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신학자들] 생애

본 훼퍼의 긍극적인 것 궁극이전의 것

好學 2012. 1. 21. 06:32


 

본 훼퍼의 긍극적인 궁극이전의

 

I. 서 론

 

A.저자의 의도와 저작배경

이 단원에서 본회퍼는 기독교적 삶의 근원과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해 "궁극적인 것"과, "궁극이전의 것(etwas Vorletztes)"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이야기한다. 그는 이 저작을 그의 활동의 종반기인 저항과 감금의 시기에 집필하였으며 미완성의 작품으로 남길 수 밖에 없었다. 즉 그는 1940년 11월 말부터 이 글을 에탈에서 쓰기 시작하였으나, 1941년 2월 첫번 스위스 여행으로 인해서 중단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썼던 이글은 윤리학에있어서 가장 치밀한 노력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궁극적인 것과 궁극이전의 것"이라는 표제는 벌써 전에 클라인 크뢰신에서 나온 단편에도 나타나 있다. 그 후 본 회퍼는 그와 같은 오랜 저술을 위한 시간을 얻지 못했다.

B.연구방법과 범위

이 논고에서는 본회퍼가 쓴 이 저작의 내용을 요약 정리하는데 중점을 두면서,저자가 목소리를 높이는 주요 쟁점에 대해서는 참고자료를 통하여 부연코저한다. 특히 기독교인의 삶의 기초로서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그리고 그의 말씀과 신앙과 의인(의인)의 관계성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만이 궁극적인 현실성인가, 고귀한 은총은 무엇이며 값싼 은총은 무엇인가,

궁극적인 것을 뒤따르는 궁극이전의 것은 무가치한 것이며 죄악인가 하는 문제들에 초점을 맡추어서,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사고로 일관하는 본 회퍼의 사상에 접근하고저 한다. 그는 슐라이엘마허, 릿츨, 불트만과 달리 그리스도의 업적에서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인격에서 출발함으로 자유주의 신학의 기독론에서 떠나 종교개혁의 기독론과 바르트의 기독론의 방법에 따라 기독론을 취급한다. 그는 그러한 관점에서 현실개념을 파악하며, 은총과 세계,궁극적인 것과 궁극 이전의 것 사이의 문제를 해명하려는 것이다.

II. 내 용 요 약

 

A.궁극적인 말씀으로서의 의인

 

1.궁극적인 것

기독교인의 삶의 본질은 은총만으로 의롭게 된다는 종교개혁이 불러

일으킨 사건에서 나타난다.인간의 삶의 모든 것은 여기 이 사건 속에 집약

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 사건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인간 삶의 어두운

동굴이 위대한 힘에 의해 열려지고 하나님의 말씀이 꿰뚫고 들어온 것을 의미한다.

이 사건 속에서 인간은 그 때까지 끌려다녔던 미궁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알게되며 자유와 사랑과 소망을 소유하며, 모든 과거는 사죄의 말씀에 싸여

있고 모든 미래는 하나님의 신실성에 의하여 보존 된다. 이 삶은 스스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찬양하는 교회와 더불어 창조의 한 지체임을 깨닫는삶

이다. 이러한 모든 사건은 그리스도가 인간에게 올 때 일어난다.

이 사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참되고 현실적인 것이며, 그리스도의 현존을

경험한 인간의 삶으로서, 이제부터는 잃어버려진 삶이 아니라 의로와진

삶, 오직 은총만으로 의로와진 삶이다.

본회퍼는 바로 이것 - 죄인이 의롭게 되어지는 사건을 "궁극적인 것"으

로 기술하였다. 즉 다시 말하면 말씀에 의한 의인(의인)을 기독교인의 삶

의 본질로 파악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 본질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 본질은 비본질적인 것 즉 궁극이전의 것과 어떠한 형태로 공존하

는가. 바로 이것이 지금과 이제까지의 모든 기독교인의 공통의 문제이며

본회퍼가 본 저작에서 제기한 문제인 것이다.

2.의인(의인)

죄인이 의롭게 되는 사건은 궁극적인 것이다. 그것은 심각한 의미를

내포하고있다.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써만

들어야하며 들을 수 있다. 이 말씀의 궁극적 성격은 이중의 의미를 가지

고 있다. 이 말씀은 내용적으로는, 기존하는 사물, 궁극이전의 모든 것의

완전한 붕괴를 내포하는, 그리고 지금까지 이미 걸어왔던 길의 전적인 단죄

(Verurteilung)와 가치박탈을 뜻하는 궁극적인 말씀을 의미한다.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은총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존재하지않

는다.그리스도 때문에 하나님의 은총으로 죄인들이 의롭게 되었다.

그러나 그 말씀은 어떤 것에 의해서도 강제되지 않는 하나님의 자유한 말

씀이기 때문에 변경할 수 없는 궁극의 말씀이고 궁극적인 현실성이다.따라

서 그것은 인간 자신의 방법으로 의롭게 되려는 어떠한 방법도 배제한다.

바울의 길, 즉 율법을 자랑하고 그렇게함으로 그리스도에게 적대하던 길도,

또 루터의 길, 즉 수도원에 들어가고 회의 속에서 율법을 넘어서는 길도 궁

극적인 말씀에 의하여 의롭게 될 수 없고 그 반대로 양자가 걸어 갔던 길은

심판에 빠진다. 그리스도 때문에 의롭게 된 것은 죄인 바울, 죄인 루터이지 그들이 범한 죄가 아니었다.

질적으로 궁극적인 말씀은 단 한 번 결정적으로 모든 인간의 방법을 배제

해버린다. 그것은 용서의 말씀이고, 그리고 다만 용서만으로 의롭게 되는 말씀이다.

3.고귀한 은총과 값싼 은총

만일 오늘날의 기독교 회중에게 설교할 때 , 가끔 들을 수 있듯이 개

개인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말씀을 들을 수 있으려면 우선 막달라 마리아,

거지 나사로, 십자가상의 강도 등과 같이 모두 희미한 "주변 인물

(Randgestalten)"과 같이 되어야 한다고 설교하는 것은 무의미하고 그릇된

것이다. 기독교 메시지의 내용은 사람이 성서의 인물 가운데 이사람 혹은

저 사람이 되어야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과 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앙 외에는 어떠한 방법도 우리를 이 목표로 인도할 방법

은 없다. 그렇지 않다면 복음은 그 가치를 잃을 것이다. 그리고 고귀한 은총은 값싼 은총이 될것이다.

그러나 죄인을 의롭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시간적으로도 궁극적인 말씀

이다. 궁극적인 말씀은 항상 궁극 이전의 어떤 것(etwas Vorletztes), 즉

어떤 행위, 고통, 운동, 의지, 패배, 출현, 탄원이나 소망, 즉 엄밀한 의미

에서 순간을 전제로 하고 있고, 시간의 마지막에 궁극적인 말씀이 존재한

다. 모든 시간이 은총의 시간이 아니라, 바로 지금이 결정적으로 "구원의

날"(고후6;2)이다. 은총의 시간은, 지금 나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초월하여 멀리 미래의 말씀이 있을 것이지마는 과정을 전혀 예측 할 수 없는 것으로서 궁극적인 시간이다.

하나님이 허락하고, 기다리며 준비하는 시간이 있고, 또 궁극 이전의 것

을 심판하고 단절 하는 궁극적 시간이 있다. 궁극적인 말씀을 듣기 위해 루

터는 수도원을 거쳐야 햇고, 바울은 율법의 신봉의 시기를 거쳐야 했고, 저

도둑은 죄책으로 이해서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야만 했다. 우리는 한

길을 걸어가고 궁극적인 길의 전 과정을 횡단해야 했다. 개개인은 무거운 짐을 지고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궁극적인 말씀은 궁극 이전의 성취가 아니라 그 완전한 파괴이다.

궁극적인 말씀에 직면했을 때 루터도 바울도 십자가위의 강도의 형편과 전

혀 다를 바가 없었다. 우리는 그 길을 걸어 가야하고, 하나님이 그 길의 끝

을 정해 준 곳까지 걸어가야 한다. 따라서 궁극적인 것에 의하여 지양되고

무력화됨에도 불구하고 궁극 이전의 것은 존재한다.

그러나 죄인을 의롭다고 인정하는 하나님의 은총의 말씀은 궁극적인 말씀

으로서의 그 위치를 결코 떠날 수가 없으며, 단순히 획득되어진 결과로서,

즉 처음과 마찬가지로 마지막에도 똑같이 잘 되어질 결과로서 존재할 수는 없다.

궁극 이전의 것으로부터 궁극적인 것에 이르는 길은 결코 없애버려서는

안된다. 말씀은 궁극적인 것이어서, 궁극이전의 것으로 되돌아 갈 수 없다.

그렇지않으면 그것은 계산할 수 있는 것, 상품적인 것으로 환원되고 그렇게

됨으로써 그 신적인 본질을 상실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은총은

값싼 것이 되고 선물이 될 수 없다.

본회퍼는 인간의 세속적 종교적 본능에 호응하는 것이 은혜를 값싸게 하

였다고 종교개혁사의 흐름을 평가하면서, 은혜는 생명의 대가이며 날마다

이 은혜를 위하여 생명을 지불해야 하고, 은혜에 의하여 순종을 면제받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순종이 은혜에서 시작된다고 하여, 고귀한 은혜를 어

떻게 견지할 것인가를 역설한다.

 

B.궁극이전의 것

1.궁극이전의 것(etwas Vorletztes)

궁극 이전의 것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궁극적인 것으로부터 그 이

전에 일어나는 모든 것이고 궁극적인 것이 발견 됨으로써 궁극 이전의 것으

로 인정되는 모든 것이다. 즉 기독교인의 삶 속에서 궁극적인 것과 핵심이

되고 본질이 되는 요소로부터 제외되고, 부수적이며 비본질적이며 일상적인

것을 "궁극 이전의 것"으로 말하는 것이다.

은총과 신앙만으로 의롭게되는 것은 모든 면에서 궁극적인 말씀으로 존속

하기 때문에 지금 우리는 궁극 이전의 것에 대해서도 말해야 하겠다. 우리

는 그리스도인의 삶 가운데서 궁극 이전의 것에 대하여 묻는 것이다. 즉 우

리는 그것을 부인하는 것이 경건한 자기 기만인가 혹은 궁극 이전의 것을

자기의 존재양식에 따라 취급하는 것이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을

묻게 되는 것이다.우리는 이렇게 함으로써 또한 말씀인 복음이 시간 가운데

서 연장될 수 있을지 여부와, 여기서도 궁극적인 것은 궁극 이전의 것과 구

별되어야 하는지 여부를 묻게 되는 것이다.

에를 들면 왜 나는 중대한 상황에서 가까운 사람의 죽음에 직면하여 몹

시 낙담한 사람과 같이 있을 때 가끔 궁극 이전의 태도를 취하기로 결단해

버리는 것일까? 또 왜 나는 특히 그 사람이 기독교인인 경우에도 내가 잘

알고 자유로이 신용할 수 있는 성서 안의 말씀을 말하는 대신, 그 슬픈 사

건을 만나서 도움을 잃은 사람과 그 슬픔을 같이 나눈다는 표시로 침묵을

지킨 채로 앉아있을 수 밖에 없는가? 나는 왜 가금 궁극적인 것에 관하여 말해야 할 때 입을 열 수 없는지?

그리고 그 대신 왜 전적으로 궁극 이전의 것의 인간적인 연대성에 서려고

하는가? 그것은 궁극적인 말씀에 대한 불신에서 생긴 것인가? 인간에 대한

공포로 부터 생긴 것인가? 혹은 이러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객관적으로 정

당한 이유가 있는 것인가? 내가 말씀에 대하여 아는것, 그것을 자유로이 소

유하는 것, 그렇게 하여 이른 바 상황을 정신적으로 지배하는 것, 그것들은

오직 외관상 궁극적인 사실같이 생각되지만 실제로는 전혀 궁극 이전의 것이 아닐까?

이 질문은 어느 특수한 경우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기독교인의 사회생활

의 모든 영역을 내포하고 있다. 위에서 말한 개개의 특수한 경우들은 기독

교인의 매일의 공동생활과 그의 교회에 대한 선교적인 모든 활동영역의 무

수한 경우에도 적용된다. 기독교인의 생활 가운데서 궁극적인 것과 궁극

이전의 것 사이의 관계는 "급진적인 것"과 "타협"의 두 가지 극단적인 형태를 가진 해결방법이 있다.

2.궁극적인 것과 궁극 이전의 것 - 그 대립적 관계와 해결책

a.급진적 해결

급진적 해결(radikale L sung)은 단지 궁극적인 것만을 고려함으로

거기서는 궁극 이전의 것과 완전한 단절이 있을 뿐이다. 궁극적인 것과 궁

극 이전의 것은 상호 배타적 대립관계에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궁

극 이전의 것의 파괴자요 원수가 되며, 궁극 이전의 것은 그리스도에게 대

적한다.

그리스도는 세계가 성숙하여 불태워 지도록 넘겨지는 것의 표징이다. 여기

에는 어떤 구별도 없다. 모든 것은 심판대 앞에 나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오직 두 가지 구별이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편이냐, 그리스도에게 대적

하느냐 하는 것이다. "나의 편이 아닌 자는 나를 배반하는 자이다."(마

12:30) 모든 인간의 행위에 있어서 궁극 이전의 것은 모두 죄이며 부정이

다. 다가오는 종말에 직면하여 기독교인에게는 단지 궁극의 말씀과 궁극의 행동이 존재할 뿐이다.

이 세계에서 생긴 것은 이미 그 중요성을 잃고 기독교인은 거기에 대해

책임이 없다. 세계는 멸망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말씀 아래서는 세계의 모

든 질서는 붕괴 될 것이다. 여기서는 전부가 아니면 무이다. 하나님의 은총

의 말씀도 여기서는 변하여 모든 저항을 경멸하고 분쇄하는 냉혹한 율법이 된다.

b.타협적 해결

다른 하나의 해결은 타협이다. 여기서는 궁극적인 말씀은 원칙적으

로 궁극 이전의 말로 부터 분리된다. 궁극 이전의 것은 자기 안에 존재의

권리를 갖고 궁극적인 것에 의하여 위협당하거나 협박당하지 않는다. 세계

는 여전히 존속하고 종말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고, 궁극 이전의 것은 하나

님이 만든 이 세계에 대한 책임 때문에 행해져야 한다. 더우기 인간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서 평가 받아야 한다.

궁극적인 것은 일상적인 것 저편에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이

미 존재한 것들에 대한 영원한 의인으로서, 또 이것은 기존하는 사물에 부

담이 되는 고소로 부터 형이상학적인 성화(성화)로서 존재한다. 자유로운

자비의 말씀은 지금은 그것을 부정하고 그 가치를 확증하는 모든 궁극 이전

의 것을 지배하는 은총의 율법이 되었다.

c.예수 그리스도의 해결책

위에 제시한 이 두 개의 해결책은 똑같이 극단적이고 똑같이 진리

와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 이것들은 궁극적인 것과 궁극 이전의 것을 상호

배타적인 관계에서 고려하기 때문에 극단적인 것이다. 이 두 경우에 있어서

그들 자신으로서는 똑같이 정당하고 필연적인 사상을 허용할 수 없는 추상화(Verabsolutierungen)이다.

급진적인 해결은 모든 것의 종말과 심판과 구원의 하나님을 생각하고, 타

협적인 해결은 창조주와 보존자 하나님을 생각한다. 그러므로 창조와 구속,

시간과 영원은 풀 수 없는 투쟁 가운데서 서로 대립하고, 그 결과 하나님

자신의 통일성은 해체되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붕괴된다. 따라서 기독교

적인 삶은 급진주의적인 것도 타협주의 적인 것도 아니다.

이 두 개의 개념을 가지고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를 논하는 것은 예수 그

리스도의 유일한 중요성 앞에서는 논의의 대상이 되지 못하며, 그의 중요성

이 이 두 개의 해결책은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지지 않는다는 점을 밝혀준

다. 순수한 기독교 자체의 이념조차도 또한 있는 그대로의 인간 자체의 이념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 하나님의 현실과 인간의 현

실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종류의 기독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극단주의도 타협주의도 존재하지않

고 하나님과 인간의 현실이 존재한다. 기독교 자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

것은 이 세계를 파괴하게 될 것이다. 또 인간 자신도 존재하지 않는다. 왜

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배제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들은 단순히 이념에 지나지 않는다.

오직 신인(신인, Gott-menschen)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존재하고 그만이

현실적이고, 따라서 그를 통해서만 이 세계는 마지막 날을 위해 성숙할 때

까지 보존될 것이다. 극단주의자는 하나님의 창조를 받아 들일 수가 없

다. 그는 창조된 세계와 불화하고, 대심문관의 이야기 가운데서 급진적인

예수상을 만들어 내는 이반 카라마조프적인 인물이다.

타협은 언제나 궁극적인 것에 대한 증오에서 생긴다. 기독교적 타협정신

은 오직 은총으로만 죄인이 의롭게 된다는 것에 대한 증오에서 새긴다. 궁

극적인 것을 단념하고 전혀 보잘 것 없는 세계의 지혜에 순응하는 것이 진

정한 기독교의 세상에 대한 열려진 태도이고 기독교인의 사랑이라는 사고 방식이 등장한다.

극단주의는 시간을 미워하고, 타협주의는 영원을 미워한다. 극단주의는

현실적인 것을 미워하고 타협주의는 말씀을 미워한다. 이러한 두 가지 태도

는 똑같이 반그리스도적(christuswidrig)이라는 사실이 이러한 대립에서 명

백해진다. 왜냐하면 여기서 서로 적대관계에 있는 것이 그리스도에게서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독교적 삶에 대한 문제는 극단주의에서도 타

협주의에서도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 자신에게서 결정되고 해답이 주어진

다. 오직 그에게서만 궁극적인 것과 궁극 이전의 것 사이의 관계가 해결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인간이 되고, 십자가에 달리고, 부활한 하

나님을 믿게 된다. 우리가 인간이 되는 곳에서 우리는 피조물에 대한 하나

님의 사랑을 알게되고, 십자가를 통하여 모든 육신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알게되고, 부활을 통하여 새로운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된다.

이 세 가지 요소를 분리시키는 것보다 더한 오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

면 이 세 가지가 합하여 하나의 전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

육신의신학, 십자가의 신학, 부활의 신학은 서로 대립하는 것으로 수립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며, 그러한 시도는 기독교 생활에 대한 사고방식에서도

큰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성육신의 신학에만 기초를 둔 기독교 윤리는 쉽

게 타협접적 해결로 빠지며, 단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에만 근거를 두고

수립된 윤리는 극단주의나 열광주의(Schw rmerei)로 빠진다. 오직 이 세 개

의 통일에서 대립이 해소된다.

예수 그리스도, 인간 그 자체(der Menschen)는 하나님이 피조 세계의 현

실 가운데 들어온 것을 뜻하며,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될 수 있고

되어야 하는 것을 뜻한다. 십자가에 달린 분인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타락한 피조계에 대한 최종적인 유죄판결을 선언하는 것을 의미한다. 궁극

적인 것은 십자가에서 모든 궁극 이전에 대한 심판으로서, 그러나 궁극적인

것의 심판에 굴복하는 궁극 이전의 것을 위한 은총으로서 현실적인 것이다.

부활하신 분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그의 사랑과 능력으로 죽음

에 종말을 고하고 삶에 새로운 창조를 불어 넣고, 새 생명을 선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물론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 했으나, 인간은 그의 죽

음의 한계선에 이르기까지는 궁극 이전의 세계,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간 세

계와 십자가가 서 있는 세계에 머문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전적으로 은총으로만 죄인이 의롭게 되는 메시지

가운데서 우리와 만난다. 기독교인의 삶은 성육신의 능력에 의하여 인간이

되는 것을 말하며, 십자가에 달려 죽고 , 부활의 능력 가운데서 사는 삶을

뜻한다. 그것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없이는 다른 것도 존재할 수 없다.

 

C.길 예비

1.말씀을 위한 길의 예비

말씀이 선포되기 위해 즉 궁극적인 것이 방해받지 않도록 하기위해

궁극 이전의 것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 즉 다시 말하면 굶주린 자에게

빵을 주는 것은 은총의 도래를 위하여 필요한 길 예비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일어나는 것은 궁극 이전의 것이다. 굶주린 자에게 빵을

주는 것이 그에게 하나님의 은총과 의인을 설교하는 것과 같은 것은 아니

며, 빵을 받는다는 것은 신앙 안에 서 있다는 것과는 다르다. 그러나 궁극

적인 것을 알고 궁극적인 것 때문에 이런 일을 하는 자에게는 이 궁극 이전

의 것이 궁극적인 것과 관계되어 있다. 그것이 궁극 이전의 것(ein

Vor-Letztes)이다. 은총의 도래는 궁극적인 것이다.

궁극이전의 것을 부정하는 극단주의의 위험과, 궁극적인 것을 경시하는

타협주의의 함정, 그리고 궁극적인 것을 얻지 못한 자들의 상황 즉 은총이

자기에게 미치기까지 도움이 필요한 자들의 상황. 이러한 것들의 문제를 해

결하기 위하여 길 예비에 관하여, 그리고 궁극 이전의 것에 관하여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먼저 노예에게 자유를, 권리 상실자에게 권리를,

굶주린 자에게 빵이 주어져야 하고, 또 모든 가치가 질서를 회복해야 한다

는 주장은 명백한 오해이다. 그 점에 관해서는 신약성서와 교회사의 증언이

있다. 그리스도를 위해 길을 예비 하는 것은 사회개혁과 같은 특정한 바람

직한 상황을 만들어 내는 문제만은 아니며,오히려 모든 것은 길 예비라는

행위가 하나의 영적인 현실이라는 사실 위에 놓여 있다.

왜냐하면 세계의 조건을 개혁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도래가 문제이

기 때문이다. 주의 은혜로운 도래는 오직 영적인 길 예비 뒤에 따라온다.

다가오는 궁극적인 것 때문에 궁극 이전의 것이 주목되고 힘을 얻게 되어야

하는 것이 길 예비에 속하는 일이다. 길 예비란 참회를 뜻한다(마3;1 이

하). 참회는 구체적인 전환을 말하며 행위를 필요로 한다. 길 예비가 목표

로 하는 마음의 상태가 적극적으로 표현되었을 때, 우리는 인간존재와 선한

존재(Menschsein und Gutsein)라는 두 개의 규정에 도달하게 된다. 이것은

은총으로부터 의롭게 되어지기 위한 궁극 이전의 것이다.

2.주님의도래

오직 주님의 도래가 인간 존재와 선한존재의 완성을 가져 온다. 도

래하는 주님 자신만이 길을 예비할 수 있고, 또 그가 인간을 전혀 새로운

인간 존재와 선한 존재로 인도하며, 그리스도를 위한 모든 길 예비의 목표

는 바로 우리 자신이 결코 길을 예비할 수 없다는 인식에 도달하는데서 성

립되며, 또 길 예비를 요구하는 것이 바로 모든 경우에 있어서 우리를 회개

에로 인도한다고 하는 점이 명백히 언급되어야 한다.

길 예비는 모든 방법과는 달리 그리스도 자신이 그 길을 가야한다는 것을

우리가 명백히 이해하는 데서 이루어진다. 길 예비는 궁극적인 것으로부터

궁극 이전의 것에 이르는 길이다. 그리스도는 자기의 의지, 자기의 힘, 자

기의 사랑으로 오며, 또 그는 아무리 큰 장애라 할지라도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고 극복하기를 원하며 , 그는 자기의 길을 예비하는 분이라는 사실,

그것이, 그리고 실제로 오직 그것만이, 우리를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 만든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오시는 분에 의해서 그의 길을 만들도록 해야하

며, 또 그를 진지하게 기다리는 자가 되어야 하는가? 우리는 그리스도를 기

다리기 때문에 또 우리는 그가 올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오직 그

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길을 예비한다.

III. 결 론


 

기독교인의 삶은 내 안에서 궁극적인 것이 동트는 것이며, 내 안 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계시는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인 것을 기다리는 궁극 이전의 것에서의 삶이기도 하다. 기독교인의 삶의 진지함은 오직 궁극적인 것 안에만 있고, 궁극 이전의 것도 또한 그 진실성을 가지는데, 그 진실성은 물론 궁극 이전의 것은 궁극적인 것과 비교해 볼 때 웃음거리로 간주되는 데서 성립되어, 궁극적인 것과 궁극 이전의 것이 똑같이 그들의 진실성을 보유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고 그가 도래한다는 현실에 직면할 때, 어떤 극단적 기독교도 어떤 타협적 기독교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이와 같이 본회퍼에게 있어서의 현실 개념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죽음과 부활의 3중적 모습으로, 그 존재방식을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신학적인 구도를 통하여 은총과 세계의 대립,즉 궁극적인 것과 궁극 이전의 것의 부조 화적인 딜레마를 해결하려 하였다.

이러한 형태로 본회퍼는 그리스도만이 참된 현실의 존재방식이 됨을 인식 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윤리학의 방향은 기독론적 인식론 위에 터전을 닦게 되었으며,또 거기서 그의 윤리학은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라는 대명제를 통하여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간다.

 

* 참 고 문 헌

Bonhoeffer,d.[기독교 윤리],손규태 역,서울:대한기독교서회,1974.

Bonhoeffer,d.[나를 따르라],허혁 역,서울:대한기독교서회,1965.

박봉랑,[기독교의 비종교화],서울:범문사,1976.

정하은,"전후 기독교 윤리학의 신국면," [현대와 신학] 제1집(서울:유니온 학술자료원,1990)

)D.Bonhoeffer,[기독교 윤리],손규태 역(서울:대한기독교서회,1974),p.13.

)Ibid.,pp.103-104.

)Ibid.,p.105.

)Ibid.,p.106

)Ibid.,pp.107-122.

)박봉랑,[기독교의 비종교화] 서울:법무사,1976.

)D.Bonhoeffer, op.cit., p.102.

)Ibid.,P.103

)Ibid.,P.104

)Ibid.,P.102

)Ibid.,pp.104-105.

)Ibid.P.105

)Ibid.P.105

)Ibid.P.106

)Ibid.,p.106.

)Ibid.,p.106.

)Ibid.P.107

)디이트리히 본회퍼,[나를 따르라],허혁 역 (서울:대한기독교서회,1965),

p.31.

)D.Bonhoeffer, op.cit., p.114.

)Ibid.,p.107.

)IBID.,P.108

)Ibid.,pp.108-112

)Ibid.,pp.108-109.

)Ibid.,p.109.

)Ibid.,p.110.

)Ibid.,p.110.

)Ibid.,p.111.

)Ibid.,p.112.

)Ibid.,p.114.

)Ibid.,p.114.

)Ibid.,p.115.

)Ibid.,p.117.

)Ibid.,p.117-118

)Ibid.,p.115.

)Ibid.,p.119.

)Ibid.,p.120.

)Ibid.,p.121.

)Ibid.,pp.121-122.

)Ibid.,p.112.

)정하은,"전후 기독교 윤리학의 신국면," [현대와 신학] 제1집(서울:유니온 학술자료원,1990),pp.116-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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