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韓國信仰人]

이용도 목사

好學 2012. 1. 27. 21:02

도포 입고 '조선식 믿음' 말하다 

 

-한국기독교 120년 숨은 영성가를 찾아…'예인 목사' 이용도 -
 
 

서울 서대문구 신촌 연세대 뒷산 기슭. 한국 문화와 기독교를 접목시킨 원로 신학자 유동식 박사(85·전 연세대 교수)의 자택 마당에 들어서니 담에 잇대어 있는 산기슭과 다름없이 풀이 무성하다. 자연 그대로다. 미소로 맞이하는 그의 얼굴에도 한시를 읊조리고 그림을 그리는 예술신학과 풍류의 멋이 깃들어 있다. 그는 1960년 개신교의 토착화 논쟁을 이끌었고, 한국 고유의 영성인 풍류도를 통해 예술적인 차원에서 복음을 이해했다. 그런 그가 이 땅에서 가장 사랑하는 선배 기독교인이 있다면 바로 이용도(1901~1933)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그리스도가 살 때 말과 행동이 모두 시와 그림이 된다’고 믿는 풍류신학자 유동식에게 ‘한 줄 한 줄이 시 아닌 게 없었던’ 이용도의 일기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피어난 한 송이 꽃이었다. 그가 오랫동안 ‘이용도 생애와 사상 연구회’ 회장을 맡아 불과 서른세 살의 꽃다운 나이로 세상을 떠나버려 한번도 볼 수 없었던 ‘청년 이용도’를 평생 사숙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용도는 20세기의 첫새벽인 1901년 4월6일 황해도 금천에서 태어났다. 그와 함께 한국 개신교사에 가장 큰 족적을 남긴 함석헌·김재준이 태어난 바로 그 해였다. 나라가 도탄에 빠져 민족의 고난과 함께 시작된 그의 삶 또한 고난의 여정이었다. 소거간꾼으로 술주정이 심했던 아버지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지만 늘 병고에 시달렸던 어머니 사이에서 자란 이용도는 잔병치레가 심했다.


서구신학 탈피 주체성 강조…연극·시로 하나님 음성 전해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열다섯 살에 개성 한영서원에 입학한 그는 1919년 결혼까지 했으나 3·1운동에 가담해 2개월간 구금되는 등 독립운동을 하다 3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몸은 허약했지만 참을 수 없는 불의엔 온몸으로 항거할 만큼 그의 열정은 뜨거웠다.

그는 스물네 살 때 감신대의 전신인 협성신학교 영문과에 입학했으나 다음해 폐병 3기라는 사형 선고를 받고 말았다. 벗의 손에 이끌려 휴양 차 벗의 고향인 평남 강동에 내려갔던 그는 그곳에서 부흥회를 인도해달라는 교회의 요청으로 강단에 올라 찬송가를 부르다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끝없이 쏟아지는 눈물의 홍수 속에서 삶의 큰 전환을 맞았다. 그때 그의 병도 상당히 호전되었다.

1928년 1월 신학교를 졸업한 이용도는 강원도 통천으로 처음 파송 받았다. 그는 통천에 있던 금강산 백정봉에서 10일간 금식기도를 하는 등 기도의 삶을 살았다. 열정적인 독립운동가에서 기도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해 크리스마스이브 때 새벽 기도 중 내적인 마귀와 싸워 이기고, 며칠 뒤 마침내 자신에게서 죄가 떠나가는 체험에 이르렀다. 그 뒤 통천 인근 30여 교회에서 이끈 부흥회는 그가 단상에 올라간 지 5분 만에 사람들의 얼굴을 눈물로 적실만큼 감동을 자아냈다.

‘나는 주의 사랑에 삼키운 바 되고 주는 나의 신앙에 삼키운 바 되어 결국 나는 주의 사랑 안에 있고 주는 나의 신앙 안에 있게 되는 것이었나이다.’

자신의 체험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전했던 그에겐 교회의 교리와 형식 같은 것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당시 서양 선교사들이 전한 서구 신학의 틀에 갇혀있던 목사들과 달리 조선식 도포 차림으로 조선의 언어로 회개와 신앙을 부르짖었고, 가야금을 뜯으면서 가극과 연극·시·편지·일기를 통해 초월적 하나님의 음성을 전한 그는 ‘민족적 신비주의자’였다.


이단 낙인·핍박 속 33살 요절
 
이런 면에서 20세기 초 개신교를 이끌었던 부흥사 길선주, 김익두와도 달랐다. 그는 민족적이고 토착적이이서 신탁을 받은 무녀와 기독교의 경계마저 허물어버렸다. 그는 서구신학보다는 동양의 눈으로 볼 때 영적 세계에 쉽게 들어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자 장로교와 그가 속한 감리교조차 그를 이단시했다. 그를 이단으로 낙인찍은 교회에선 그를 따르는 교인들마저 출교했다. 그러자 이용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33년 6월 ‘예수교회’라는 교단을 창립하고 그를 초대 대표로 선출했으나 그는 폐병으로 고생하다가 10월 2일 원산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불과 4년 동안 예수의 삶을 전하다가 예수처럼 기존 교단에 의해 핍박을 받았고, 예수와 같은 나이인 서른세 살에 불꽃같은 삶을 마쳤다.

그가 소천한 뒤 선교사들은 그를 5세기 성자의 이름을 본떠 ‘시므온’으로 칭했다. 그러나 그가 스스로 칭한 호는 시므온이 아니라 시무언(是無言)이었다. 하늘의 언어를 읊조렸던 동양적 기독교 시인의 호엔 ‘굳이 무슨 말을 하랴’는 말뜻이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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