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韓國信仰人]

이세종 3

好學 2011. 12. 17. 06:22

이세종 3
 

 

10.‘이세종파’를 만들지 말라

 

이공은 남의 일을 비평하지 않았고, 기성교회에 대해서도 불평하지 않았다. 교회들이 하는 일에 대해서는 좀 불만스러운 점이 있어도 하나님은 그것을 통하여서 구원의 자녀들을 나게 하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공은 제자들에게 말하길 자기 강의만 듣지 말고 다른 교회 집회나 도시의 큰 교회에 가서 공부하라고 권했다. 누구나 한 편 소리만 들어선 바로 깨닫지 못하는 법이며, 껍데기가 있어야 알맹이도 깨닫는 것이라고 했다. 언제나 제자들에게 경고한 것은 ‘이세종파’를 절대로 만들지 말라는 것이었다. 제자들이 이공에게서 배운 바를 어디에서 가르칠 때, “그 가르침을 어디에서 받았느냐?” 묻는 일이 있으면, 이공에게 들었다고 말하지 말고 천태산 바위 밑에서 받았다고만 대답하라고 일러주었다.
이공이 제자들과 함께 모여 예배 드리는 시간은 일정하지 않았다. 예배를 드릴 때 연보를 가지고 온 이들에게는 일일이 물어 보았다.
“이 연보를 식구들이 알게 가져왔소? 모르게 가져왔소?”
만일 집안 식구들이 모르게 가져온 연보라면 하나님은 그런 연보를 절대로 안 받는다고 도로 가져가라고 명했다.
“아니, 한 번 가져온 연보를 어떻게 도로 가져가요?” 하는 이가 있으면, 이공은 “이리 주시오. 내가 갖다 드리지” 했다.
성탄절 연보도 그러했다. 쌀 얼마를 가족 몰래 가져온 이가 있었는데, 이공이 자기가 친히 그 연보 쌀주머니를 안고 그 교인의 주인댁에 내놓으며 사유를 설명하자 그 집 가족들이 도리어 황송해 하면서, “이처사, 그러지 마시오. 한 번 바친 것을 어떻게 도로 받습니까?” 했다. 이러한 가족들의 진심을 알고 나서야 “댁에서 허락하신다면 도로 가져 가겠습니다” 하면서 가지고 나왔다. 그러니 마을 사람들은 누구나 이공을 신용했다.
이공은 이처럼 빛을 따라서 하나님을 위해서 열심했던 배후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까이 하였으며 그 말씀대로 실천하면서 살려고 노력하였기 때문이다. 우리 또한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성경을 많이 읽고, 성경에서 배우고, 성경의 말씀을 실천하려고 새롭게 다짐해야만 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 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벧전4:12-16).
인생은 이 땅 위에서는 고역이라는 말씀처럼 시련을 당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시련이 우리에게 다가올 때 어떤 때는 힘들고 어렵지만, 그 시련을 잘 견디어내기만 한다면 매우 유익함이 많다. 사람이 시련을 당하므로 더욱더 겸손해지고 영혼은 더욱더 성숙해지기 때문이다. 마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 땅에서 출애굽 시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에 들여보내기 위해서 광야 40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그들을 이런저런 환경 속에서 시련을 주신 것과 같다. 하나님은 이러한 시련을 통해서 겸손하고 거룩한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변화시키려고 하신다.
이와 같은 원리로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인도하시는데 우리 믿음의 선진들은 많은 시련 속에서 연단을 받아 예수님의 거룩한 인격을 본받아 성화 되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세종 선생님은 주님의 고난의 발자취를 따라가신 분이라 하겠다.

 

11. 고난을 사랑한 이공

 

일제 말엽, 일본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감옥에 갇히고 순교를 당하던 때, 이공은 사람들에게 할 수만 있으면 피해 다니며 숨어 있으라고 권했다. 왜냐하면 “붙잡혀 감옥에 갇히든지 순교하는 일은 내 영혼 구원 얻는 데는 좋으나, 그렇게 핍박하는 이들에게는 범죄할 기회를 주어서 그들에게 살인죄까지 짓게 하는 것이니 차라리 숨어사는 것이 낫다”고 했다. 이공 자신 또한 신사참배 때문에 피해 다니다가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화학산 깊은 산 속에서 3년 간 살면서 그곳에서 여생을 마치게 될 때까지 극심한 고생을 하였다. 방을 작게 짓고 문도 좁은 문으로 만들어 몸을 구부리고 겨우 들어가게 했다. 그곳에 사는 동안 전혀 세수도 목욕도 하지 않았다. 음식은 처음에는 보릿가루나 도토리 가루 등을 먹었으나 시일이 지날수록 음식의 분량을 줄이면서 마지막에는 밥이 죽으로, 죽이 가루로 변했다. 그리고 마지막 두 달은 물로 바뀌고 나머지 한 달은 공기로 변했다. 3개월 동안 음식이라고는 입에 대지 않으니 몸의 살은 빠지고 피골이 상접하여 눈은 우물처럼 움푹 들어가 두 눈동자만 광채가 났다. 제자들은 이런 그를 두고 살아있는 가죽 성경이라고 하였다.
겉사람 즉 육성의 기능이 점점 떨어질수록 속사람 즉 영성은 더욱 맑고 새로워지는 법이다. 육이 살면 영이 흐려진다. 음식을 먹지 않으면 육신은 더욱 쇠약해가지만, 반대로 영은 더욱 맑아지는 법이다.
이공은 환난과 고난을 기뻐하였다. 그는 인생에 있어서 고난의 섭리를 믿었다. 사는 것이 죽는 것이요, 죽는 것이 도리어 사는 것이라는 기독교의 역설적인 진리를 굳게 믿었다. 그에게는 생활의 어려움, 가정의 고난, 육신의 질병, 정신적인 고통 등이 계속되었다.
이공은 제자들에게 “병들었다고 울지 말고 나았다고 기뻐하지 말고 후에 또 올 병을 생각하라. 부자라고 기뻐하지 말고 가난하다고 한탄 말라. 화가 복이다. 이 이치를 깊이 명심하며 살라”고 가르쳤다.
또한 그는 “사람들은 자기 살림에 특별한 축복이 없을 때에라도 재앙을 당하지 않는 것이 곧 복인 줄을 모르고 있다. 신앙생활에 있었어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을 믿고 당장 무슨 큰 복이 쏟아져 내려오지 않더라도 재앙이 오지 않는 것만 으로도 복인 줄을 알아야 한다” 고 가르쳤다.
어느 때 이공은 팔에 종기가 나서 무더운 여름날 동안 낫지 않고 계속해서 고통이 더해갔다. 그래도 그는 태연히, “아무 때라도 한 번은 썩을 몸, 죽으면 모조리 썩을 것이니 살아서부터 썩은들 어떠랴” 하면서 약도 쓰지 않고 견디었다.
“의인은 환난을 기뻐한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많은 고난을 당하는 것이 믿음이다. 많이 당하면 당할수록 마음이 너그러워진다. 쓰라린 경험을 많이 겪은 이가 믿음이 좋은 사람이다. 이 세상에서는 고난의 경험이 곧 믿음이다. 많이 경험할수록 잘 믿는 것이다.”
“고난은 천국 상을 버는 일이다. 무슨 고통과 어려움이라도 다 당하라. 많이 겪을수록 좋다. 많이 벌어 놓고 빚 갚는 일과 같고 더구나 내가 별로 잘못한 일이 없는데도 고난을 당할 때에는 상을 받게 된다. 세상에서의 고난, 학대, 핍박받는 것에 대한 삯이 바로 다시 오는 세상의 영광이다.”
그의 가르침은 고난을 회피하려고만 하는 기복사상에 사로잡힌 연약한 성도들의 신앙과는 전혀 다른 가르침이었다.
“고난을 자원해야 한다. 고난을 일부러 벌어서 겪으면 값비싼 경험을 얻게 된다. 그런 이는 앞으로 시험이 닥칠 때 넘어질 위험성이 적다.”
“이 세상에서 나 하나를 살리려면, 남을 밟고 그 위에 내가 올라서지 않고서는 어렵다. 남을 넷, 다섯 죽이고서야 비로소 내가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다. 그러므로 신자가 이런 세상에서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가려면 항상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고 자기에게 강한 것, 내놓을 것이라곤 하나도 없게 살아야 한다.”
“신자들이 십자가, 십자가 하지만 십자가가 무엇인가? 사람에게 거리끼게 하는 것이 십자가이다. 십자가 형틀은 가로 세로 사방으로 뻗어 있다. 이런 십자가를 등에 지고 좁은 문으로 통과해 보라. 가시덤불 사이로 지나가 보라. 아무 데도 걸림이 없이 쉽게 통과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십자가는 남에게 거리끼는 것이다. 자기의 팔다리를 십자가처럼 두 팔 뻗고 활개치며 좁은 문으로 들어가 보라. 그런 모양으로 자기 집 봉창 문이라도 나가려 해 보라. 어떻게 나갈 수 있겠는가?”
이것이 이공의 교훈이요, 그가 밟고 간 길이다. 고난의 길!

12.사람이 아닌 하나님께

이공은 수도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말하길, 한 가지 방법으로만 말고 때로는 도시에서, 때로는 산중에서, 때로는 많은 군중 속에서, 또는 혼자서 고독하게 골고루 경험해 보아야 좋다고 했다. 그렇게 하면 시작할 때는 몰라도 결론은 모두 좋게 맺어질 것이라고 했다.
“수도는 고생을 겪어보며 연단 받으려는 것이니까 넉넉한 생활 속에서는 수도가 되어질 수 없다. 수도자가 먹을 것, 입을 것이 넉넉하면서 수도한다고 하면 남들이 비웃기도 하려니와 많은 시험을 당하게 된다. 그러니 수도하려는 사람은 아예 빌어먹을 작정을 하고 나서야 되는 것이다”고 하였다.
금식하는 일에 관해서 말하길, 사람이 보는 데서 자랑하거나 칭찬 받으려고 하는 것이라면 무의미하다고 보았다. 신자는 무엇이나 세상에서는 사람 앞에서 숨겨야 한다. 그는 사람의 존경이나 칭찬을 절대로 받지 말라고 엄히 경고했다. 괜히 “금식, 금식하고 다니면서 말을 듣지 말고, 있으면 감사히 받고 없으면 말라”고 했다.
또한 이공은 “하나님은 큰 사랑이시니 은혜를 주시는 데 있어 누가 고생을 많이 하고 애쓴다고 주시는 것이 아니라 거저 주시는 은혜, 값없이 주시는 은혜이다. 부자나 깡패에게라도 그 아버지는 주신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마귀가 있기 때문에 믿는 신자들이 고난을 겪는다. 사단이 자꾸 송사하니 그 답변으로 그의 입을 막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고난을 겪게 하신다(욥기1:9-12). 신자는 이 세상에서도 평안하게 살게 하다가 죽은 후에 천국에 보내고, 불신자는 이 세상에서 고생만 겪게 하다가 죽은 후에도 지옥에 보낸다면, 마귀가 참소할 것이다. 마귀로 하여금 하나님의 공의에 몰려 스스로 지옥으로 가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신자들이 이 이치를 모르고 고생이 싫다고 야단들이다”고 말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셨을 때, 우편에 달린 강도가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눅23:41)고 겸손하게 고백한 것처럼 우리들도 어려운 일을 겪을 때 닥쳐온 고난을 도리어 감사하게 받아야 하겠다.
그는 말하기를 신자는 이사야 53장을 읽으면서 성자 예수님이 이 세상에 와 계시는 동안 성부께서 그를 어떻게 대우 하셨는가를 항상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최후의 순간에 자신의 남루한 옷 그대로 묻으라고 부탁하면서, “좋은 옷 입혀 땅에 썩히면 죄가 되오. 나의 떨어진 옷을 벗기고 새 옷을 입히는 자는 화가 있을 것이요”라고 하면서, 1942년 음력 2월 추운 겨울에 그토록 사모하였던 주님의 품으로 갔다.
결혼한 여자가 한 남편의 아내가 되어 남편의 사랑을 받으며 단란한 가정을 꿈꾸면서 살아가는 것은 누구나 바라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성경적인 높은 이상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남편을 이해하지 못하여 집을 나가 외갓 남자와 두 번씩이나 살림을 차리며 살던 아내가 있었다. 그의 남편은 그런 그녀를 끝까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감싸주었고, 그 여인은 결국 회심하고 그 후부터는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의 삶을 살았다. 이 여인이 이세종(이공) 선생의 부인 문순희 여사다. 필자는 거룩한 한 남편이 강퍅한 한 아내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었는지 살펴보려 한다.
이세종은 “백명의 교인들보다 한 여자의 비위를 맞추기가 더 힘들다”고 말했다. 이공의 부인은 일자무식이었고 생각하는 것도 좁았다. 또한 조급하여 쉽게 화를 내는 성격이었다. 이런 부인에게 이공은 말하길 “당신은 산골에서만 살아야 합니다. 당신은 샘이 많은 여자라서 도심지에 가서 살게되면 성격이 더 나빠질 것입니다”고 자주 말하였다.
이세종은 예수님 믿기 전 남의 집에서 머슴을 살았는데 그때 아내를 얻게 되었다. 그의 나이는 30세였고, 부인의 나이는 14살이었다. 그녀는 이공에게 시집와서 세상의 다른 부부들처럼 재미있게 정을 나누며 살지 못했고, 자녀마저 낳지 못했다.
남편은 예수님을 믿은 후 순결한 삶을 결단하고 “이제 우리는 남매처럼 살아야 한다”고 침소를 같이 하지 않았다. 그 많던 재산마저 다 남에게 주어버리자, 부인은 견디다 못해 “이렇게 사는 내가 그의 아내냐?”면서 같은 마을에 사는 어떤 청년과 눈이 맞아 집을 나가버렸다.
부인이 딴 남자와 눈이 맞아 나가버린 것을 알게 된 이공은 그 집을 찾아가서 아내에게 돌아오라고 권하였다. 이공은 부인과 살림을 차려 살고 있는 그 남자에게도 말하길, “이렇게 된 것은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 모두 내 죄 때문이요. 내가 잘못해서 이렇게 되었으니 제발 저 여자를 돌려보내 주시오”하면서 그 남자 앞에 무릎을 꿇고 부탁하였다. 그럭저럭 몇 해 동안은 살았으나 마을 사람들의 여론이 나쁘고, 그 남자는 여자가 썩 마음에 드는 점이 없어 여자를 돌려보내고, 자기는 부끄러워 이사를 가 버렸다. 부인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다시 이공에게로 돌아왔다. 이공은 돌아온 아내를 탕자를 맞아들이듯 받아들였고 옛날과 다름없는 태도로 대해주었다. 그러나 얼마지나지 않아 또 다시 집을 나가 버렸다.
이번에는 능주 고을에 산다는 어떤 홀아비였는데, 아이들만 여럿을 데리고 살고 있었다. 부인은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을 듯이 살림을 모조리 가지고 가버렸다. 이 세종은 능주로 가서 홀아비와 살고 있는 아내를 찾아갔다. 마치 사랑의 선지자 호세아가 음녀로 타락한 아내 고멜을 찾아가 타이르듯이 아내를 찾아갔다. 찾아가도 왔느냐는 말도 않고 인사도 하지 않는 아내를 보고, 이공은 “하나님 앞에서 죄 짓는 일은 두려운 일이니 마음을 돌이키시오”라고 일러주었다.
이공은 이렇게 몇 번을 찾아가서 아내를 타일렀다. 이렇게 찾아온 남편에게 부인은 어찌나 싸늘하게 대하는지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다. “흥! 무엇 때문에 치근치근 자꾸 와. 나 망신시키러 왔어?”하며 구정물을 퍼서 이공에게 끼얹고 온갖 욕설을 퍼부었다. 이때 이공은 비 맞은 생쥐꼴을 하고,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마시오. 꼭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마시오. 살다살다 못살겠으면 꼭 돌아오시오”하며 간곡하게 권면했다. 부인은 그 남자와 몇 해를 살았으나 결국 그와도 헤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이공에게로 돌아왔다.
이런 수치스러운 여자를 누가 받아 주겠는가? 부인이 다시 돌아왔다는 소문이 나돌자, 친척과 마을 사람들이 품행이 나쁜 이런 여자를 우리 동네에서 살게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야단법석이었다. 그러나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많은 사람들이 간음한 여인을 정죄했지만 그 여인을 용서해 주었던 예수님을 기억하면서 이공은 친척들과 마을 사람들을 설득시키면서 “제가 부족해서 그렇게 되었으니 용서하여 주시오”하였다. 이세종은 이렇게 마을 사람들과 친척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부인을 다시 받아들였다. 그 때문에 이공의 위신은 땅에 떨어졌고, 세상에 둘도 없는 바보로 낙인찍히게 되었으나 정작 이공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다.
전에는 부인에게 무관심하던 이공이 이때부터는 부인을 앉혀 놓고 무식한 그녀에게 한글을 가르쳐 주었다. “글을 배우시오. 글을 배워 성경으로 벗을 삼으시오. 성경 못 보면 외로워 못 삽니다.” 이때부터 부인은 이공에게 한글을 배워, 그 후 세상을 떠날 때가지 성경으로 벗을 삼고 살았다. 이공은 참으로 한국의 호세아였다. 부인 문순희씨는 그 후부터 마음을 고치고 변하기 시작했다.
말년에 이공이 세상을 버리고 깊은 산 속에 살 때에도, 부인은 끝까지 떠나지 않고 따라 다녔고, 그녀도 남편처럼 청빈하게 살았다. “딴 생각을 버리시오. 당신은 욕심이 많으니 도회지에서는 살 수 없고 이 산 속에서만 살아야 합니다”라고 했던 남편의 권고에 따라, 그녀는 이공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남편의 무덤을 3년 동안이나 지키면서 혼자 살았다. 자녀 하나도 얻지 못한 그녀는 고독한 여생을 보냈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의 참회의 삶이었다.
3년간이나 그 쓸쓸한 산중에 홀로 살면서 해마다 보릿고개가 되면 아랫마을로 내려와 보리 이삭을 주워 식량에 보태고, 벼가 나면 또 벼이삭을 주워서 연명했다. 그리고는 산나물로 살았다. 남편인 이공이 세상을 떠나면서 아내에게 유언하길, “언덕으로 벗삼고, 천기로 집 삼고, 만물로 밥 삼으시오”라고 말했다. 즉 자연으로 돌아가 자연을 떠나지 말라는 말이다. 그녀의 말년은 아무도 돌보는 이 없이 고독했으나 꾸준히 지난날을 참회하면서 남편의 가르침대로 살았다.
“나는 세상에 와서 그렇게 예수님을 잘 믿는 남편을 만난 행복 자이다”라고 하면서 감사했다. “내가 예수님을 안 믿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녀는 자신같은 여자가 좋은 남편을 만난 덕분에 예수님 믿고 구원 얻은 것을 감사했다. 누구하나 만나주는 사람도 없고 도와주는 사람도 없는 고독과 고난 속에서 감사하면서 살아갔다. 겨울에도 내복 한 벌 없이 무명 옷 한 벌로 지냈다.
이공의 부인은 깨달음이 점점 깊어갔다. 그녀는 다른 사람을 만나면 “믿어야 참이 오지, 안 믿으면 거짓입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못하면, 우리는 아무 것도 못합니다. 주님 안에 있지 않으면 정절을 지킬 수 없습니다”고 하면서 성경을 읽으라고 권했다.
이세종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부인은 수십 년 더 살면서 77세에 임종할 때까지 남의 폐를 끼치지 않고 혼자서 손수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믿는 사람들이 혹 나무를 한 짐씩 가져다주면, “이런 죄인이 황송해서 어떻게 그런 나무를 뗄 수 있겠습니까?”하면서 기어이 되돌려 보냈다. 밤에 잠잘 때는 “나 같은 죄인이 어찌 하늘을 마주 보고 눕겠습니까?” 하면서 옆으로 누워 새우잠을 잤다.
병들어 임종이 가까울 때까지 생활 일체를 자기 힘으로 했고, 다른 신자들이 도우려면 절대 사양했다. 그것은 자신의 과거를 속죄하는 거룩한 생활이었다. 이공의 부인은 임종이 가까워 오는 병상에서 돌봐주는 분에게 성경을 읽어달라고 부탁했다. 특히 그녀가 사랑한 성경구절은 “잉태치 못하며 생산치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구로치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지어다.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니라”(사54:1)는 말씀과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길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치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더라”(눅23:29)는 말씀이었다. 이공 부인은 슬하에 자녀 하나 없었으므로 이 말씀들이 더욱 감격스러웠던 것이다.
마지막 임종시 그녀에게 보고 싶은 사람이 없느냐고 물으니 없다면서, “나는 사랑하는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인데 누가 보고 싶겠어요?”하면서 “죄악 벗은 우리 영혼은 기뻐 뛰며 주를 보겠네”라는 찬송을 부르면서 눈을 감았다. 이세종은 살았을 때, “시종이 여일해야 한다. 사람은 죽은 다음에라야 안다”고 했는데, 그녀의 임종은 참으로 복되고 아름다웠다.
일자 무식하고 생각하는 것이 좁고 성격이 급하여 쉽게 화를 내었고, 남편의 사상을 이해하지 못해 자신을 불행한 여자라 생각하여 두 번씩이나 집을 나가 딴 살림을 차렸던 여자. 그러나 다시금 남편의 사랑으로 집에 돌아와 남편을 통하여 성경을 읽기 시작하면서 남편의 사상을 이해하고 남편처럼 청빈과 순결과 순종을 추구하면서 산 속에서 예수님과 자연을 벗삼아 평생을 참회하는 삶을 살았던 여자. 그리스도 안에서 승화된 삶을 사신 문순희 여사를 생각하면 이 말씀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好學의 神學 > [韓國信仰人]'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기철 목사의 아내 오정모   (0) 2012.01.25
고당 조만식  (0) 2012.01.25
이세종 2  (0) 2011.12.17
이세종 1   (0) 2011.12.17
이용도 목사  (0) 2011.1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