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신학자들] 생애

윤성범의 신학사상

好學 2012. 1. 21. 07:51


 

윤성범의 신학사상

[감신대 교수]

 
 

 

"첫째로 단군 신화에는 삼신이 등장하게 된다. 곧 환인, 환웅, 환검/단군, 이 세 분인 것이다. 이 3자는 다같이 '남성적인것으로 표현되는것이 주목되는 점이다.

그리스도교 삼위일체에서 도 '아버지'되시는 하나님,'아들'되시는 하나님,'성령'되시는 하나님, 이렇게 해서 부.자.영.으로 세분이 되는데 환인 은 아버지 하나님에, 환웅은 성령되시는 하나님에, 그리고 환겸은 아들되시는 하나님에 각기 대응된다고 볼 수 있다."

-[기독교와 한국사상].P.61-

 

I. 글머리

 

개신교 선교 1세기를 앞두고 한국 신학계에서는 '한국적 신학'을 만

들어 보려는 새로운 시도가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특히 1960년대의

한국 신학자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기독교 신학의 한국문화로의 직수입

에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 그들의 의도는 기독교 신학자체를 한국사상으

로, 혹은 한국사상을 기독교 신학사상으로 채색하려는 대담한 작업이었

다. 이런 신학적 움직임은 복음과 문화의 동화과정이나 상대화 과정을

촉진시키는 운동으로 번졌으며, 많은 신학사상 논쟁이 보수주의 신학자

들과 자유주의신학자들 사이에서 야기되었다.

그러나 이른바 '기독교의 토착화'란 이름으로 시작된 신학사상 논쟁은

본론을 벗어나 기독교 신학의 핵심인 신관의 상대주의화로 이끌려 갔으

며, 한국신화의 재해석을 기독교의 영향으로 형성된 삼위일체 신관의 유

입으로 주장하기까지 전개해 갔던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문제는 기독교

의 본질을 종교상대주의적으로 이해하려는 의도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절대성을 문화 세속주의적으로 해석하려는 의도까지 포용된 매우 위험스러운 발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토착화 신학을 부르짖는 신학자들은

기독교 역사 자체는 항상 복음이 던져진 곳에서 복음이 어떻게 토착화됐

느냐는 점을 보여준 토착화의 역사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댜. 따라서 토착

화의 역사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복음의 토착화는 기독교의 상

대화로, 그리고 기독교의 상대화는 비기독교적 기독교의 출현을 가속화

함으로써 마침내는 기독교를 근본적으로 변질시켜 버리고 말았다.

한국신학사상의 여러 형태를 살펴볼때, 한국에 전래된 기독교가 한국의

문화나 종교와 단절된 상태에서 오직 서구 기독교 신학사상의 충실한 답

습을 정통 신학의 보수로 간주했던 것도 문제는 많다. 그렇다고 전혀 기

독교적이지 않은 것을 억지로 기독교 신학의 핵심으로 해석하려는 견강

부회의 자제 역시 신학적으로 문제가 많은 논쟁일 수박에 없다.

20세기 중반 이후 한국 신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서구신학 일변도의 서양

문화 지배적인 체계에 대하여 반작용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들은 한국적

인 것을 찾아보려 했으며, 어떻게 하든지 기독교적 요소를 한국의 문화

에서 찾아내려고 안간힘을 기울였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서양문화에 대한 반작용이기도 했다.

이러한 신학운동을 과감하게 시도한 신학자들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인

물은 아마도 윤성범 교수일 것이다. 그는 과히 '돈키호테적 망상가'였다

고 할 정도로 신학과 신화의 구별을 없애버리면서까지 기독교 신학을 단군신화와 연결하려했다.

우리의 의도는 두번에 걸쳐 윤성범의 생애와 신학과정 및 그의 신학사상

을 객관적이고 과학적으로 철저하게 파헤쳐 규명하려는데 있다.

그리고 나서 그의 신학사상에 대한 종합적 평가가 뒤따를 것이다. 그것은

그가 한국 신학 사상사에 어떤 영향을 던져주었는가 하는데 대한 평가일

뿐만 아니라 한국적 신학을 지향하려는 모든 노력들에 어떤 활력소를 주

었는가라는 자료제공의 의미도 함께 검토되고 평가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 사상가에 대한 평가는 시대의 분위기뿐만 아니라 역사적, 문화적.사회

적 맥락에서 그 위치를 분석하여야 가능하기 때문에 윤성범의 신학사상에

대한 종합적인 평가는 매우 폭넓게 비판적 평가가 될 수밖에 없다.

이 연구의 최종 목적은 한국신학의 정립이 어떤 과정을 거쳐야할 것인가

를 선구자적 입장에서 신학한 윤성범의 신학태도에서 찾아보려는 데 있다.

 

II. 윤성범의 자기 초상화

윤성범 교수는 1916년 1월 13일 강원도 울진 (오늘날은 경북에 편

입됨)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목사였으며, 3대째 기독교를 믿는 독

실한 기독교 가정이었다. 그의 소년기는 동해안의 맑은 바닷물과 관동팔

경의 산고수려한 자연에 도취되어 매우 아름다운 추억을 영글어갔던 시기

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항상 어디엔가 정처없이 떠나려는 방랑자의 기질

이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그의 사상편력에서도 짙게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그의 성장기에 아버지가 목회지를 옮겨다닐 때마다 숙명적으로든

지 강제적으로든지 정든 곳과 사랑과 감정이 짙게 배어든 자연과 벗들을

떠나야하는 유랑하는 인간의 기질과 닮아간 것이었다. 항상 뜨내기같은생

활습관, 그것이 인간 윤성범의 모습으로 정착되어 갔다. 그의 가정은 아

버지를 따라 삼척, 강릉, 횡성 등지를 옮겨가며 생활해야 했다. 소년 윤

성범은 횡성에서 국민학교에 입학하였다가, 그곳에서 4학년까지 마치고수

원지방으로 아버지의 목회지가 옮겨져 수원 남양국민학교를 졸업하게 되

었다. 아버지의 목회지는 수원에서 공주로 다시 결정되었다. 그는 공주영

명중학교에 입학하여 한 학기만 가까스로 마치고 평북 영변지방으로 아버

지가 파송되어, 온 가족이 다시 이사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평북 영변 숭덕학교에 편입하여 졸업을 한 뒤에 평양 광성고등보통

학교에 입학하여 졸업을 하였다.

그에게 하나님의 선택은 이때 이미 시작되었다. 그는 광성고등보통학교

를 졸업하기 두달 전에 폐병3기로 진단된 무거운 병을 앓게 되었으며, 좌

절과 죽음의 병이라는 폐병의 절망속에서 해주에 가서 열달동안 요양하고

평복 북진에 돌아오서 2년동안이나 치료를 계속하며 쉬게되었다. 그의 병

은 거의 완전히 치료되었으며, 이런 치유의 기적을 그는 이렇게 고백하였

다. "내 병은 정말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낫게 된 것이다."

3년에 걸친 요양을 하는 가운데 그는 많은 책을 읽을 수 있었다고 한다.

주로 철학과 논리학에 관한 책들을 탐독하고 영어와 독일어 공부를 하면

서 무료한 시간을 보냈다. 특히 일본어로 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읽

었고, 그 뒤에는 독일어 원서를 읽었다.그는 이 책에서 상당히 많은 영향

을 받았는데, 어떤 이유로 칸트의 사상을 공부하게 되었는지는 밝히지 않

고 있다. 그가 뒷날 동지사대학 신학부 졸업논문으로"칸트의 종교철학"을

써서 학위를 받게 된 것도 요양하면서 독파한 독서의 영향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1937년 4월에 윤성범은 원산 송도원에 가서 여섯달 동안 전지요양을 하

였다. 이곳에서 그의 삶의 전기가 서서히 시작되었다.그의 진술에 따르면

여기에서 잊혀지지 않는 것은 원산 덕원산에 있는 베네득트 수도

원을 방문한 것이었다. 그리고 송도원은 덕원과 원산 시내와의중

간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수도원 수도사들이 반드시 송도원을

지나서만 왕래할 수 있었다. 이때에 나는 내가 책으로 자습한 독

일어 발음에 대하여 수도사들을 붙들고 묻기 시작하였는데 이들

은 친절히 알려주었던 것이다... 정말로 원산 송도원의 로맨틱한

분위기는 나의 생애를 통해서 길이길이 기억될 기념탑과 같이 여겨지곤 한다.

윤성범은 1937년 가을에 감리교신학교에 응시했지만 신체검사에서떨

어졌다.그가 신학을 공부하기로 작정한 것은 목사의 아들로서 아버지

의 길을 따라가겠다는 단순히 답습적 의미보다는 이미 그가 폐병을

앓기 전부터, 그러니까 그가 광성보고에 다닐때 이미 결정된 것이다.

광성고보 시절 일주일에 걸쳐 사경회가 있었다. 그때 정경옥 교수가

사경회강사로 초빙되어 말씀을 전하였는데 감수성이 강했던 소년 윤

성범은 정경옥의 집회인도에서 큰 감명을 받아 신학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내가 감리교신학을 지망하게 된 것은 그 당시 신학계에 혜성과 같이

나타난 정경옥 교수 때문이었다. 그가, 내가 광성고보에 재학 시에평

양에 오셔서 한 주일간 사경회를 학교에서 하신 일이 있었다. 그때난

데없이 우리 졸업반에서는 일곱명이나 신학교에 가기로 작정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만큼 정교수님은 우리에게 큰 감명을 주신 분이다.

정교수님은 우리에게 뜻은 달랐던지 그 다음 해에 나는 경도 동지사 대학 신학에 입학하게 되었고....

동지사대학에서 윤성범의 생애는 신학도로서 시작되었다. 당시 동지

사대학은 일본의 사상계에서 중심 위치에 있었다고 윤성범은 생각하

기 때문에, 그의 신학수업은 가히 일본의 신학사상 젖초기지에서 최

첨단의 이론을 배울수 있었다는 말로 이해될 수 있다. " 당시 경도는

사상계의 중심이요, 특히 철하기나 신학에 있어서 그러하였다." 이렇

듯 현대 사상과 철학의 중심지요 일본 문화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

를 차지하고 있는 고도에서 그의 학문,특히 신학에 대한 열정은 끝없

이 달아올랐다.

 

윤성범은 동시사대학 신학부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그당시 동시사대락 신학부에는 칼 바르트 신학으로 꽃피우던 때이었

다. 아마 칼 바르트 신학이 일본에서 파풀러하게 되기 10년전에 이미

동지사에는 그의 신학이 소개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밖에도 변증법적

신학자들 예컨대 에밀 브룬너나 프리드리히 고갈텐 등의 책도 소개되

고 있었다. 철학으로는 칸트의 철학과 신칸트학파의 연구가 성행하였

고, 실존주의도 많이 소개되었다... 그 당시 동지사는 가장 찬란한학

풍이 조성되어있던 때였다고 생각한다... 그 당시를 회고해 볼 때 내

가 경도 동시사에 온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싶다. 즉 동지사는 아

주 자유로운 신학적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신학사상 때문

에 제약을 받는 일이 없었던 것이다. 어떠한 신학사상도 동지사에서

는 다 공부할 수 있었고, 토의할 수 있었고, 또 비판할 수 있었던 것

이다. 이러한 자유가 없었던들 나는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

다... 동지사는 나의 학문적인 성장을 위하여 처음 보금자리가 된 셈이다.

윤성범은 동시사대학 신학부에서 자유주의 신학 사상뿐만 아니라 그

가 항상 깊은 관심을 갖고 접근하려했던 서양철학의 탐구도 게을리하

지 않았다. 특히 그는 칸트철학에 대한 연구를 동지사대학에서도 계

속하였다. 칸트의 사상구조는 그를 사로잡았다. 그래서 그는 조직 신

학을 전공하면서 특히 바르트보다는 자연신학의 입장에서 철학의 신

학적 접근도 허용하는 에멜 브룬너의 신학을 좀더 잘 이해할 수 있었

다고 술회하고 있다. 결국 신학부에서 졸업을 하면서까지 그는 철학

을 계속했으며, 졸업논문으로 "칸트의 종교철학"이란 논문을 제출하

고, 1941년 동지사대학 신학부의 신학공부를 마쳤다. 1941년 12월 8

일 윤성범은 미일전쟁이 터지던 날 밤에 귀국하였다. 그가 귀국했을

때는 일본인 한국에서 그들의 식민정치를 더욱 강압적으로 퍼져나가

던 시기였으며, 일본제국 자체는 미국과는전쟁으로 이른바 대동아 전

쟁에 온갖 힘을 쏟아야하는 어려움에 처한 때였다.

따라서 경제의 압박과 전선의 분산 그리고 식민지 확대로 군사력이

흩어지면서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그 초조함과 절박함을 한국에 대한

온갖 압정으로 해소하려는 정칙을 펴나갔다. 신사참배와 창씨개명의

강요, 한국어 말상정책과 일본문화로의 예속화정책, 전비충당을 위한

재물 공출과 농산물의 극심한 수탈, 강제징용, 항일운동단체 분쇄와

철저한 한국지배 등등은 한국의 완전한 일본예속을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특히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기독교계 학교의 폐쇄와 순교자의 신앙으

로 교회를 지키려는 성직자들과 성도들에 대한 혹독한 고문과 극형은

아무리 식민군대의 무법지배의 전시체제 아래라지만 일본 군국주의들

의 만행의 단면을 여실히 보여준 실상이었다. 일본 군국주의자들은한

국교회가 항일자세와 저항운동을 고취할 뿐만 아니라,나라잃은 백성

들의 슬픔을 위로하고 희망을 주는 정신적 안식처였기 때문에 신사참

배를 기독교에 강요하여 기독교의 민족운동 기세를 꺾어버리려 했던

것이다. 이러한 목적으로 일본은 온갖 폭압적 식민통치를 계속 조여

갔으며, 한국교회는 심하게 핍박받을 수밖에 없었다. 윤성범은 일제

말의 어려운 시기에 여러해 동안 목회경험을 한 뒤에 1945년 5월 목

사안수를 받고 교역을 하다가 1946년 1월 남으로 내려왔다.

해방후 감리교신학 재건운동이 벌어졌다. 아무런 재정의 뒷받침도없

는 상태에서 양주삼 총리사, 변홍규 박사와 이규갑 목사등 몇 사람과 함께 윤성범은 신학교를 다시 시작했다.

1946년 1월에 감리교신학교 교수로 취임하였다. 월급없는 교수직을

아버지의 재정적인 도움으로 수행해 나갔던 것이다. 윤성범은 주 24

시간이나 강의하며 연구하는 교수생활을 해나갔다. 감리교 신학교는

1950년에 유형기 박사가 교장으로 취임하면서 선교부의 도움으로 재정

형편이 나아졌으며, 분열된, 교회가 합해지면서 수습되고 개선되었다.

일본에서 귀국한 다음 목회와 교수생활로 10여년을 보내고 있던 학구

파 윤성범은 도저히 현상유지적인 나태한 생활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좀더 공부하고 싶었으며, 더우기 그가 청년기부터 깊은 애정을갖

고 공부하던 독일어에 매료된 탓으로 그는 당시 미국 유학에 많은 젊

은이들이 희망을 안고 태평양을 건너던 것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매우

낯선감이 있는 독일이나 스위스 유학을 생각하였다.

독일이나 스위스는 그에게 두가지 의미를 주고있기 때문이다. 첫째 독

일 철학과 신학의 내용과 그 방법론에 이끌렸으며, 특히 칸트와 실존주

의철학, 그리고 신학적으로 변증법적 신학과 그의 우상이었던 칼 바르

트의 신학을 배울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둘째 미국의 실용주의 문화

보다는 유럽 대륙의 깊은 문화유산을 체험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가 독

일어에 깊은 애착을 갖기 시작했던 그때부터 그의 잠재의식 속에서 독

일어문화권에 대한 어렵풋한 표상은 차차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

것은 1953년에 와서 분명해졌다.

1948년 독일어로 된 에밀 브룬너의 [종교철한]을 직접 한국말로 번역

하기도 하고, 오스카 쿨만(Christustunddie Zeit)(1946)]에 대한 서평

도 감리교 신학교 교지 [신학세계]에 소개하는등 학문적 작업을 계속하

면서, 이를 계기로 그는 쿨만 교수와 접촉을 하기 시작했다. 결국 쿨만

의소개로 스위스 바젤대학교에 유학을 가게 되었다.

전쟁을 치룬 한국의 정치.경제의 상황은 비참했기 그의 유학은 거의

불가능할 수밖에 없었다.자비로는 도저히 유학의 꿈도 꿀 수 없는 형편

이었다. 그러나 당시 감리교신학교 고장이던 유형기 박사 (뒤에는 감돋

이됨)의 주선으로 윤성범은 십자군장학금을 받게 되었으며, 바젤대학으

로 가지 전에 제네바대학 부설 에큐메니칼연구원에서 겨울방학 석달 동

안은 독일 하에델베르크에서 연구로 지내게 되었다. 1954년 여름에 건

너간 바젤대학은 그에게 매우 큰 의미를 주었다. 그곳에서 칼바르트 밑

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일찍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그 당시 나에게는 칼 바르트 교수야말로 우상과 같은 존재가 되고 말

았다. 그의 아래서 공부를 해볼 엉뚱한 생각이 나의 잠재의식 속에는 언제나 움터 살아나고 있었다.

당시 바젤대학교에는 윤성범에게 "우상과 같은 존재"였던 칼 바르트뿐

만 아니라, 철학에 깊은 관심을 갖고 동경하고 있던 그에게 실존주의의

맛을 충분히 전달해 줄 수 있는 칼 야스퍼스, 그와 서신 교류로 친숙한

관계에 있던 오스카 쿨만 교수, 그리고 구약신학계에서 세계적 명성을

갖고 있던 아이히롯트 등이 가르치고 있었다. 이러한 학문적 분위기에

서 그는 유럽의 문화적 체취마저 전달받는 이중적 소득을 얻을 수 있었다.

바젤이라면 중세기에서 현대로 접어드는 사상적인 교량역할을 한 고장

이요, 인문주의의 선포의 총 본산지이기도 한 것이다. 내가 바젤에서충

실히 강의를 듣게된 과목들은 바르트 교수와 야스퍼스 교수의 것이었다.

이러한 상반되는 사상가의 사이에서 나는나의 사상을 정리할 수밖에 없

게 되었다. 이것이 뒤에 한국적 신학의 중요한 모티브가 될 줄은 나 자신도 채 몰랐던 사실이다.

이러한 진술은 그가 어떤 점에서 칼 바르트 신학의 영향을 받았는지에

대해선 밝혀주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가 항상 토착화신학을 전개하면

서 한국적 신학(다른 말로는 성의 신학)의 인정을 칼 바르트적 파라다

임에서 확인하려는 점으로 보아 불과함을 알 수 있다. 바르트는 말씀의

신학자이지만, 윤성범 교수가 주장하는 '언 + 성 = 성'의 신학으로서의

말씀론을 역설하는 신학자는 아니다.

이 점에서 윤성범은 스승 사상의 중심개념을 자신의 신학형성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면서 자신의 신학론을 전개한 것이다.

어쨌든 그의 소원은 이루어졌고, 그의 신학세계는 넓어졌으며, 그의정

신적 기둥은 스위스에서 축성되었다. 그러나 그가 진정 바젤에서 무엇

을 배우고 돌아왔는가 하는 것은 아직도 많은 질문으로 남아있다.

내가 야스퍼스에게서 배운 것은 내 나름대로 기독교와 타종교 간의 상

호이해를 촉진시킴으로 보다 높은 인간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는 신념을 얻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분명히 윤성범이 두 학문 영역의 상호관계를 인정하면서 신학의

다른 종교와의 교류 및 이해를 촉진하려는 종교신학의 출발점이 되었고

또한 강한 그러나 매우 본질적인 자극제를 제공한 계기가 되었다고 하겠

다. 야스퍼스에게서 "기독교와 타종교간의 상호이해를 촉진시킴으로 보

다 높은 인간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는 진리를 깨달았던 윤성범은 그래

서 계속하여 다음과 같이 역설하고 있다.

우리는 흔히 신학을 순수신학으로 고수하려고 한다.그렇게 하면 할수록

신학은 고립화 되고 부분화되어서 인간이해를 전체적인 양상에서 파악할

수 없도록 만들어버리고 말게될 위험을 내포하게 된다.

이러한 그의 주장 핵심에는 신학의 상대화가 요청되고 있으며, 신학의

순수성은 신학 자체를 제한하므로 신학이 진정한 신학, 참신학이기 위해

서는 신학의 순수성을 신학 자신이 파괴하고 다른 종교와의 상호교류와

헌합을 감행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순수형통보다는 피의 교류를 함으로

써 유전학적으로 더욱 훌륭한 후손을 기대하는 생물학적 발상이기도 하

다. 그의 혼합주의는 피의 혼합이라기 보다는 사상의 혼합이요, 문화의

혼합이며, 특히 신앙본질의 혼합까지 포함하는 매우 폭넓은 것이다. 결

국 그의 주장은 혼합이 완전이해를 촉진한다는 명제를 만드는 결과로 귀

착되었다. 그는 아래와 같은 표현으로 그의 이러한 혼합주의를 설명한다.

나를 칼 바르트와 칼 야스퍼스 두 선생님의 사상을 율곡 선생의 사상에

서 발견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서 후일에 나의 신학적인 발전, 즉 '성의

신학 (성의 신학)''(한국적 신학)을 전개시캘 수 있는 사상적 근거를 두

선생님의 사상에서 배울 수 있었다는 것을 여기서 고백할 수밖에 없다.

1955년 12월 말에 윤성범은 귀국하였다. 2년 동안에 신학박사과정을 마

침으로써 한국인으로서는 제1호 바젤대학 신학박사의 영예를 갖기도 했

鑁(1960). 귀국한 뒤 그는 교수생활에 충실했으며,1957년 1월에 [기독교

사상] 제 1권 1호에 "바르트의 인간구조론"이란 논문을 발표하기까지는

조용하게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사실 바르트

신학을 이해하려는 편이었다. 그가 단군신화를 기독교 신학적으로 해석

하며, 경교에서 유래된 삼위일체론적 신관의 삼신일체론적 신개념으로의

전이를 역설하기 시작한 것은 바젤에서 귀국한 지 9년 정도 지난 1963년

부터 시작되었다. 귀국한 뒤의 상황은 이러했다.

그런데 나는 이때 학문적인 새로운 분야를 알게된 것이다. 그것은 1960

년에 독일 말붉대학에서 열리는 제10회 '국제종교사학회'에 참석할 수있

었던 때부터 시작이 된다. 기독교 밖에 있는 여러 종교의 연구에 관심을

모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나에게는 주어지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윤성범은 1965년 미국 클레아몬트대학에서 열린 11회 국제

종교사학회와 1975년 영국 랭카스터대학에서 열린 13회 국제종교사학회

에 참석하였으며, 1970년에는 한국종교사학회를 발족하여 종교 간의 교류를 갖기 시작했다.

이것은 나에게는 정말로 좋은 기회가 된 것이다. 종교 간의 대화가 무

엇을 의미하느냐를 비로소 피부로 느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시대

에 나는 한국학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는 기회가 오게 되었다. 그것이 '

단군신화'와'율곡사상'연구인 것이다. 나는 한국역사에 단군신화를 이야

기하면 그것이 허무맹랑한 이야기로만 생각했던 것이다. 모든 신화가 그

렇듯이 근거없는 것으로 코웃음해 버린 때가 있었다. 그런데 나는 이 단

군신화에 굉장한 진리가 간직되어있음을 점차로 알게된것이다.

1960년 이후 그는 점차로 종교 간의대화를 주장하기 시작했으며, 국제

종교사학회 실행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종교학자적 이해지평에서 기독교신

학의 본질을 투시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그는 종교신학의 정당성을 강

조하기에 이르렀으며, 신학의 상대화 뿐만 아니라 한발짝 더 나아가 단

군신화의 기독교적 이해를 정당화햐러는 이론을 제시하기도 했다. 단군

신활를 경교에서 유래한 것으로까지 주장한 것이다.

나는 단군신화가 중국 당나라 때에 페르시아로부터 온 경교(네스토리우

스의 경교)서 유래된 삼위일체론에 근거한 것이 아닌가고 가정하고 연구 해 본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뒤에 '경교'가 들어오기 이전에도 하도낙서나,주역 사

상에서도 천지인 삼자가 양쾌라는데 관심을 가져보게도 되었고, 중국의

음양 일본도의 사상과 다른 한국 고유의 사상이기도 한 것을 알게 되었다.

 

윤성범의 후기사상은 철저히 토착화신학으로 집약될 수 있을 정도로 신

학의 토착화과정에 집중적인 연구를 쏟았다. 그는 토착화를 단순히 개체

화로만 보려는 편협주의에 반대하면서 더욱 개방적인 보편성에서 신학의

토착화를 역설하고 있다. 그것은 그가 항상 신학은 보편적이며 개체적이

라고 하는 명제적 주장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실 신학이 보편성을 거부

하고 철저히 개인주의나 개체주의의 단일적 요소에만 만족한다면 신학자

체는 철저한 도그마에 빠진 독선에 불고할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해석이나 하나님의 보편성, 혹은 교회의 보편성이나 그리

스도의 만인구원성은 모순적 교리로 이해될 수밖에 없다. 이 점에서 이

해한다면 신학은 개체성이라는 기독교의 특생과 보편성이라는 기독교의

기능적 요소를 모두 수용하고 있는 개체적보편, 혹은 보편적 개체로서의

미가 충족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말하기를:

이러한 학문적인 태도에 있어서는 순수 기독교신학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고 무엇인가 다른 요소가 가담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입각

된 것이다.신학이 아무리 귀한 학무이라고 하더라도 한국사람에게 유용

한 것이 아니어서는 안되겠다는 말이다. 물론 신학이 유니버샬 하기를바

라야만 되겠지만은, 그 유니버샬한 것일수록 한국사람에게 보다 더 잘적

용 혹은 응용이 되지 않고는 아무짝에 소용이 없는 것이 되고말겠기 때

문이다. 이것이 현대학문에 ABC 가 된다고 하겠다.

그의 주장의 이러한 면은 아무런 논쟁거리가 되지 않는다. 신학의 보편

성과 맥락에서의 적용 가능성은 기독교의 선교적 목적이기도 하기 때문

이다. 기독교는 항상 이반문화권에 복음을 전파하며, 순교자의 사명으로

열심히 다른 문화에 들어가서 활도하려한다. 그러므로 신학의 보편성이

란 다른 문화로의 적용과 응용가능성을 찾아보려는 노력으로 인하여 인

정될 수밖에 없으며, 또한 신학이 아무리 다른 문화에 스며들어 가더라

도 그 동화과정에서 기독교의 복음 자체를 그 맛이나 멋, 다시 말해서핵

심 자체마저 상실하여 동화되고 소멸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래서 기독

교는 그 진리의 말슴, 복음 자체를 지키기 위하여 모든 것을 양보하면서

도 죽음을 감수하면서까지 복음고수를 하는 것이다.

윤성범은 복음의 토착화를 주장하면서 한국학을 도입하고, 유교를 끌어

들이면서 논리의 균형을 상실하는 듯한 묘한 입장에서 60년대와 70년대

를 보냈다. 그는 단군신화의 삼위일체론적 해석을 경교에서 끌어내어 견

강부회하기도 했고, 중용 사상에서 하나님의 말씀론을 이끌어내기도 했

으며,마침내 바르트의 신관을 중용사상으로 대치하여 '언어장난'을 하기

도 했다. 그의 말놀이 솜씨, 즉 언어유희술은 매우 기발하고, 기상천외 하였다.

나는 여기서 바르트의 교의학을 일관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말의

'성'과 바꾸어 놓아보았고,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셋으로 구분하여 성

부,성자,성신의 각기의 직능에 적용시킨 관과 같이, 나는 성도 셋으로구

분하여 성부,성자,성신에 적용시키고, 이것에 나의 '성의 신학'의 전체

인 것이다. 이것은 나로서는 교의학의 이론 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성은 단순히 이론적인 터닦음으로 끝나버릴 성질의 것이 아니라,

성은 무엇보다도 실천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르트의교

의학이 이론과 실천을 합한 것으로 이루어진 것과 같이, 성도 이론과 실

천(Theorieund Praxis)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성의 윤

리로서 나는 '효'을 내세우게 된 것이다.

 

윤성범의 생애는 매우 평탄하면서 발전적이었다. 활동력이 강한 신학자

였으며 언어의 재치와 기발한 생각을 잘하는 한국신학계의 꾀돌이(?) 였

다. 그는 신학계에서 뿐만 아니라 한국 종교학계와 문화계에서도 명성을

떨쳤다. 그의 신학에 대한 신학적 정통성 문제로 비판의 화살이 쏟아져

으나 그의 인품은 이러한 성난 함성의 비판을 가리앉을 수 있었다. 그러

나그가 부르럽고 유연한 인간만은 아니었다. 그는 매우 강한 자기 주장

과 자기 이론의 명제화로 때로는 독선적이기도 했다. 감리교 신학교가종

교신학, 혹은 문화신학을 한국의 어느 신학교보다 먼저 주장할 수 있었

던 선구자적 위치는 분명히 윤성범 교수의 신학사상에 크게 영향받은 것

임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는 그의 신학을 마무리짓는 작업을

계획했고, 그 청사진을 발표하기도 했다.

나는 앞으로 나의 신학을 완성할 단계에 이르렀다. 즉 성의신학은 이론

적인 것이었고, 효는 실제적 윤리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나의 마지막 관

심은 숙원인 '인간화' 즉 '성론을 완결하는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가장

어렵고 또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끝나면, 이때까지 쓴 나

의 신학체계, 즉 성론, 효론, 성론이 끝나게 되고, 이것을 총망라하는 '

프로레고메나 (총료)', 즉 도론을 쓸 작정이다. 이 도론은 성.효.성론에 관련되는 것임은 물론이다.

윤성범의 한국적 신학 정립의지는 매우 강하다. 그리고 주위의 어떤 비

판이나 공격에도 개의치 않고 그의 사상을 추진하는 박력있는 학자였다.

그의 '성의 신학'청사진은 매우 분명한 골간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신

학체계가 부분적으로는 약술되어 있지만 총론적으로 체계화되지 못한 것

은 매우 아쉬운 바이다. 그의 신학사상이 기독교적이거나 비기독교적이

거나의 시비논쟁을 떠나서, 그의 대담한 해석력은 한국적 신학사상을 형

성해 보려는 모든 사람들에게 더욱 궁금한 그래서 더욱 아쉬운 점으로 남게 된다.

 

III. 마무리

우리는 지금까지 인간 윤성범의 삶의 과정을 신학적 관점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그의 생애는 우리에게 세가지 점에서 깊은 의미를 주

고있다.

첫째, 그의 '한국적 신학'이란 사실 기독교 신학으로 인정하기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독교와 한국문화의 접촉점뿐만 아니라 본질적 교류까지도 추적하려 시도했던 것이다. 이 점은 마치 문화의 뿌리를 추적해 가는 원류 탐색 작업을 방불케하는 모험이다.그러나 한국문화에 대한그의 이해의 깊이에 대하여는 많은 회의가 있다. 그 이유는 그 스스로 한국문화나 사상, 혹은 한국 종교나 예술 등에 관하여체 계적인 연구를 하지 않고 몇권의 단편적 개론서 정도에서 한국의 사상유형이나 문화형태론을 추출해 보려는 시도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이런 연구물을 기독교 신학의 핵심 명제와 결부시켜 동질화 하려는 모험을 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착상이나 의욕은 좋았으나, 결과는 마치 과학 공상소설의 허무맹랑한 내용처럼 결실이 없고 가능성없는 논리의 전개에 불과했던 것이다.

둘째, 그는 여러 곳으로 옮겨다니면서 성장했기 때문에, 항상 뜨내기적 기질과 빨리 적응해야 하는 조급함을 기질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가 철학에 관심을 가지고 출발하다가 신학으로 그의 방향을 전향했고, 곧 한국문화에 쏠리는 경향이라든가, 칸트에서 야스퍼스로, 브룬너에서 바르트로, 단군신화에서 중용의 사상핵심으로 그의 관심이 계속 교차되고 있는 것은 그의 삶의 기질로서 이해되는 바이다.

인간은 어떤 생물보다 귀소본능이 강한 존재이다. 고향의식이나 향수병은 귀수본능의 표현이며, 잠재의식의 구체적 현상이다. 윤성범은 신학적 귀소본능을 그의 글에서 분명히 표현하고 있다. 목회작에서 출발하여 문화신학을 정립하려 했고 최종목표가 이러한 신학체계 완결이었으며,그리고 나서 다시 목회자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가 투르나이젠을 존경하는 것이 바로 그의 신학자로서의 삶보다 목회자로서의 삶에 충실하고 만족해 하는 모습에서 탄복했기 때문인데, 이런 자극도 그의 목회자로의 희귀의식에 큰 영향을 준것은 틀림없다. 이것을 그는 즐겨 "믿음의 유비(analogia fidei)"라고 불렀다. 믿음의 유비는 그의 신학본래의 회복이며, 신학자의 신학귀본능이다.

셋째, 그는 항상 모험을 좋아했다. 그러나 그는 대체적으로 기발한 구상이나 구도를 제시하는 것으로 모험을 끝내는, 이른바 문제제기적 모험가로 만족했다. 모험가는 도구와 용기와 호기심이 강해야 한다. 바로 이점을 그는 구비하고 있었다. 여러 외국어의 구상능력(도구), 과감한 사상대입 시도 (용기) 그리고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 (호기심)은 그의 장점일 수도 있었다.

 

끝으로 윤성범 교수에 대한 유동식 교수의 글을 인용하여 제시하면서이 글을 끝내려 한다.

한 학자에게서 모든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 그의 논무에서 우리도 도전이요 직감적인 판단 등 많은 계발점을 발견한다. 그만큼 많은 학자의 이름과 학파를 나열해주는 이도 드물다. 그러나 항상 아쉬운 것은 그 충분한 설명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에게서 우리도 많은 사고의 새로운 형태를 배운다. 그러나 그 형성에 내용은 언제나 우리가 채워야 할 새로운 과제로 남아 있다. 그에게는 서론이 있다.여기 한국신하계의 풍운아 윤성범의 모습이 있다.


윤성범의 신학사상 (II)

 

"단군신화는 기독교 삼위일체신론의 잔해라고 보며 기독교잔해신관을 이해하는데 전이해가 된다고 하겠다."

-"한국적 신학성" P.148 -


 

I.머리말

 

한학자에게서 모든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 그의 논문에서 우리는

도전적이요 직감적인 판단 등 많은 계발점을 발견한다. 그만큼 많은학

자의 이름과 학파를 나열해 주는 이도 드물다. 그러나 항상 아쉬운 것

은 그 충분한 설명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에게서 우리는 많은

사고의 새로운 형태를배운다. 그러나 그 형성의 내용은 언제나 우리가

채워야 할 새로운 과제로 남아있다. 그에게는 서설이 있다.그러나 본

론은 앞으로의 과제로 남아 있다. 여기 한국 신학계의 과제로 남아 있

다. 여기 한국 신학계의 풍운아 윤성범의 모습이 있다.

이는 윤성범 박사에 관해서 누구보다도 잘 아는 유동식 교수가 몇줄

의 짧은 서술로 윤성범의 학문태도를 가장 정확하게 평가한 것이다.

사실 우리는 윤성범에게서 한국적 신학의 청사진을 기대하면서 많은시

간을 기다려 왔으며, 그의 대표적인 몇몇 작품들에서의 그의 구상과주

장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너무도 극단적인 사고 유형과 비약은 당

혹감과 거부감을 불러 일으키게 한 것도 사실이다. 여기에서 우리의인

내심은 그의 작품 가운데 대표적인 것들을 분석해 보면서 그의 사상을

들여다 보는 것과 그의 기독교 이해 및 신학자로서의 그의 신학이해를

평가해 보도록 하는 시간을 요구한다.

한 사상가의 사상에 관한 이해는 많은 시간이 소모되는 작업이다. 그

뿐 아니라 사상의 형식이나 방법에 대한 이해의 폭도 다양하다.그러나

우리는 윤성범 신학사상의 내용과 구조를 분석. 해석. 이해의 접근 방

법을 통해서 객관적으로 규명할 것이며, 한국 신학계에서 그의 위치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한다.

이 논문의 목적은 첫째 윤성범의 신학사상을 올바로 이해하려는데 있

으며, 둘째 그의 신학성을 규정하려는데 있다. 그리고 셋째 그의 신학

의 문제성을 제시하면서 평가하려는데 있다. 왜냐하면 그의 신학사상

에 대하여는 그 이해 차원이 다양할 뿐만 아니라 이해의 정도에 있어

서도 서로 극단적인 면을 띠고 있기 때문에 그의 신학에 대한 논쟁의

터전을 여기에서 제공한다는 것은 사실 그의 신학을 이해.규정.제시.

평가하려는 본래 목적을 벗어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

리의 작업은 철저히 그의 작품에 의존한 해석학적 작업이 될 것이다.

 

II. 윤성범의 신학사상

 

윤성범의 신학사상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그의 작품들의 핵심을정

확하게 파악하는 작업에서 시작된다고 하겠다. 다른 사상사들에게서는

때때로 그들의 사상을 어느 특정 시기에 표출된 대표작에서 사상 전체

를 조명할 수 있으나 윤성범의 경우는 모든 사상이 한결같이 자신의내

면 세계를 구현한 표출의지의 결정체이기 때문에 어느 특정 논문이나

한 시점에서 이해할 수는 없다. 이 말은 그의 사상 전체가 한두 편의

논문으로서는 대표될 수 없다는 말이며, 동시에 그의 사상은 모든 작

품에 흩어져 있다는 말이다. 한마디로 그의 사상은 한국문화의 토양속

에서 꽃필 수밖에 없는, 기독교의 복음을 토착화라는 표헌형식으로 나

타내려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자기 신학의 알파와 오메가를 모두 한국문화의맥

락에서 구조하려했던 것이다. 이것은 한국문화라는 밭, 즉 맥락(cont-

ext)과 복음이라는 내용의 말씀, 즉 본문(text)을 상호관계 속에서 이

해하려는 방법이며, 동시에 text를 context로부터 이해하려는 시도와,

반대방식을 사용하려는, 모험을 감행하겠다는 의지로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윤성범은 서툴기는 하지만 토착화신학을 시도한 몇몇 한국신학

자들 가운데 선구자의 입장에서 평가될 수 있다는 인물이다.

문제는 그의 주장, 그의 토착화 신학의 구조, 다시 말해서 스스로 "

한국적 신학"이라고 자신있게 이름붙인 그의 신학이 솔직히 말해서 기

독교 신학으로 이해될 수 있는가라는 점이다. 몇몇 학자들이 그의 "한

국적" 이라는 표현 속에 담겨진 내용을 반박하고 나섰으며, 몇몇 윤성

범 신학 추종자들과 그의 제자들은 윤성범의 "한국적 신학","성의 신

학"의 가능성을 주장하면서 변호하고 있었다.

그러나 학문의 발전이나 학문의 학문성은 이론과 실제의 합리적,과학

적.역사문화적 타당성과 실용성에서 입증되었을 때 그가 진가를 발휘

하게 되고, 그렇게 되었을 때 학문으로서의 위치를 인정받게된다는 학

문이론 법칙에서 볼때 그의 신학 자체가 참된 기독교 신학인가라는 점

은 계속 문제로 남을 수밖에 없다.

그 문제란 곧 윤성범의 신학이 기독교적 학문인가하는 것이며,비록 그

것이 형식상으로는 학문으로 인전된다고 해도 그리스도 신앙에 기초한

기독교의 정통적인 신학으로 인정될 수 있는 기독교신학인가가 문제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우리는 무엇이 그에게서 문제가 되며, 어떤 점에

서 그의 신학사상은 기독교 신학계에서 수용불가능한 것이며, 그의 작

품들은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가 하는 점을 분석하고 나서 이해와 평가

를 내려야 할 것이다. 이러한 작업의 기초적 실천이 곧 작품자체를 분

석-해석-이해-평가하는 행동이다. 우리도 이런 과정을 거쳐 윤성범의

신학사상을 개관할 것이다.

 

1. "한국 재발견에 대한 단상" (1963.3)

기독교 신학을 서구문화의 맥락에서 탐구하여 한국에 접목시키려는

기존의 신학태도를 조심스럽게 점검하던 과정에서 윤성범은 과감하게

이런 신학함 자체를 던져버릴 수밖에 없는 자신의 용기를 찾아내었다.

그것은 곧 자신의 신학이해에 대한 정의로 시작되었다. 더욱 근원적으

르로 소급해 간다고 하면 모든 종교의 표현 형태를 문화의 영향을 받

을 수밖에 없을 것이며, 반대로 모든 민족의 개체적 문화는 그 민족각

각의 고유종교로부터 형성의 기초를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바로이

점은 문화신학을 역설하였던 변증법적 신학자 파울 틸리히(Paul Till-

ch)의 문화와 종교의 상관관계론에서 이미 주장된바 있다. 윤성범은이

점을 의식이라는 본질에서 찾아내었으며, 문화와 종교의 상화관계를설

명하는데 사용했다. 그는 그의 논문 "한국 재발견에 대한 단상" (1963 .3)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개인이나 사회나 더 나아가서는 국가나 민족까지라도 자기가 누구인

가의 명백한 의식없이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 바로 근자의 일인가 싶다.

윤성범에 따르면 "자기가 누구인가"라는 궁극적 질문은 자기의식을묻

는 질문이다. 그러나 이 질문은 인간의 개인적 자기 정체성(self-ide-

tity)을 묻는 질문이 아니고, 민족사적 맥락에서 자기자신을 인식해야

하는 개체적 인간. 즉 역사의식 속에서 발견될 수 있는 자아를 의미하

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강조하여 말하기를.

먼저 우리는 나 자신을 알아야 된다고 하는 말은 무엇을 구체적으로

의미하는지를 명백히 규정해 놓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두

말할 것 없이 한국을 역사적으로 잘 연구하는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우리는 자기의 역사를 모르고 자기를 안다고 하는 것은 정말로 거짓말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역사이해와 자기정체를 연관지으면서 역사의 객관성과주

관성을 변증법적 관계로 규정하고 해석하려 시도했다. 이런 역사이해

의 과정을 통하여 그는 "객관적 공정성"과 "주관적 함축성"의 상호유

기적 관계에서 역사의 사건사적 의미와 해석학적 이해가 가능함을 역

설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豁다.

그러나 이러한 주관적 해석학적인 고찰은 객관적 훈화적인 공정성위에

토대한 것이 아니면 안됨은 물론이다. 그리고 아무리 주관적인 해석이

라고 할지라도 그가 역사전체를 볼 때에 그 역사적 계열전체가 하나의

뚜렷한 해석학적 논리를 견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역사의 본질에 관한 이론에서 윤성범의 새로운 학설은 전혀 없다.역사

(Geschichte)란 인간의 현존 (Dasein)에 따라서 결정되는 사건자체(Ge-

schehen selbst)로서의 역사 (res gestae)와 과거가 되어버린 사건에관

한 지식으로서의 역사 (historia rerum gestarum)로 구별된다. 의미사

와 사건사를 탐구하는 역사 자체에 관한 학문이 곧 역사철학이다.

윤성범의 역사서술방식은 다만 historia rerum gestarum 으로서의 역

사를 "객관적 공정성"이란 개념으로, 그리고 res gestae로서의 역사를

"주관적 함축성"이란 개념으로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한마디로 윤성범

은 그의 신학사상을 정초하기 위한 첫단계로서 역사인식을 끌어들였던 것이다.

역사란 문화와 뗄수 없는 관계에 있다. 그것은 마치 시간과 공간이 분

리될 수 없는 숙명적 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과 같다.그래서 우리는 간

단하게 역사란 시간적 차원에서 표현된 문화라고 정의할 수 있으며, 반

대로 문화란 공강적 차원에서 표현된 역사라고 정의할 수 있다. 좀더구

체적으로 정의한다면, 역사란 인간적 실존의 관념화된 실체이며,문화란

인간적 실존의 대상화된 실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윤성범은 역사철학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에게서 역사이해의 더 깊

은 차원은 기대할 수 없다. 다만 그의 역사인식에 관한 진술은 그의 신

학을 시작하기 위한 서론적 진술에 불고하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우리

는 더이상 그의 역사이해에 관하여자세히 말하거나 논쟁할 필요가 없

다. 그는 곧 역사인식론을 마무리 짓고 문화론으로 관심을 돌렸다. 기

독교와 한국 문화의 관계 맥락에서 한국적 신학을 설계하려는 의도에서

그는 문화론을 역설하고 있다. 문화란 무엇인가? 그에게서 문화란" 조

화미"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조화미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것은 미학에서의 내용과 형식의 조화일치를 뜻하는가? 그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물론 '조화미'라고 하면 곧 미술공예와 같은 표현양식을 의미하는 것

으로 볼 사람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화미는 문화일반 곧 생활

양식 전반에 두루 사용할 수 있는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언어로부터 시

작해서 문화 전반에 걸쳐 한국의 특성은 조화미에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왜 윤성범은 역사에서 문화로 관심사를 옮기면서 조

화미라는 종합체를 역설하고 있는가라는 점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것

이다.다시 말해서, 그가 한국적 신학을 형성하려고 노력하는 첫 마당에

서 내용과 형식의 조화일치를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는 말이다.

윤성범은 기독교 신앙의 정당한 근거를 올바른 신앙형태에서 찾으려한

다.그러면서 그는 기독교의 내용과 한국문화의 형식의 조화미로부터 최

상의 신앙형태를 발견할 것을 기대하였다. 이러한 접촉은 곧 그의 토착

화신학을 출발점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그래서 그는 토착화신학이

란 "그리스도교의 본질적 내용이 한국문화의 순수형식과 어떻게 조화되

느냐"에 달려 있다고 분명히 표명하였다.

"한국 재발견에 대한 단상"은 기독교 복음이라는 씨가 한국문화라는밭

에 뿌려져서 조화미를 드러낼 때 참된 한국적 신학이 가능하다는 주장

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한국문화를 추적하려는 의도가 깔린 논문이다.

그리고 그 의도의 깊이에는 기독교의 신학사상을 문화신학으로 설명하

려는 목적이 들어있다. 그러나 이 논문에서 그는 내용과 형식, 기독교

와 문화의 조화미를 말하면서 기독교의 본질이해에 관하여는 전혀 언급

하지 않고 있다. 왜 기독교는 문화라는 형식과 조화미를 이루게되는 내

용인가라는 점에 관한 진술이 없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가 문제점만을제

기하고 문제전개는 하지 못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2. "복음의 토착화에 대한 전이해" (1963.6)

두번째 논문운 복음이 어떻게 토착화 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을 몇

가지 제시하려고 집필된 것이다. 윤성범은 먼저 마태복음 9장 17절의새

포도주와 새 가죽 부대의 비유를 기독교 토착화에 대한 전이해로서 끌

어들여 설명하고 있다. "새 술은 복음이요, 새 부대는 그 복음을 받아

들이는 바탕이다."라는 명제로서 대표되는 그의 토착화신화의 시도는철

저히 씨와 밭, 술과 부대의 상관성을 요청하고 있다. 이것은 기독교라

는 씨의 결정체인 핵과 문화라는 밭의 바탕에서 신학을 이해하려는 전

이해의 시도이다. 이 관계에서 토착화의 신학 설계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문화신학을 설명하는 구도를 지닌 공식이다.그의 표현을 따르면

문화는 어디까지나 복음을 받아 들이는데 전제되는 바탕 혹은 토양에

지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아니, 사실은 문화가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신앙적 결단으로 받아

들인다.그러나 내가 누구냐라고 물을 때에 나는 이러 이러한 계보의 존

재자라는 것쯤은 알아야 된다는 말이다.

윤성범의 논리구조에서 보며 씨와 토양의 관계는 곧 문화이해로 귀착

된다. 그는 씨를 받아들이는 토양으로서 문화를 언급하면서, 문화를 복

음의 바탕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곧 이어 그는 문화라는 본질이복

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를 신앙적 결단으로 받아

들인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복음을 수용하는 주체를 "나"자신으로 표현

하였다. 이것은 복음을 수용하는 토양이 문화이며 문화의 주체는 인간

이라는 더 높은 차원의 문화이해를 서술한 것이다. 그는 토착화한 문화

이해를 서술한 것이다. 그는 토착화란 문화적 수용일 뿐만 아니라 개인

의 신앙수용적 결단임을 새롭게 인식한 것이다. 그렇다면 복음과 바탕

은 곧 기독교의 핵심 진리와 그 진리 자체를 수용하게 되는 인간의 실

존적 상태 자체라고 하겠다. 그리고 개인의 결단 역사 하나님은 은혜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면 토착화란 이교도가 기독교인으로 개종된 실존적

변화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토착화를 문화적 맥락

에서 실존적 맥락으로 해석하려는 그의 시도는 별로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토착화를 문화나 사상의 번역으로 이해하려는입장, 즉 문화적 전이현

상설을 윤성범은 철저히 부정한다. 그에 따르면 "번역 일반은 토착화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번역이란 원문을 그대로 옮겨놓는 것을 위주로하

는 이상 토착화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제 아래서 그는 토

착화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제 아래서 그는 토착화를 문화

이전이나 문화이식같은 과정으로 보려는 토착화론을 반박하고 있다.

그에게서 토착화는 문화에 떨어져 문화를 변화시킬 뿐만아니라, 그 문

화의 밭에 떨어져 열매가 맺도록 변질된 실체 자체를 의미한다. 그러므

로 그는 토착화를 단순히 문화약식의 변화정도로 이해하려 하지않고,오

히려 문화의 새로운 내용변화로 이해하려 한다.

마지막으로 윤성범은 토착화를 계획된 과정속에서 형성되는 현상으로

변화시캐면 역작용만 강하게 표출되기 때문이다. 이 점은 역사나 문화

의 숙명적 진행과정을 의도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독교 복음의 토착화란 어떠한 모양의 계획으로써 달성되는 것은 아

니다. 복음과 우리 민족과의 부단의 점촉에서 점진적으로 개척되어질

성질의 것이요, 인의적으로 이렇게 저렇게 뜯어고치는 것을 의미해서

는 안될 것이다. 그러므로 토착화는 먼저 소극적, 피동적인 것으로 볼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는 그릇 또는 '새 가죽 부대'

이며 복음의 씨를 받아 자라나게 할 수 있는, 옥토에 비길 만한 토양

이며 신앙인 동시에 적극적, 능동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고유

한 - 그렇다고 주관적인 것은 아니다 - 사고양식으로써 터 닦을 수 있

는 학적인 공작이라고 볼 수 있는것이다.

토착화에 대한 윤성범의 이해는 문화이해를 기초로 하여야 가능하며,

그는 토착화를 문화로 이해되는 인간의 삶의 전체를 담고있는 그릇,혹

은 새술이라는 내용물을 담을 수 있는 새가죽 부대, 그리고 싹이 돋아

나고, 자라서 열매를 맺도록 하는 옥토라는 신앙으로 이해하기도 하고

혹은 이런 과정이 가능할 수 있도록 하는 신학함(theologisieren), 즉

"학적 공작"으로 표현하면서 토착화의 다양한 이해를 시도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토착화의 본질과 개념 이해에 많은 혼란과 단절

된 이해의 흐름을 갖고있다는 점이다. 토착화란 한 사상이 타문화권에

서의 개화를 의미하느냐, 혹은 타문화를 이질적 사상이 변화시키는 과

정이냐가 그에게서는 분명하지 않다. 그는 때때로 전자의 입장을 취하

기도 하고, 때로는 후자의 입장을 옹호하기도 한다. 어쨌든 그의 토착

화 시도는 기독교와 한국문화의 상관관계에서 기독교의 본질을 해석하

려는 의도였다고 하는 것이 그의 토착화에 대한 이해차원이라고 하겠

다. 이 점에 관해서 그는 [기독교와 한국사상]이라는 책에서 좀더 자세히 말하고 있다.

 

3. [기독교와 한국사상](1964)

이 책의 머리말에서 윤성범은 "이 책의 의도한 바는 단순히 기독교

복음을 복음 자체로 음미한 것이 아니고, 이것을 한국이라는 토양을 전

제로 하고 여기다가 우리들의 신앙적인 여건들을 대비 시켜본데 지나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이 책은 "색 다른 방법론적인 특이성" 을

지니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방법론적 특이성은 그가 서

론에서 서술하고 있듯이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의 전이해(Vo-

r verstandnis), 틸리히의 상황(situation),그리고 그에게 철학적 비판

주의를 넣어준 칸트(I.Kant)의 사상으로부터 형성된 것임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여기에 그는 어떤 형태로든지 칼 바르트 (Karl Barth) 의

말씀의 신학'을 도입하려고 했으며, 심지어 자신의 모든 신학적 시도및

방법론적 유비이론을 철저히 바르트적인 것으로 연결시키려 했다.

윤성범은 철학사상이나 사회사상으로부터 인간의 자아의식과 자기반성

의 필연성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나를 발견하지 않고는 믿음

은 성립될 수 없으며 믿음이 성립되지 않는한 신학은 수립될 수 없는것

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우리가 얼마나 나를 잊어

던가는 한국에 신학이 없었다는 것으로 충분히 이해되고도 남음이 있는

것으로 충분히 이해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라고 단정적으로 표현하

기도 했다. 그의 주장의 핵심은 다음 문장에서 분명히 드러났다.

한국의 그리스도인은 한국의 얼을 도로 찾아야만 믿음도 바로 찾게 될

것이다. 아니 자기 자신을 바로 안다는 것은 벌써 믿음의 출발점인 것이다.

자아의식, 혹은 자기발전의 요청은 신앙에의 접근을 가능케하는반면에,

"자리"로서 표현되는 맥락(context)은 문화적 a priori 를 필요로 한다

고 하는 그의신학이해는 몇가지 새로운 점이 있다. 그것은 신학이해는

몇가지 새로운 점이 있다. 그것은 용어의 사용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신학의 장을 윤성범은 크게는 문화라는 맥락에서 이해하고, 좀 좁은 으

미에서는 전이해라고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장의 분석을 그는 세가지 차원으로 설명하고 있다.

 

1) 그에 따르면 한국신학의 수립에 "감"이 요청된다. 감이란 무엇인가?

감이란 단순히 재로나 소재만을 의미하는가? 이 점을 그는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 설명하고 있다.

"감이란 단순한 소재만을 여기서 의미하는것은 아니다. 그것은 소재와형

상을 전제하고 있다고 해야 좋을 것이다. 소재와 형상이 전제되었다고 그것이 벌써 솜씨가 가담된 것이 아니다."

윤성범은 그의 감론에서 두가지 모순에 빠져 있다.

첫째, 감이 소재와 형상을 전제한 실체라고 한다면 감이란 형이상학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eles)는 그의 형이상학에

서 질료(materie)와 형상(form)의 상관 개념인 이 두 본질이 존재자의원

리를 구성하는 것이므로 생성과 존재와 관계된 것임을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발견한 사실은 윤성범의 감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소재) 와

형상의 형이상학인 질료형상설 (Hylemorphismus)에 불과한 진술이라는것이다.

둘째, 그는 문화적 a priori 에서 감론을 설명하려 시도하고 있다. "과

거,현재,미래를 꿰뚫는 a priori 한 무엇이 문화형태인 것이다. 이러한

문화적 a priori 에만 복음은 담길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의 문화적 a

priori 는 벌써 불교나 유교가 들어오기 전에도 있었다고 해야 좋을 것

이다." 그러므로 "신학적인 문제로서 아직 남아있는 것은 '감'에 대한분

석적인 문제인 것이다. 감은 이 내용과 형식의 소재적 상태를 두고 말하

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윤성범의 문화적 a priori 란 복음을 수용할 수 있는

자리로서 공간적 맥락, 즉 context 란 점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곧이

어 그는 내용인 복음이 담길 수 있는 형식으로서 문화적 a priori란 도

대체 공간적 실체인가? 그렇지 않으면 형식이라는 범주론적 개념인가?

그 본질규명을 윤성범의 진술에서는 찾을 수 없다. 그는 때때로 문화적

a priori 를 공간적 실체로 이해하면서 진술하고 있으며, 때로는 아리스

토텔레스의 형이상학적 형상 개념으로 사용하기도 하며, 때로는 내용의

상대개념인 형식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이러한 개념 사용의 혼동은 그가

개념이해를 완전히 하고있지 못한데서 나타난 것임에 틀림없다. 감의 상

태란 무엇인가?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다시말하면 만일 복음이 내용적이라고 말한다면 자리 곧 문화적 a pri-

ori는 형식적인 것이 아닐 수 없고, 문화적 a priori가 내용이라면 복음

은 형식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양자가 동시에 내용과 형식이 될 수

는 없는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에 놓여있는 것이 감의

상태인 것이다. 신학적인 감의 문제도 인식론적인 해명이 필요하다.

토착화를 부르짖는 신학자 윤성범은 그의 감론에서 감이란 본질을 복음

과 토양의 관계에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어느 어느 학문이든지 본문

(text)과 맥락 (context)의 상호관계에서 본문의 의미가 드러난다는 사

실로 비추어 볼때 그의 감론은 질료와 형상의 상관관계론에 불과하며,해

석학적 이해에 불고하다고 하겠다.

윤성범은 종종 자신의 진술을 스스로 수정하는 모순을 범하곤 한다. 그

의 표현을 유심히 살펴보면 서로 모순적인 내용을 찾아낼 수 있다. " 한

국의 문화적 a priori 는 벌써 불교나 유교가 들어오기 전에도 있었다고

해야 좋을 것이다." "나는 한국에는 고유한 문화적인 특이성(form)이 있

다는 가정에서 출발하고 싶다." "말하자면 한국적 문화 a priori 에는재

래의 종교의 모든 특이성이 함축되게 된다"는 서로 모순적 주장을 하고

있다.

 

2) 윤성범은 신학 방법론으로서 솜씨론을 말하고 있다 감론이 복음과자

리의 관계를 규명하는 작업이라고 한다면, 그 자체만으로는 신학이 성립

될 수 없는 것이다. "형식과 내용의 문제는 다시금 솜씨의 문제로 발전

해 나가야만 될 것이다. 여기에 솜씨란 말하자면 위의 두 계기를 어떻게

손질을 해야 양자의 관계가 유기적으로 결합이 될 수 있으며 따라서 단

순한 존재적 성격에서 솜씨에 의한 세련된 형태로 발전할 수 있는 것일

까?" 라는 신학 방법론적 문제를 논한 것이라고 하겠다. "솜씨가 신학의

방법론의 하나로 채택된 데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

솜씨는 양자를 매개 손질하는 제3자인 것이다. 이 제3자로서의 솜씨는

단순한 직관 혹은 감성도 아니요, 단순한 사유도 아닌 감성이다. 이것을

우리는 신학에서 중보자(der Mittler)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의 신학방법론은 변증법적 방법론으로서 두 실체의 궁극적 일치 혹은

조화를 지상의 목적으로 하는 역설법이다. 솜씨는 내용과 형식의 중보자

요, 동시에 제3자로서 이 두 실체를 수용. 포괄하고 있는 포괄자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솜씨론은 인식론이나 사변 철학이 아니며, 분

석방법이나 해석학도 아니고, 단지 키엘케골(S.Kierkegaard)이 일찍이주

장한 바 있는 역설(paradox) 이라고 할 수도 있다. 신학 방법론으로서의

솜씨란 기술이나 손놀림 자체가 아니고, 영향력이며 작용으로서 감이 가

능할 수 있도록 하는 역동력이다. 그러므로 "솜씨는 신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다 할 것이다... 앞으로의 신학의 향상은 이 솜씨가 있

고 없음에 좌우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그는 강조하고 있다.

이제 신학에서의 표현에 관심을 돌려보자.

 

3) 윤성범은 신학에서 감과 솜씨와 더불어 3대 요소는 멋이라고 생각했

다. 그에 따르면 "멋이란 솜씨로 인해서 일어나는 하나의 아쥐 메뜨리

(asymerie)의 미적표현을 이름한다." 그러므로 "솜씨 없는 멋이란 생각

할 수 없는 것이다." "멋이란 솜씨로 이루어진 어떠한 상태가 유동하는

그 표현양식에서 비로소 느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윤성범은 멋

을 성령의 역사하심과 같은 의미에서 이해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말씀과 문화 a priori는 솜씨에 의하여, 곧 그리스도에 의하여 좁히어

짐으로 생명적이 될 수 있으며 이러한 생명적인 것이 비로서 약동할 수

있게 됨은 당연한 사실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생명적인 약동

이 멋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이것은 구원의 현실이요, 구원의 장래를내

증하고 있는 것이다.

멋은 사실 그리스도의 영역은 아닌 것이다. 이것은 성령의 활동 영역

인 아닌 것이다. 이것은 성령의 영역인 것이다.

성령의 역사는 우리를 죄악으로부터 해방시켜 자유로운 몸이 되게한다.

멋은 곧 성령의 역사에 의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자유로운 자녀가 된 상

태인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동시에 구원도 된다. 구원은 자유로운 하

나님의 자녀된 상태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멋은 그러므로 교의학에 있

어서는 구원론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이런 맥락에서 윤성범은 '자유는 곧 멋이다' 라고 외쳤던 것이다. 그

리고 "신학적 사고양식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요청했던 것이다.

 

III. 요약 및 중간평가

 

1. 신학의 토착화는 먼저 자기의식의 함양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 윤성범의 주장이다. 그에 따르면 자기의식이란 역사의식과 일맥상

통하며, 역사에서의 주체성을 말하는 것이다. 신학은 자기의식이 없는

곳에서 전개될 때 수입된 외국신학으로 만족할 것이며, 진정한 의미에

서 한 민족이나 역사성에 참여하려는 의식있는 사람의 신학이 될 수 없

다고 할 수 있다. 토착화란 이런 자기의식으로 새롭게 형성된 신학의자

기화를 의미한다고 하겠다. 이 점이 바로 윤성범의 토착화신학론이다.

 

2. 문화신학은 문화와 종교의 상호관계를 이성과 계시, 속과 성의 본

질로부터 규명하려는 신학이다. 윤성범은 문화론을 전개하면서 문화신

학적 측면에서 형식과 내용의 조화미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한

국문화란 신율 문화인가라는점, 즉 한국문화는 기독교적 본질에 의해서

표출된 표현양식인가라는 점은 매우 진지하게 논의되어야 할 문제이다.

윤성범의 문화론에서 씨와 밭, 복음과 문화라는 상대개념은 토착화신학

의 공식에 불과하다. 그 자체에 대한 본질분석이 부족한 것이다.

 

3. 새 포도주와 새 가죽 부대의 비유를 윤성범은 복음의 토착화의 전

이해로 서술하고 있으나, 설명 자체가 애매하고, 너무 비약되었다." 전

이해"라는 개념이 복음이 수용될 수 있는 토양이나 바탕, 즉 맥락인지

혹은 관념상의 복음이해 이전의 단계인지 불분명한 것도 이해를 흐리게

한다.

 

4. 민족의 얼과 신앙을 연계시켜 주장하는 점은 별로 호소력이 없다.

내 자신을 안다는 것이 어째서 신앙의 출발점이 되는지 너무 비약적이

므로 많은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

 

5. 그는 감론에서 복음과 자리의 상관관계를, 그리고 솜씨론에서 형

식과 내용의 상관관계를 이루는 신학적 방법론을, 마지막으로 멋론에

서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얻는 자유함, 즉 구속론을 역설하고 있지만,

감-솜씨-멋이란 개념들은 질료적 성질, 양태적 성질, 지각적 성질을연

상케하는 낱말들이며, 꼭 이런 개념들의 사용으로 용어의 토착화를 나

타내는 것이 바람직한가 다시 생각하게 한다.

 

6. 우리는 지금까지 윤성범 교수의 초기 작품들 몇 편을 분석하면서

그의 신학함을 살펴보았다. 중간단계에서 그에 관한 평가를 내린다는

것은 조급한 감도 있으나 더욱 명료한 이해를 위하여 필요하기 때문

에 이 단계에서 중간평가는 필요하다고 하겠다.

첫째, 윤성범의 사상구조는 역사와 문화의 범주에서 형성된 것이다.

그에게서 신학은 역사의식이나 문화의식을 통하여 민족 고유의 형식

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토착화란 다른 말로 표현하면, 기독교의 역사

화라고 할 수 있으며, 문화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점을 윤성범은 포착한 것이다.

둘재, 윤성범의 신학이해는 철저히 무화신학적이며, 좀더 구체적으

로 서술하면 신학문화론적이다. 민족의 문화의식, 혹은 민족혼이 신

앙을 가능케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그의 신학은 상대주의적이며,

종교일반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하겠다. 토착화를 역설하면서 그는

문화를 발견했으며, 기독교의 케리그마는 잃어버린 것이다. 그는 복

음이란 말로써 케리그마를 표현하려고 했으나 복음이란 자리에서 이

해되는 상대적 본질이므로 그에게서 복음은 유일회적 특수성과 유일의적 본질을 상실한 것이다.


5. "한국적 신학:성의 신학"(1971)

1960년대는 한국 신학계의 격동기였다고 하겠다. 개신교 신학의

연구가 점차 가속화되면서 서구신학이 폭넓게 유입되기 시작했으며,그

반면에 신학인구의 증가와 기독교에 대한 관심의 증대는 점점 신학의

활성화에도 많은 자극을 주었다. 이때의 신학논쟁은 매우 다양했지만,

주로 신학의 토착화 과정에 집중되었다. 좀더, 정확히 말한다면 기독

교와 한국문화의 관계정립을 수립하려는 논쟁이 주류를 이루고 있던시

기가 1960년대의 한국 신학계의 움직임었다고 하겠다. 이러한 신학논

쟁기의 대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윤성범 박사였다. 그는 주로 문확신

학적 입장에서 토착화 신학을 역설했으며, 이미 앞 장에서 우리가 분

석해보았듯이 매우 철조한 한국학수용론자였다. 이점에 있어서 아무도

그의 문화신학적 신학함을 비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그

가 한국적 문화나 혹은 한국문화 이전의 문화 원형을 기독교의 복음의

실현체로서 주장하려는 점이다. 그 대표적인 보기의 하나로서 단군 신

화론에 대한 그의 삼위일체론적 해석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윤성범은 한국의 신학에 매우 당혹스러운 신

학청사진을 펼쳐 보였다. 그것은 그의 "언+성의 신학"이다. 도대체 한

국신학을 모색하던 과정에서 그가 긍국적으로 발견한 그의 신학주제 "

성이란 개념을 기독교 신학의 계시개념과 같은 의미의 다른 표현 정도

로 정의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계시라는 낯설은 개념

대신에 성이라는 친근한 개념을 대치하여 신학적 제문제를 해석해 나

간다면 동양천지는 온통 이 성의 개념 하나로써 기독교의 진리의 접촉

점과 출발점을 삼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성의 개념에 대한 이러한 일차적 의미맥락에서 본다면 그의 성의 신

학은 문제가 너무 많이 제거될 소지가 있다. 왜냐하면 그의 한국적 신

학은 그 전제가 계시신학을 정립하려는 것으로 비쳐질 수 있기 때문이

다. 물론 그가 성서 신학적 의미에서버다는 계시의 신학으리 신관정립

의도에서 사용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성과 계시의 일치라는 개념정의는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여기에서 성이란 낱말이 유교적 개념이

기 때문에 문제삼을 필요는 없다. 다만 우리가 문제 삼고자 하는 점은

기독교의 계시 개념에 성의 용어를 대입하는 것 자체가 너무 당혹스런

비약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그의 오류는 존재의 양태를 생성과 동일

시한 것이다. 기독교 신학에서 하나님의 계시란 신적 현현이기 때문에

그 자체는 범주성을 초월한 능력이다. 물론 특수계시라든가 일반계시

가 인간의 시공간적 우주세계에서 나타나 보여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의 계시가 그렇다고 시공간상태에서 계시되면서 점차 성숙되어

간다거나 완성되어 간다거나 생성진행되어 점점 높은 단계로 전이되는

것은 아니다. 한마디로 계시는 생성 (Werden)이나 과정(Prozess)이 아니다.

윤성범은 두번째 오류에 빠져있다. 그것은 다름아니고, 성이란 일반

종교현상학에서의 성현이나 성성의 표현, 혹은 심미적 차원에서의 종

교성과 동일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으면서, 곧이어 기독교의 신성의 본

질과 일치하려는 점이다. 아마 우리도 성이란 개념의 이해를 슐라이에

르마허 (F.Schleiermacher)의 "절대의존의 감정"과 같은 신비적. 초월

적.의존감정으로서 이해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리고 루돌프 오토(R-

udolf Otto)의 누미노제 (das numinose)로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이 성은 계시일 수 없으며, 성 자체는 종교성에 불과할

뿐이다. 윤성범은 진부할 정도로 많은 용어 남용과 동서양의 고대철학

의 자연사상에서부터 많은 사상, 이론, 개념, 신앙들을 진열하면서 성

의 신학화를 열심히 역설하였으나 사실 서양철학사의 가장 기초편인고

대철학, 특히 아티카철학이전의 자연의 본질에 대한 논쟁에서 이미 거

론된 죽은 개념에 불과한 자연 혹은 생생 개념을 신기한 발견이나 되

듯이 집착하여 그의 신학을 만들어보려고 노력했다.우리가 받은 인상

은 그의 신학공작은 창조적 작품의 제조에 실패하고 오직 인공적 노력

을 경주하여 억지로라도 무엇인가 신학형태를 만들어 자신의 작품( 신

학)으로 남기려는 안간힘처럼 보인다. 그것은 그의 신학하는태도가 너

무 장난스럽고 난잡하며, 필요이상의 이론도입과 서술이상의 진술 및

때때로 외래어 구사실력을 뽐내려는 듯한 분위기도 풍기고 있기 때문

에 신학의 진지함이나 학문의 솔직함이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많은 것을 던져주면서 해답은 하지 못한다는 비평을 받기도 한다.

유비법이나 일치화법은 그 본질의 동질성에서나 적어도 양태의 일치

성에서 가능하고, 인정도 받을 수 있는데 마치 금강석 (계시)을 얼음

(성)이라고 혹은 얼음을 금강석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그의 신학태도

와 괴변은 그의 후반기에 와서 점점 심해진 듯하다. 그는 성이 마치요

술방망이라도 되는 듯이 착각을 하면서 모든 사상에 휘둘러대며, 성의

본질에 성이상의 본질을 부여하여 의미화했다. 그는 성의 개념 정립을

위해 서양철학, 동양철학, 한국 재래 종교나 기독교, 불교, 심지어 종

교학과 실존철학, 정치신학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도입을 시도했으며

동시에 이들 사상의 핵심이 곧 성이라는 논조로 논리적 비약과 모험을

감행했다. 그에게 붙여진 한국신학계의 돈키호테란 별명은 그의 신학

성을 잘 웅변해주고 있다.

 

2) 윤성범은 성이란 개념을 불교의 "일심"이란 개념과 동일한 본질로

이해하고 있다. 윤성범에 따르면 일심(한마음)이란 개념은 종교적 개

념으로서 원효가 애용한 개념이다. 원효가 애용했다는 일심이란 개념

을 그는 아래와 같이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야스퍼스의 '초월(Tra-

nszendenz)'이나 '포괄자(das Umgreifende)'에 해당하는 개념이다.

신학적으로는 '하나님'에 해당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의 진술에서보

듯이 '일심=초월'이라든가 '일심=하나님'이라는 대입은 사실상 논리적

증명이 결여된 그의 독백 (monologue)이거나 자신만의 이해등식에 불

과하다. 여기에서도 우리는 그의 기본 사고 구조 속에 있는 비약의 본

능과 과감한 대비법을 볼 수 있다. 일심을 하나님으로 본다는 것 자체

는 기독교 신학에 대한 그이 신학적 입장을 의심케 한다. 그는 불교의

일심과 기독교 하나님의 삼위일체을 동일시하려는 의도에서 이렇게 주

장했으나 일심이 인격적 하나님이며, 창조적이며, 역사의 섭리자요 주

관자라는 사상은 어떤 근거에서 설명할 것인가?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즉 "만일에 원효가 '일심'에 대신에 '성'을 채용했더라면, 불교의 진

리가 더 빠른 속도로 전파되었으리라 생각해 보게도 된다."

"한국적 신학"의 제2장은 "성의 입장에서 본 제신관의 평가"라는 제

목이 붙어있다. 제2장은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 진술되고 있는데 먼저

철학적 신앙의 입장에서 (1) 유일신관 (2)인격신관 (3) 성육신관이 다

루어져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종교사적 입방에서 (1) 불교의 신관

(2) 유교의 신관 (3) 도교(선교)의 신관이 다루어져있다.

윤성범은 먼저 철학적 신앙의 입장에서 3대 신관을 취급하고 있다.그

가 철학적 신앙의 입장에서 본 신관은 모두 암호(chiffer)와 같은 것

이므로 해독이 필요하다. 이러한 사상을 그는 칼 야스퍼스 [철학적 신

앙 (philosophische Glaube angesichts der Offenbarung)]의 입장에서

진술하고 있다.그러나 그는 야스퍼스는 신학자가 아니라는 사실과 철

학자로로서의 야스퍼스는 동시에 정신분석학자라는 사실을 이해하면서

신학의 신관을 취급해야 했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는 그의 신관

진술을 거의 철학, 특히 서양철학의 자연관에서 우주의 근원, 원리,원

질, 원소,로고스, 운동 자체와 같은 실체로서 이해.진술하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 신학에서의 신관념이 희랍 자연철학에서의 근원, 원리,

원질, 원소, 로고스, 운동 자체와 같은 것이라고 하는 것은 철학자들

의 신개념일 수는 있으나 신학자의 신개념일 수는 없다.

더욱이 인격 신의 개념을 한국의 자연종교나 무속신앙에서 불리워지

는 산신 사상에서 도출해내려는 시도는 신학의 범신론화와 자연신앙을

기독교 신학에서 수용해야한다는 논리와 같다고 하겠다.

 

여기에서 인격신에 관한 그의 서술을 잠깐 소개해 보자,

한국의 신관념은 인격신을 주로하고 있다고 보아 잘못이 없을 것이다.

유대교의 입장과 대차가 없다고 해도 어폐는 없을 것이다. 아니, 한국

인은 너무 지나치게 인격신을 숭승해왔다고 좋을 것이다. 만일 이것을

율곡의 성의 입장에서 본다면 '여지무성적부입 (만일 뜻이 있어도 성

이 없으면 설 수 없다는 뜻)'의 뜻으로 볼 수 있으며, 우리 민족의 자

주정신이 박양하고 사대주의에 흐르는 잘못을 이러한 데서 들 수 있으

며, 우리 민족의 자주정신이 박양하고 사대주의에 흐르는 잘못을 이러한데서 들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성육신에 관한 윤성범의 서술도 많은 문제가 있다. "성육신 사상은말

하자면 초월의 첫째 암호였던 '유일신'사상과 둘째 것인 '인격신' 사

상과를 조화, 종합시킨 형태라고보면 좋을 것이다"라고 하는 그의 주

장은 구조적으로나 내용상으로 전혀 의미가 없는 공허한 틀과 같은 것

이다. 도대체 그는 이런 진술속에서 무엇을 표출하려 했으며, 또 이런

사상이 무엇을 구조하기 위한 것인가 하는 것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율곡의'기질무성칙부능변화'(기질이 있어도 성이 없으

면 변화할 수 없다는 뜻)라는 말의 의미가 '성(vere deus)'과 '기질(

vere homo)'관계로도 해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기질'이 변

화할 수 있는 인간성이라야 '참인간'이 될 수 있다는 말이며, 이러한

진정한 인간성은 자체로만은 불가능하고 성의 개입을 통해서만 가능하

다는 말이 되어 '성'은 '참 하나님'의 모습을 완전히 지니고 있다는말이 된다.

윤성범은 이처럼 모든 신학주제에 성의 개념을 도입하거나 신학의 명

제를 성의 본질 속에서 수용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진정한 한

국적 신학이라고 하는 점은 매우 회의적이다. 그의 성의 신학은 가치

적 차원에서 보면 무가치적 비효율성에 불과하며 언어적 장난에 지나

지 않는다.종교학적으로도 인정되지 않은 것이며, 신학적으로는 더 말

할 필요도 없다. 그렇다고 그가 그겋게 역설하듯이 유교나 도교나, 불

교적으로 그의 성론이 인정받고 있는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그들

의 반응은 기독교 신학자들 보다도 오히려 더 무관심한 편이다.

그것은 성에 대한 윤성범의 이해가 잘못됐을 뿐 아니라 해석이나 본질

규정 역시 너무 비약적이므로 진리의 진실성을 찾을 수 없고, 전체 사

상이 황당무계하고 비논리적이기 때문이다. 동서양의 많은 사상과 진

리에 성을 개입시켜 논술하고 있으며, 때로는 성이 진리로, 때로는 하

나님의 속성으로, 그리고 때로는 하나님 자체로 둔갑하는 것이 그의한

국적 신학의 기본구조 즉 성의신학의 구조라는 것을 분석해 보면서 신

학이론 정립에 궁한 나머지 말도 안되는 개념 하나에 그렇게 너무 무

의미한 것에 허탈한 감도 없지 않다.

윤성범은 결론적으로 "성의 입장에서 보면 기독교나 타 종교나 다 종

교인 점에서는 마찬가지이다." "성은 바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종교적

자연성을 배제하는 원동력이 된다고도 말할 수 있다." 이 점에서 그는

혼합주의와 종교상대주의를 인정하고 있다.

 

윤성범이 이 논문의 마지막 장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잇다.

칼 바르트는 삼위일체신론을 조직 발전시키기 전에 이것을 하나로 통

일하여서 생각한 것이 그의 '하나님의 말씀론(die Lehre des Wortes G

ottes)'인 것이다. 이 말씀론에 해당한 것이 바로 '성'의 개념인 것이

다. 한국의 고유한 신관념의 하나인 단군신화는 주후 6세기 경의 중국

에 들어온 경교(Nestorius파)의 영향을 받아 이루어진 것으로 보며,여

기의 교량적인 역할을 한 것이 발해하는 나라이다. 이 시대에 유포된

'삼일신'사상은 한국에 와서는 단군신화로 낙착을 보게된 것이다. 단

군신화는 기독교 삼위일체신론의 잔해(vestigium trinitas)라고 보며

기독교신관을 이해하는데 전이해(preunderstanding)가 된다고 하겠다.

이러한 진술들의 핵심에는 무엇이 들어있을까? 아마도 몇가지 중요한

사실을 그냥 넘길 수는 없을 것이다.

 

이종성 박사의 비평에 따르면 윤성범의 성의 신학에는 크게 네가지 문제가 있다.

첫재, 혼합주의의 방법론을 수용하고 있는 점, 둘째, '언 + 성'의 결합으로 구성된 성이란 글자르리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요1:14) 는

기독교의 진수, 즉 "ho logos sarks egeneto"라고 주장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비약이며 성급한 생각이라는 점,

셋째, 성이란 심적 상황을 말하는 것이므로 성에서 삼위일체신을 이해하려는 것은 주관적 관념론이라는 점,

넷째, "저자(윤성범)는 필요이상으로 외국신학자들의 글을 인용하고 있으며, 때로는 불필요할 정도로 복잡한 주를 붙이고 있으며, 필요 이상으로 외래어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이종성 교수는 성의신학을 "그의 (윤성범) 장난기어린 언어의 유희에서 온 것"이라고 추측하면서 신학적 문제성을 비판하였다.

 

3. "성의 신학이란 무엇인가?" (1973.2)

여기에서는 이 논문을 장별로 간추리면서 비평하고 평가하는 작업을 할 것이다.

 

1) "서문"에서 우리는 "성의 신학"과 같은 신학의 모험이 신학의 토

착화 과정에서 반드시 있어여할 한 거침돌과 같은 것이라는 점을 윤성

범의 진술 속에서 찾을 수 있다.

 

2) "토착화란 무엇인가?" 라는 장에서 그는 좀 더 분명하게 "기독교의

영원한 진리가 역사 속에서 구체화되는 일체의 과정을 다 토착이라는말

로 일괄 표현할 수 있다. ... 그렇다면 토착화란 바로 다원화,상대화라

는 결과를 초래할 것도 분명한 사실이 아닐 수 업다는 말이 된다." 성

의 신학의 신학적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기독교 진리가 상대화되면

서까지 기독교를 토착화해야 하는가하는 점과, 기독교 진리를 상실하거

나 상대화하지 않으면서 기독교를 한국문화에 토착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업는가 하는 문제이다. 만일 기독교의 상대화나 다원화까지도 감수하면

서 다시 말해서 기독교를 종교 중의 한 종교로 상대화하면서까지 토착

화를하는 것이 기독교에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까 하는 것은 좀더 깊

이 그리고 진지하게 토론해 보아야 할 과제이다. 다만 기독교는 상대화

로서는 전혀 기독교일 수 없다. 기독교의 상대주의, 즉 기독교의 상대

화는 기독교를 비기독교화하는 것이며, 기독교를 이름뿐인 기독교로 변

질시키는 것이다. 이런 것을 토착화라고 하는 성의 신학의 주장은 예수

복음과느니 거리가 먼 것이다.

 

3) "해석학이란 무엇인가?"

" 토착화과정을 구체적으로 전개시키면서 해석학이 된다."라고 윤성

범은 말한다. 서양적 기독교를 한국적 문화라는 맥락에서 해석하는 행

위를 토착하과정에이라고 한다면, 성의신학은 해석학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해석학이란 단순히 방법론에 불고하므로 윤성범은 토착화가 방

법론인지 정칙되고 있는 과정인지, 혹은 신학의 문화화인지 문화의 신

학화인지 밝히지 못하고 있다.

 

4) "성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윤성범은 성의 개념을 유교적 근원에서 설며아면서, 성이란 '존재

론적인 관념', "즉 희랍철학에 의한다면 만물유전 속에서도 변하지 않

는 로고스 그 자체"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성을 토착화의 초점으로 생

각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성이란 조화일치의 원리요, 다양상에서 단일

성을, 그리고 단일성에서 다양성을 표출해 낼 수 있는 원동력이기도 하

다. 이 점은 서양철학에서,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주장하고

있는 잡다와 단일의 관계 구조를 이곳에서 도입한 것에 불과하다. 성이

종합, 일치, 조화, 통일하는 원리라는 점과 동시에 성이 잡다며 다양성

이라는 것, 이것이 곧 성의 실체이다.

 

III. 맺는말

 

지금까지 우리는 윤성범의 신학사상을 그의 주요 작품들을 분석. 해석, 평가하면서 진술해 보았다. 그 결과 그의 신학에는 몇가지 문젬

점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우선 3가지 점만 들어 그의 신학의 문제성을 제시하려고 한다.

첫째, 윤성범은 매우 의욕적인 태도로 그 자신의 신학을 정립하려 노력했었다. 그 일환으로서 그는 한국신학이라는 주제를 자기 영역에서 소화, 전개하려 했다. 그러나 한국신학의 문제는 비교적 큰 어려움없이 한국 신학계에서 수용되엇다. 복음과, 문화 씨앗과 토양의 상관관계론에서 꽃피어날 수밖에 없는 한국적 장미, 혹은 한국적 포도라는것을 그는 "한국 신학"이라고 부르려 했다. 이것은 그가 일생동안 계속 반복해서 부르짖었던 토착화의 과정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둘째, 윤성범은 성의 신학을 그 자신 매우 진지하게 서술. 묘사하고 있으나 사실상 너무 잡다한 가지로부터 다양한 근원에 이르기까지 모

든 것을 성으로서 해석하려는 것은 많은 무리가 있다. 그에게서 성은 신이며, 그리스도이며, 동시에 성령이기도 하다. 그런가하면 성이란심 상태이며, 일심이며, 계시이기도 하다. 때로는 종교성처럼 서술되기도 하고 때로는 종교성이 아닌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것, 원리이며 내용이기도 한 것 등등 거의 모든 것이 성과 관계되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이다. 이것은 그의 범신론적 사상이며,다원주의적 기질을 표출해주는 개념이라고 하겠다. 성의 신학이란 따라서 기독교 신학의 다원주의 내재 상대주의라고 할 수 있다. 윤성범은 성이 신학의 내용인지 신학함의 방법론인지 분명히 밝히지 않았다. 토착화 과정에서 서술된 성의 본질은 다양성에서 통일성을 , 그리고 통일성에서 다양성을 언급한다는 점에서 방법론적 원리이론일 수 있다. 그 반면에 삼위일체신론과의 관계이서 성이 신성으로서 서술될 때에는 성이란 곧 내용 자체인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 듯 하다. 성이 방법론이며 내용이라는 것이 논리적으로도 불가능한데, 그렇다면 성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의 설명은 계속 불분명하게,주장은 계속 문제점만을 던져주고 진행되고 있다. 해답없는 신학이 그의 신학함의 전형적 형식인 것이다.

셋째, 한국적 신학을 만들어 보겠다고 하는 그의 노력은 매우 높이평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핵심 자체까지 포기하면서 한국신학

이라는 이름의 비기독교적 신학을 수립하는 것이 신학적으로 의미있는 일인가? 우리는 여기에서 기독교 상대주의에 관하여 좀더 냉정한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이다. 윤성범의 한국적 신학은 문화신학, 기독교 상대주의 그리고 종교신학으로 발전하여 신학의 케리그마가 희석되고 타종교의 진수가 강하게 흐르는 이상한 신학이 될 수밖에 없다. 이점에서 한국 신학의 수립은 매우 신중한 이론적 근거에서 출발하여 매우 진지하게 전개되어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성의 신학은 가능성 없는, 일종의 신학 연습에 불고하다.


윤성범의 신학사상 (III)


 

I. 머리말

한국신학의 모식은 윤성범 교수의 최대의 관심이었으며, 동시에 그

의 신학함 자체이기도 했다. 1967년 12워에 [현대와 신학](제4호)에 발

표한 그의 논문은 바로 이러한 그의 신학적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과업이 한국적 신학을 정립하는 정초작업에 있다는 것을역

설하려했다. 윤성범은 개신교 선교 80여년이 지난 이 시점까지도 한국

신학은 "아직도 초년병에 지나지 않으며 여전히 제자리걸음에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알게된다" 고 그 나름대로의 통찰을 서술했다. 아직도"

제자리에 걸음" 단계의 신학이란 사실상 윤성범의 사고구조 속에서는신

학전무의 상태를 의미하는 말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것은 기독교가한

국에서 80여년이나 긴 시간을 보내면서도 한국적 정형을 갖고 진행. 성

숙하지 못하였다는 판단이기도 하다. 물론 한국적 신학을 추구하려는다

른 신학자들은 윤성범의 한국신학 진단을 그대로 긍정. 수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에서도 한국적 신학형태는 형식적으로든지 내용적으로든

지간에 진행되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윤성범은 바로 이러한 것들, 즉

한국적 신학을 형성시킬 수 있는 한국특유의 지정학적. 문화적 요인이

나 숙명과 같은 것은 신학의 궤도를 결정하는 데 실제적으로 큰 역할을

할 수 없었으며, 오히려 이러한 요인들이 한국신학을 제자리걸음에 머

물러있는, 초년병처럼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를 그는 다음

과 같은 글을 통해 항변적으로 역설하고 있다.

과거를 회고해 볼 때에 한국교회는 몇몇 카리스마적인 신학자들의 독

무대였던 감이 없이 않아 있다. 그 몇 사람이 이러라면 이렇고 저러라면 저렇게 되었던 것이다.

그의 이러한 진술은 매우 진지하게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그

의 표현대로라면 한국신학 태동의 걸림돌이 된 것은 몇몇 신학자들이었

기 때문이다.그러나 그는 그 몇몇 신학자들, 즉 "몇몇 카리스마적 신학

자들"은 누구인가라는 것을 밝히지는 않고 있다. 만일 그가 암시하는몇

몇 카리스마적 신학자들이 윤성범 자신의 선배적 위치에 있는 인물들일

경우 우리는 그가 암시적으로 공격하는 한국의 몇몇 카리스마적 신학자

들은 장로료계의 신학자들임에 틀림없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는 자신

보다 선배인 감리교계통의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에 대하여는 극적 표

현이나 필요이상의 과대해석이나 미화를 절제하지 못하고 감정표출을할 정도로 치우쳐 있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분명히 "몇몇 카리스마적 신학자들"속에 감리교신

학자들은 들어 있지 않다는 간접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그는 그의 논문

"한국에 있어서의 한국신학"에서도 이러한 면모를 드러내고 있다.

 

그의 진술에 따르면:

한국사상에 정통한 한말의 한 학자인 최병헌선생의 기독교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이해를 소개함으로 그의 이해가 오늘의 신학자들보다 더 깊이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 보려 한다.

최변헌 선행은 서울 정동 감리교회의 목사로 그리고 후년에는 감리교 신학교 교수로 재직하기도 한 한국 유일의 학자 목사로 알려져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윤성범의 감리교 신학에로의 강한 편향본능이나 편식주의를 비판하거나 분석할 필요는 없다. 그는 감리교와 장로교의 경쟁 혹은 신학적 활동성을 대비하는 듯한 입장을 취하면서, 간접적으로 장로교회가 1930년대에서 20여년간 성서무오설과 축자영감설 논쟁을 벌이면서도 분열을 자초했으나, 감리교의 일각에서는 한국적 문화를 신학에 도입하려 시도한 점 때문에, 즉 몇몇 카리스마적인 장로교 신학자들의 독무대였던 한국 교회가 감리교계의 공헌 혹은 새로운 지향성 때문에 새로운 길을 열기 시작했다는 점을 논문 곳곳에서 암시하고 있다.

 

II. 윤성범의 신학사상

 

1. 윤성범의 신학사상

이제 여기서부터 우리는 그의 "한국에 있어서의 한국신학"은 무엇을 의도한 것인가하는 점을 분석해 보도록 하자. 윤성범이 구상하는 한국신학 수립의 길은 4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 그는 "2,000년이란 긴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면면히 흘러 내려 오는 신학적인 전통을 올바로 알아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윤성범

의 의도는 기독교 전통과 종교개혁의 신학사상을 올바로 수용하여 우리

의 신앙을 형성해야 할 것을 주장하려는 것이다. "한국 기독교 역사 가

운데 누구 한 사람인들 이러한 오랜 전통에 관심을 쏟은 사람이 있는가

말이다. 교회사가도 없었고 기독교고전을 법대로 연구해 놓은 사람도없

는 현실이다.특히 교부나 이름 있는 신학자들의 연구서 하나도 나오지 못한 상태이다."

둘째, "한국 교회가 가진 잘못된 사고양식 가운데 하나는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한국의 문화전통을 무슨 귀신딱지 같은 것으로 보아 버리려는 천박한 생각이다." 이점은 윤성범의 올바른 지적이다. 한국사람들은 그 심성이 항상 감성적이고 감정적이면서 자기의 옛것은 쉽게 잊어버리고 남의 것은 늘 새롭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이것을 사대주의 사상에서 비롯된 민족기질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떻든 이러한 기질 때문에 우리는 우리 것은 천하게 생각하거나 별로 가치있는 것

으로 여기지 않고, 외래문화에 쉽게 동정과 찬미를 보낸다. 윤성범의지

적은 바로 한국신학자들 자신이 한국 것에서부터 우리 기질과 문화를표

출하여 서구 종교인 기독교, 실제적으로 사상의 한 유형이라고 볼수 있

는 기독교 사상을 연결시켜 한국신학을 형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신학"이라고 하는 그의 표현을 분석해보면 '한국의 문화와

전통' + '서구의 기독교 신학과 사상' = '한국신학'이라는 등식이 될수

도 있다. 그래서 그는 단정적으로 "모든 문화적 유산에 대한 해석학적

고찰없이 외래의 종교나 신학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수박 겉핥기의피

상적인 결과밖에는 얻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고 피력하였다.

셋째, 윤성범은 "수박 겉핥기"식이 아닌 참된 한국신학의 모습을 " 계시의 친근성"과 "계시의 수용성"의 규명을 통해서 드러내려 했다.

여기서 그는 계시 = 복음 = 씨(종) = 종자로 대치하여 이해를 돕고자했다.

"계시의 친근성"이란 그의 논조에 따르면 요한복음 1장 14절의 "말씀

이 육신이 되심"에 근거하여 볼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까이 오시

려는 친근성"을 의미하며, 곧 복음은 인간에게 항상 친군해 있음을 설

명하려는 것이다. 계시의 친근성이 한국 문화에서 보여준 실례가 하나

님 개념임을 윤성범은 논증하고자 한다. "우리 한국의 개신교가 여호와

의 이름 대신 한국 고유의 토착적인 신개념인 '하나님' 개념은 믿지 않

은 사람들일지라도 아주 익숙해진 친근한 이름이기 때문에 복음을 받아

들이는 데 소외감을 덜어주는 중요한 역살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윤성범은 "계시의 친근성"과 대칭적을, 좀더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상

화관계적으로 "계시의 수용성"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 만일 복음을 씨로 본다면 우리는 불가피하게 씨가 심어지고 자라나고

그리고 열매를 맺게되는 자리(토양)를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물

을 여지없이 인간의 '마음 밭' 또는 한국이면 한국의 문화적인 전통을

지적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앞서 말한 복음의 친근성의 대상이 바로 이

'마음밭'인 것이다. 이 자리가 복음의 지향대상인 것이다...

앞서 말한 복음이라고 하는 객관적인 전통 (사도들의)이 씨나 종자에해

당한다면, 자리는 인간의 '마음 밭'이기도 하고 동시에 좀더 넓게 한국

이면 한국의 '문화일반','문화 a priori ' 혹은 문화전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넷째, 윤성범은 "기독교가 한국 땅에서, 달리 말하면 기독교의 전통이 한국의 전통 속에서 살아나기 위해서는 이 두 전통을 잘 파악해야 되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구의 기독교 전통을 잘 소화하는 노력이 없어서는 안될 것이다."라는 표현을 통하여 그가 구상하는 한국신학의 구조를 분명히 드러냈다. 이것은 매우 현실가능한 구도며 제안이기도 하다. 그의 결론적 서술은 그의 한국신학 구상의 전모를 더욱 분명하게표 현해주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므로 한국의 신학은 이 때까지의 기독교의 전통을 잘 받아들이고

동시에 그 전통에다가 우리 한국 고유한 전통을 첨부하여 금상첨화의사

상적인 계기를 마련하지 않으면 안되리라 생각한다.

이러한 진술의 핵심은 한국신학이란 토착화 과정을 밟아야 한다는 것

과 이런 과정을 필연적으로 거쳐서 형성된 한국신학은 다시 시계교회에

기여하는 특이성을 가져야 한다는 점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런 맥락에

서 그는 "한국신학은 토착화의 고장을 밟아서만 일보전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신학은 말하자면 이러한 토착화 과정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보아도 잘못이 아닐 것이다"라고 설파하였다. 그는 잠시 대지에 떨어졌

다. 바람에 날아가 버린 씨앗처럼 복음의 씨앗이 한국땅에 토착하지 못

한 것을 한국신학 부재에서 설명하려한다. 이것은 그의 표현에 따르면

"수박 겉핥기의 신학"이다. 그는 수박 겉핥기의 신학, 즉 신학의 피상

성을 극복하여 씨앗이 옥토에 떨어져 뿌리내리게 하는 것이 토착화 과

정이라고 설명하면서 3단계의 토착화과정을 성서에 근거하여 제시하고

있다.

 

1) 마태복음 7장 6절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

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

할까 염려하라"라는 구절에서 윤성범은 비인격체(개.돼지)에 복음(거룩

한 것, 진주)이 무의미함을 증명하려 했다. 토착화란 복음의 수용주체

인 인격체와의 관계에서만 가능하다. 그래서 윤성범은 복음의 토착화를

인격적인 주체성이 형성과 관계지어 해석하고 있다. 그가 토착화 과정

의 첫 단계로서 인격조성의 필요성을 내세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

다. 그래서 그는 토착화 주장은 "하나님 앞에서 한국 교회는 하나의 인

격적인 실존이요 주체자인 것을 말하기 위한 것뿐이다." 라고 분명한 어조로 단정한다.

 

2) 마태복음 9장 17절 "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

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

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라는 성구를 한국의 맥락에 적용. 해석하면

서 윤성범은 포도주는 "하나님의 말씀","복음"으로 그리고 부대는 " 인

간의 심성","한국의 문화전통, 혹은 "정신풍토",혹은 "마음 밭"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포도주와 부대는 곧 복음과 문화의 관계라고 역설하고 있다.

 

3) 요한복음 12장 24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라는 성구에서 그는 토착

화 과정의 세번째 전거를 찾으려 했다.

윤성범은 밀알의 비유를 "복음이 복음대로 있고 한국 민족이란 마음밭

에 깊숙이 떨어져 들어가서 자신은 죽고 그곳에서 새로운 싹이 나오지

아니하면 많은 영혼을 구할 수 없다"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이런 토

착화의 과정을 그는 여기에서는 "세속화" 혹은 "복음의 세속화"라고 불

렸다. 그의 진술을 그대로 인용해 본다.

복음의 세속화란 다른 것이 아니고 복음이 땅에 떨어져 복음대로 이

땅 위에 이리 저리 떠돌아다니는 것이 아니고 깊이 옥토에 떨어져서 자

신의 이전 모습은 썩어지듯 없어지고 한국의 새 토양에서 새로운 열매

가 맺히고 이리하여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거두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상에서 우리는 윤성범의 토착화과정 3단계론을 살펴보았다. 그는 "

복음이 지향하는 목표(좋고 많은 결실)를 어느만큼 거둘 수 있느냐의문

제를 다루는 것이 토착화의 과정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다

른 말로 표현하면 "복음의 공리성"이라고 그의 모든 토착화신학을 위한

과정을 총체적으로 결론지었다.

 

"한국에 있어서의 한국신학"이라는 윤성범의 논문은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요약 평가된다.

(1) 한국신학이란 기독교 신학전통에 대한 풍부한 지식의 기초 위에서 수립된다.

(2) 한국신학이란 한국 문화전통에 대한 정확한 (올바른) 이해의 기초 위에서 수립된다.

(3) 한국신학이란 복음과 문화의 상호관계성에서 수립된다.

(4) 한국신학이란 토착과정을 거쳐 수립된다.

우리는 윤성범의 한국신학 수립 의지를 부정하거나 무가치한 주장이라고 평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이 논문은 문화신학의 차원에서 신만을 강조하는 사람들에게서는 별로 새로운 것이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기독교의 복음이 타문화권에 전파되었을 때 타문화를 말살하거나 부정하면서 기독교 진리를 설파하는 것이 토착화는 아니기 때문에 토착화 신학 자체는 문화에의 토착이므로 이미 윤성범의 한국신학은 일종의 토착화신학의 공식과 같은 진술일 뿐이다.