문을 한다든지, 무슨 이야기를 들으면 곧, “성경을 찾아봅시다. 성경 본문 그대로가 참 진리입니다. 성경은 성경으로만 해석하는 것이 바른 신앙입니다”라고 하였다.
제자들과 같이 성경을 공부할 때에는 이공은 안에는 신(神)이 말하고 있는 것 같아서 누구나 그 앞에 있으면 유리관 속을 들여다 보듯 자기 마음에 품은 것을 숨길 수가 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를 더욱 두려워했고, 그의 앞에서는 괜히 떠는 이도 있었다. 그럴 때면 “사람들은 조심할 데 가서는 조심하지 않으면서도 조심하지 않아도 좋을 데서는 조심하노라 하니 그래선 못쓴다. 병원을 가면 병을 고치고자 다 털어놓 듯이 우리도 서로 털어놓고 고치자는 것이 아닌가?”고 하였다.
그는 남에게 바로 말해 주는 것이 사랑이라면서 남이 말씀대로 살지 않거나 잘못된 것은 바로 가르쳐 고쳐주는 것이 참 사랑이라고 했다. 그는 “아무나 성경을 읽는다고 다 유익한 것이 아니다.” 하였다. 그는 성경을 읽는 태도에 대하여, “여호와의 도가 정직한 자에게는 산성이요 행악자에게는 멸망이니라”(잠10:29)는 말씀을 인용하면서, 정직한 자는 성경을 바로 이해하고 소화시켜 유익을 얻으나, 악인은 도리어 성경에 걸려 넘어진다고 했다.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딛1:15-16).


성경을 읽는 사람은 우선 자기를 깨끗이 해야 한다. 음란을 멀리하고 양심이 맑아야 성경을 읽어도 모든 것을 바로 깨닫는다.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는 아무 것도 바로 이해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성경은 아무나 아무렇게 읽어도 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을 바로 읽으려면 먼저 자기를 깨끗케 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이공은 성경을 읽으며 탐구할 때 남들이 엿들어 보면, 그는 혼잣말로 자문자답(自問自答)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 그렇습니까?”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이공이 하나님과 이야기하고 있다”고 말했다.

 

9. 읽은 말씀을 꼭 실천하였던 이공

 

이공은 단지 성경 연구를 위한 공부가 아니라, 한번 읽고 그 말씀대로 실천하는 주의였다. 그는 성경과 실제생활의 일치에 전력했던 사람이다.
어느날 제자들을 데리고 산에서 로마서를 공부하는 중에, ‘만물이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기를 탄식하며 고대한다’(롬8:18-22)는 성경을 설명하다가 바로 앞에 앉아서 듣고 있는 박복만씨에게 말했다.
“당신, 지금 앉았다가 누웠다 하고 있는 그 자리를 좀 보시오.”
박공이 자기가 앉아 뭉게고 있는 풀밭을 보니 마치 멧돼지나 산짐승이 뒹군 자리같이 풀들이 어지럽게 깔려 쓰러져 있었다. 이공은 그 풀을 손짓하며 말했다.
“그 풀들은 지금 탄식하오, 안하오?”
“헤헤, 탄식합니다.”
박공은 그렇게 지적을 받으니 좀 미안했다. 이공은 “모르고 한 일은 괜찮아요. 알고 지은 죄가 벌이 중하오”하고 나서는, “그렇소. 부끄러움을 모르면 인생의 가치가 없는 거지요”했다. 그날 성경공부를 마치고 내려오다가 길가에서 쉬는 도중에 손에 쑥 한 포기를 뜯어 들고 제자들에게 물었다.
“이 쑥에서 무엇을 배울 것이 있소?”
“예. 색깔이 변치 않는 것, 봄이 오면 다시 돋아나는 것 등 쑥 한 포기에서도 배울 것이 많지요.”
“그렇지요. 그리고 그처럼 변함없이 믿는 마음을 가지려고 피차 애쓰면 좋겠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육신적으로 볼 때는 쑥뿌리보다 더 쓴 것이 진리요, 그러나 영적으로는 꿀보다 더 단 것이 진리이니 이것을 잘 붙들어야 한다고 했다.


이공은 비록 세상 학문은 배우지 못했지만 타고난 지혜가 누구보다도 뛰어났다. 제자들의 말에 의하면 그처럼 영특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가 살던 도암면 등광리 근처 동두산 마을 박씨촌에 박참봉이라는 한학자(漢學者)가 있어서 시골 마을에서는 내노라 했다. 한 번은 그가 이세종을 찾아와 자기의 한학(漢學)을 자랑 삼아 이공에게 까다로운 질문 공세를 편 일이 있었다.
박참봉은 천자풀이와 주역(周易)으로 이공에게 질문하고, 이공은 성경을 가지고 대답하는데, 그만 박참봉이 감복하고 말았다. 그후에 박참봉은 기독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어, 예수님을 믿게 되었으며 사재를 들여 그 마을에 교회 건물을 지었으며 다시는 주역(周易)을 보지 않고 성경을 읽으면서 꾸준한 신앙생활을 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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